2001년 5월호

‘나와 신동아’

  • 입력2005-04-18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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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이들의 희망이었던 신동아 - 김동길
    • 장편연작시 ‘애린’ 연재 전후 - 김지하
    • 군사정권과의 아슬아슬한 곡예 - 노재봉
    • 내 생애 가장 보람찼던 편집장 시절 - 손세일
    • 폭발적 반응 불러일으킨 DJ·YS 기사 - 이경재
    • 아버지가 선물한 신동아 딸에게 사줄 터 - 최열
    • 비디오형 인터뷰로 보낸 그 5년 - 최일남
    매우 어려운 세월이었다. 10·26 사태가 벌어지고 유신체제의 왕좌에 앉았던 ‘절대군주’가 졸지에 세상을 떠나 어수선했지만 그래도 민주화의 일선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서울의 봄’이 올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프라하의 봄’이 왔던 것처럼 서울에도 봄은 온다는 막연한 기대가 없지 않았다.

    70년대, 80년대엔 ‘동아일보’가 의식이 살아 있는 젊은이들의 좋은 친구였고 희망이었다. 4·19의 푸른 꿈을 무참하게 밟아버린 것은 박정희 장군의 군사 쿠데타였고 10·26의 아롱진 꿈을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은 전씨, 노씨가 이끈 신군부였다.

    군사독재하의 ‘동아’는 민중에겐 희망의 등대였고 믿을 만한 길잡이기도 했다. ‘신동아’ ‘여성동아’는 당시 동아일보의 오른팔 왼팔이었다.

    당국의 감시와 탄압이 신동아에 집중되면서 의식이 뚜렷하고 젊은 기자들이 ‘여성동아’로 옮기기도 해 여성지에 대단한 글들이 실리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 신문이나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 날마다 벌어지는 희한한 시대였다.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이던 시절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해외여행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장군이 제5공화국을 개설하고 이범석 형이 청와대 비서실장, 외무부장관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초기에는 추상 같던 전두환 정권에도 다소 느슨한 면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여권도 만들고 여행도 할 수 있게 돼 십수년 만에 뉴욕, 시카고, LA 등지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그런 와중에 ‘신동아’에 83년 8월부터 ‘떠돌며, 생각하며’를 연재하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담당 기자가 누구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당시의 동아 기자들은 모두가 군사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은 터여서 기자의 마음이 내 마음이었고 내 마음이 기자의 마음이었다. 검열 체제가 얼마나 완벽했던지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글은 삭제되기가 일쑤였다. 요즘 기자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의아스럽게 여길지도 모른다.

    함석헌 선생을 모시고 장준하씨, 천관우씨, 이태영씨 등이 ‘씨의 소리’란 잡지를 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엔 중앙정보부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서 잡지의 글 한 줄도 그 사람들의 동의가 있어야만 활자화 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잡지에 실릴 글에 “정보부의 이런 처사는 참기 어렵다”는 구절이 있었다. 언쟁이 벌어졌다. 그 쪽에서 내놓은 타협이 이런 것이었다. “정보부는 곤란하니 정 그렇다면 ‘보’자 하나는 빼주시오.” 그래서 ‘정보부’가 ‘정부’가 돼 나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정보부가 정부보다 더 크고 소중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가. 어쨌든 안기부건 정보부건 그런 일을 맡은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그 수준이었으니 신동아의 고민도 어지간했을 것이다.

    필자 마음이 기자 마음

    그때는 기자들과 승강이를 하는 필자가 없었다. 요새는 잡지에 글을 쓰는 일이 아주 드물어 실정을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기자가 필자를 동정하고 필자가 기자의 신분을 염려해주는 그런 분위기였다.

    내가 신동아에 ‘떠돌며, 생각하며’를 기고하던 시절엔 의식 있는 모든 한국인에겐 ‘공동의 적’이 이었다. 그 ‘적’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군사독재’라는 이름의 적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돼 이른바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킨 뒤로는 ‘적’이 없어졌다. 김대통령은 이제 정당과 이념을 초월해 인류애의 상징이 된 것일까. 그래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 것일까.

    요새 신문이나 잡지를 하는 사람들은 아마 맥이 빠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적이라고 하면 다소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정신적 작업에는 적이라고 부를 만한 투쟁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민주주의 적’이 과연 누구인가. 국민의 정부에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는 것을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국무총리, 국회의장, 당의 총재권한 대행, 대표도 모두 군사정권 시절의 인물들인데 앞으로 이 나라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을 고차원의 화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원칙을 내동댕이친 타협은 타협이 아니라 변절이다. 오히려 신동아에 글을 쓰던 그 시절이 그립다. 더욱이 지난해 6월13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15일 공동성명이 발표된 뒤로는 정말 뭐가 뭔지 나는 모르겠다. 현정권이 군사정권의 거물들은 모두 높은 자리에 앉혔으니 군사독재가 정당화됐고 미전향 장기수와 복역중이던 간첩을 다 풀어주었으니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다 받아들이겠다는 얘기로 풀이되는데, 그렇다면 1980년대 젊은이들이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는 어디로 가는가. 설 자리가 없지 않은가.

    통일이 되기 전까진 자유민주주의로 기틀을 잡아야 한다. 대외적으로, 또 대내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에 따라 국시의 제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통일이 실현될 수 있다. 군사독재와 공산독재가 원료의 대부분인데 그 속에 자유민주주의를 양념처럼 조금 집어넣으면 그 국이 무슨 맛이 되겠는가.

    한번 생각해보라. 글 한 줄 때문에 정보부에 붙들려 가서 매맞고 새우잠 자고 그리고 풀려 나와서도 또다시 그 짓을 되풀이하던 그 시절의 신동아 기자들이여. 내게 시간과 여유가 생기면 다시 떠돌고 싶다. 다시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체험을 ‘떠돌며, 생각하며’라고 이름지어 다시 신동아에 연재하고 싶다. 그 시절을 회고하며 영국시인 예이츠의 시 한 수를 적어 놓고자 한다.

    비록 잎사귀는 무성하나

    뿌리는 오직 하나

    나의 청춘의 허위 많던 시절

    나 잎사귀와 꽃들을

    햇볕에 흔들며 자랑하였거늘

    나 이제 시들어 진리가 될 건가

    끝 줄 한마디 “나 이제 시들어 진리가 될 건가.” 나도 이젠 늙었다. 나도 주희(朱熹)와 함께 탄식한다. “나 이제 늙었으니 이 누구의 허물인고.”

    ‘신동아’가 지령 500호를 맞았다. 500호 기념 특집에 짧은 기고를 해달라는 부탁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1986년 1월호와 2월호 6월호 3회에 걸친 ‘애린’이란 제목의 시(詩) 연재다. 그 외에도 대설 ‘南’의 6회 연재가 있었으나 대설처럼 길고긴 ‘南’에 얽힌 추억담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애린’에 관한 회상을 말하고 싶다. 시를 연재한다는 것이 문제가 있긴 하나 그때 그만한 사연이 있어 단행했던 기억이 난다.

    전라도 해남에 내려가 살 때다. 나는 지나친 음주로 병이 났고 그 병으로 시름시름 앓았다. 외우(畏友) 이문구 형이 위문차 내려와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아픈 것을 보니 그야말로 일거수 일투족이 애린(哀)일세. 일거수 일투족, 사사물물을 ‘애린’이란 제목으로 시 연재를 해보는 게 어떤가? 그래서 모인 시로 우리 ‘실천문학’에서 시집을 낸다면 좋지 않겠나.”

    이형이 실천문학을 맡고 있을 때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게 있어 이형은 문자 그대로 외우다. 그의 말을 거절하기 힘든 친애(親愛)의 정이 내겐 있다. 승낙했고 그 이전에 써둔 것들과 새로 쓴 것들을 묶어 당시 신동아 차장이던 이화복 형을 통해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애린’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혹은 누구일까? 묻는 사람이 많았다. 해석도 구구했으며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내 숨겨둔 애인이라는 설, 유럽으로 여행 갔다가 그곳에서 결혼한 내 첫사랑이라는 설, 한자로도 哀 또는 愛 등 여러 가지로 해석했으며 소문에 따르면 신동아 발표와 시집 간행 바로 직후엔 전라도 이리 역전에 ‘애린’이란 카페가 생겼다고도 한다.

    무엇인가 안쓰럽고 슬픈 사람의 냄새를 풍기는 ‘애린’이란 말 또는 이름에 대한 궁금증은 그 무렵 내 주변을 감쌌다. 새삼스럽지만 이제 와서 사실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애린’이란 이름의 제목(신동아 이전부터 써왔던 ‘애린’ 연작시들의 제목)을 쓰기 위해 나는 불문학을 전공하는 전채린 교수를 만났다. 전교수의 동생 이름이 전애린(田愛麟)인데 그 발음이 특이하고 좋아서 기억하고 있던 터다. 사랑스럽고 부드럽고 안쓰럽고 불쌍한 그리고 둥글고 모성적인 푸근함이 서린 말이었다.

    6, 7년간의 독방 감금 생활 결과 나에겐 이상한 증세가 많이 생겨 있었다. 여러 가지 사건도 있었지만 그중 두 가지만 얘기한다면 하나는 벽면 창으로 인한 생명의 발견이고 또 하나는 평소에도 자꾸만 손을 쥐엄쥐엄해쌓고 부드럽고 둥글고 말랑말랑한 것을 만지고 싶은 간절한 감각적 갈증과 결핍이 극심했다는 사실이다. 감방 안에서 경험하는 것 일체가 딱딱하고 모나고 메마르고 차갑고 녹슬고 직선이나 직각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 다른 하나는 중얼거리는 버릇이었는데 혼자서 “애린” “애린아” 하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감옥 안에서 생각과 사상을 재정립했다. 생명, 평화, 화해와 공생의 사상으로의 대전환이었다. 그 전부터도 생명은 내 시의 주요 테마였지만 그것은 죽음과의 대결 속에 있는 생명이었지 죽음까지 포함하는 우주적 실제로서의 생명은 아직 아니었다.

    남이야 민주화 투쟁을 어떻게 하건 내 경우엔 부드러움과 여성성, 생명 외경 등에 의한 동조, 포위에 의해 서서히 그리고 완만하게 폭력을 변화시켜가면서 전반적으로 새 이념과 새 사상, 새 문화의 창조에로 나가고자 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민주화가 생명, 생태, 환경 이념을 토대에 두고 진행돼야 하고 그 근거는 생태학은 물론 동학이나 불교 또는 노장학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상처받은 자들의 위로자 ‘애린’

    그것이다.

    그 생각들이 이미 감방에 있을 때 나의 시가 프랑스 레지스탕스 문화의 꽃이던 ‘엘자’, 루이 아라공의 처형당한 아내인 그 ‘엘자’의 이름, ‘엘자’의 눈, ‘엘자’의 신비로울 정도의 부드러움과 섬세함 등 미적 감각의 포위에 의해 도리어 나치즘의 폭력과 포악성의 딱딱함이 여지없이 폭로되고 정신적으로 패배케 하는 그 ‘우회’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적인, 전략적 수정을 가져왔다.

    ‘애린’은 ‘엘자’의 울림과 같은 계열에 서 있다. 애린은 한마디로 상처 받은 자들의 위로자 이름이다. 애인이요 누님이며 어머니고 또 자기 내부에 있다는 ‘아니마’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나는 전채린 교수에게 그 이름 사용을 허락받았고 전애린씨에게 양해를 구하는 말을 전해주기로 약속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와 정립하건대 애린의 한자는 愛麟이 돼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愛麟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가, 때로는 나 자신마저도 애린이라는 카페이름 같은 이미지로 남아 왔다. 왜 그럴까?

    그것은 3회에 걸친 신동아 연재와 그에 이은 두 권 분량의 ‘애린’ 시집 간행 이후 10여 년에 걸쳐 서울, 해남, 충주, 일산 등을 전전하며 아픈 세월을 보내야 했던 슬프고 어두운 사연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여성성과 유연함에 의한 폭력의 포위. ‘엘자’의 전략에 입각한 ‘애린’의 문화적 유희.

    이것을 알아챈 사람은 돌아간 채광석 형 한 사람뿐이었고 그때 시작된 나에 대한 비난과 중상은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비아냥거림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토대를 확보하고 있다. 그것은 확신이나 고집 같은 것이 아니다. 도리어 덧없는 감상에 가까운 서정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여성과 어린이, 안쓰러운 누님 그리고 고생 속에서도 자식을 품에 안고 눈물 짓는 모든 어머니의 모성만이 유일하게 남은 인류회생의 출구라는 것. 그 서정적인 출구를 나는 최근 율려운동(律呂運動) 과정에서 양을 상징하는 율(律)보다 음을 상징하는 려(呂)가 더 중요시되는 복천율려(復天律呂)인 여율(呂律) 그리고 그것의 구성 원리인 팔려사율(八呂四律), 즉 여성성이 중심이 되고 남성성이 보완적 위치에 서는 미완적 우주원리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있다.

    바로 이 팔려사율(八呂四律)의 기우뚱한 균형이 다름아닌 ‘애린’이다. ‘애린’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 도리어 도처에서 아파하고 숨죽여 눈물 짓는다.

    사방을 돌아봐도 모두 다 아프다. 치유해야 할 상처와 병들뿐이다. 이 문명의 병. 이 세계에의 치유책은 여성적 우주 원리 이외에선 발견할 수 없는 것인데 바로 이 원리의 이름이 ‘애린’이다. ‘애린’의 어머니, 할머니인 마고(麻姑)다.

    나는 최근 마고의 묵상집을 구상하고 있고 그 마고의 다른 이름인 이사(夷史: 동이족의 홍불이고 역사가, 천문학자, 정치가로서의 동이여인)에게 바치는 서정시도 몇 편 썼다.

    이 모두가 ‘애린’의 후속편이다.

    애린!

    카페이름 같고 신파조 유행가 제목 같은 이 ‘애린’이란 말이 아직도 나의 가슴에 서늘한 그늘로 남는 까닭은 내가 아직도 깊은 상처와 무거운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민주화도 완성되지 못한 채 사회도 자연도 병들어 이 땅 사람들의 상처는 더욱더 깊어져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돌이켜 15년 전 신동아에서의 ‘애린’ 연재를 생각해 보니 대설 ‘南’은 그것대로 합법성이 있지만 만용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나 지령 500호와 함께 ‘애린’ 시의 연재라는 괴팍한 행동이 ‘애린’이란 이름의 안쓰러움, 부드러움과 더불어 용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솟는다. 500회 지령을 빌려 부디 너그럽게 용서되기를.

    나와 ‘신동아’의 관계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근 20년간 계속됐다. 나의 교수 시절 전체와 맞먹는 기간이다. 그만큼 나는 신동아와 인연이 길고 깊었던 셈이다.

    당시 신동아는 다른 월간지와 다르게 편집자문 위원을 두고 매달 한 번씩 5, 6명 또는 6, 7명이 모여 편집 문제를 논의했다. 위원들은 대개 일년을 단위로 위촉됐으며 해가 바뀌면 다른 사람들로 바뀌었다. 그런데 유독 나만 계속 위원으로 위촉됐다. 아마 내가 신동아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편집자문 위원을 맡았을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신동아의 편집 지향을 내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평가돼 신동아 편집진이 그 지향의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동아의 손세일, 이준우, 이채주, 이정윤, 김종심, 김대곤씨 등과는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냈다. 내 자신은 신동아의 준사원 같은 책임감으로 동참했었다.

    내가 관계했던 기간은 군사정권의 통치기간과 일치한다. 그때 신동아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비판적 종합 월간지였다. 그래서 편집은 늘 군사정권과 아슬아슬한 곡예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동아의 전체적 성격은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고급교양, 일반교양 종합지였다. 이 때문에 독자들에겐 한 달 동안 늘 가까이에 두고 읽는 일상시민의 교과서 같은 잡지로서 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신동아는 50년대 ‘사상계’와 비슷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다.

    나 자신은 대학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소위 ‘상아탑’이란 말에 따른 현실 외면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나의 전공분야가 정치학인 탓도 있었지만 학자도 현실적인 발언을 해야 하고 또 현실을 통해서 학문적인 문제 의식을 다듬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신동아에 대한 참여는 남달리 적극적이었다. 특히 매월 모이는 편집회의는 나에게 안목을 넓혀주는 기회가 되기도 해, 늘 그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정부의 비위에 거슬렸던 심포지엄

    편집회의 결과는 이따금 굵직한 심포지엄 계획으로 이어졌다. 그 계획에 참여시켜야 할 인사들을 선택하는 일과 섭외에 내가 관여하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다. 심포지엄은 대개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는 주제들이라서 꼭 필요한 사람들을 참여 시키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루종일 매달려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다. 타계하신 이용희, 이한기, 천관우, 조기준 선생 등 이 도움을 주신 것을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그런 심포지엄과 아울러 신동아는 매월 특정 주제로 특집을 구성해 그것으로 매호의 성격을 부각시켰다. 이 때문에 가끔 지인들의 서가에 가보면 특집제목을 크게 써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보는 때엔 나도 어떤 보람을 느꼈다. 한편 편집 계획을 해놓고도 불가피한 사정으로 꼭 넣어야 할 것이 빠질 처지에 놓이는 일도 빈번했는데, 그런 때 내가 대타로 메우는 경우도 더러 있어서 어떤 호에는 내 이름이 두 번이나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당시는 종합월간지가 지금처럼 흔하지도 않았고 사회적 사명감을 가지고 만든 것은 신동아가 거의 유일한 것이어서, 영향력 있는 논객으로서 신동아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물론 그들의 참여는 고료(稿料)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언젠가 홍이섭 선생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사회를 맡은 좌담을 마치고 나서 우연히 고료 얘기가 나오자 “예부터 원고료 한 장 값이 냉면 한 그릇 값을 넘는 일이 없었다네”라며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어떤 이는 “지식인은 지식 장사 하는 사람들이 착취해왔다”고 내뱉기도 했다.

    원고를 맡거나 행사를 마치고 나서 신동아 사람들이 봉투를 건넬 때 언제나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민망해하던 모습은 언제나 안쓰러움을 느끼게 했다. 지금은 사뭇 감정이 다르지만, 당시만 해도 지식인에 대한 대접은 그 정도였고 또 지식인은 지사의 한 부류로 인식돼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신동아 기자들에게 섭외비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장들은 자주 접하는 필자들을 밖에서 대접하지 못하고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뜻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과 이윤을 생각하는 경영자들 사이에서 신동아 관계자들이 체면 유지를 위해 고심하는 일이 이젠 없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글을 쓰거나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 신동아 관계자들 모두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신동아가 갖고 있던 영향력에서 느끼는 보람 때문이었다. 더욱이 신동아는 여타의 상업지들과 달리 내용이 조금 어렵고 비대중적인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지식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다는 의미에서 관계했던 모든 사람의 자부심 또한 컸다.

    요즘도 이런 환경인지 의문이다. 우선 독자들의 성향에 많은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글 세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또 상업 문화가 확대되면서 금방 읽고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수요가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신동아라고 해도 과거와 같은 편집체제를 어떻게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보니 요즘 종합 월간지들은 특색을 가려내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엇비슷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 신동아도 팔리는 잡지로 만들려면 우선 면 수를 늘려 독자들이 손해보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과 또 내용을 가볍고 흥미 있는 것으로 채워 독자들의 기호에 맞추어야 한다는 요구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신동아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좀 욕심을 부리고 싶은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물론 신동아도 상품인 이상 팔리지 않는 것을 만든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얘기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잘 팔리는 잡지가 반드시 좋은 잡지는 아니며 안 팔리는 잡지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잡지일 수도 없다. 따라서 좋은 잡지라고 해서 반드시 안 팔린다는 법도 없다.

    격이 있는 잡지이면서도 잘 팔리는 잡지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으나, 신동아는 이미 지령 500호라는 역사를 통해 특정한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시대 흐름에 따라 신동아도 변신해야 하는 것은 마땅하나 자꾸만 시류에 따라가다 보면 특성을 잃어버릴 수 있어 염려되는 것이다.

    아무리 전자 매체가 발달해도 인쇄물의 중요성이 상존하는 것을 볼 때 이제 신동아도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그 위상을 새롭게 설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 한국 사회는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어서 국민들이 방향 감각을 쉽게 갖지 못하는 형편을 고려한다면 신동아가 기여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고 중요하다. 신동아가 담아내야 할 문제는 지천에 깔려 있다. 이런 때 신동아가 지혜의 보고로서 자리잡기를 바라며 편집진의 건투를 비는 바이다.

    “일찍이 ‘신동아’ 편집장과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시고….”

    이 말은 내가 결혼 주례를 설 때마다 사회자가 주례를 소개하는 말의 서두다. 나는 신동아 편집을 맡았을 때를 내 생애의 가장 보람 있었던 시절로 여기고 있다. 실은 신동아 복간 자체가 나의 강력한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신동아 복간을 알리는 동아일보의 사고(社告)문안을 기초하면서 나는 몹시 흥분했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경륜을 필요로 합니다. (중략) 따라서 이번에 복간되는 신동아도 편집 방침에 있어 창간이나 다름없는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중략) 독자 여러분이 바라는 기사가 어떤 것인지 항상 유의하겠습니다. 유동하는 정세의 바닥을 파헤치고, 겨레가 겪은 특수한 경험들을 공유하게 하고, 민족문화의 참다운 모습을 빚어내는 등 가능한 모든 분야를 고루 다룰 작정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엄숙한 다짐이기도 했다.

    멋쟁이 프랑스 문학자 전성자 교수가 신동아에서 수습기자로 일할 때다. 내가 하도 호되게 일을 시켜 눈물을 보이곤 했었는데, 그 전기자가 하루는 나를 보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일이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사명감이 넘쳐서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던 나에게 이 말이 얼마나 당돌한 문제 제기였던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술도 그 무렵에 가장 많이 마셨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천관우 선생이 복간되는 신동아의 주간을 맡았는데, 사내에서 ‘코끼리’라고 일컫던 그분과 삼라만상을 놓고 열띤 심포지엄을 하다 보면 지금은 없어진 복취루 방바닥 한쪽 벽 앞으로 빈 배갈 병이 어지러이 늘어서곤 했다.

    천주간과 가장 치열하게 다툰 것은 1964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던 사르트르의 ‘말’이 출판됐을 때다. 나는 대학시절에 ‘한국의 사르트르’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을 사회에 참여하는 지식인의 이상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말’ 전문을 번역해 싣자고 주장했으나 천주간은 찬성하지 않았다. 거의 생리적으로 사르트르를 싫어하던 천주간이 마지막에 “신동아가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잡지가 아니라면 나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계속 고집해 나는 “천 선생은 동아일보보다 더 보수적이십니다”고 말하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복간된 신동아의 특징이 될 정도로 가장 성공적인 시도는 심층보도와 종합분석기사일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신동아’ 사건을 유발한 1968년 12월호의 ‘차관’기사다. 이 기사는 정치부 김진배 기자와 경제부 박창래 기자가 공동 취재한 장문의 ‘차관백서’ 같은 것이었다.

    국회에서도 크게 논란이 된 이때의 신동아 사건에 대해서는 기회를 보아 따로 좀 자세히 적을 참이다. 이 무렵엔 홍승면 논설위원이 주간을 겸했는데, 이 필화 사건으로 홍주간과 나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다가 서대문 교도소에 수감됐고 뒤이어 우리 두 사람과 천관우 주필은 해직됐다.

    갈현동의 조그만 우리집에서 자주 부회를 열었다. 술잔을 들고 창 밖 파촛잎에 내리는 황혼의 보슬비를 바라보면서 홍승면 주간이 웃지도 않고 “아이, 비가 조금만 더 내렸으면 술맛이 날 텐데…”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홍주간의 멋에 새삼 감탄했었다. 영시를 낭독하는 레코드를 감상하는 때도 있었는데, 언젠가 오든(W.H.Auden)의 시를 목청 좋은 딜런 토머스가 낭독하는 것을 듣던 문명호 기자가 속필로 따라 적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신동아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신동아 인터뷰’다 나는 저널리즘의 장르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 인터뷰라고 지금도 확신한다. 미국이나 독일의 언론 연수 프로그램에서 인터뷰 요령을 특별히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신동아는 복간 때부터 홍승면, 심연섭, 박권상, 권오기 등의 논객들에게 인터뷰를 맡겨왔는데, 하필이면 고약한 시대였던 1974년 말에서 1975년에 걸쳐 내가 신동아 인터뷰를 맡았다. 이때 나는 논설위원으로 긴급조치 상황에도 정론을 펴느라 고심하던 때다.

    김영삼, 이병린, 김수한, 김옥길, 김대중, 지학순, 김동조, 홍종인, 이태영, 최인호, 김영옥씨 등을 인터뷰했었다.

    나의 신동아 인터뷰 기사만 읽고 나를 만나서는 실망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깐깐하고 검질긴 질문으로 미뤄 내가 깡마르고 콧대가 날카롭고 눈빛이 매서운 그런 사람으로 짐작했는데, 둥글넓적한 내 얼굴이 영 딴판이라는 것이었다.

    동아일보가 광고탄압을 받고 있는 가운데 1975년 1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같은 날 동아일보에 게재된 사설 ‘국민투표를 해야 하는가’는 내가 쓴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 동아방송의 정오뉴스는 “이 뉴스는 윤보선 전대통령과 동아일보 논설위원 손세일씨가 신동아에 기고한 원고료로 제공하는 것입니다”라는 격려 광고방송이 나갔다.

    신동아와 나의 관계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의 주저가 된 ‘이승만과 김구’의 초고를 연재한 것이다.

    신동아 사건 이듬해인 1969년은 3·1운동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동아일보는 몇 가지 기념사업을 추진했는데, 그중 하나가 ‘기념논문집’을 펴내는 일이었다. 천관우 선생이 편집을 주관했다. 나는 해직되어 집에 있으면서 이 논문집에 기고할 논문을 집필했다. 나는 태평로에 있던 국회도서관에 다니면서 논문을 썼는데,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 선생이 소장했던 임시의정원 문서가 대형 금고처럼 꾸며진 창고 속에 있어서 그 속에서 문서를 뒤적이다가 화장실에 갈 때면 도서관 직원이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집필한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지도 체계’다 이 논문은 이승만과 김구라는 두 지도자에 포커스를 맞춰 서술한 것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1970년 일조각에서 출판됐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온 지 30년이 된 오늘도 정치학이나 현대사 관련 박사 학위 논문에 더러 이 책이 인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퍽이나 민망스럽다. 나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부분보다도 주로 내가 인터뷰했던 관계자들의 증언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요즘 ‘이승만과 김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사실 그 동안 나는 정치인 생활을 하면서도 이 책의 증보판을 쓸 생각으로 관계 자료를 계속 모아왔는데, 큰 책 세 권 분량의 라이프 워크로 다시 쓰고 있다. 신문도 동아일보 같은 요새 신문보다 ‘독립신문’ ‘황성신문’ ‘매일신문’ 등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신동아와 직접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4년 8월부터다.

    동아일보 정치부 수석 기자로 한참 일할 나이에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된 지 꼭 4년 만에 동아일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신동아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나로서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바로 복직하고 싶었지만 신군부에 의해 세워진 5공 정권이 아직도 서슬 퍼런 상태였기에 회사로서는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권상 편집국장(현 KBS 사장)을 비롯해 34명의 동아일보 기자들이 강제 해직된 상태에서 입사 동기생이자 함께 해직 당했던 강성재 형(전 국회의원) 등 두세 사람만 우선 복직된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직도 언론풍토는 살벌했다.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뼈대 있는 비판적 언론인들을 800여 명이나 ‘언론정화 대상자’라는 딱지를 붙여 내쫓은 데 이어 신문 방송사들을 무더기로 통폐합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력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론을 길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4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방송들은 KBS와 MBC 모두 공영사가 되어 정부 통제 아래에 있었고 신문들도 거의 비판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재야의 두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김영삼에 관해서는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특히 김영삼의 23일간의 단식투쟁이 정국의 뇌관으로, 떠오르는 상태에서 용기 있다는 언론들도 겨우 1단짜리로 ‘재야인사 문제’ 정도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일부 월간지들이 과거 군사독재 정권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연재함으로써 간접적인 군부비판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월간지가 신동아였다. 내가 신동아 기자로 복직한 그달 8월호에 5·16혁명 지도자로 부각됐던 장도영의 인터뷰 기사는 대히트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권력투쟁을 벌였던 장씨의 인터뷰 기사로 평소 6만∼7만부 팔리던 신동아가 10만부를 돌파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사는 성대한 자축 파티까지 열었다.

    남시욱 출판국장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출신인 나와 강형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강형이 먼저 좋은 글을 써 냈다. ‘참군인 이종찬 장군’이다. 5·16혁명 세력을 비롯하여 12·12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에 반감을 가졌던 국민들에게 정치에 초연하려 했던 이종찬 장군을 ‘참 군인’으로 묘사함으로써 군의 정치개입을 비판한 것이다. 훗날 ‘참 군인 이종찬’은 책으로 출간돼 호평을 받았다.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1985년 2·12 총선 결과에 대한 심층분석 기사 ‘신한민주당의 전부’가 그것이었다.

    13일 저녁 총선결과 갓 탄생한 신민당이 민한당을 누르고 제1야당으로 뛰어오르는 돌풍을 일으키자 남국장은 긴급 분석기사로 원고지 300매를 쓰라고 지시했다. 마감 시간을 겨우 이틀 남겨놓고 300매를 쓰라니…. 그러나 자료는 무궁무진했다. 신민당 돌풍을 일으킨 진원은 그 당시 재야 인사로만 표기되던 김대중, 김영삼 등 두 김씨였다. 1980년 5·17 전국 계엄 이후 국내 언론에서 사라졌던 두 김씨가 4년 동안 국내외에서 벌였던 민주화 투쟁에 관해서는 평소 상당한 자료를 모아둔 상태였다. 두 김씨를 비롯한 민주산악회와 한국인권문제연구소, 그리고 양김 세력이 합쳐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구성과 활동, 선언서, 성명만 나열해도 엄청난 분량이었다.

    거듭 찍어내도 모자랐던 신동아

    신동아 3월호가 나오자 언론의 자유가 거의 없던 시기, 정치에 목말라 있던 국민들의 반응은 가위 폭발적이었다. 몇 판인가 거듭 찍어내도 모자랐다. 사서 읽지 못하는 독자들이 그 대목을 복사해서 돌렸다. 20만부가 훌쩍 넘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창간 이래 처음 10만부 나갔다고 자축연까지 열었는데…. 판매부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금기시되던 두 김씨의 이름과 재야의 민주화운동 보도가 신동아에 의해 햇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다른 언론 매체들도 조심스럽게 뒤따랐지만 신동아가 언론 자유라는 부분에선 항상 한발짝 앞서 나갔다. 5월호에 기고한 ‘김대중과 김영삼’ 역시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두 김씨의 출생으로부터 정치 거목으로 성장해온 인생역정, 80년의 봄 이후 두 김씨가 신군부로부터 받은 정치적 박해와 민주화운동, 정치적 철학과 스타일, 그리고 그들의 참모진에 이르기까지 두 김씨의 모든 것을 비교 분석한 것이다. 신동아 판매부수가 25만부를 훨씬 넘었다. 특히 양 진영에서는 이 기사에 환호하면서도 두 김씨 중 어느쪽에 더 호의적인가에 크게 신경을 쓰는 듯했다. 나는 대체로 균형 있게 쓰려고 노력은 했지만 양 진영에서 단어 숫자까지 세어보니 똑같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비교한 단어도 문제였다. 나는 ‘김대중은 지장(智將)’ ‘김영삼은 덕장(德將)’이라고 표현했는데 좋은 뜻도 있지만 사실 교활하다거나 좀 덜 유능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김대중씨 쪽의 한 참모(현 민주당 최고위원)는 ‘지장’이 ‘덕장’에게 지는 게 아니냐며 약간의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현실화됐다. 그때 비교한 통치 스타일은 지금도 적중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두 진영은 만족했고 한 진영에서는 영어로 번역, 외국에까지 배포했다. 이후 나는 두 김씨의 민주화운동, 특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운동을 중심으로 거의 매달 심층분석 기사를 내놓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7년 단임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 제도로는 정권교체가 전혀 불가능했다. 이는 군부통치를 영구화하는 장치였다. 두 김씨가 정권교체로 집권하려면 직선제 개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대단했다. 여기에 두 김씨의 대권경쟁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집권세력의 역공도 만만치 않아 현행헌법을 유지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권력을 영구화하려는 내각책임제 개헌도 추진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야당인 신민당을 분열시키려는 공작도 추진했다.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가 자신을 총재로 밀어준 김영삼 상임고문과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김영삼의 기습 서명 작전으로 신민당이 붕괴되고 통일민주당이 창당됐다. 개헌정국은 꼬여 있었다. 나는 얽히고 설킨 정국을 그때그때 풀이하면서 직선제 개헌을 성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글을 써냈다.

    드라마 형식의 정치기사

    86년 1월부터 ‘야당분열 드라마와 공작 정치’ ‘김영삼의 기습 서명 드라마’ ‘3김씨의 80년 봄과 86년의 봄’ ‘개헌과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체제와 야의 집권 기류’ ‘김대중의 불출마 선언과 신민당의 직선제 투쟁’ ‘신민당 드라마’와 ‘통일민주당’ 등을 잇따라 써냈다.

    1987년 7월호에 직선제 개헌 운동이 최고조에 오른 ‘6·10 시위의 막전 막후’를 썼고 마침내 6·29 선언 직후인 8월호에 ‘민중의 승리… 5·17에서 6·29까지’를 총정리했다. 이어 양김의 패배와 노태우의 승리로 귀결된 87년 대통령 선거를 종합 정리했다. 민주화세력의 양대 산맥인 두 김씨의 싸움으로 죽 쒀서 누구 좋은 일만 한 셈이었다.

    이처럼 나는 현실정치 문제를 드라마 형식으로 엮어 재미를 곁들이면서 민주화운동을 선도하려 했다. 이와 함께 과거 군사통치의 어두운 뒷면을 발굴한 비록(秘錄)도 연재했다. 1985년 10월 ‘유신 쿠데타의 막후’를 시작으로 한 이 시리즈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부각시키며 내가 풋내기 정치부 기자 시절 보고 들은 대사건들을 등장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른바 ‘10월 유신’을 ‘유신쿠데타’라고 제목을 단 것부터가 대단한 도전이었다.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동원, 국정감사중인 국회를 해산하고 비판적인 야당 국회의원들을 동빙고동 보안사에 끌고 가 갖가지 고문을 자행한 내용을 생생하게 그렸다.

    그에 앞서 일어났던 10·2 항명 파동과 비상사태 선언 등이 결국 종신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나는 후에 신동아에 기고한 이 글들을 모아 ‘유신쿠데타’(1988, 일월 서각)라는 책을 발간했다. 당국은 이를 묵인하지 않았다. 판매금지 조치를 당한 것이다. 시인 김지하의 ‘5적’과 함께 판금 서적에 올랐다는 기사가 동아일보 사회면 중간 톱으로 오르기도 했다.

    다음으로 기억할 만한 연재물은 ‘코리아 게이트’다. 70년대 한국과 미국 사이에 벌어진 로비 스캔들은 한미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흔히 ‘박동선 사건’으로 불리지만 실제 양국 대통령 사이를 오고 간 핵심 인물은 김한조였다. 실제 코리아게이트로 미국 법에 의해 처벌을 받은 한국인은 김한조뿐이었다. 그는 위증죄로 처벌을 받았지만 실은 양국 대통령과 관련된 폭발적 내용을 가슴에 묻고 있었다.

    1986년 12월 나는 형기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숨어 살고 있던 그를 설득해 로비 스캔들의 전모를 파악했지만 안기부에 의해 햇볕을 보지 못했다. 인쇄까지 마친 신동아 12월호의 관련 기사가 삭제된 것이다. 만일 그대로 나가면 한미간에 커다란 외교문제가 발생한다는 이유였다. 이 기사는 6·29 선언으로 어느 정도 언론의 숨통이 트인 87년 10월부터 연재할 수 있었다. 이듬해 4월까지 7회 연재한 이 기사는 후에 ‘코리아게이트’(동아일보사 발행)란 이름의 단행본으로 나왔고 SBS에서 연속극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신동아에 근무하면서 2개의 단행본을 얻은 셈이었다.

    신동아에 이러한 기사가 실리고 단행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정부당국과 끊임없이 투쟁한 결과였다. 안기부는 사사건건 전면삭제나 부분삭제를 요구했다. 그때마다 출판국 기자들의 농성, 항의가 잇따랐고 남시욱 국장, 이정윤 신동아 부장 등 실무 책임자를 비롯한 회사 최고 책임자들의 용기가 필요했다.

    특히 나와 함께 복직한 윤재걸 기자의 ‘광주사태’ 기고는 반군부 독재투쟁의 절정이었다. 한마디로 신동아는 당시 모든 언론을 통틀어 민주화투쟁의 최선봉에 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신동아는 잡지 출판 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그 시절 그 가운데 나도 신동아의 일원으로 한몫을 했다는 사실은 내 생애 최고의 자부심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 ‘신동아’는 특별한 잡지다. 나는 1964년 11월 복간호부터 지금까지 신동아를 보고 있는 애독자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내게 신동아와 사상계를 사주시곤 했다. 이렇게 접한 신동아는 나에게 사회를 보는 시각을 길러줬고, 갖가지 사회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워줬다. 특히 한일회담 반대와 관련된 특집기사는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나를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춘천고 1학년이던 나는 이 기사를 접하고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합류해 도청까지 행진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의 신동아는 지금보다 훨씬 무게 가 있었다. 두께도 그러했거니와 기사나 글의 내용이 학문적인 깊이로 다가왔다. 그만큼 나는 신동아를 읽을 때마다 묵직한 포만감을 느꼈다. 시대를 비판하고 저항 의식이 강한 지식인들의 시론은 당시 나의 시국관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런 기사가 나올 때면 나는 신동아를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면서 탐독했다.

    이런 신동아에 대한 나의 집착은 아련한 추억 속에도 자리잡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친구들과 ‘007 위기일발’이라는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를 20분도 보지 못한 채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걸렸고, 다음날 그 선생님은 우리를 교무실로 불러 가방을 검사했다. 그때 내 가방 속에는 신동아가 들어 있었다. 나는 혼쭐이 날 것이라는 불안감에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선생님은 “담배나 라이터 대신 이런 책을 들고 다니니 학생 수준이 높구먼” 하시면서 다음부터 조심하라고 짧게 훈시하곤 우리를 용서하셨다.

    신동아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가격과 뒷면 표지 광고다. 아마 당시 신동아 한 부의 가격은 100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동아 뒷면의 표지를 장식했던 유한양행 광고와 한 제약회사의 철분보충제 광고는 아직까지도 내 머리에 남아 있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신동아는 늘 내 곁에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학원 민주화와 교련 반대 시위를 주동하고 학교에서 제적돼 강제 징집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군대에서도 신동아는 내 비판의식을 곧추 세워줬고 사회의 각종 문제를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나 제대 후 유신반대 운동으로 투옥되었을 때 4년간은 신동아를 접할 수 없었다. 옥중에서 가장 궁금한 것이 바깥 소식이었고, 이런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일간신문과 신동아였지만 4년간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출감 이후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청계천 중고서점을 뒤져가며 신동아 4년치를 수배해 밤새 읽기도 했다.

    1년 중에서도 내가 특별히 기다리는 것은 신년호다. ‘세계를 움직이는 77인’ 같은 특집 시리즈나 별책부록은 자료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그 부록들을 모아놓고 시간날 때마다 뒤져본다. 80년대 후반부터 나도 신동아에 기고를 하게 됐는데, 세계를 움직이는 77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로마 클럽 창시자를 소개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앞쪽의 화보도 빼놓지 않고 보는 기사다. 이 꼭지는 각 분야에서 특색 있는 인사 11인을 선정하는데, 볼 때마다 우리 사회의 흐름과 미처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는 기분이다. 중·단편 소설도 즐겨 읽었는데, 그 유명한 유주현의 ‘조선총독부’는 내가 가장 탐독하는 부분이었다.

    매년 11월호 또한 잊지 않고 챙겨 둔다. 1년간의 총목차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간혹 기억을 더듬으며 글을 쓸 때 아주 긴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어느 해인가 10년치 목록을 한꺼번에 게재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이 10년 동안의 기사들을 꼼꼼하게 훑어보며 그 동안 신동아에 글을 썼던 필자들의 변화된 성향을 분석한 적이 있다. 몇몇 필자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변화와 굴곡을 보이고 있었다. 60년대에 정부의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던 글들이 70년대 유신독재와 80년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정반대의 논리로 굽어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생생한 현장성과 비판정신

    신동아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은 것 같다. 60년대 한·일 굴욕 외교에 대한 과감한 비판도 그렇거니와, 3선 개헌이라는 서슬 퍼런 시대에도 용기 있는 글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70년 대 초 사법부 독립선언, 광주 대단지 사건, 위수령 발동 등에 대한 르포는 지금 읽어도 생생한 현장성과 역사성이 느껴지는 기사였다.

    언론통제가 심해 정치적인 내용이 기사 가치를 갖지 못하던 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월간지는 약간의 자기공간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신동아에는 정치비화와 폭로성 기사가 그래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 신동아는 그 당시가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신동아와의 인연이 만든 개인적인 에피소드도 몇 가지 있다. 하루는 신동아 화보에 연재중인 ‘한국인의 얼굴’이라는 면에 내가 선정돼 기자가 집으로 취재를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와 아내는 한 번도 기자를 집으로 들인 적이 없었다. 개인적인 사생활만은 보호받고 싶었고, 특히 개인의 삶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해 가십거리로 만드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 때문에 나는 신동아의 취재를 정중히 사양했다. 하지만 그 기자는 계속해서 연락을 했고, 나도 결국 아내를 설득해서 처음으로 사진기자와 취재기자를 우리 집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시 사진기자 윤기은씨가 찍어 준 가족사진이다. 그 사진은 큰 액자 속에 넣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초에도 신동아 때문에 아내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어디서 내가 요리를 즐긴다는 얘기를 들었는지 최영재 기자가 명사의 요리솜씨를 화보로 꾸미는데 취재에 응해달라고 부탁해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응낙했다. 집에 들어가 이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며 집에서 취재를 해야겠다고 말하자 아내는 화난 목소리로 ‘당신이 언제 요리한 적 있냐’고 되물었다. 사람이 그렇게 신뢰성 없는 행동을 하면 어떻게 하냐고 다그치며 당장 못하겠다고 다시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최 기자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기자는 난색을 하며 마감이 너무 촉박하다며 다른 사람을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해봤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환경연합과 참여연대가 함께 운영하는 느티나무 카페에서 환경연합의 활동가 10여 명과 함께 감자와 양파, 해물을 갈아서 감자해물부침을 만드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또 신동아에 실렸던 사진 한 장 때문에 곤란을 당한 적도 있다. 언젠가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심재권씨가 호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서강대 교직원 식당에서 환영회를 열었다. 당시 이 모임은 신동아에 화보로 실렸는데, 그 사진에는 심재권씨의 친구인 김근태 의원, 손학규 의원 그리고 내가 등장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지난해 총선 당시 심재권씨의 선거 전단에 게재됐고, 상대후보는 이를 두고 총선연대 상임대표인 내가 심재권씨를 도와주고 있다며 총선연대와 나를 거칠게 공격했다.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쌓인 신동아는 서고가 비좁은 탓에 일부가 책장에서 내려와 박스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아버지가 나에게 선물했듯이 나도 올해 대학에 입학한 딸에게 신동아를 선물할 생각이다. 물론 신동아 역시 독자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직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현장성과 비판정신이 살아 숨쉬는, 그래서 어제와 오늘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내일을 올바르게 예측할 수 있는 좋은 글과 기사가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 최일남 - 비디오형 인터뷰로 보낸 그 5년

    ―실례지만 지금 정 회장 호주머니의 용돈은 얼맙니까.

    “20만원입니다. 미안합니다. 한 사람 월급을 넣고 다녀서.”

    ―그 돈을 하루에 다 쓰나요.

    “모자라는 때도 있고 며칠씩 남아돌 때도 있습니다. 친구 만나 가벼운 식사하는 데 쓰기도 하는데, 친구들이 많이 모이면 외상을 긋기도 합니다.”

    ―외상 안 주는 집은 없지요?

    “허허. 그렇지요. 돈은 없고 별안간 손님 만나면 도리 없지 않습니까.”

    84년 11월호 ‘신동아’에 실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인터뷰에 나오는 대목이다. 장소는 계동에 있는 현대 사옥 회장실이었다.

    나중에 혼자 생각해보니 하나마나한 질문이었다. 1등 재벌 총수는 본인의 얼굴 자체가 돈이요 담보일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이처럼 소소한 궁금증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뒤이어 가진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과의 인터뷰 때도 그걸 들먹였다.

    “비밀입니다. 비상금으로 30만~40만원은 가지고 다닐 걸….”

    대표위원의 ‘월급’이 얼마냐는 우문에 여유 있는 현답을 얻은 셈이다. 국회의원 세비만 받을 뿐 공식 경비는 당에서 나오는 경상비로 충당한다고 남의 말하듯 스치고 지나갔다.

    대뜸 호주머니 돈에 빗대 옛얘기를 시작하는 까닭이 없지 않다. 많은들 대수고 적은들 상관할까마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례 행렬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그때 생각을 어쩔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언론은 그의 기세(棄世)를 두고 하나같이 빈손으로 떠났다고 했다. 케케묵은 표현이 늘 공허한데, 인물이 인물인만큼 이번에는 좀 다른 감회를 느꼈다. 인터뷰 자리에서 비친 ‘경영 인생’의 토로와 함께.

    “우리 사고방식으로는 내가 많은 사람을 벌어 먹이고 있다고 말하는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고, 반대로 그들이 나를 호강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피차 도와가며 사는 것이지 어느 사람이 어느 사람을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흔히 ‘그 사람은 내가 데리고 있던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데리고 있기는 뭘 데리고 있어. 서로 필요에 의해 사는 것이지.”

    ‘최일남이 만난 사람’

    달에 한 사람씩, 81년부터 만 5년 동안 각계 각층 인사를 신동아에서 만났다. 꼭 60명인데 이 가운데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정 회장말고도 스물이 넘는다.

    ▲종교=함석헌·지학순·김재준·노기남·김용기·안병무·언더우드·정대위 ▲예술=김소희·김중업·김수근·김용익·한창기·서정주 ▲정치·법조=이병린·이태영·김동영·김철·이재형

    그 밖에 강문봉 장군과 신동아 제2대(일제시대) 편집부장을 역임한 최승만 선생이 있다.

    상대적으로 종교인이 많은 것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 반영이다. 신문이 제대로 구실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인권 회복을 위한 종교계 목소리에 간접 편승함으로써 일맥상통의 격려, 공감을 서로 꾀했다고 볼 수 있다.

    내깐에는 그리고 내용과 체제 면에서 인터뷰 문장의 다양한 전개를 시도하고자 기를 썼다. 상대방 대답을 충실히 옮기는 기본 원칙은 지키더라도 이왕이면 주변 환경이라든가 본인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주관적으로 묘사하여 독자에게 지루한 느낌을 주지 않는 방법은 어떨까 신경을 썼다. 단조롭지만 정확한 오디오 수법에 비디오 효과의 변화마저 주자는 속셈이거늘 그게 어디까지 가능할까… 궁리가 많았다. 잘못하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쓰는 자의 제멋에 겨운 소리로 타박 받기 쉽다. ‘아’ 다르고 ‘어’ 다른 우리 말의 여리고 미묘한 뉘앙스 때문에도 오해를 살 공산이 커 애를 먹었다. 두고두고 연구해야 할 장르다.

    맨 처음 ‘최일남이 만난 사람’을 기획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준우 신동아 부장이다. 그야말로 신동아에 살고 신동아에 죽은 사람이다. 우수한 에디터였다. 복간 이래 딴 곳에 한눈 판 적이 없다. 오늘의 신동아는 그의 타고난 잡지쟁이 근성에 힘입어 단단한 지반을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바닥에서는 어쩌자고 출판 내지 잡지 저널리스트에 대한 평가, 대접이 신통치 않다. 그 방면의 영향력이나 발전 추세가 그전과는 판이할 정도로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실정인데, 이영우라는 필명으로 일찍 소설가로 등단했던 그가 나에게 인터뷰 얘기를 꺼낸 것이 81년 가을이다. 79년 5월부터 80년 해직 때까지 동아일보 본지에 한두 달에 한 번꼴로 나가다 중단된 반면짜리 인터뷰를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신동아로 자리를 옮겨 한번 해보자고 권했다. 고마웠다. 문화부장을 하면서 반년 넘게 신동아 부장을 겸임했던 인연에다 ‘주문배수’ 자세로 글쓰기 좌판을 벌인 처지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앞서 편집부국장 직함을 차고 신문에 썼던 동아 인터뷰의 첫 번째 손님은 청와대 안주인 시절의 박근혜씨였다. 정치적 균형을 잡아줄 겸 내친 김에 인터뷰 대상을 넓히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져 그 뒤로도 잘 나갔다. 김영삼, 천경자, 박경리, 김수환, 함석헌 등이었는데, 80년 봄에 가졌던 김대중 인터뷰는 계엄사령부 검열에 걸려 나가지 못했다. 겨우 복권이 되어 이름 석자를 활자화할 길이 트이기는 했으나 내세울 타이틀이 미처 없던 때였다. ‘재야 유력인사’로만 통했다.

    “재야 유력인사라는 타의의 베일을 벗기자 그 속에서 김대중씨가 나왔다”는, 빛을 못 본 인터뷰의 첫 구절이 지금 생생하다. 6월 항쟁이 터지기까지는 두 번 다시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만한 경위를 딛고 장소를 바꿔 계속한 나로서는 신장개업이나 다름없는 신동아 인터뷰가 그토록 오래 갈 줄 몰랐다. 그뿐인가. 작업이 너무 힘겨워 5년 만에 스스로 손을 든 다음에도 다른 지지(紙誌)에 판을 또 차렸다. 팔자에 없는 인터뷰 업 꼬리가 그렇게 길었다. 재차 찾아 다닌 대상이 다시 40명, 전후기를 합쳐 100명 가량이다.

    수작업으로 일관하는 까닭에 공력이 더 들었다. 녹음기를 켜놓으면 어쩐지 서먹하다. 기록 장치에 미리 겁먹는 풍토 탓에 곧이곧대로 받아 적는 수더분한 방법을 택했다. 네댓 시간이 보통이다. 때로는 무박 이일 푼수로 유난을 떨었다.

    그때 절감한 것이 한국적 화술(話術)이랄까 입담의 모호함이다. 이전에 많이 해 본 사회(신동아 좌담회) 때도 통감한 일이지만 명쾌하게 맺고 끊는, 논리적 일관성을 세우기가 참 힘들다. 그렇다고 안 한 말, 없는 말을 끼워넣어서는 안 된다. 인터뷰어가 우선 마음에 새겨야 할 금기다. 다른 한편으로 이 바닥에 여전한 양자간의 상좌(上座), 하좌(下座) 격식이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방해한다. 바쁜 시간을 내어 만나준다는 유세가 말마디에 그대로 드러나기 일쑤다. 인터뷰에도 ‘특종’ 개념이 있다. 이해는 하지만 버려야 할 유산이다. 덜 떨어진 관례다.

    허심탄회한 인터뷰

    마주앉기 전이라면 모른다. 일단 응했으면 일 대 일의 ‘격투’가 따로 없다고 여기며 피차 전력 투구하는 가운데, 유머와 더불어 성실한 응수가 바람직하다. 저쪽이 당수고 총재면 이쪽은 아니할 말로 국민을 대변하는 마당이다. 이 방면의 걸출한 저널리스트인 오리아나 팔라치 여사의 은유적 ‘인터뷰 성교론’이 그걸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이만한 큰소리가 실제 현장에서는 물론 잘 통하지 않았다. 대면한 이들이 다 어깨에 힘부터 주고 덤빈 것도 아니다. 진부한 ‘허심탄회’라는 표현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갔는지 장담할 수는 없되, 대부분의 명망가들이 마음의 옷을 어지간히 벗고 트인 경지를 펼치려고 노력하여 재미있게 일을 했다. 분위기가 편안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집채 같은 팔걸이 의자나 소파 등속으로 가득 찬 사무실을 피하고, 되도록 자택에서 하자는 요구를 들어준 분들에게 감사한다. 사소한 것 같으면서 중요한 ‘연출’ 덕분에 거둔 효과를 무시 못한다. 말이 곧 사람이라면 집은 어떤 인품의 안과 밖을 고스란히 엿보게 하는 묘미가 있다.

    이왕 작은 일화의 편린을 주워섬기는 터에 보탤 것이 하나 더 있다. 인터뷰 사례금을 건네받는 분들의 독특한 표정이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종전의 매체들은 남의 귀중한 시간을 축내고 자기네 잇속을 챙기면서도 사례하는 예가 드물었다. 말이 안 된다. 신동아가 그걸 깬 셈이다. ‘소정의 액수’는 3만원. 세금을 제하면 2만9천 몇 백 몇 십원… 동전이 짜랑짜랑 섞인 봉투를 내밀었다.

    그 돈을 정주영 회장도 받고 노태우 대표위원도 받고 빠짐없이 죄 받았다. 그때 기분이 썩 좋았다. 왜 좋았는가를 굳이 물을 것 없으려니와, 돈을 받고 영수증을 쓰면서 꽤나들 놀라던 장면이 어제 같다. 주민등록번호를 제대로 외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김천시로 내려가 사무실을 차린 이병린 변호사는, 당시 이화복 신동아 차장과 사진기자를 포함한 우리 일행의 뒤를 한사코 쫓아오며 서울 가는 노자에 보태도록 봉투를 반납하려고 했다. 그 바람에 벌인 노상 승강이가 이제는 옛날이다.

    ‘신동아’ 500호 기념을 누구보다도 축하한다. 덕택에 익힌 세상 공부가 암만이다. 가고 없는 분들에게도 시답잖고 껄렁한 졸문을 바치고픈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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