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무하마드 깐수’ 정수일 박사 특별기고

한국·이슬람, 1천2백년 교류사 탐험

  • 정수일 < 전 단국대 교수 >

한국·이슬람, 1천2백년 교류사 탐험

3/7
이 설화의 최초 대본인 ‘삼국사기’는 처용 일행을 어느 날 동해변에 나타난, 모양과 의상이 괴이한 4명의 자연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보다 약 400년 후에 쓴 ‘삼국유사’에는 느닷없이 처용이 동해 용의 한 아들로 둔갑하면서 신비와 주술이 함께 한 설화로 윤색·가공되어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때는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5년(879) 3월, 곳은 개운포(開雲浦: 오늘의 울산)다. 그러면 그 무렵 신라의 최대 국제무역항인 울산에 나타날 수 있는 낯선 이방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서구인들이 나타나기에는 아직 500년이나 이른 시기이고 보면 분명히 당시 지중해로부터 홍해와 인도양, 서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남해 전역을 활동무대로 누비던 아랍 무슬림 중 몇몇이라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랍 무슬림들이 범선을 타고 사나운 파도를 가르던 그 바닷길을 따라 일찍이 아랍 땅을 찾아간 한국인도 있으니, 그가 바로 신라의 대덕고승 혜초(慧超)다. 그는 727년경 구법차 천축(天竺: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식(大食: 아랍)을 역방(歷訪)하였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물론, 중국을 포함한 한문화권 내에서 처음으로 아랍 현지를 방문하고 유명한 견문록(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이 견문록은 8세기의 서역에 관한 기록 중에 단연 으뜸가는 진서(珍書)로 공인되고 있다. 스님은 진정 이 나라의 자랑이고 역사의 선구자였다.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그를 알고 기리는 일이 너무나 소홀하고 미흡함에 못내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신라와 아랍 간에는 교역도 진행되고 있었음이 아랍문헌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아랍 무슬림들이 신라에 왕래한 첫 기록을 남긴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는 845년에 쓴 역사지리서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서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황금의 산출, 그리고 아랍인들의 왕래에 관해 기술한 다음 신라에서 수입되는 비단·검·사향·침향(沈香)·말안장·초피(貂皮: 담비가죽)·도기·범포(帆布)·육계(肉桂: 계수나무 껍질) 등을 나열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반도에서도 아랍을 비롯한 서역계의 유물이 다수 발굴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향(乳香)과 안식향(安息香)을 비롯한 아랍산 향료, 신라고분과 사찰에서 출토된 각종 유리기구, 일반 서민들도 애용하던 슬슬(瑟瑟: 비파)이나 구슬 같은 기호품, 단검이나 토용 등이다. 그리고 신라인들은 서역에서 수입한 침향이나 육계, 낙타 등을 일본에 재수출하는 중개무역의 지혜도 발휘하였다.



경주에서 남쪽으로 얼마쯤 가면 경주군 외동면 괘릉리에 이른다. 신라고분군과는 동떨어진 이곳에 능의 주인공이 원성왕(元聖王, 8세기)으로 짐작되는 괘릉이 자리하고 있다. 만고의 영생을 꿈꾼 한 제왕의 성역에 이색적인 용모와 복장을 한 장구(長鷗)의 무인석상 한 쌍이 능을 수호하고 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길게 드리운 구레나룻, 움푹 팬 큰 눈과 우뚝 선 매부리코, 우람한 몸통… 어느 모로 보나 심목고비한 전형적인 중세 서역(오늘의 중앙아시아와 중동지방)인의 생김새다. 안강의 흥덕왕(興德王, 9세기)능에도 이와 비슷한 무인석상이 있다.

신성한 묘역에 이례적으로 이러한 석상을 세운 것은 서역인의 장대한 기골과 이색적인 용모에서 오는 수호적 기능을 노린 것으로 사료된다. 1000여 년 동안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도 의젓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이 석상을 눈여겨볼 때마다 그 무언(無言) 속의 ‘유언(有言)’에 귀기울이게 된다. 이 요지부동의 무인석상이야말로 신라인들의 높은 지혜를, 그리고 그들과 서역인들 간에 있었던 어울림과 만남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오면서 오늘도 무언가를 더 증언하려는 성싶다. 다만 그것이 ‘역사의 언어’여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세계 속의 한국이었다는 역사의 한 단면을 전해주는 데는 족하다.

準몽골인 回回人

역사는 언제나 냉철하다. 누가 무어라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누가 아니라고 해서 무턱대고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1000여 년 전부터,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부터 있어온 한국과 아랍-이슬람세계의 교류상을 감안할 때, 한국은 결단코 은자의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다. 그렇기에 한국과 이슬람은 신라를 이어 고려와 조선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왕래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과하면 적어도 근세까지는 직접적인 만남보다는 중국이나 몽골, 러시아나 일본 등 주변국에 밀려든 이슬람의 여파에 편승된 만남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만남은 문명교류의 궤를 따라 면면히 이어져 왔다.

고려시대는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 새 장이 열린 시대다. 고려 시대 초엽에는 아랍상인들이 대거 몰려왔고, 말엽에는 주로 이슬람을 적극 수용하고 십분 활용한 원제국(몽골)을 통해 이슬람문명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영내에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이나마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의 여러 문헌, 특히 한적(韓籍)에 의해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같은 사적을 펼쳐보면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回回)’나 무슬림을 일컫는 ‘회회인’에 관한 기사가 간간이 나타난다. 모두가 한국과 이슬람의 만남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1024년과 1025년, 1040년에 열라자(悅羅慈), 하선(夏詵), 보나합(保那盒)을 비롯한 대식(大食: 아랍)상인이 100여 명 씩 무리를 지어 수은이나 몰약(沒藥: 난초과의 교목으로 방부제로 쓰임), 소목(蘇木: 한약재 일종) 같은 방물을 가지고 상역차 개경에 찾아왔다. 고려왕은 그들에게 객관(客館)까지 마련하여 후대하고, 돌아갈 때는 금백(金帛)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동방예의지국다운 처사이며, 두 이질문명의 화목한 만남이다.

여말에 이르러 한반도에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는데, 그것은 호한(浩瀚: 넓은)한 몽골초원으로부터 달려온 기마유목민과 통칭 ‘색목인(色目人)’이라고 하는 그들의 ‘문화교수 (Professeurs de civilization)’인 서역 무슬림에 의해서다. 원 제국에서 이 색목인들은 몽골인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제국의 내정은 물론, 원정을 비롯한 대외관계에서도 두뇌구실을 하였다. 이슬람이란 이질적 문명이 그 신봉자도 아닌, 그저 이용자일 뿐인 이방의 북방 기마유목민의 등에 업혀 반입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에는 아이러닉한 사변이 침묵을 깨는 일이 가끔 있다.

원대 조정에서 ‘문화교수’라는 특수한 입지를 갖고 있던 무슬림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원제국의 고려 경략에 동참하여 사신이나 역관, 서기, 근위병, 시종무관 등 여러 가지 직분으로 고려에 공식 파견되었다. 그 밖에 상인이나 민간인들도 다수 고려에 들어왔다. 그들 중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고려에 잔류하여 귀화하고 동화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 무슬림, 특히 귀화무슬림은 중세 한반도 무슬림의 비조가 되고 이슬람의 정초자가 되었다. 그 대표적 일례가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이다.

3/7
정수일 < 전 단국대 교수 >
목록 닫기

한국·이슬람, 1천2백년 교류사 탐험

댓글 창 닫기

2019/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