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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요리사의 세계

요리 배우는 남자들

“30대, 화이트칼라, 취업보다 취미”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요리 배우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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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집안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대신 ‘요리=취미생활’ ‘요리=행복’ ‘요리=일상’이라고 외치는 남자가 많아졌다. 심지어 “요리는 예술”이라며 장보기를 즐기는 남자도 있다. 독신이자 자영업자인 고진운씨(남·41)는 혼자 산다고 해서 대충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자라고 해서 매 끼니를 밖에서 사먹지도 않는다.

“일주일에 두 번 퇴근길에 장에 들러 정식 요리를 해먹는다. 기분 내키면 음악에 맞춰 춤까지 추며 요리를 한다.”

그는 주로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매장 식품코너에서 장을 본다. “반짝세일 시간에 맞춰 가면 평소 값이 비싸 사지 못했던 싱싱한 물건을 싼값에 건질 수 있다. 그 희열은 직접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말하는 고씨. 그는 “요리는 음악이나 미술과 흡사한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요리를 하려고 앞치마를 두르는 남성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몇 가지 자료를 보면 과거에 비해 요리를 만드는 남자가 확실히 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한국산업인력공단 통계에 따르면 조리사 자격증이 처음 시행된 75년부터 지난해까지 26년간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딴 사람 수는 총 31만 7277명이다. 이 가운데 남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17.1%다. 지난 10년간 통계를 보면 해마다 자격증을 취득한 남성 수가 꾸준히 증가해왔고, 증가율 역시 해마다 큰 폭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91년 1917명에 불과했던 자격증 취득 남성 수가 92년 2088명으로 증가했고, 93년 2389명, 95년 3168명, 97년 5588명, 99년 7508명에 이어 지난해는 7789명으로 증가했다. 90년대 초반 매해 100~300여 명이던 증가폭이 95년 이후부터 1000명을 넘어섰다.



한편 지난해 양식·일식·중식 조리사 자격증 취득현황을 살펴보면 남녀를 통틀어 양식 9736명, 일식 3101명, 중식 1251명 가운데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30%, 50%, 30%였다. 공단 관계자는 “IMF 이후 자격증을 따려는 남성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취미 삼아 조리를 하다 기왕이면 자격증에 도전하자는 남성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PC통신과 인터넷 포털사이트 요리동호회 역시 요리에 관심을 가진 남성회원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PC통신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회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천리안요리동호회 현재 회원 수는 3000명. 이 가운데 남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40% 정도다. 동호회 시솝을 맡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김연경씨(여·38)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매월 1회 회원요리실습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요리는 배우고 싶지만 30만원씩 하는 학원수강료가 부담되고, 시간 맞춰 강의 들으러 가기 불편한 남자 직장인들이 동호회로 많이 몰린다. 회원들에게 정기요리실습대회에 참석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한 번에 1백 명 이상이 참가한다. 남성회원들이 더 열성이라 가족까지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며 “각자 직접 만든 요리를 한 가지씩 가지고 여러 명이 모여 품평회를 열거나 친목을 다지는 포틀럭 파티도 종종 연다”고 덧붙였다.

천리안요리동호회는 회원에 유명호텔이나 대형 레스토랑 주방장 등 특급요리사가 많아 실습대회 때 이들이 강사로 참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김연경 씨는 “동호회에 들면 수강료를 내지 않고도 일류 요리사한테 요리를 배울 기회가 생기는 거다. 어디 가서 특급호텔 주방장한테 무료 요리수업을 받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동호회 초창기 첫 실습 메뉴가 깐풍기였다. 회원 대부분이 생전 처음 배운 요리여서 집에 가서 제대로 할 때까지 열심히 연습한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회원 뿐만 아니라 실험 대상이 된 가족까지 아직도 깐풍기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동호회 게시판에는 “내가 실습으로 만든 요리는 우리집 강아지가 다 먹는다. 개 팔자 상팔자”라고 쓴 남성회원 글이 올라 있다.

천리안 요리동호희

인터넷 포털사이트 야후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요리동호회와 관련해 12개 웹페이지와 100여개 사이트가 있다. ‘먹자’ ‘노른자’ ‘386요리동호회’를 비롯해 의사·약사·간호사를 회원으로 둔 병원요리동호회도 있다. 요리동호회 회원 수는 최소 수십 명에서 최대 수천 명에 이르며 회원 중 남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10~50%다. 때문에 동호회 게시판에서 ‘나만의 요리비법, 맛있는 된장 끓이는 법’ ‘싱싱한 생선 고르는 요령’ 등 남성회원이 올린 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5세인 학생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요리 중 하나인 된장찌개를 소개할게요. 나만의 노하우. 아주 걸쭉하게 재료를 듬뿍… 슈퍼에서 파는 된장말고 각자 집에서 담근 장을 쓰시구요. 시장 방앗간에 가면 맛있는 된장이 있답니다. 양파, 무, 대파 1뿌리, 마늘, 고추, 버섯, 감자… 아참, 무는 얇고 길게 썰어주세요. 두께 5㎜·길이 5㎝ 정도. 조개, 미더덕 준비하시구요, 물 양은 지름 20㎝ 냄비에 2/3 쯤 담고 된장은 큰 스푼으로 두 개 정도 넣으세요. 미더덕은 많이 넣어야 맛있어요. …쉽죠? 아마 웬만큼 요리하시는 분들이니까 저보다 더 맛있게 만드시겠죠? 그럼.(김형권)”

요리하는 일이 재미있고 즐겁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남자들이 요리에 입문하게 된 까닭은 다양하다. 백규선씨(삼양사 근무·38)는 “전라도 출신이라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자랐다. 그래서 요리 하나는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어느 날 깨달았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즉석두부 집에 들러 밥을 먹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콩비지를 싸주면서 조리법까지 친절히 가르쳐 주기에 집에서 요리를 했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이 손도 안 댔다. 그때 충격이 엄청 컸다. 오기가 생겨서 천리안요리동호회에 가입했다. 학원에 다니는 것보다 동호회는 훨씬 다양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아내로부터 “음식에 소질 있나보다”는 말을 듣는다.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딸의 담임은 “아빠가 요리사냐”고 묻기도 했다. “주말마다 요리를 해줬더니 아이가 학교 가서 시시콜콜 자랑했던 모양이다. 아내는 동네 슈퍼에 음식을 나눠주며 남편이 만든 거라고 자랑하고 다닌다”며 백씨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진호씨(종로식품 근무·29)의 요리 입문 동기는 ‘애인의 핀잔이었다.

“여자친구가 다니는 직장은 일이 많아 일요일에도 자주 출근했다. 애인이 있는 동료 가운데 여자친구를 위해 직접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는 남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걸 보자 여자친구가 샘이 났는지 왜 다른 남자들처럼 안 하느냐고 서운해했다. 요리라곤 군대시절 취사병 한 것밖에 없는데 별수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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