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서정주, 親日은 밉지만 문학은 존중해야”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mairso2@donga.com

    입력2005-04-18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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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6일 오후 2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반백의 머리칼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회의용인지 접대용인지 가늠할 수 없는, 의자가 여럿 딸려 있는 볼품없는 탁자에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앉아 있었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알은 체하며 일어서서 악수를 청한다. 시골 냇물과도 같은 상쾌함과 아늑함이 느껴지는 눈길이다.
    3월24일 건강 문제로 사직한 이문구씨의 뒤를 이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제7대 이사장에 취임한 현기영씨(60). 그는 전임자의 잔여임기인 올 연말까지 이사장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점퍼에 노타이 차림의 그에게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라는 직책이 풍길 법한 권위를 찾지 못한 기자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와 오늘 나눌 대화의 주제는 다양하다. 문학권력, 문언유착, 안티조선, 친일문학 논쟁 등으로 문단 안팎이 시끄러운 탓인지 그의 이사장직 취임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일찍이 작가회의 활동에 열성을 보였던 그는 ‘4·3 작가’로 불릴 정도로 유난히 제주 4·3 항쟁을 다룬 소설을 많이 써왔다. 봄 향기가 진동하는 4월이 되면, 그는 바쁘다. 개나리 진달래가 피어나는 것에 맞춰 그의 마음속에선 핏빛 서린 4·3의 꽃이 피어난다. 그는 요 며칠 동안 그 일로 바빴다.

    “4월 초가 되면 제주도에서 4월제 행사가 열려요. 광주에 5월제가 있듯. 행사는 4월1일부터 일주일 동안 계속돼요. 서울에서도 관련 행사가 열리는데 올해는 4월1일 성균관대에서 추모제와 학술토론회가 있었습니다. 다음날 제주도에 내려가 작가회의 제주지회가 주관하는 4·3문학 토론회와 4·3 관련 중·단편 선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했어요. 이튿날은 술도 먹고 좀 쉬었다가, 그 다음날은 내가 초대소장을 지낸 ‘제주 4·3 연구소’가 주최하는 4·3학술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순이 삼촌’

    어차피 물어볼 터였는데, 현이사장이 먼저 꺼내니 질문 순서를 바꿔 4·3 얘기부터 하기로 맘먹었다. 작가 현기영을 알기 위해선 4·3을 알아야 한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4·3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문학적 소명으로 삼았다. 1978년 4·3 문학사에 기념비가 된 중편 ‘순이 삼촌’을 ‘창작과비평’에 발표한 데 이어 이듬해 ‘순이 삼촌’을 비롯해 ‘해룡이야기’ ‘도령마루의 까마귀’ 등 4·3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소설을 담은 작품집을 출간했다. 이런 문학적 활동과 더불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과 함께 ‘4·3을 생각하는 모임’을 조직하고 추모제를 여는 등 꾸준히 4·3 관련 활동을 벌여왔다.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4·3 행사는 당국의 눈을 피해 ‘게릴라식으로’ 비밀스럽게 진행됐다. 역대 군사정권하에서 4·3은 금기였기 때문이다. 숨통이 트인 것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해 4월3일 여의도 100인회관에서 열린 학술토론회가 첫 공개행사였다. 이어 1989년엔 공식 추모제가 서울과 제주에서 동시에 열렸다.

    ─많은 독자들이 현기영 하면 ‘순이 삼촌’을 떠올립니다. ‘순이 삼촌’은 우리 문학사에서 4·3을 처음으로 다룬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요?

    “꼭 그렇진 않아요. 그 전에도 몇몇 작품이 4·3을 다루긴 했습니다. 슬쩍 언급하고 지나간 작품도 있고, 당시 가해자 위치에 있던 서북청년단 시각에서 쓴 소설도 있었어요. 그런데 대부분 가해사실이나 비참한 상황이 묘사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됐어요. 내 소설이 갖는 의미라면 (4·3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신원 또는 해원되지 않은 떼죽음을 고발하고 진상규명을 호소한 점이라고 할까요. 가해양상과 피해양상을 처음 드러낸 것이죠.”

    4·3을 맞는 소회

    ─지난해 1월 4·3 특별법이 공포됐고, 특위의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작업이 진행중입니다. 지난 3일로 52주년을 맞았는데 소회가 남다를 듯싶습니다.

    “착잡하죠. 어쨌든 특별법이 통과된 데는 이 정부의 공이 큽니다. 이 정부가 인권을 신장하려 애쓰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다른 정책이야 어떻든 간에. 4·3을 해결할 공간을 마련해준 거죠. 그런데 특별법엔 몇 가지 미비한 점이 있어요. 우리가 너무 목말라 있던 터라 허겁지겁 서둔 탓인데, 앞으로 개정해야죠.”

    ─어떤 점이 미비합니까.

    “우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달리 조사권이 보장돼 있지 않아요. 조사위원회가 군이나 경찰 수사기록, 국방부 전투기록을 요구할 수 있는데, 관련 기관에서 없다고 하면 더 손쓸 수 없게 돼 있습니다. 또 하나는 군법회의에서 일종의 약식재판이라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희생자가 군법회의를 거치지 않았지만, 재심청구 규정이 빠져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마도 이런 조항들을 집어넣으려면 반대세력과 싸워야 할 겁니다.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를 비롯한 극우세력이 4·3 진상규명을 가로막으려고 방해공작을 하고 있어요. 그들 주장은 군법회의에서 처단된 범법자들까지 어떻게 무고한 희생자로 보느냐는 거죠.

    그러나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면 그런 얘기 못할 겁니다. 주민들은 한라산에 입산한 게 아니라 탄압을 피해 피난간 거예요. 해변으로 내려가면 다 죽였거든요. 아녀자 노인들이 무슨 게릴라 활동을 했겠어요. 경찰은 산에서 내려오면 전비전과를 묻지 않겠다며 선무공작을 폈어요. 그 약속을 믿고 산에서 내려오면 약식재판에 넘겼는데, 젊은 남자들은 육지로 보내버렸어요. 그들 중 상당수는 전쟁 때 죽거나 월북하거나 옥사해 다시 돌아오지 못했어요. 재심을 청구해 그들이 무죄임을 밝혀내야죠.”

    1948년 4월3일 발생한 4·3항쟁의 성격을 올바르게 규정하기 위해선 사건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에서 내려와 도내 경찰서를 공격했던 3000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외친 구호는 ‘미군 철수’ ‘단독선거 반대’ ‘이승만 타도’ ‘경찰 철수’ 등이었다.

    항일전통이 강했던 제주도에서 광복 직후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이들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좌파 계열이다. 1946년에 치른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선거에서 좌파가 당선된 곳은 제주도뿐이었다.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은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들을 배척하고 군정기관에 친일세력을 중용함으로써 주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1947년 좌파가 전국적 규모의 3·1절 행사를 추진하자 미군정은 이를 강제로 막았다. 그 와중에 터진 사건이 4·3의 촉발제가 된 이른바 3·1사건이다.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이 3월1일 평화시위를 하는 군중을 향해 발포, 주민 6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주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미군정은 경찰을 증원하는 한편 극단적 반공사상으로 무장한 서북청년단을 파견했다. 이들의 탄압을 피해 상당수 주민이 한라산으로 숨어들었는데, 그들이 1년 뒤 4·3항쟁을 주도했다.

    “민중봉기를 하려면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절해고도에서 단지 정치적 이데올로기 하나 때문에 그랬겠어요? 고립된 섬에서 무장봉기는 죽음이나 다름없는 건데. 얼마나 탄압이 심하고 고통을 당했으면 그랬겠나를 생각해야죠. 47년 3월1일부터 48년 4월3일까지 1년 남짓한 기간에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세력의 탄압이 무지막지했어요. 그것이 4·3의 원인이 된 겁니다.”

    현이사장은 몇 차례 탄식을 내뱉었다.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한국정치연구회가 펴낸 ‘한국현대사’에 따르면 1949년 4월 4·3이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 목숨을 잃은 민간인은 당시 제주도민의 약 8분의 1인 3만 여명에 이른다.

    “일부 남로당 세력이 개입한 건 맞죠. 남로당이 차고 넘치는 민생의 고름을 터뜨리는 구실을 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미군정 자료에 따르면 당시 남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지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미군정이 친일파를 등용했기 때문이에요. 친일세력의 70∼80%를 등용하니 민중이 등을 돌릴 수밖에. 일제 때 민중을 억압했던 친일세력이 해방 공간에서도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니, 이거 정신없는 거예요, 민중으로선.

    거기다 이승만이 단독정부를 수립한다고 하니 분통터질 일 아니에요? 나라를 세워야 하는데 무슨 반쪽 나라를 세우냐, 이게 말이 되냐, 삼척동자라도 반대할 일 아니냐, 그에 반대하는 첫 시위가 47년 3·1절 시위였어요. 6명이 총에 맞아 죽었으니 도민들이 욱 하고 일어났을 것 아니에요. 총파업에 경찰과 공무원까지 합세했어요. 시위와 파업 가담자들에 대한 고문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결국 3명이 고문을 받고 죽었죠. 부두가 봉쇄돼 섬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살 길은 오직 산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어요. 당시 주민들의 구호가 ‘앉아서 죽느니 서서 싸우다 죽자’였습니다. 당시 미군정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역임한 이인씨가 ‘제주 사건은 막다른 골목으로 쫓긴 쥐가 고양이에게 덤벼든 것이나 다름없다’고 평한 것은 유명한 얘기잖아요.”

    진상규명 특위가 구성되긴 했지만 4·3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는 3월29일 성명서를 내 4·3 위령제 취소를 요구했다. 국가정통성 훼손이 그 이유였다. 지난 2월 민주당 김중권 대표는 재향군인회 초청강연에서 4·3을 좌익세력 폭동이라고 표현했다가 4·3관련 단체 대표자 간담회에서 사과하는 곤욕을 치렀다. 그에 앞서 국방일보 왜곡보도 파문(1월26일)과 제주경찰사 4·3관련 기록 삭제 소동(2000년 12월)이 벌어졌다. 지난해 9월엔 당시 한나라당 김기배 사무총장이 4·3을 ‘반란’으로 표현해 물의를 빚었다. 현이사장은 이에 대해 “4·3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했다.

    YWCA 위장결혼사건에 연루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세력이 정통성을 주장하고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주류세력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4·3이 정부 수립을 반대한 것이니 반란으로 규정될 만도 하지요.

    “분단주의자, 냉전주의자들의 시각이죠. 나라를 반으로 잘라버린 것을 정당화하는 거예요. 반면 북은 또 4·3을 평가절하해요. 남로당이 주동했다는 이유로. 87년 6월 항쟁 이후 4·3 관련 책들이 쏟아지고 논의가 활발해지자 북은 교과서에서 4·3 관련 기록을 늘리는 간교함을 보였어요.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4·3을 재평가하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반란이라면, 무엇에 대한 반란이냐. 미 군정에 대한 반란이에요. 친일파를 등용한 미 군정에 대한 반란이라는 거지요. 친일파에 대한 반란이라고 할 수도 있고.”

    ─4·3은 민중항쟁 양상을 띠었고 공권력에 의해 대규모 양민학살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5·18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저는 항쟁 이데올로기를 다루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얘기하려면 복잡하거든요. 설득력 있게 쓰려면 대하장편이 필요해요. 그래서 항쟁보다 수난에 초점을 맞췄는데 사실 항쟁이데올로기는 중요하지 않죠. 물론 외세배격 등의 이념은 영원히 기억될 만한 것이지만, 그 엄청난 죽음 앞에 이데올로기는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또 모험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지요. 동족이 동족을 그토록 가혹하게 대량으로 죽인 사실은 역사적 연구과제입니다.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인간이 그렇게 포악해지는 건지, 정치 이데올로기 문제 외에 인간 본성의 문제까지 4·3을 통해 연구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4·3과 관련해 필화사건을 겪었다. 1979년 11월 서울사대부속고교 영어교사였던 그는 세칭 ‘YWCA 위장결혼사건’에 연루된다. 사건 당일인 11월24일 YWCA 집회에 가면서 ‘순이 삼촌’을 몇 권 갖고 간 것이 화근이었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의 고통과 절망감은 뒷날 그의 소설 ‘위기의 사내’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매질이 끝났을 때 그는 교사도 작가도 아닌, 세 아버지의 아버지도 아닌, 한 여자의 남편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닌, 팬티에 겁똥을 깔긴 한 마리의 사냥감 짐승이었다.’ 당시 수사관은 그에게 “왜 이런 글을 썼느냐”고 신문했다.

    “고문자도 뭔 할 말이 있었겠어요. ‘너 왜 이따위 글을 썼어’ ‘왜 군을 모욕했어’라고 묻더군요. 하도 얻어맞다 보니 말이 나와야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는데, 이렇게 대답했어요. 과거 잘못을 밝혀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 또 역사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걱정돼서 썼다고요. 고문자는 내 답변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디다.”

    고문 얘기를 하며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유신 말기 4·3에 관한 소설을 집중적으로 쓰게 된 데는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제주도에서 4·3은 우울한 기후 같은 거예요. 제주도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내가 자라던 시절 어른들은 ‘사태 때 죽었다지’, 그런 얘기를 귓속말로 건네며 한숨을 푹 내쉬곤 했지요. 4·3 얘기만 나오면 늘 짓눌린 분위기였어요. 처음엔 저도 순수문학,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학을 했어요. 그런데 일단 데뷔하고 나니 4·3에 대해 써야겠다는 생각이 왈칵 치밀어 오르더라고요. 외가 쪽이 당했는데, 외가나 내 친구들 집안이 당한 일을 통해 4·3의 분위기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어요.

    내가 데뷔한 게 75년인데, 10월유신 이후 긴급조치가 발효되고 정치적 억압 상황에서 순수문학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펜대를 사소한 개인 일상에 놀린다는 건 사치고 이 펜대로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 특히 내가 태어난 고장의 치유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말하려면 입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 일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본능처럼 솟구쳤어요.”

    ─그동안 항쟁보다는 수난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고 하셨는데, 앞으로 본격적으로 항쟁을 다룰 계획은 없습니까.

    “25년 동안 4·3에 매달렸는데, 이제는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고 다른 주제의 글도 쓰고 싶어요. 적어도 문학적으로는 4·3에서 벗어나려고 해요. 사회적 운동은 계속할 것이지만.”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그의 소설집 ‘순이 삼촌’은 1979년 11월15일 초판 1쇄를 찍은 후 서점에서 자취를 감췄다. 제2판 1쇄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94년 3월20일. 1980년대 초 판금조치를 당한 탓이다.

    4·3 얘기로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의 말마따나 ‘4·3’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그와는 4·3말고도 얘기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소설가 현기영보다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현기영에게 듣고 싶은 얘기들이다.

    ─문인단체무용론이 제기되는 등 문단 안팎이 어수선한 시점에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이사장을 맡게 된 동기는요? 예전부터 꾸준히 작가회의에서 활동해오셨죠?

    “나도 상당히 공들인 조직이에요. 80년대엔 신나게 활동했지요. 그런데 90년대 들어와 오랜 타깃이던 군사 파시즘이 물러가면서 갑자기 이 조직의 목표가 사라진 거지. 그러면 좀 쉬거나 해야 하는데, 관성으로 굴러오다 보니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거지요. 나도 한때 탈퇴할까 생각도 했어요. 작가라는 사람들이 사소한 싸움거리에 일일이 다 낄 수는 없는 것 아니에요? 시민운동도 있는데.

    정말 큼직하게 싸울 만한 것이 있어야 싸운다는 타성에 젖다보니 어떨 땐 정작 싸워야 할 때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있어요. 둔감해진 거죠. 조직은 또 비대해져 회원이 지금 1000명 가까이 돼요. 성향이 무척 다양해졌죠. 전에는 비판적 지식인이 압도적이었는데, 많이 희석됐어요. 그런 상황에 이문구씨가 건강상 이유로 그만두게 됐잖아요. 동갑내기인 내가 그 양반 일을 마무리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맡게 됐어요.”

    ─전임인 이문구씨가 얼마 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성명 내고 시위하던 세월이 지났으니 작가회의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며 작가회의 해체를 주장했습니다. 작가회의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보십니까.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많이 없어진 건 사실이지만, 이 조직이 할 일은 여전히 있다고 봅니다. 우선 박정희기념관 반대운동 해야지요. 아다시피 작가회의 전신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1974년 발족) 아닙니까. 유신정권에 반대해 태어난 건데,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태생과 존립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는 문학 본연의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작가들 중 우리 회원들이 많아요. 80년대 문학엔 사회성이나 역사성이 강했어요. 80년대가 남성적 시대로 용기니 자기희생이니 공동체니 하는 그랜드 내러티브, 즉 거시서사 혹은 거대서사 시대였다면, 90년대는 미시서사 시대입니다. 80년대 문학에 대한 반동이죠. 다정다감한 여성적 감수성이 문단을 주도하고 있는데, 사실 미시서사도 괜찮은 겁니다. 인간의 따뜻한 감정을 다듬고 어루만져주는 문학도 가치가 있죠. 여성 문인들의 활약에 대해 남성 문인들이 좌절감을 느끼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거시서사를 다시 회복하면 되죠.

    (작가회의) 서울본부와 지방 지부의 관계가 소원한 편인데 앞으로 문학적 교류를 활발하게 하려고 합니다. 소비적 만남이 아니라 오늘날의 상품소비문화 속에 소설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하는 진지한 소설 쓰기, 진지한 문학하기를 워크숍 등을 통해 함께 고민하고 토론할 계획입니다. 지방문학이 부당하게 소외돼 있어요. 좋은 작품과 작가들이 많은데 지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되는 측면이 있어요.”

    서정주와 보들레르의 차이

    ─일부에서 제기하는 문인단체 통합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새삼스럽게 왜 그런 얘기가 나오는지. 파벌이라는 말에는 신경 안 써요.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고나 할까요. 작가회의가 할 일은 분명히 따로 있습니다. 박정희 기념관 문제만 봐도 문인협회와 의견이 다르지 않습니까. (문인협회는) 전두환 정권 말기 4·13호헌조치도 지지했는데, 어떻게 우리와 합칠 수가 있어요?”

    ─두 단체간에 대화는 없습니까.

    “젊은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안 해요. 일원화할 필요도 없어요. 북한처럼 획일화된 사회도 아닌데. 성격이 다른 두 단체가 서로 거울도 되고 변증법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거죠.”

    지난해 12월 미당 서정주가 죽자 문단 안팎에선 때아닌 친일문학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의 논쟁이 두드러졌다. 여기에 일부 평론가 작가들이 인터뷰나 글을 통해 가세하면서 미당 논쟁은 지난 몇 달 동안 열기를 띠었다.

    ─미당의 죽음을 둘러싸고 친일문학 논쟁이 벌어졌는데, 현이사장 생각이 궁금합니다. 크게 두 가지 시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작가와 작품은 별개다. 즉 삶이나 행적에 문제가 있더라도 작품은 별개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미학적 분리주의죠. 둘째는 반대로 작가의 행적이나 삶에 문제가 있으면 작품의 가치도 인정해줄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참 답변하기 곤란한데,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과 닿아 있는 문제거든요. 문학은 분명 도덕적인 것은 아니에요. 예를 들어 보들레르의 경우 ‘악의 꽃’이라는 시집 제목이 상징하듯 인간 본성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악을 드러내 보이고 부르주아의 위선을 비웃었어요. 그런 게 문학이거든요. 그렇지만 그의 삶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이었지요.”

    ─보들레르의 생활은 엉망 아니었습니까. 사창가에 가 살고, 성병에 걸리고….

    “그러나 그는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 받고 있어요. 그의 생활을 문제삼아 그의 시를 나쁘다고 말할 순 없지요.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자 실존적 존재이거든요. 눈물겨운 실존적 존재로서 개인은 타락할 수도 있지요. 욕망에 빠지기도 하고 알코올 중독이나 질탕한 성생활에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만 할 순 없거든요. 술 먹으면 타락하고도 싶은 게 인간 본성이에요. 그런 걸 문학이 보여준단 말이에요. 또 그런 데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런데 서정주의 경우엔 분명 이와는 다른 측면이 있어요. 최소한의 사회적 임무는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일제 식민통치로 우리 사회가 정체성을 잃고 위기에 처했는데 일제에 동조하고, 전두환 정권에서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는데 이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시를 쓴 행위는 보들레르의 경우와는 다르죠. 그렇긴 한데….”

    현이사장은 이 대목에서 무척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블라인드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탁자 위를 어슬렁거렸다. 어디선가 공사를 하는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방심하면 졸음에 떨어질 것만 같은 나른한 봄날 오후다.

    ─이런 구분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작가가 개인적 영역에서 타락한 것과 공적인 영역에서 타락한 것은 다르지 않으냐는.

    “그렇죠. 그런 점에서 보들레르와 비교할 순 없죠.”

    ─일제 때 가장 바람직한 것은 황순원처럼 붓을 꺾는 것이었을까요. 또 항일문학을 하지 않았다고 문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침묵이라도 지켰으면 그나마 나았겠지요. 김동리만 해도 가까운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여 글을 쓰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김동리는 친일문학을 얘기할 때 빠져요. 서정주론은 친일행위를 반드시 지적해야 완성됩니다. 그러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얘기해야 하겠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라는 직책이 풍기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그는 미당 문학을 일방 비난하지는 않았다. 분노라는 표현보다 슬픔이라는 표현을 썼다.

    “일제를 겪어보지 않고 그 시대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만주사변 이후 일제 무단정치가 시작되는데, 완전히 조선의 모든 체제를 편입시켜요. 그때부터 조선·동아가 변하기 시작한 거예요. 문인들도 변절하고. 산천초목이 다 변했어요. 40년대 들어서면 노동운동 농민운동도 사라져요. 그때 대시인인 서정주가 그런 시를 남겼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에요. 그때 한번 잘못했다면 전두환 정권 때 용비어천가를 쓰지 말았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게 뭐야, 문학이란 게, 작가라는 게 독자적인 정부나 다름없는데 정권에 스스로 추파를 던지고… 한마디로 시인으로서 자존심이 없는 행위였어요.”

    ─미당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 시인 중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독자들이나 문인들을 상대로 한 각종 조사결과도 그렇고. 교과서에도 가장 많은 시가 실려 있지요. 민족문학을 표방하는 작가회의로선 미당 시의 교과서 게재를 반대할 만도 한데요.

    “자라나는 애들에게 공동체 의식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므로 미당의 시를 교과서에 싣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창비’(창작과비평사) 주간 최원식씨의 논문에도 친일문학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슬픔이 나와 있어요. 우리 문학사에서 친일문학을 다 걷어내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언론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독재정권 때는 뭔가 달라졌어야 하는데, 언론은 광주항쟁을 폭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광주항쟁을 지역감정 탓으로 돌리면서 합리화 작업을 했어요. 박정희 부활은 그 작업의 연장선입니다. 반공보수 이데올로기의 완성이지요. 미당의 아름다운 시를 논할 땐 반드시 그의 친일·친독재 행적을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친일과 관계없는 작품까지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건 안 되죠.”

    완벽한 인간은 없다

    ─말하자면 미당 문학을 완전히 부정할 순 없다는 거지요?

    “그게 비극이라는 거죠. 슬픔이고. 시인이나 작가는 도덕적 존재는 아니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싶습니다.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펜이 무엇에 봉사했느냐, 어떻게 쓰였느냐를 두고 평가해야겠죠. 물론 완벽한 인간은 없어요. 완벽주의를 요구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거죠. 애석하게도 미당에겐 이런 약점이 있다,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노혜경 시인이 ‘인물과사상’ 3월호에 이런 얘기를 했어요. 미당 문학에 대해 친일행위를 비판하면서도 예술성을 인정하는 것은 친일부역문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이고 역사성이나 윤리성을 강조하는 문학관에 대한 회피 수단으로 이용된다고요.

    “그게 80년대식 비판인데… 서정주 문학을 논할 때 친일경력과 5공 군사독재에 협조한 사실을 지적하고 비판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봐요. 시 좋은 건 좋은 대로 인정해야지요. 일제 때의 문학을 전부 버릴 수 있습니까. 안 좋은 부분은 잘라 내더라도 전통은 계승해야죠. 미당의 언어감각과 조탁능력은 계승해야 합니다.

    미당 문학의 딜레마를 뒤로 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지난해 문단의 가장 큰 이슈는 문학권력 논쟁이었다. 출발점은 평론가 권성우씨(동덕여대 교수)의 4·19세대 비평가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권씨는 문학과지성사가 주최한 ‘김현 10주기 기념 심포지엄’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4·19세대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위상을 확립하는 과정에 전 세대 문인들을 지나치게 폄하고 같은 세대 문인들을 치켜세우는 편파적 비평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문학과지성사의 동인지인 ‘문사(문학과사회)’가 권씨를 비판하고 나섰다. 권씨는 같은 지면에 반론을 요구했으나 ‘문사’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때부터 인터넷을 중심으로 ‘문사’의 ‘문학권력 행사’를 성토하는 여론이 일었다. 네티즌들의 공격을 견디다 못한 ‘문사’가 홈페이지를 잠정 폐쇄하자 불똥은 ‘창비’ 홈페이지 게시판으로 튀었다. 이에 ‘문사’측과 ‘창비’측이 각각 의견을 밝히면서 ‘4·19세대 비평가들의 인정투쟁론’은 문학권력 논쟁으로 확대됐다.

    7월말 발생한 작가 황석영씨의 동인문학상 거부 파동은 문단에 안티조선 논쟁을 촉발했다. 그후로도 문학권력 논쟁은 식을 줄 몰랐다. 10월에 들어선 국문학계 거두인 김윤식 교수의 논문 표절사실을 폭로했던 30대 평론가 이명원씨가 ‘압력’을 견디다 못해 대학원 박사과정을 자퇴하는 사건이 일어나 문단과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비슷한 시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이문구씨가 동인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문언유착 시비와 더불어 안티조선 논쟁이 재연됐다.

    11월말엔 시인이자 평론가인 남진우씨와 시인 김정란씨 사이에 문학권력 논쟁이 벌어졌다. 남씨가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있는 ‘문학동네’를 통해 “문학권력 문제를 제기하며 일부 문인들을 공격해온 김정란씨야말로 문단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며 김씨를 비판한 것이 계기였다. 조선일보를 통해 촉발된 이 논쟁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와 월간 ‘인물과 사상’을 통해 확산됐다.

    “권성우씨의 문제제기엔 일리가 있죠. ‘창비’나 ‘문지’(문학과지성사)나 자신들이 크기 위해 전 세대를 비판해야 했겠지요. 손창섭이나 장용학 같이 훌륭한 작가들이 존재도 모를 정도로 묻혀진 데는 그런 점이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창비’야 어차피 참여문학을 표방하고 문학의 사회성을 추구했으니 그럴 수 있겠지만, ‘문지’가 그런 일을 한 것은 짚어볼 필요가 있어요. 문학권력이란 수십 년의 세월 같은 것입니다. 누적된 시간 때문에 갖는 권력이지요. 파시스트 권력처럼 갑자기 나타나 누군가를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권력의 속성은 같아요. 부당하게 선택과 배제를 한다는 것, 그 점에서 문학권력도 분명 권력이지요.”

    ─지난해 문단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일은 동인문학상 파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황석영씨의 동인문학상 비판논리에 찬성하십니까. 소설가 양귀자씨는 조선일보 기고를 통해 “황석영이 오히려 줄 세우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는데요. 그 사건을 계기로, 평론가 김명인씨의 표현대로라면 문단에 하나의 전선이 명백하게 형성됐습니다.

    “문학과 권위는 관계없어요. 문학은 권위를 타파해야지요. 문학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잖아요. 그런데 자유주의자로 자처하는 문학인들이 보기에 동인문학상 제도는 아주 위압적이고, 문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어요.”

    ─상당히 선진적인 심사방식이라는 평가도 있지 않습니까.

    “프랑스에 그런 식으로 심사하는 상이 있다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종신심사제는 문제가 있어요. 박정희가 종신 총통제까지 꿈꾸지 않았습니까. 종신이라는 말은 권위적이고 파시즘적인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그런데 종신심사위원이라니. 그러면 그들은 완전무결한 사람들이냐. 무오류의 인생을 산 사람들이냐.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무오류는 문학이 아니에요.”

    작가는 도덕주의자가 아니다

    ─어쨌든 작가회의 대표가 그 상을 받지 않았습니까.

    “개인적 행위로 봐야지요. 뛰어난 소설이니까 상 받을 만하지요. 제도 자체가 문제라는 거지. 후임자로서 거기에 대해 더 말하기도 그래요.”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999년 ‘언론개혁 촉구 100인 선언’에 당시 작가회의 대표 신경림씨도 서명했는데, 지금 벌어지는 언론개혁운동을 어떻게 보십니까.

    “신문과 문학은 공생관계예요. 지금 문학 쇠퇴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문학을 애호하고 대중에게 문학을 알려주는 언론이 있어야죠. 좋은 작품을 써도 신문에서 다뤄주지 않으면 일반 독자들은 책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도 몰라요. 또 출판사야 어차피 돈 벌려고 책 내는 건데 언론이 다뤄주지 않으면 상당히 힘들죠. 일제 때 쌍생아처럼 탄생한 신문과 문학은 서로를 비난하기가 참 어려운 관계예요.

    보수언론이 자정작업을 통해 스스로 변화했으면 좋겠어요. 타사와 경쟁하는 데 문학인을 이용하지 말고 색깔론이나 지역감정을 일으켜 여론을 호도하는 일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까지 언론개혁에 나선다면 오히려 방어본능만 자극해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문학인들이 독자들과 싸우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딜레마예요. 많은 사람이 언론은 자정능력이 없으니 외압에 의해 개혁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자정이 가장 좋다고 봐요.”

    ─90년대 초 작가회의에서 김지하 시인을 제명한 사건이 화제가 됐지요. 과거 사회참여문학을 한 작가들은 큰 짐을 안고 있어요. 한번 투사로 자리매김했으면 끝까지 투사로 남아있길 바라는 대중심리에 대한 부담입니다. 박노해씨의 출소 이후 행적에 대한 비판도 그런 차원이지요. 말하자면 지조를 지키길 원하는 겁니다.

    “80년대를 겪은 사람들의 정신적 상흔이지요. 80년대의 시대정신에 비춰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물론 변하지 않는 사람도 많죠. 하지만 작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변하지 않으면 안 돼요. 작가는 우국지사나 도덕주의자와는 다르거든요. 상황에 따라 변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거든요. 물론 카멜레온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저 자신도 변합니다.

    80년대 시대정신을 새로운 세기, 새로운 사회에 어떻게 반영하느냐, 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중요하죠. 요즘 80년대 식으로 쓰면 읽을 사람도 없어요. 상황이 달라졌어요. 예전엔 정치권력이 독재였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손이 독재자가 됐거든요. 그걸 타깃으로 싸우는 것이 굉장히 힘들어요.

    시민운동의 영역까지 작가가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변화된 현실에 맞는 문학형식을 발견하고 그에 맞는 글을 쓰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해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잖아요. 80년대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민족주의와 가난을 다시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이분법 구도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통일에 대한 그의 생각은 조금 뜻밖이었다.

    “통일정책도 분명히 조심스럽게 추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언론처럼 막무가내로 트집잡는 것도 문제지만, 통일을 서두르는 사람들도 문제입니다. 10년 내지 20년 내에 하나로 합쳐지길 원하는데, 그건 너무 조급한 생각입니다. 50년 동안 갈라져 전혀 다른 사회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어요. 우선 전쟁이나 억제하고 공존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해요. 이런 얘기도 이분법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 거죠.”

    ─속도조절론에 일리가 있다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면 나를 보수로 보겠지요. 그럼 내가 설 땅은 어디냐. 통일론 민중론 언론관이 다 똑같기를 요구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거든요.”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는 “지식인 노릇도 하고 예술가 노릇도 하려니 복잡하다”며 웃었다.

    “제 작품 ‘지상에 숟가락 하나’ 읽어보셨어요? 그거 읽어보면 그냥 순수한 예술로 느껴지죠. 일생 동안 4·3으로 문학적 화두를 삼는다는 건 피곤한 노릇이죠. 그걸 통해 사회적 발언도 해야 하고. 4·3도 이제 제도권으로 들어갔잖아요. 그럼 제도권에서 잘해주길 바라는 거죠. 언론개혁문제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끼어들면 여당 편이나 든다고 말할 것 아니에요.”

    현이사장은 구상중인 작품을 묻자 ‘소비문화에서 부유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장편 하나를 끝내고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문학 본연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거지. 나이도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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