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진 감독과 36년, 인연도 작품도 롱런
을미사변 100년, 개막일 정해 놓고 시작
무대 가르는 뱃머리, 압도적 스펙터클 초연
낭인 칼에 쓰러진 궁녀들, 경사진 이중 회전무대의 전율
한국에서 실어간 첨단 장비, 링컨센터 기술진도 “판타스틱!”
‘명성황후’ ‘영웅’ ‘칼의 노래’ 항일 3부작 완성이 목표undefined

무대미술가 박동우,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홍태식 객원기자
지금은 “해외로 수출되는 K-뮤지컬”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지만 본격적인 해외 진출 K-뮤지컬의 원조는 ‘명성황후’다. 뮤지컬 본산인 영국 다음으로 미국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국가가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명성황후’는 공연계의 새 역사를 썼다. 최초 브로드웨이 입성, 최초 웨스트엔드 진출, 최초 1000회 공연, 최초 150만 관객 동원 기록 등 뮤지컬 ‘명성황후’가 가는 길은 늘 ‘최초’였다.
박동우(63)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는 초연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명성황후’의 무대미술을 담당했다. 가장 많은 공연을 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외에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링컨센터 뉴욕 주립극장, LA 슈버트 극장과 코닥 극장, 런던 아폴로 해머스미스 극장, 토론토 허밍버드센터 무대가 눈을 감아도 보일 정도다.
요즘은 무대미술가와 무대디자이너라는 명칭을 구분 없이 사용하지만 영어로 무대미술은 시노그래피(scenography), 무대디자인은 스테이지 디자인(stage design)이라고 한다. 무대미술가라고 하면 공연 전체의 시각적 부분을 총괄하는 감독의 성격이 강하다. 지난 30년간 ‘명성황후’가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쳤는지, 특히 시각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박동우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는 얘기다.
“10년 뒤 내 작품 들고 오겠다”
‘명성황후’의 탄생은 4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극 ‘아일랜드’로 동아연극상 연출상(1977)을 받은 윤호진(77·‘명성황후’ 예술감독)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젊은 연출가들을 선발해 보내주는 6개월 해외 연수 기회를 얻어 영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1982년 1월.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마침 초연 중인 뮤지컬 ‘캣츠’를 본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스펙터클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대, 실제 고양이라 해도 믿을 만큼 생생한 분장, 디테일한 안무,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감미로운 음악까지 어느 것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답보 상태인 한국 공연 문화의 돌파구가 보였다. 창작 뮤지컬로 승부를 보겠다고 결심했다.
귀국하자마자 배우 윤석화와 함께 무대에 올린 ‘신의 아그네스’(1983년, 박동우는 1992년 재공연 때 합류했다)가 대박이 났다. 국내 최장기 공연, 최다 관객 기록을 갈아치우며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었다. 하지만 윤호진의 시선은 더 멀리에 있었다. 서른 중반 나이에 미국 유학을 단행했다. 귀국 후 1991년 뮤지컬 전문극단 ‘에이콤’ 창단, 2년 뒤 뮤지컬 제작사 ‘에이콤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1994년 1월 창립 작품으로 브로드웨이 고전 ‘아가씨와 건달들’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렸다.
‘아가씨와 건달들’은 정식 계약을 맺고 저작권료를 지불한 첫 라이선스 뮤지컬이기도 했다. 흥행 대성공으로 그동안 밀린 빚을 청산하고 두둑한 현금까지 만져봤지만 그는 눈 딱 감고 세트를 불사르며 미련도 불살랐다. 1987년 12월 뉴욕 공항에서 귀국길에 오르며 ‘기다려라, 브로드웨이, 내가 딱 10년 안에 내 작품을 들고 다시 돌아온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우리만의 소재를 찾다 발견한 것이 명성황후였다. 극동의 작은 나라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격동의 시기, 일본 낭인들이 남의 나라 왕궁에 쳐들어와 왕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야만의 시대에 비운의 왕비라는 스토리텔링은 뮤지컬 ‘에비타’ 못지않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일단 개막일부터 정해 놓고 작품을 시작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1995년 10월 8일로 못 박았다.
무대미술가 박동우가 윤호진 대표로부터 ‘명성황후’에 합류하라는 전화를 받은 것은 1994년 봄. 두 사람이 처음 호흡을 맞춘 작품은 1989년 극단 실험극장의 ‘실비명’이었다. 연극 ‘아일랜드’ ‘신의 아그네스’로 승승장구하던 연출가와 데뷔 3년차 신예 무대미술가는 이후 14년의 나이 차를 넘어 눈빛만 봐도 서로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파트너가 됐다. 박동우는 ‘실비명’으로 ‘대한민국연극제 무대미술상’(1990)을 수상하고 포상으로 2주간 브로드웨이를 방문했을 때 존 내피어가 무대미술을 담당한 ‘레미제라블’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자베르 경감이 센강으로 빠지는 장면에서 겨우 20cm 높이의 다리를 갑자기 솟아오르게 한 뒤 무대를 회전시켜 자베르 경감이 센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만들었다.”(동아일보 2017년 5월 4일자, 무대미술가 박동우 “브로드웨이가 경쟁상대다”)
이 충격은 5년 뒤 ‘명성황후’라는 명품 뮤지컬이 탄생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이제 ‘브로드웨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한국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와 경쟁할 준비가 됐음을 세계 무대에 보여줄 차례였다.
그러나 자금이 막혀 ‘명성황후’는 수차례 공연이 무산될 위기를 넘겨야 했다. 1995년 10월 8일에 맞춰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대관해 놓았는데 편곡자인 호주의 피터 케이시가 개막을 코앞에 두고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을 더는 할 수 없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단원들 밥도 외상으로 먹일 만큼 가난한 제작 형편을 호소했지만 호주인에겐 통하지 않았다. 결국 개막일을 연기하고 부랴부랴 편곡 비용의 일부를 마련해 부친 뒤 완성된 곡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해를 넘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1995년을 하루 남긴 12월 30일 뮤지컬 ‘명성황후’를 무대에 올렸다. 기획에서부터 초연까지 딱 5년이 걸렸다.

명성황후’ 2막 2장에서 아다미 온천장에서 여우사냥(명성황후 시해) 음모를 꾸미는 일본인들. (주)에이콤
소용돌이치는 무대, 침몰하는 조선의 운명
일단 스펙터클한 무대부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이양선(외국 함선)의 거대한 뱃머리가 무대 위로 밀려들어 오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숨을 멈췄다.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을 압박해 오는 제국주의 세력을 온몸으로 느끼게 만드는 시각적 효과였다.
“초연 때 다른 장면들은 대부분 상징적으로 처리하고 이양선 부분만 사실적으로 표현했어요. 무대가 갈라지면서 뱃머리가 확 밀고 들어오니까 관객들은 ‘그야말로 이양선이 침범했구나’를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죠.”
‘명성황후’의 거대한 함선은 2009년 뮤지컬 ‘영웅’에서 ‘기차’로 재현됐다. 눈발 날리는 만주 벌판을 뚫고 달리던 기차(영상)가 하얼빈역으로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12m짜리 실물 기차로 바뀌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또 ‘명성황후’에서 미우라와 암살자들이 일본 아다미 온천장에서 ‘여우사냥(명성황후 시해)’ 음모를 꾸미는 ‘이중무대’ 장면은 관객에게 전율을 선사했다. 이중무대란 기존 무대가 위로 들어올려지면서 아래 있던 무대가 위로 올라와 관객들이 2층으로 된 무대를 보게 되는 구조다.
“음모는 지하에서 꾸며야 훨씬 더 ‘음모’스럽잖아요. 무대 전체를 4m 들어올려서 위에서는 고종과 왕비가 외교 사절과 만나 태평스럽게 환담을 나누고 바로 아래층에서 암살자들이 둘러앉아 조선 정벌과 명성황후 시해를 결의하는 장면을 이중구조로 보여줘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켰죠.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이 개관한 지 얼마 안 돼 처음으로 리프트를 사용한 것이었는데 내가 계획했지만 실제 장면을 보고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받을 만큼 효과적이었죠.”
뭐니 뭐니 해도 ‘명성황후’ 무대미술의 백미는 ‘경사진 이중 회전무대’다. 극 중 장소가 36회나 바뀌는 역동적인 공연에서 ‘어떻게 하면 순식간에 자연스럽게 무대전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기능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됐다. 예를 들어 옥좌에 있는 왕은 신하들보다 위에 있어야 하므로 단을 높여야 한다. 왕이 걸어서 단 위로 오르려면 10초 이상 걸리고 퇴장할 때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의미 없는 등퇴장을 지켜보거나 불 꺼진 무대를 바라보며 시간을 죽여야 한다. 경사진 회전무대를 이용해 장면을 전환하면서 자연스럽게 퇴장을 유도하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됐다.
기능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심의 디스크(원반)와 이를 둘러싼 링(테두리)이 엇갈려 돌아가게 이중 회전무대로 만들었더니 공연의 핵심 개념을 상징적으로 시각화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박동우는 계단 위에 옥좌가 놓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수천 바퀴 돌려보다가 ‘소용돌이’라는 이미지가 그려졌다고 말한다. 배가 소용돌이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고 침몰한다.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라앉아 버린 조선의 실상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이미지가 없었다. 내부의 디스크와 외부의 링이 서로 엇갈려 돌아가면 소용돌이처럼 보이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경사를 만들고 경사 한쪽 끝을 잘라 계단을 만들었더니 무대전환 문제가 해결됐다. 낭인들이 한밤중에 궁궐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장면에서 ‘경사진 이중 회전문대’는 극적 효과를 배가했다.
“디스크 부분이 왕비의 침소이고 반지 모양의 테두리는 침소로 향하는 궁궐의 회랑이 됩니다. 궁녀들은 이 회랑에서 칼을 든 낭인을 막습니다. 기록을 보면 팔이 떨어져 나가도 막았다고 해요. ‘왕비는 어딨냐’ ‘모른다’고 할 때마다 베어진 궁녀들이 쓰러지고 링을 계속 회전하면서 궁녀들을 퇴장시키죠. 낭인들이 복도를 지나 점점 더 왕비의 침소로 다가갈수록 극적 긴장감은 고조됩니다.”

‘명성황후’ 2막 6장에서 명성황후의 원혼이 등장해 ‘백성들이여 일어나라’를 합창하는 피날레. (주)에이콤 | 박동우 교수가 ‘명성황후’를 위해 제작한 경사진 이중 회전무대 모형. 홍태식 객원기자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
2년 뒤인 1997년 8월 15일 쉰두 번째 광복절을 브로드웨이 링컨센터 뉴욕주립극장에서 맞이했다. 2586석의 객석이 가득 찼고, 수백 명이 표를 구하지 못해 발길을 돌렸다. 마지막에 죽은 명성황후의 원혼이 등장해 ‘백성이여 일어나라’를 합창하는 장면에서 배우들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됐다.
객석 중간에서 초연을 지켜본 윤호진도 울었다. 제작비가 없어서 배우들에게 ‘노개런티’를 선언하고 “돈 받고 독립운동했다는 얘기 들어봤느냐, 뉴욕 공연은 우리에게 독립운동이나 마찬가지다”라며 달랬고, “비행기표를 못 사면 뗏목이라도 타고 가겠다”며 호기를 부렸지만 이런 성공을 기대할 만큼 자신만만하지는 않았다. 불가능하다고 손가락질받던 일을 보란 듯이 해낸 감격과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딱 10년 안에 내 작품을 들고 다시 돌아온다!’는 다짐은 현실이 됐다.
흔히 뮤지컬 ‘명성황후’는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단순히 팬덤에 의한 ‘N차 관람’ 이야기가 아니다. ‘명성황후’는 매시즌 리뉴얼을 시도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현대적 해석을 반영했고, 끊임없이 대본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볼거리를 추가하면 어떤 장면은 삭제했고, 순서를 뒤집거나, 장면과 장면을 이어 붙이기도 했다. 대본이 바뀌면 가사를 다시 쓰고, 새로운 곡을 만들거나 편곡을 다시 했다. 그때마다 무대디자인과 의상디자인도 달라졌다.
예를 들어 1997년 뉴욕 공연에서는 초연 때에 비해 장치를 훨씬 단순화했다. 압도적 스케일의 서양 함선이 들오는 장면 대신 배 3척의 돛대만 만들고 그 아래 3명의 선장이 올라타는 바스켓을 달아 공중에 띄우는 것으로 대치했다. 이양선을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상징적으로 표현했더니 통일성, 극장성, 역동성이 더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순회공연을 하다 보니 공연장 상황에 따라 무대장치를 바꿔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사-이중 회전무대’는 뉴욕주립극장에 맞는 사이즈로 이동이 가능하도록 다시 제작했다. 초연 때 직경 15m에 달하던 회전무대는 직경 12m로 축소됐다. 링컨센터 뉴욕주립극장에는 기본적인 회전무대가 설치돼 있지 않아서 이 문제도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한국에서 제작해 공수해 온 ‘포터블 회전무대’가 뉴욕주립극장에 설치돼 회오리치듯 돌아가기 시작하자 세계 최고를 자부하던 링컨센터 기술진이 “브라보” “판다스틱”을 외치며 감탄했다. ‘포터블 회전무대’로 전 세계를 누볐다.

‘명성황후’ 1막 1장에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는 외국 함대를 돛과 바스켓으로 상징화했다. (주)에이콤
롱런의 비결은 변치 않는 가치와 완성도
박동우 교수는 1995년 초연 무대를 ‘1.0버전’, 1997년 뉴욕 순회공연을 위해 간소화한 무대를 ‘2.0버전’, 본격적으로 영상을 투사하기 시작한 20주년 무대를 ‘2.5버전’으로 구분한다. 25주년 무대는 LED 영상을 도입해 가장 사실적인 무대미술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20주년 무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작팀은 30주년 공연을 앞두고 다시 아날로그의 풍부한 질감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1997년 뉴욕 버전을 기본으로 지금까지 해온 모든 버전의 장점을 취한 무대를 만들었다.
지난 30년간 이러한 디테일한 변화를 구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명성황후’ 마니아다. 같은 공연을 열 번 봤어도 디테일한 면에선 다 다른 공연을 본 셈이다. “볼 때마다 새롭다”는 ‘명성황후’가 30년간 롱런할 수 있는 비결 중 하나였다.
“공연 입문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지지하는 배우를 중심으로 공연을 보러 옵니다. 물론 스토리를 즐기러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토리를 한 번 알고 나면 다시 볼 이유가 없죠. 다음 장면에 뭐가 나올지 다 알고 나면 흥미를 잃습니다. 여기까지가 공연의 입문 단계라고 하면 다음 단계는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 표현 방법을 즐기는 겁니다. 오페라 ‘라보엠’을 생각해 보세요. 스토리가 복잡한 것도 아니고 음악도 너무 친숙해서 웬만한 오페라 감상자라면 모르는 게 없습니다. 그 뻔한 작품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러 가는 게 우리가 계속해서 공연을 보는 이유입니다. ‘명성황후’를 반복해서 관람하는 관객들을 위해 우리 제작팀 또한 늘 새롭게 변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30주년을 맞은 ‘명성황후’가 앞으로 계속 30년을 공연한다면 언젠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버전이 나올 수도 있겠죠.”
30년 전 초연 때 ‘명성황후’의 성공 요인을 묻자 윤호진 감독은 세 가지를 꼽았다.
“명성황후라는 주제가 지닌 스토텔링의 힘과 남녀노소 다 같이 볼 수 있는 뮤지컬 장르의 보편성, 관객들을 열광케 하는 강렬함,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이라는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
보편성, 강렬함, 타이밍. 윤 감독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명제는 유효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롱런하는 작품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박동우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에 따라서 그 가치가 줄어들지 않는 것. ‘명성황후’나 ‘영웅’은 소재라는 측면에서 그런 힘을 갖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불멸이죠. 그러한 가치를 얼마만큼 완성도 있게 만드느냐가 공연의 생명력을 좌우합니다. ‘명성황후’ ‘영웅’ 그다음으로 ‘이순신 장군’이 그런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윤호진 감독과 함께 뮤지컬 ‘칼의 노래’를 구상 중인데 ‘명성황후’ ‘영웅’과 함께 항일 3부작으로 완성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