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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100년 비화 · 2

‘40년 간판쟁이’ 백춘태의 간판전쟁으로 지샌 날들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40년 간판쟁이’ 백춘태의 간판전쟁으로 지샌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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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서울생활 2년이 지날 무렵, 마침내 ‘등극’의 기회가 왔다. 미술부 책임자인 ‘오야지’가 되는 것을 ‘등극’이라 부르는데 휘경동에 있는 대영극장에서 일해달라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스물두 살 나이에 극장간판을 그리는, 동년배 중에 가장 빨리 책임자가 된 것이다. 한 프로를 그리고 받는 돈은 3만원. 당시 교수의 한 달 월급이 3000원이었는데 그보다 10배가 많았다.

그러나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 월급 주고 캔버스로 사용할 합판과 페인트 등 재료를 사고 나면 손에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들 어떠랴. 여전히 춥고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남들보다 앞서 간다는 자부심에 고생을 낙으로 알았다.

60년대 ‘벤허’ 등 외국영화가 물밀듯 들어오면서 극장마다 ‘간판전쟁’이 시작됐다. 신문광고를 제외하고는 영화 홍보 수단이 간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극장간판이 지금처럼 대형화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거대한 간판 밑에 서면 중압감에 압도당했다. 말하자면 관객과 극장간판의 기(氣)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나 크게, 얼마나 멋진 장면과 선전문구로 사람들 호기심을 자극하느냐가 관객을 끄는 수단이었다. 이 때문에 흥행에 성공하면 ‘영화가 좋은 탓’이지만 실패하면 덤터기는 ‘간판쟁이’가 몽땅 뒤집어써야 했다.

스타급 배우들도 극장간판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자신의 얼굴이 크게, 앞쪽에 나오게 미술부장한테 담뱃값이나 대폿값을 찔러주며 ‘와이로’를 쓰기도 했다. 그 가운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배우가 김추련이다. 단성사에서 ‘겨울여자’ 개봉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극장 뒤 작업장으로 어느 날 털이 텁수룩한, 생전 처음 보는 청년이 찾아왔다.

“저~ 김추련입니다.” 영화계에 겨우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배우라 김추련이 누군지도 몰랐다. “이 영화로 떠야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간판에나마 제 얼굴 좀 크게 그려주십시오.” 남녀 주인공이자 당대를 주름잡던 신성일과 장미희를 두고 무명에 가까운 배우가 자기 얼굴을 크게 그려달라니, 아무리 극장간판에 문외한이라도 이보다 더 황당한 청은 없었다. ‘뭐 이런 희한한 놈이 다 있나’ 싶어 딱 잘라 거절했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김추련은 밤이든 새벽이든 작업장 문 앞을 지키고 섰다 근처 포장마차로 소매를 잡아끌었다. 끈질긴 정성에 감동해 김추련의 얼굴을 맨 앞에 가장 크게 그려주었다. 그 다음 여주인공 장미희, 맨 마지막에 자그마한 크기로 신성일 얼굴을 그려넣었다.



“간판 그린 ××가 누구야?” 신성일의 분노

개봉 직전 간판이 올라가던 날, 극장 앞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만 해도 간판을 올리는 날은 출연배우와 극장관계자가 모두 나와 지켜보는 게 관례였다. 톱스타인 신성일도 일찍 극장으로 나왔다.

“간판 그린 ××가 누구야? 당장 잡아와!”

불그락푸르락 서슬 퍼런 그를 피해 재빨리 도망쳤고, 그림에 손도 대지 않은 후배들까지 덩달아 줄행랑을 놓았다.

얼마 뒤 더욱 기막힌 소동을 겪었다. 60년대는 극장에서 영화상영뿐만 아니라 가수나 배우, 희극인들이 공연하는 ‘극장쇼’가 활발하던 때다. 한번은 여성 톱 가수 두 명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공연이 있었다. 간판 하나에 두 스타 얼굴을 나란히 그리면 입체감이 살지 않기 때문에 두 명 중 한 명의 얼굴은 뒤쪽에 작게 배치해야 했다. 공연 직전 극장에 먼저 도착한 가수가 간판을 보고 “내 얼굴이 왜 쟤 밑에 깔렸냐”고 파르르 떨더니 공연을 펑크낸 채 극장 입구에서 되돌아갔다.

간판에 출연배우 이름을 쓸 때 반드시 ‘~군’, ‘~양’ 등의 호칭을 붙여야 하던 때가 있었다. 배우 이름만으로 남녀 구분이 안 가는 경우가 간혹 있어 남자가 ‘~양’으로, 여자가 ‘~군’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미 극장 입구에 내걸린 간판에 붓을 들고 매달려 부랴부랴 호칭을 고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60년대는 극장 전면에 내거는 간판 외에 글씨 위주의 실내간판이 지금의 선전지 구실을 했다. 당시 외국영화는 거의 대부분 일본을 통해 수입됐기 때문에 영어에서 일본어로,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영화제목이나 선전문구를 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 단어가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실내간판에 쓸 문구라며 선전부장이 건네준 종이에 ‘비끄이 밴드’라는 말이 있었다. 요즘이야 당장 ‘빅 이벤트’로 고쳐 쓰겠지만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모른 채 선전부장이 써준 대로 간판에 옮겨 적었다. 그런데 영화를 본 관객이 “아무리 봐도 영화에 밴드가 나오지 않던데 도대체 이 영화와 ‘비끄이 밴드’가 무슨 연관이 있느냐”며 물어와 곤혹스러웠던 기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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