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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베짱이’가 아닌 상상력의 ‘샘물’

  • 육영수 < 중앙대학교 교수·사학 >

인문학은 ‘베짱이’가 아닌 상상력의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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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서양대학의 변천사에 한국을 포함한 동양대학의 역사를 비추어 보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흥미롭고도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우리 나라에 서양식 근대대학이 출범한 이래 실제적 의미에서는 ‘대학의 역사가 없다’는 사실이다. 대학과 국가(권력)의 관계, 대학생과 사회의 관계, 교과목의 변천과 사회적 수요의 관계 등의 문제를 지식사회학의 관점에서 심도 있게 종합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빈약한 것이다.

우리 대학사에 대한 빈곤한 관심은 그 동안 이 땅의 학자들이 한번도 대학의 본질과 과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심도 있게 점검해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 나라의 지식인들은 “대학은 진리탐구의 장소인가 아니면 직업훈련소인가” “교수와 대학생은 기존 질서와 가치관을 확대 재생산하는 자들인가 아니면 사회변혁의 촉매인가”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성찰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이 땅의 인문학자들의 직무 유기에 가까운 무관심과 게으름이야말로 오늘날 ‘인문학 위기’의 직접적인 한 요인이며 동시에 본질이다.

둘째는 좀 더 충격적인 것으로 근대 대학의 수립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한 번도 인문학과 인문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19세기 후반 국가생존 차원에서 신식 고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된 초기부터 신자유주의적 교육방침이 지배하는 오늘까지 인문주의적 교양교육과 시민교육은 늘 뒷전에 처져 있거나 미운 오리새끼 같은 서자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런 비인문주의적인 경향은 인문주의적 교육이 르네상스 시기부터 대학교육의 본령을 차지했던 서양의 경우와는 대조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교육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던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 교육관과도 동떨어진 새로운 현상이다.

주지하듯이 14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인문주의자들은 문법, 수사학, 시학, 역사, 철학의 5개 분야를 ‘인간성에 대한 공부(studia humanitatis)’의 핵심과목으로 삼았다. 오늘날 흔히 인문학의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문학-역사-철학(文-史-哲)과 동일한 과목을 선별하여 공부함으로써 인간의 지적, 도덕적 인격을 함양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학, 법학, 의학 등 전문적인 고등훈련을 강조했던 서양중세 대학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성 회복을 모색한 르네상스가 이룩한 ‘교육학적 전환’이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일차적인 고등교육 목표는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고 논리적인 대화와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타인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의 ‘교양인’은 특정분야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인간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정확하고 최선의 도덕적인 판단을 자립적으로 내릴 수 있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교육이 서양의 독점물은 물론 아니었다. 오랫동안 유교문화권에 속했던 우리 조상들도 일찍부터 인본주의적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372년에 설립되어 흔히 우리 나라 최초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꼽히는 고구려의 태학(太學)은 오경(五經), 사기(史記), 삼국지(三國志), 옥편(玉篇), 문선(文選)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교과목 기준으로 따진다면, 서양보다 무려 천 년이나 앞서 우리 나라의 고대 고등교육기관에서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등과 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주제’들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나라가 경험한 특수한 근·현대사의 행로는 서양식 근대 고등교육의 태동과 함께 인문주의적인 전통이 죽어버리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근대적 대학교육의 도입과 본질이 실용주의 교육에 초점이 맞춰짐으로써 대학과 인문학은 애초부터 ‘잘못된 만남’으로 결별하게 된 것이다.

188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서양식 고등교육기관(원산학사, 배재학당, 이화학당)은 기술관료나 전문직업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서양열강과 일본의 침략적인 야욕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군사, 외교, 법률, 통상, 통신 및 광산개발 등과 같은 실용적인 과목들이 강조됐던 것이다.

19세기말에 형성된 인문교육 천시경향은 일제시대에도 지속된다. 자생적인 민족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 내에는 철학, 사학, 문학 등 인문학과가 설치됐지만 이는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전문관료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수립을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일제는 1943년 ‘교육에 관한 비상조치령’을 발표해 전쟁수행에 도움이 되는 이공계통 교육을 강화하고 이들에게만 징집면제의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당시 젊은이들이 문과보다는 이공계열의 전공선택을 선호하는 풍조를 조장했다.

광복 이후에도 인문학과 인문주의에 대한 천시정책은 지배엘리트에 의해 계승됐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관비생으로 영어위탁 교육을 받고 ‘이 땅에서는 최초로 영어로 졸업생 대표연설을 했던 인물’이며, 미국유학 시절에는 존 듀이의 실용주의적 교육철학을 연구했다. 제3공화국 출범이후 약 20년간 교육정책을 좌우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사범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황국신민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이런 전력을 가진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국가의 수요에 필요한 방향’으로 고등교육을 재편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이공계 전공자들에게 독점적으로 국비유학생의 혜택을 부여하고, 방위산업체 근무를 조건으로 징집면제의 특혜를 베푸는 ‘일제의 잔재’를 되풀이하였던 것이다. 19세기말에 시작된 인문학 천시경향이 면면이 이어져 이 땅은 인문주의가 성장할 수 없는 척박한 토양이 되었다.

익사한 인문학

우리 대학의 인문학 천시경향은 ‘압축된 근대화’의 또다른 부산물이다. 마치 박정희 시대의 ‘압축된 근대화’가 정치적 권위주의와 집단적 병영문화를 야기했듯이 ‘압축된 근대화’란 외길을 강요 당한 우리 대학과 인문학은 국가주도형 교육정책과 시장수요 원칙에의 복종이라는 두 줄기의 가시에 걸린 ‘새 신세’가 됐다.

서양대학이 수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경험했던 세 단계(교회→국가→시장)를 우리 대학은 채 100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압축해 경험했다. 대한제국→식민시대→유신시대를 거치는 ‘압축된 성장사’의 틈바구니에서 인문학과 인문주의는 실종됐다. 면면이 이어오던 인본주의적 교육 전통이 ‘근대화 물결’ 속에서 단절되고 익사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한제국의 붕괴와 일본에의 합방이라는 우리 근대사의 특수성 때문에 근대대학의 탄생은 인문학과의 순조로운 만남을 통한 ‘연착륙’으로 귀결되지 못했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조국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사명’의 수행에 떠밀려 인문학은 대학교육의 주류에서 더욱 소외됐다. 고담준론(高談峻論)과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유교적 선비의 후손인 인문학자는 이제 ‘냉수 마시고 이 쑤시는’ 한량이나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 비현실적인 인물로 낙인 찍힌 것이다.

“인문학은 저항한다”

근대대학의 짧은 발자취를 추적함으로써 ‘인문학’이란 나무가 성장하기에 어려운 이 땅의 척박함과 그 환경의 적대성을 분석해 보았다. 식민시대, 군사적 독재시대, 신자유주의적 개방시대를 거치면서 노출된 교육적 이념과 목표설정의 진통과 혼란은 교육행정 담당기관의 명칭변경(문교부→교육부→교육인적자원부)에서도 재확인된다. 이제 교육의 모든 것을 ‘인적 자원’의 공급과 관리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교육당국은 시장의 충실한 대리인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새 천년을 맞은 지금 국가 백년대계에 대한 교육당국의 태도가 갖는 오류를 지적하고, 인문학과 인문주의가 가지는 현실적인 중요함과 시대적인 소명감을 밝히려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이 땅의 인문학과 인문주의가 보존되고 장려되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바야흐로 형성되는 ‘지식·정보의 세계체제론’에 저항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연방으로 대표되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이래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금융에 의한 세계질서의 재편성은 ‘지식제국주의’라는 새로운 지배-종속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초고속 정보망의 구축은 거대자본을 바탕으로 한 정보의 독점적인 생산과 분할 및 보급을 가능케 한다.

후기 산업사회가 가져온 이런 기술혁명의 도움으로 초강대국 미국은 전 세계 지식·정보를 주도적으로 창출하는 생산자이며 동시에 이를 전략적 차원에서 다른 국가들에게 공급하는 배급자가 됐다. 더구나 정보의 바다에 지식을 공급하고 이를 검색, 가공하는 매개 언어로서 미국식 영어가 전 세계적으로 사용돼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거대금융자본과 전자정보산업의 야합으로 재편성되는 세계체제의 사다리구조에서 우리 나라를 포함한 제3세계 국가들은 강대국의 ‘지식 하청국’이나 ‘정보 주변국’으로 종속될 우려가 매우 높다. ‘지식·정보의 세계체제론’이 내포한 제국주의적 음모와 종속화의 비밀을 폭로하는 데 인문학의 본질인 비판·저항정신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도의 현대 대학사는 우리에게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17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인도에 상륙한 영국은 19세기 초엽 이미 인도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실제적인 통치자로 군림한다. 식민지 인도인들을 제국의 문화와 가치관으로 동화시키려는 목적으로 1835년 입안된 ‘매콜리(T. B. Ma-caulay) 보고서’는 “영어를 유일한 언어로 한 영국식 서양교육의 전면적 실시”를 선언했다.

인도인에게 유럽의 문화와 과학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1837년 영어를 정부의 공식언어로 채택했고 1857년에는 런던대학교를 본 딴 서양식 대학을 대도시에 건립했다. 외양적 변화뿐 아니라 교과목에서도 실질적인 ‘인도의 영국화’가 실천됐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영국에서 출판되자마자 인도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됐으며, 옥스퍼드와 켐브리지보다도 먼저 영문학과가 설립됐다. 그 결과, 1858년에 대영제국으로 합병된 이후 1900년에 이르기까지 인도 전래의 토착언어와 교육체제는 거의 소멸됐다.

‘인도의 유럽화’를 겨냥한 대영제국의 식민지 교육정책은 원래 의도대로 본국에 충성하는 협력자계층을 양성하는 데 성공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영국의 식민지 교육은 역설적으로 ‘저항하는 비판세력’을 준비하는 데 기여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국정부는 인도인들이 식민통치를 이해하고 충성을 바칠 것을 기대하면서 유럽의 역사와 정치이론, 진보주의적 계몽철학과 같은 인문학 교육을 대학교육의 주안점으로 삼았다. 많은 시설투자가 필요하지 않은 인문학을 인도인들에게 주입시킴으로써 식민지 정부의 하급관료 양성에 힘쓰는 대신 의학과 공학 등 기술응용 분야에는 본토에서 훈련 받은 영국인을 주로 채용하였다. 1937년 당시의 통계를 보면, 문리대에 전체 인도대학생의 83.5%, 의대에는 4.5%, 공대에는 1.9%가 재학할 정도로 영국식민정부는 인문학에 편중된 대학교육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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