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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위기의 기초학문

인문학은 ‘베짱이’가 아닌 상상력의 ‘샘물’

  • 육영수 < 중앙대학교 교수·사학 >

인문학은 ‘베짱이’가 아닌 상상력의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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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가까운 기간 영국식 기초학문의 세례를 받은 인도의 엘리트들은 1947년 독립 이후 ‘제3세계 지식인’의 전위대로서 부상한다. 그리하여 유럽 중심주의에 입각한 세계질서에 도전할 새로운 담론 창조에 앞장선다. 1980년대를 전후로 인도 출신 지식인들이 중심이 돼 주창한 ‘서발턴(subaltern·국내에서는 ‘하층민’ ‘하위주체’ ‘종속계급’ 등 다양한 명칭으로 소개됐다) 연구’가 좋은 사례다. 서양인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일그러진 동양관을 일컫는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서양 중심적 가치관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타자’ 혹은 ‘비정상인’으로 취급 받았던 유색인, 하층민, 이민자, 소수민족에 대한 재발견과 재조명에 ‘서발턴 연구’는 초점을 맞춘다.

“유럽 도서관이 소장한 단 한 권의 서적이 인도나 아라비아의 토착적인 전체 학술작품의 가치에 필적한다”거나 “셰익스피어를 인도 전체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오만한 유럽중심주의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을 집중적으로 교육 받은 식민지 인도 지식인의 굴욕감은, 자신의 정체성 수립에 필요한 ‘쓴 보약’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성적 비판정신, 역사적 진보주의의 확신, 유토피아적 꿈꾸기 등 영국이 제공한 인문학으로 단련 받은 인도인들은 ‘제국의 개’가 되는 대신에 서양문명의 허구성을 고발하는 ‘제3세계의 호랑이’로 거듭난 것이다.

인도의 사례는 ‘지식·정보 세계체제론’과의 소리 없는 전쟁에 직면한 이 땅의 인문학자들의 비판과 책임의식을 촉구한다. 우리 지식인들이 아직까지 내세울 만한 독창적인 인문학적 담론을 창출하지 못한 것은 일제가 강요한 이공계 우선 주의적인 식민교육을 받았던 탓일까? 광복 이후 유난히 미국적 제도와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 이 땅의 인문학이 지금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지식·정보 세계체제론’의 정체와 그 위험성을 널리 알리는 작업이다.

거대금융 시장이 선전하는 세계화, 개방화에 현혹돼 그 체제의 고착화에 협력하거나 그 체제로 ‘편입’하기 위해 애쓰는 대신, ‘가치 세계체제론’이라는 ‘21세기형 뉴 밀레니엄 제국주의’의 그물에서 나라와 지식계를 구출하는 데 인문학이 앞장서야 하는 것이다. 탈출에 그치지 말고 가능하다면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새로운 세계체제론’의 촘촘한 그물을 찢도록 노력해야 한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인문학 그 자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관은 ‘지식·정보 세계체제론’의 거대한 아가리로 흡수되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은 상상한다”



학문의 지구화를 표방하는 응용과학과는 달리, 인문학의 본질과 생명력은 그것이 각 나라의 독특한 전통과 역사에 따라 ‘특수한’ 세상 읽기와 해석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지식·정보의 세계체제론’에 따르면 이 땅의 인문학은 세계 석학들이 발표한 이론적 모델이나 가설이 한국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응용되는지 실험해 보고서를 제출하는 보조적 역할에 만족해야만 한다. 이런 ‘지식의 하청구조’는 미국 디즈니사로부터 만화영화 제작주문을 받아 전체 줄거리도 모른 체 배경 그림만 죽도록 그리는 막노동과 유사한 역할을 이 땅의 인문학이 담당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국내 학술지에 발표되는 인문학 논문의 가치를 ‘저명한 외국 저널’에 게재되는 논문의 반쪽 혹은 반의 반 쪼가리로 평가절하 하는 작금의 ‘교육개혁’은 학문적 사대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연말연시에 언론에서 경쟁적으로 취급하는 ‘특집: 세계 석학(碩學)과의 대화를 통해 본 한국사회의 진단과 미래’는 우리 인문학이 ‘지식의 세계적 계서화’에 이미 한 발을 들여놓았다는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

인문학이 보존·장려되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상상력의 보석상자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허무맹랑한 것을 공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멋진 신세계’를 소망한다. 좀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당시에는 다소 황당해 보이는) 인문주의적인 실험정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인류가 향유하는 갖가지 문명이기의 출현과 기술적 진보가 가능했을까?

인문학적 상상력이 기술발달의 밑천이며 그에 선행함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르네상스 인간형’을 대표하는 다빈치는 특정 분야의 깊은 지식이나 고도의 기술력으로 무장된 인물은 아니었다. 건축가, 미술가, 수학자, 발명가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릴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과시했던 그의 창조력의 원천은,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인문학적 호기심이었다. 그가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스케치했던 탱크, 기중기, 헬리콥터 등은 비록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지만 과학자와 기술자에 의해 실현되었다. 마찬가지로 미래소설, 공상과학 장르의 영화 등을 통한 인문학도들의 허무맹랑한 ‘다른 세상에 대한 꿈꾸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무선전화와 비행기를 발명하여 시·공간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었을까.

인문학 천시 풍조는 젊은이들이 꿈꾸는 것을 방해한다. 시험 전문가를 양성하는 우리 교육은 인문학을 외우고, 받아쓰며, 베끼는 학문으로 타락시켰다. 그 결과 이 땅의 젊은이들은 상상력 결핍증에 걸린 ‘무늬만’ 디지털인 세대가 됐다. ‘스타크래프트’ 컴퓨터 게임의 세계적인 ‘고수’인 우리 젊은이에게 한 수 배우러 외국 게이머들이 유학을 왔다는 기사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외국인들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첨단기술의 합작인 비디오게임에 매료돼 밤을 세우는 ‘손끝만 디지털 세대’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그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빨리 보내는 기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디지털 마인드’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력과 역사적 지식에 탄탄한 기반을 준 콘텐츠가 빈약한 디지털문화는 속 빈 강정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소외하는 우리 교육정책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디지털 문화를 수동적으로 소비만 하는 ‘재주 넘는 곰’ 노릇을 하고, 외국 닷컴은 ‘돈을 챙기는 점잖은 주인’ 행세하기를 장려하는 것과 같다.

학문붕괴 막는 파수꾼

인문학의 유용성을 생산성, 시장수요, 실적주의 등의 잣대로 측량할 수는 없다. 인문주의가 함양하는 도덕적 절대주의, 이성적 판단력, 역사적 책임의식, 사회적 공동체주의 등은 그 자체가 교환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인문학은 ‘무엇이 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생활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의사, 변호사, 은행가, 벤처 기업가를 꿈꾸는 학생들이 철학과 역사과목을 수강하더라도 취업시험과 승진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윤리학, 프랑스 혁명사, 낭만주의 문학 등 교양과목은 그들로 하여금 봉사하는 공무원, 생명을 사랑하는 의사,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토목기사가 될 것을 보챌 것이다. 인문학의 유용성이 여기에 있다. 인문학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베짱이’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더 좋은 동료와 이웃이 될 것을 꿈꾸게 하는 상상력의 ‘샘물’인 것이다.

인문학이 생존·번식되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학문의 붕괴를 막는 파수꾼 역할을 할 수 있어서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존립위협에 그치지 않고 사회과학, 자연과학, 응용과학 등 인접학문의 연쇄적인 붕괴를 초래한다.

인문학의 존재이유와 시대적 사명감은 모래사장을 지키는 모래언덕에 비유할 수 있다. 당장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깔끔한 해변경치에 어울리지 않는 모래언덕처럼, 인문학은 쓴 소리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래언덕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수익을 보장하는 화려한 러브호텔과 식당을 짓는다면 해변의 모래사장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고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곳이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시장성과 경쟁력 없다는 핑계로 인문학을 학대하고 ‘자유롭게’ 멸종하도록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 전체의 학문적 토대 붕괴와 인간성의 오염과 종말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자초할 것이다.

습지대가 희귀동식물의 안전지대가 되듯이 인문학은 학문이라는 생태계를 보호한다. 늪과 갈대 숲으로 이루어진 습지대에는 지렁이를 비롯해 농약에 쫓겨난 온갖 곤충들이 서식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딴 곳에 방치된 그곳에서는 생명의 정화와 순환이 밤낮없이 조용히 진행된다. 지렁이는 진흙에 구멍을 뚫어 산소와 영양분을 제공하고, 갈대의 거친 잔뿌리는 썩은 물을 순화시킨다.

같은 맥락에서 인문학은 상처 받은 영혼을 위로하며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 ‘이겨라’ ‘성공하라’는 구호에 발맞춰 ‘누가 치즈를 옮겼는지’ 찾아 헤매다가 ‘부자아빠’가 되지 못한 처세술의 낙오자에게 인문학은 무소유(無所有)의 충만함과 자유로움을 가르쳐 준다. 후배에 밀려 승진도 못하고 (불)명예 퇴진한 직장인의 분노를 인문학은 ‘황성 옛 터의 쓸쓸함’을 노래하며 인생의 덧없음으로 포옹한다. 습지대가 사라지면 자연계 생명사슬의 정상적인 순환이 흔들리듯이, 인문학이 황폐해지면 사회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으로, 인간은 ‘가슴이 없는 기능인’으로 퇴행한다. 멸종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인큐베이터’에서 보호해야 할 당위성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매년 신학기마다 인기 없는 사학과에 할 수 없이 입학해 의기소침해 있는 제자들에게 인문학 전공자는 졸업 후에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예비 실업자’가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력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그들이 대학에서 공부할 인문학은 모든 종류의 부당한 지배에도 저항하며, 지금과 다른 세상의 도래를 상상하며, 성공시대와 성취주의의 허구성을 성찰하며 학문의 최일선을 지키는 첨병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문학자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숙맥이 아니라, 제국의 흥망사 읽기에 안경을 벼리고 몸에 해로운 담배로 철학을 사색하며 밤을 새워 시(詩)의 가래침을 내뱉는다. 가문 여름날 장대비 같은 곧은 소리를 외치기 위해. 감시와 처벌의 눈초리에도 인문학을 하는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신동아 200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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