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주총리가 담당한다.”
이는 장주석이 수차례의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주총리가 중국경제를 지휘하는 최고책임자가 되기까지엔 덩샤오핑은 물론 장주석의 절대적인 신임도 큰 역할을 했다.
1991년 덩샤오핑의 추천으로 부총리에 오른 주총리는 기업간의 연쇄 부실채권을 의미하는 ‘삼각채’ 문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냈으며, 1992년에는 인민은행장을 겸하면서 중국 거시경제를 통괄하는 경제개혁의 기수로 부각됐다.
1998년 리펑(李鵬)에 이어 국무원 총리가 된 주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5년의 재임기간 중 세 분야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국유기업 개혁, 금융 개혁, 정부기구 개혁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주총리는 재정·경제전문가와 기술관료들을 대거 신임 내각에 포진시켜 현대 중국사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압축 개혁’을 시작했다.
국무원 내에서 주총리의 측근이자 참모로 꼽히는 인물로는 상하이에서 함께 일했던 우방궈(吳邦國) 부총리, 지질구조 분야의 엔지니어로 중앙판공실 주임을 역임한 원자바오(溫家寶·59) 부총리 등이 있다. 원자바오 부총리는 주총리에 이어 후임 총리 물망에 오르는 인물이다.
주총리의 국무원 내 측근으로는 다이샹룽(戴相龍·57) 인민은행장을 빼놓을 수 없다. 주총리와 다이행장은 마치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다닌다. 장쑤성 출신인 다이행장은 중앙재정금융대학을 졸업한 후 평생을 금융기관에서 일한 재정·경제통. 1995년 주총리에 이어 인민은행 행장에 올랐고, “인민폐 평가절하는 없다”는 주총리의 취임공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심복이자 ‘금융을 통한 거시통제’라는 주총리 경제개혁 이론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다.
역시 장쑤성 출신인 샹화이청(項懷誠·62) 재정부장은 산둥(山東)대를 졸업한 후 1962년 재정부에 들어와 부장까지 오른 정통 재정부 관료 출신이다. 샹부장과 동갑내기인 대외무역경제합작부 스광성(石廣生·62) 부장은 베이징대외무역대학 졸업 후 대외무역경제합작부에서 평생을 보낸 국제교역문제 베테랑이다. 스부장은 올해 중국의 WTO 가입협상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능력을 인정받는 한편, 한·중 간 마늘분쟁과 중·일 간 농산물분쟁 등에서도 ‘슬기롭게 대응’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도 중국 정보통신산업 정책을 총괄하는 우지촨(吳基傳) 신식산업부장과 올 들어 시작한 제10차 5개년계획을 수립해 추진하는 쩡페이옌(曾培炎) 국가발전계획위원회 주임, 지방할거식 ‘제후경제’ 타파에 총력을 기울이는 리룽룽(李榮融) 국가경제무역위원회 주임도 주총리가 이끄는 경제 실무내각의 야전군 사단장이다.
주총리는 측근을 두지 않기로 소문나 있다. 이 때문에 국무원 안팎에서 그의 측근으로 불리는 인물은 극소수다. 그중에서도 인민은행 부행장을 역임한 후 현재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주석으로 있는 저우샤오촨(周小川), 국가 원로 야오이린(姚依林)의 사위로 광둥성 부성장을 지낸 후 현재 국무원 경제체제개혁판공실 주임으로 자리를 옮긴 왕치산(王岐山), 저명 경제학자 우징롄(吳敬璉)의 애제자로 경제체제개혁판공실 부주임으로 있는 리젠거(李劍閣), 원로 천윈(陳雲)의 아들로 국가개발은행장을 맡고 있는 천위안(陳元) 등이 주총리의 신임을 받는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배후 조종자들
중국의 경제정책은 경제관료 몇 명의 생각과 주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주총리를 비롯한 내각 각료들이 각종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기까지는 정부 기관들의 스태프 조직으로 있는 국책연구기관들의 광범위한 연구와 조언이 뒷받침된다. 중국 국무원 산하에는 중국사회과학원, 거시경제연구원, 국무원 발전연구중심 등 다양한 연구기관이 있어 때로는 역할을 분담하고 때로는 서로 경쟁하면서 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중에서도 국무원 국가발전계획위원회 산하기관인 거시경제연구원은 경제정책 실무 분야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연구소로 통한다. 현재 원장은 국가계획위원회 소속으로 오랫동안 경제분석과 예측활동에 종사해온 바이허진(白和金·61).
거시경제연구원 산하에는 경제연구소, 산업발전연구소, 투자연구소, 시장 및 가격연구소, 종합운수연구소 등 9개 연구소가 있다. 신장(新疆) 타림분지의 천연가스를 가스관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는 서부 대개발의 서기동수(西氣東輸) 프로젝트나 양쯔강의 물을 거대 수로를 통해 화북평원으로 끌어올리는 남수북조(南水北調) 프로젝트 등이 이 연구원의 작품들이다. 무려 1000명이 넘는 연구인력을 확보하고 있는 거시경제연구원에서 농업 전문가인 류푸탄(劉福垣)과 교통운수 전문가인 숭푸잉(宋孚瀛) 등 세 명의 부원장이 바이원장을 돕고 있다.
사회과학원은 중국 최고 권위의 연구기관이자 최대 연구기관이다. 부총리급인 리티에잉(李鐵映)이 원장을 맡고 있다. 사회과학원은 산하에 경제연구소와 수량경제연구소, 공업경제연구소, 재정무역경제연구소 등 무려 34개 연구소를 갖고 있다. 가령 공업경제연구소는 고급 연구인력 45명을 포함, 연구소 인력이 모두 600명에 이른다. 기업개혁이론으로 유명한 천자구이(陳佳貴) 부원장을 비롯해 금융이론에 강한 왕궈강(王國岡), 리양(李揚) 등이 사회과학원 소속 경제이론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국무원 발전연구중심은 국무원 직속의 별도 연구기관이다. 주임은 베이징대 왕멍구이(王夢奎) 교수. 중국의 대표적 개혁개방 이론가인 쉬에무차오(薛暮橋)와 사회과학원 부원장을 지낸 마훙(馬洪) 교수가 명예주임으로 있다. 산하에는 거시경제연구부 등 6개 연구부가 설치돼 있다.
1993년 국무원 발전연구중심 주임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마훙(81) 교수는 주룽지 총리의 오늘을 만드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는 대학을 막 졸업한 젊은 주룽지를 자신이 고위관리로 있던 동북지역으로 데려갔으며, 그 후 국가계획위원회가 설립되자 주총리를 그곳으로 보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칠 때 주총리가 다치지 않도록 음으로 양으로 도운 사람도 그였다. 그래서 주총리는 “마훙은 영원한 나의 선생님”이라며 자주 그를 찾아 문안도 하고, 주요 정책에 대해서 상의하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은 그 동안 관료만능의 시대였다. 학자나 지식인은 영향력이 극히 제한돼 있었으며, 사회적 지위도 낮았다. 그러나 시장경제시대가 열리면서 상황이 변했다. 학계의 영향력이 빠르게 커지고 있는 것이다.
힘 얻는 이론가들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정치협상회의(정협)가 개막됐을 때 학계의 몇몇 인물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양회(兩會)’로 불리는 두 회의에 유명 학자 두 명이 대표로 참석했기 때문이다. 칭화대의 우징롄과 베이징대의 리이닝(以寧) 교수였다. 이들이 각기 전인대와 정협 대표로 양회에 참석했을 때 중국 기자들은 “증시 논쟁이 정계로 비화했다”며 이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와 같은 소동의 발단은 올 초 두 사람이 벌인 증시 과열 여부 논쟁이었다. 중국의 한 인터넷신문이 지난해 중국 최고의 경제학자로 뽑은 우교수가 지난 1월 CCTV에 나와 한 말이 논쟁의 발단이었다. 그는 “중국 주식시장은 권력층을 배후에 낀 ‘큰손’과 기관투자가들이 짜고 치는 도박판 같다”고 비난했다. 또 “이들이 자신의 주머니를 부풀리기 위해 가격을 조작하는 바람에 소액 투자자들은 빈털터리가 되기 십상”이라며 “중국의 개혁·개방이 일부 특권층만 배불리는 ‘특권층 자본주의’로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교수의 발언은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증권관리감독위원회는 즉각 문제의 주식거래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으며, 이로 인해 주가가 대폭락하는 등 주식 거래가 크게 위축됐다.
그러자 베이징대의 저명 경제학자 리이닝 교수가 2월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리교수는 샤오줘지(蕭灼基), 퉁푸나이(董輔乃) 등 다른 경제학자들과 함께 TV에 나와 “우교수의 발언은 과대 포장된 것”이라며 “주식시장엔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같은 베이징대의 샤오교수는 “우리(같은 저명 경제학자) 다섯 명이 한자리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발언의 권위를 높였다.
이 논쟁은 개혁·개방 후 중국 학계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벌인 최초의 대규모 논쟁으로 꼽힌다. 중국 학계는 그 동안 논쟁을 극히 꺼려왔다. ‘구동존이(求同存異)’, 즉 ‘다른 것은 제쳐두고 같은 것을 찾는다’는 중국의 외교정책이 논단에도 적용된 셈이다.
그러나 논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수파 이론가와 개혁파 이론가 사이의 논쟁은 그 동안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다. 덩샤오핑이 채택한 개혁·개방노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유명한 인물이 지금은 은퇴한 사회과학원의 류궈광(劉國光) 교수다. 이어 1989년 톈안문 사건 이후 개혁이 주춤했을 때 칭화대의 후안강(胡鞍鋼) 교수 등이 나서서 대대적인 개혁을 촉구했다.
주총리가 취임해 국유기업과 금융개혁을 추진하고 나섰을 때도 학계에서 이론적인 틀을 제공했다. 국민경제연구소 소장인 판강(樊綱), 베이징대의 린이푸(林毅夫) 교수와 하이원(海聞) 교수, 인민대 금융증권연구소장인 우샤오치우(吳曉求), 칭화대의 웨이제(魏傑) 교수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중국 경제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인사들로 알려져 있다.
홍콩 출신인 량딩방(梁定邦) 교수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학계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홍콩 증권거래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다 독학해 나중에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하기도 했던 그는 증권거래소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실무와 스스로 개척한 이론을 바탕으로 홍콩 증권감독위원회 주석에까지 올랐던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현재 주총리의 초청으로 본토로 건너와 주총리의 측근 저우샤오촨이 주임으로 있는 증권관리감독위원회의 특별고문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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