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코드 정치’ 버리고 리더십 다시 세워라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苦言

  • 글: 안병영 연세대 교수·행정학 ahnby@yonsei.ac.kr

    입력2003-07-24 16: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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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의 목소리는 높고,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도 분명하고, 그들이 지목하는 반개혁세력의 윤곽도 드러나지만, 실제로 국민들에게는 국정개혁의 비전이 무엇인지, 즉 개혁의 ‘본질(substance)’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의 머릿속에 개혁의 미래상이 각인되지 못한다. 오히려 실체가 불분명한 ‘섣부른 개혁만능주의’만 부르짖다가 그동안 쌓아온 경쟁력과 생산력 기반만 약화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코드 정치’ 버리고  리더십 다시 세워라

    노무현 정부 들어 사회 갈등이 오히려 증폭되고 첨예해졌다. 정부의 원칙없는 ‘한쪽 편들기’탓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 우리는 기대 반, 우려 반의 심경이었다. 많은 이들은 이 기회에 기성질서의 낡은 부분과 어두운 구석이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참신하고 바른 질서가 창출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새 정부가 그 진보적 성향 때문에 자칫 이념과잉이나 포퓰리즘의 여울에 빠져 사회통합을 해치고 국제경쟁력을 하락시켜 국정의 혼란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5개월이 되어간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은 어떤가. 새 정부에 대한 기대는 점차 퇴색하고, 우려가 부쩍 늘고 있는 분위기이다. 우선 많은 이들이 현재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을 매우 혼란스럽게 인식하고 있다. 보통 정권교체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크게 변화하기 때문에 이념갈등이라든가 세대간·집단간 갈등은 얼마간 예견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의 원칙없는 한쪽 편들기 국정운영으로 인하여 이들 제반 갈등이 조정되기보다는 오히려 증폭되고 첨예해지는 형국이어서 매우 심각한 사회분열과 국정혼란을 겪고 있다. 따라서 남북문제, 대미 관계, 노사갈등 등 어느 쟁점 하나 속시원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새 정부 출범을 전후해 전개되고 있는 대내외 경제 여건 또한 매우 불안해서, 거의 모든 경제지표에는 빨간 불이 켜져 있고 정부정책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적 신뢰도가 저하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국내외 투자자들의 투자심리가 위축되는 등 위기의식이 점차 고조되고 있다. 더욱이 올해 경제성장률이 3∼4%대 저성장에 머물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기도 전에 성장동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이러다가 국민소득 ‘1만달러 덫’에 걸려 경제가 추락하는 남미형 성장곡선을 그리지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마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노무현 정부가 처한 정치적 상황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여소야대 상황에다 신당 창당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민주당의 집안싸움이 심각하다. 게다가 대통령의 지지율마저 계속 하락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지역적 정치기반이 취약하다. 물론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 그리고 진보적·민중적 사회세력 속에 지지의 뿌리가 있다고 하나, 이들의 지지는 지역연고만큼 견고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도 유동적이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와 그 개혁 프로그램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도전세력도 만만치 않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의 국정개혁 노력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어 국민의 보편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게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얼마간 만성적 불안을 감수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사회운동적 개혁정권이다. 따라서 국정개혁에 명운을 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공적 개혁을 위해서는 국정개혁의 비전과 프로그램, 이를 수행할 국정운영시스템과 정치적 리더십, 그리고 여기에 투입할 유능한 인재가 필요하다. 이들 개혁의 성공조건들을 중심으로 지난 5개월간의 상황전개를 점검하고,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국정개혁 비전]

    새 정부는 긴 호흡을 가지고 성취하고자 하는 중장기적 비전을 선보이는 것이 상례다. 비전은 국정목표와 중심과제를 집약한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정부의 철학과 나라의 미래상을 반영하며, 이상과 현실을 접목시키는 정권의 상징정치적 능력을 축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잘 짜여진 국가비전은 주요한 정책 어젠더를 만들어내는 산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개혁정권임을 자임하는 노무현 정부에게 있어 국정개혁 비전의 중요성은 불문가지(不問可知)라 할 수 있다.

    국정개혁 비전은 다음 두 가지 기능을 발휘할 때 제 구실을 다하는 것이다. 하나는 그것이 정부의 중심적 국가활동 및 국가경영의 준거 틀이 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이 국민들의 심상(心象)에 강하게 각인되어 이들에게 엄청난 동기와 영감을 불어넣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최상의 국가비전은 정부와 국민을 한마음으로 묶어 미래의 국가목표를 향해 매진하도록 만들어주는 묘약(妙藥)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정부 출범 며칠 전인 2003년 2월21일 새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할 3대 국정목표와 4대 국정원리, 그리고 12대 국정과제를 확정 발표했다.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의 3대 국정목표와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 ‘대화와 타협’ ‘분권과 자율’ 등 4대 국정원리,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등을 골자로 하는 12대 국정과제를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다. 인수위가 마련한 이러한 국정목표, 국정원리, 그리고 국정과제는 다분히 국정개혁 비전의 성격을 지녔다. 그것은 앞으로 노무현 정부의 정책 어젠더를 창출하는 데 유용한 준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국정비전은 적어도 상징정치적 맥락에서는 성공적으로 비춰지지 않았다. 국민의 영혼을 흔들어놓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상투적이었다는 느낌이다. 즉 그 어느 것도 과거 정권의 ‘국민소득 1000달러’나 ‘세계화’, 혹은 ‘햇볕정책’ 등과 같은 고도의 개념화와 정치적 상징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 중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이라는 비전이 얼마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얼마 후 중국과 일본을 의식하고 ‘동북아 경제중심’으로 그 수위를 한 단계 낮춘 바 있다.

    운동정권적 성격 강한 참여정부

    새 정부는 그 인적 구성이나 지향성으로 보아 운동정권적 성격이 강한 게 사실이다. 또 기존의 어떤 정부보다 더 진보적인 국정개혁 의지를 표방하고 있다. 개혁의 목소리는 높고,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도 분명하고, 그들이 지목하는 반개혁세력의 윤곽도 드러나지만, 실제로 국민들에게는 국정개혁의 비전이 무엇인지, 즉 개혁의 ‘본질(substance)’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의 머릿속에 개혁의 미래상이 각인되지 못한다. 오히려 실체가 불분명한 ‘섣부른 개혁만능주의’만 부르짖다가 그동안 쌓아온 경쟁력과 생산력 기반만 약화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다가는 개혁이 한낱 ‘수사(rhetoric)’로 끝나는 게 아닐지 모르겠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및 정권실세들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추구하는 운동의 본질과 그 역학에 준거하여 판단한다면, 참여정부의 개혁비전 내지 개혁목표는 오히려 ‘탈(脫)권위’ ‘탈권위주의’ 내지 ‘탈권위사회’가 아닐까 한다. 간혹 드러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파격적 언행이나 도전적 발언도 다분히 기득권층 및 그들이 주도하는 권위사회, 그리고 그들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겨냥할 때가 많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주 기존 권위를 과소평가 내지 폄하하는 행태를 서슴없이 보여주곤 했다.

    ‘탈권위’는 그것 자체로서 구조적 사회개혁의 함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탈(脫)’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함축하듯이, 긍정적 목표와 연계된 희망찬 미래상을 투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본질보다는 양식(樣式)이나 스타일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비전이나 목표로서의 의미가 반감된다. 국정개혁의 비전은 무엇보다 국민의 구체적 삶을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하는 ‘민생(民生)’과 연관될 때 그 빛을 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소득 2만달러’를 국정목표로 제시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새로운 국정비전은 과거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의 중상주의적 국가목표를 연상시킨다. 다분히 경제주의적 함축이 강하다는 면에서 노무현 정권의 사회운동적 성격과는 무언가 괴리가 느껴지게 만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생과 직결된다는 의미에서, 또 8년간 계속 1만달러에 턱걸이한 상태에서 제자리걸음만 하는 우리에게 절실성과 절박성을 던져준다는 의미에서 한결 가슴에 와 닿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정부는 ‘2만달러’라는 기치는 곧추세웠으나, 이를 성취할 방도는 아직 제대로 강구한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실효성 있는 세계경쟁 전략과 더불어 사회적 위험을 낮추는 사회보호 전략도 함께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며, ‘2만달러’에 접근하기 위한 정치 및 사회경제적 제도개혁과 인프라 구축, 그리고 주요 정책수단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장밋빛 목표만을 제시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긴 우회로를 거쳐 비교적 실용주의적 국정개혁 목표에 접근했다는 것은 하나의 성과라고 하겠다. 이러한 국정개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념성, 정파성을 떠나 사회적 합의 추구와 고도의 정책능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코드 정치’ 버리고  리더십 다시 세워라

    분권적 국정운영 시스템을 제대로 작동시키려면 대통령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자신의 권한을 대폭 내각에 이양, 장관들이 국정의 중심에 서게 해야 한다.

    최근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 시스템에 관하여 논란이 많다. 현재의 청와대 조직은 대선에 한발 앞서 박세일 교수가 펴낸 ‘대통령의 성공조건’에서 제안한 내용을 많이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요지인즉, 청와대 조직을 정책중심의 정책실과 정무중심의 비서실로 나누고, 기존의 부처담당 수석비서관제를 폐지하며, 정책실 밑에 몇 개의 태스크포스팀을 두자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분권형’ 내지 ‘선택과 집중형’ 시스템인데, 이 시스템하에서는, 대통령은 대부분의 국정을 총리와 장관에게 맡기고, 몇 개의 ‘대통령 프로젝트’만 처음부터 끝까지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청와대 조직은 권위주의적 동원체제의 제도적 유산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은 정무분야 외에 부처담당 수석비서관 중심으로 짜여져, 이들이 내각 위에 군림, 장관들을 무력화하며 실제로 ‘소(小)내각화’ 내지 ‘권부화’(權府化)했던 게 사실이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국정운영 체제는 분권과 자율을 강조하는 민주화시대에는 맞지 않을 뿐더러, 업무의 과부하(過負荷) 등으로 비민주, 불공정, 비효율 등 적잖은 폐단을 낳았다. 따라서 새 국정운영 시스템은 이러한 구시대의 유산을 극복하자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중앙집권적 대통령 친정체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발상이다. 그런데 새 시스템은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 내지 국정운영방식이 분권적이며, 선택과 집중원칙을 제대로 지킬 때에만 바르게 작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은 어떠한가?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대통령은 국가전략과 개혁, 국민통합에 집중하고, 내각 관리는 국무총리가 책임지는 ‘책임총리제’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몇 개월간 보여준 통치스타일은 전형적인 중앙집권적 방식이었다.

    노대통령은 우선 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일일이 참견해야 직성이 풀리는 리더십 스타일이다. 그는 젊고 열정적이며, 자주 갈등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서기를 즐긴다. 전경(前景)에, 그리고 일선(一線)에 직접 나선다. 장관이 나서도 됨직한 일에도 그가 나선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청와대가 나서서 해결한다. 노사협상 테이블에까지 청와대 인사가 참석하는 형편이다. 화물연대파업의 경우가 그러했고, NEIS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대통령만이 궁극적 분쟁해결사라는 대중과 이익집단들의 중앙권력지향적 정치 태도에도 원인이 있다. 그러나 결국은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이 문제의 원천이다.

    이처럼 국정운영 시스템은 분명 분권적인 운영 스타일은 집권적이다. 그러니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할 리 없다. 시스템 구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시스템 운영자들의 행태인데, 이 괴리가 심하니 문제가 커진다.

    최근 여권 일각에서 ‘청와대 구조가 국정혼란의 주범’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구조보다 행태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노대통령 자신도 최근 “막상 구체적으로 적용해보면, 오랜 관행과 인식 때문인지 뭔가 잘못되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지금은 집권 초기이고, 주요 정책쟁점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도 확고하게 정리가 안 돼 있는 시점이다. 따라서 모두가 ‘위’만 바라보고 있고, 이러한 상황 자체가 청와대의 중앙집권적 개입을 조장하는 요인이 된다. 어떤 공무원이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 내 16곳에 전달했다는 얘기도 그냥 흘려들을 얘기가 아니다.

    노대통령과 청와대는 출범 이후 ‘시스템에 의한 정치’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국민의 눈에 비친 모습은 ‘코드에 의한 정치’ ‘인치(人治)’ 그리고 ‘아마추어리즘’이다. 시스템은 안 보이고 사람과 그들의 행태만 보이는 형국인 것이다. 따라서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통령 리더십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돌이켜보면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은 대체로 국무회의 주재를 국무총리에게 맡겼고, 큰 국사만 챙기는 편이었다. 이에 비해 국민의 정부의 김대중 대통령은 직접 국무회의를 주재했고, 개개 부처의 정책사업에 대해서도 비교적 많이 관여했다. 따라서 장관의 상대적 정책 자율성은 김영삼 정부 때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부처를 관장하는 청와대 수석과 장관 간의 역학관계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중앙집권적 체제에서 대통령의 지근(至近) 거리에 있는 청와대 수석이 대통령의 신임을 배경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경우, 아무리 대통령이 장관에게 권한을 위임해도 장관은 청와대 수석의 그늘을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가 추구하는 분권적 국정운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권한을 대폭 내각에 이양하고, 장관들이 국정의 중심에 서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대통령이 중앙집권적 친정 스타일을 고집한다면 현재의 분권형 시스템은 당초 기대했던 효과를 전혀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가능한 시나리오는, 시스템이 운영방식에 적응하는 것이다. 이미 그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각종 위원회와 태스크포스 팀이 무질서하게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들의 기능과 업무가 분명하게 정의되고 역할조정체계가 서 있는지 의심스럽다. 자칫하다가는 청와대는 위원회의 미로(迷路) 속에서 길을 잃고, 내각의 장관, 실장, 국장들은 수많은 회의에 참석하느라 제 일을 돌보기 어렵게 된다. 분권화 및 선택과 집중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시스템의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망컨대 체제와 행태의 괴리는 한동안 지속될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그와 코드가 맞는 청와대 실세들은 스스로 ‘변화의 역군’임을 자임하며 국정 전반에 걸쳐 세차게 개혁을 주도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그들은 대통령 프로젝트를 몇 개로 한정하고, 국정운영의 큰 부분을 총리와 장관에게 넘겨줄 공산이 그리 크지 않다.

    대안은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분권형 시스템에 맞춰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과 국정운영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시스템을 대통령의 집권적 리더십 스타일에 맞춰 조정하는 것에 비하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겠으나 새 정부가 내세운 ‘분권과 자율’이라는 국정원리에 맞는 발전적 문제해결 방식이다.

    또 하나의 대안은 집권형과 분권형의 가운데쯤, 즉 중간형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즉 어차피 대통령이 경제와 외교안보, 그리고 사회복지라는 세 가지 국정부문의 중심에 서야 한다면, 이 세 부문의 기획 및 조정기능을 강화하고 다른 부문은 내각에 대폭 맡기는 방식이다. 이 방안은 보다 현실적 처방이다. 위의 두 방식 중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현재 겪고 있는 시스템과 운영방식의 괴리에서 오는 혼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폭넓게 인재 등용해야 나라가 산다]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의 보좌관과 수석들, 그리고 내각의 각료, 고위 정무관, 기타 대통령이 임명하는 다양한 준공공부문 CEO의 면면을 보면 우리 사회 파워엘리트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주류에서 비주류로, 보수에서 진보로,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중심이동이 역력하고, ‘3040’세대의 전진배치도 쉽게 눈에 띈다.

    참여정부의 인맥산실은 민변, 자문교수그룹, 통추, 시민운동단체, 지방자치실무연구소 등이며, 1970년대 민청학련사건 피고인부터 1980년대 후반 386 학생운동권에 이르기까지 운동권 출신들이 뉴파워로 크게 부상했다. 인수위원 가운데 다수가 새 정부에 참여하여 ‘인수위원전성시대’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들은 대체로 엇비슷한 사회적 배경과 이념적 성향을 가진 동질적 그룹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다. 특히 권력의 중핵인 청와대의 요소요소에는 이들이 깊숙이 포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들은 한때 좌파적 이념과 교조에 크게 경도되었던 그룹이다. 따라서 이념적으로 ‘성장’보다는 ‘분배’를, ‘자유와 경쟁’보다는 ‘형평과 정의’를, ‘세계화’보다는 ‘민족적 정체성’을 중시하며, 다분히 ‘노동’ 친화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이념적 동지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념과 가치판단에 집착하며, 실용주의적 접근과 전문가적 분석에 약하다.

    새로운 파워엘리트의 또 다른 특징은 다분히 사회운동적이며 정치공작에 능하다는 점이다. 이들은 비교적 자기실현적이며, 정치적 상상력과 호소력이 뛰어나고, 세 몰이와 정치적 동원에 강하다. 이들의 대중동원능력은 이미 지난번 대통령선거에서 웅변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따라서 절차와 형식을 중시하고, 헌정주의와 심의과정을 강조하는 대의민주주의보다 국민과의 직거래를 꾀하는 이른바 국민투표적 민주주의를 선호한다. 따라서 이들 이른바 ‘운동권 정치인’들은 자칫 대중영합적인 포퓰리즘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들 중 특히 대통령 최측근의 정책참모들은 어떤 의미에서 대통령의 ‘인격적 연장’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념과 정책적 지향이라는 맥락에서 대통령과 교감하고 연대할 필요가 있으며 대통령에게 정치적 충성심을 바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주변이 온통 대통령의 이념적 동지들로만 채워지게 된다면 문제는 좀 심각해진다. 그렇게 되면 교정적(矯正的) 환류는 차단되고, 대통령의 이념적 편향성이 지속적으로 보강되어 결국 그것이 구조화, 화석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에 못지않게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운동권 출신의 개국공신들이 대체로 상징조작과 정치적 동원에는 뛰어나나, 국가경영능력 내지 정책능력은 크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국정운영력에 관한 한 아마추어들이 많다. 그런데 국정의 최고 사령탑인 청와대에는 최고의 국가전략과 정책 청사진을 바탕으로 실효성 있는 정책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경륜 있는 인재가 대거 포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과 귀가 세계로 열려 있고, 민생개혁 의지와 더불어 빼어난 정책전문성을 함께 갖춘 큰 재목들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인재가 운동권 출신 중에도 있을 것이다. 또 운동권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미 과도한 이념의 거품을 거두고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정책조망을 가진 인재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들은 개혁성과 정책능력을 겸비한 까닭에 기술관료주의에 탐닉하는 기능적 테크노크라트보다 오히려 낫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실제로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인재 풀의 업그레이드화 모색해야

    최근 노무현 정부는 장관의 정책수립 기능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장관정책보좌관’제를 도입했다. 실제로 장관에 임용되면 누구나 혈혈단신으로 해당부처에 진입하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장관이 정책전문가 한두 사람의 보좌를 받을 수 있다면 큰 힘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좋은 제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 장관정책보좌관 자리에 정책전문성과는 거리가 있는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나 정당 인사들이 대거 기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당초 취지와는 달리 ‘위인설관(爲人設官)’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노무현 정부는 용인(用人)에 실패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마디로 인재 풀의 외연 확대와 다양화, 그리고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우수한 인재를 만천하에서 널리 물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정권창출시기에 요구되는 인재와 국정운영시기에 필요한 인재는 질적으로 현저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의 인재등용과정을 보면, 이른바 국민추천제, 다단계 평가 등을 거쳤다고 하나 실제로 최종결정과정에서 가장 중시해온 잣대는 이른바 ‘코드’ 검증이었다. 거기에는 은연중 온건개혁을 넘어서는 급진적 사회변혁의지가 담겨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편향적, 급진적 안목에서 보면 인재 풀은 협애화, 동질화, 이념화되고 무엇보다 그 질적 저하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당연한 결과는 국가경쟁력 하락과 민생 혼란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하루 빨리 코드에 의한 인재 등용을 탈피하여 드넓은 인재의 바다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통합적 리더십과 實事求是]

    위에서 노무현 정부의 국정개혁비전, 국정운영 시스템과 정치적 리더십, 그리고 인재등용 등 국정개혁 성공과 연관되는 세 가지 조건을 점검해보았다. 국정개혁을 위한 노무현 정부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는 앞서 언급한 제반 조건을 관통하는 두 가지 제언을 노대통령에게 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통합적 리더십을 세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적 개혁과 실사구시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앞의 것은 사회통합 내지 국민통합을 위한 처방이고, 뒤의 것은 국정개혁을 위한 처방이다. 그러나 실제로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으로 내용상 동의반복이나 다름없다.

    인사탕평책·정책탕평책 펴야

    노무현 정부가 출범 이후 내세우고 있는 것이 국민통합과 국정개혁이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국민통합은 국정개혁의 전제다. 사회통합 내지 국민통합 없이 국정개혁이 제대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현 시점에서 가장 힘겨워하고, 또 가장 실패하고 있는 것이 국민통합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국민통합을 위해서는 통합적 리더십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 사회에는 현재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기보다는 ‘내 편’, ‘네 편’을 가르며 힘겨루기와 맞대결을 통해 ‘완승(完勝)’을 겨냥하는 추세가 풍미하고 있다. 그런 판국에 대통령이 국정운영에서 편향적인 자세를 보이면 국정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화물연대 파업이나 NEIS 시행을 둘러싸고, 무원칙하고 한쪽 편들기 식의 국정운영을 선보여 사회적 신뢰를 크게 잃었다. 아무리 법을 어겨도 사회적 약자이니 그 편에 서야 된다는 편향적 인식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보편적 준칙을 적용해야 할 대통령으로 할 일이 못 된다. 다행히 철도노조 파업 때는 대통령이 법과 원칙의 편에 서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했다. 분열적 리더십에서 통합적 리더십으로 옮겨가는 모습이었다.

    통합적 리더십은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슬기롭게 조정, 관리하고 사회적 합의와 국민통합을 일궈내는 창조적 리더십이다. 이를 위해서 대통령은 이념적으로 지나치게 편향되거나 어느 한 쪽에 있어서는 안 되며, 국정의 중심에 서서 국민 전체를 품안에 아우르는 대국(大局) 지향의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세일 교수가 주창하는 ‘인사탕평책’과 ‘정책탕평책’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는 대통령이 중심을 잡고 좌우 어느 쪽으로도 편향되지 않는 균형된 마음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자신의 이념적 경향을 넘어 공의(公義)의 차원에서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를 함께 포용해야 한다. 만약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지지세력의 향배에 민감하여 그들의 구미에 맞는 편향적, 분열적 리더십을 구사한다면 국민 대다수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이 명운을 걸고 추구하는 모든 개혁 프로그램도 물 건너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은 국민 대다수가 자신의 잠재적 지지세력이고, 바로 그들이 개혁세력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대통령이 균형과 중심, 원칙과 정도를 지킬 때 대다수 국민들은 그의 우군(友軍)이 되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밝혔듯이 노무현 대통령 고유의 정치적 지지기반은 그리 강한 편이 못 된다. 그러나 그가 통합적 리더십을 통해 도덕적, 명분적 리더십을 구축한다면, 그의 정치적 기반은 크게 강화될 것이다. 그의 정치적 리더십 아래 ‘노사대타협’과 같은 역사적 화해를 일궈낼 수 있다면, 우리가 ‘1만달러의 덫’을 탈출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개혁은 사회적 연대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과정을 무시한 급진적, 교조적 개혁은 이념적 헤게모니와 권력적 이해관계를 투영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개혁은 마땅히 폭넓은 참여와 사회적 연대를 바탕으로 합리적,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고 건강한 개혁은 국민의 구체적 삶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하는 실용주의적 개혁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유럽과 남미 좌파의 움직임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유럽 좌파들은 요즈음 영국, 프랑스에 이어 독일에서까지도 신자유주의와의 타협을 통하여 사회주의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그들은 이념적 편향에서 벗어나 ‘자유 경쟁’과 ‘정의와 형평’의 변증법적인 지양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중남미의 좌파정권들, 브라질의 룰라, 에콰도르의 구티에레즈, 아르헨티나의 키르티네르 등도 국민들의 우려와는 달리 중도지향의 실용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국민통합과 경제회복에 나서고 있다. 특히 강성 노조 위원장 출신인 브라질의 롤라가 재계지도자, 야당의원 및 주지사 등과 머리를 맞대고 경제 살리기에 앞장서서, 국민의 지지도를 80%까지 끌어올리고 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룰라는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으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친노(親勞)’ 정책이라고 설파하고, ‘노조도, 기업도, 시민도 브라질 국민’이라며 ‘나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라고 선언했다.

    이와 연관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국익차원에서 이라크 참전을 결정하고, 북핵문제에 실용주의적 노선을 따르면서 대다수 국민이 그에 대해 당초에 가졌던 우려를 크게 불식하고 지지를 보낸 것을 의미 있게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참여민주주의 지향하라]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선거가 가까우면, 여야를 막론하고 개혁논리나 경제논리보다 정치논리에 집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필요에 따라 개혁도 뒷전으로 밀리고, 경제마저도 정치논리의 영향을 크게 받아 제 구실을 못하게 된다. 노무현 정부가 아직 ‘과도기적 혼란’을 벗어나지 못한 형편에서, 현재의 정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지나치게 정치논리에 집착할까 걱정이 된다. 총선이 다가와도 정부가 경제는 경제논리에 따라, 개혁은 당초의 페이스대로 당당하게 나갔으면 좋겠다.



    노파심에서 한 마디 더 하자면, 필자는 노무현 정부가 진정한 의미의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하기 바란다. 정치참여와 정치적 동원은 겉으로는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다. 학자들은 흔히 후자를 ‘사이비 정치참여’라고 말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그 주변 실세들이 언필칭 참여민주주의를 주창하며, 국민과의 직거래 형식의 국민투표형 민주주의를 선호하고 있는 데 대해 많은 이들이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대통령의 대(對) 국민설득도 중요하다. 그러나 여론은 바른 공론의 마당에서 자연스레 형성되고 숙고와 토론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적 합의로 승화될 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지루하고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대의민주주의에 아직도 집착하고 있는 것은 그 안에 민주주의의 큰 빛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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