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비화

박지원, 노무현만은 ‘배신’않을 것으로 믿었다

  • 글: 송국건 영남일보 정치부 기자 song@yeongnam.com

    입력2003-07-28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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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다만 한잎 차에 띄워 마시며 살겠다.”
    •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현대로부터 150억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 6월18일 밤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되면서 조지훈의 시 ‘낙화’를 인용해 밝힌 소회다.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소(小)통령’ 또한 ‘대(代)통령’으로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그가 청와대에서 나온 지 4개월 만에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순간 남긴 이 말에는 어떤 생각이 녹아 있을까.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비화

    2002년 12월 박지원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에게 당선축하난을 전하고 있다.

    ‘낙화론’은 박지원 전 실장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아니다. 박 전 실장은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의 심경이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려 했던 것 같다. 그는 평소 매우 신중히 생각한 뒤에야 말을 꺼내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화제를 모은 이 시구 또한 즉흥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며칠 동안 준비한 끝에 ‘채택’됐다는 후일담도 있다.

    박 전 실장은 구속을 예감하면서 뭔가 언론에 남길 적절한 은유적 표현을 별도로 준비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박 전 실장의 한 측근은 여러 시집을 뒤졌는데 그 가운데 조지훈의 시 ‘낙화’를 찾아내 박 전 실장에게 보고했다는 것. 박 전 실장은 시 문구를 면밀히 검토한 뒤 인용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먼저 ‘꽃’은 박 전 실장 본인이거나 좌초위기에 처한 햇볕정책, 또는 위기에 몰린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한 국민의 정부 사람들을 비유한 게 아니냐는 풀이가 가능하다. 아울러 무상한 권력 자체를 ‘만개했다 지는 꽃’으로 묘사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바람’은 무엇일까. 일단 햇볕정책에 관여했던 국민의 정부 사람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되는 현재의 정치상황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보다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측에서는 ‘바람’이 현 정권을 의미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는다.

    즉 참여정부 탄생에 국민의 정부 청와대가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줬는데도 결국은 바람이 돼 꽃을 지게 하는 데 대한 비정함을 탄식하고, 그렇지만 이를 탓하지는 않겠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해석이다.



    현대측이 대북송금 과정에서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줬다는 150억원의 용처 문제, 여권 유입설 등은 특검이나 검찰의 수사를 앞두고 있다. 민주당측은 150억원에 대해선 떳떳하다는 입장이다.

    2002년 3~4월 민주당 대선후보 국민경선 과정에서 제기됐던 ‘보이지 않는 손’이나 ‘음모론’도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노무현 후보가 예상을 완전히 깨고 경선을 통해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는 데는 청와대의 막후 지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그때의 관측과 지금의 상황을 연결시켜 ‘낙화론’을 해석할 수 있는 까닭이다.

    “‘金心’ 읽은 박실장이 盧 밀었다”

    참여정부 탄생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민주당 관계자는 “민주당 대선후보 국민경선 과정에서 ‘김심(金心· 김대중 대통령의 의중)’을 읽은 박지원씨가 노무현 후보를 막후 지원한 것은 정황상 분명한 사실”이라고 단언했다. 다만 그는 “경선 이후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가 급격히 떨어지자 청와대가 나서서 후보 교체를 시도한 흔적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꽃’이 져도 ‘바람’을 탓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당시 한나라당과 이인제 후보측 등이 제기한 것처럼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청와대의 ‘작업’이 있었을까. 또 이후 지지도가 떨어진 노무현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청와대가 개입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선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지금까지 분명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먼저 당시 청와대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개입 여부를 규명해보기 위해 민주당 경선이 막 끝났을 때인 2002년 5월 박지원 실장과 일부 기자들이 북한산 자락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함께하며 나눈 대화를 들어보자. 박실장은 민주당 경선 막바지인 4월15일 청와대 정책특보에서 비서실장으로 승진한 상태였다.

    “청와대가 노무현 후보를 지원했다는 소문이 정치권에 파다한데요.”

    “대통령께서 전혀 정치에 간여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는데 무슨….”

    “대통령이 직접 하는 게 아니라 박 실장과 동교동이 막후 지원에 나섰다고….”

    “ ‘정치 뚝, 경제 GO’ , 정치 얘기는 하지 맙시다.”

    “청와대의 지원 없이 특히 광주에서 갑자기 그런 바람이 불 수 있었겠습니까.”

    “…”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가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한 데 대한 원인 분석은 했을 것 아닙니까. 정무수석실도 여전히 있고….”

    “정치 얘기는 안 합니다.”

    “개인적으로 노무현 후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있을 텐데요.”

    “(몇 번 망설이다가) 그는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배신 같은 것은 할 사람도 아니고….”

    당시 기자들은 박실장을 상대로 청와대가 노무현 후보를 지원했다는 간접적인 암시라도 듣기 위해 이리저리 돌려가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박실장은 “대통령께서 정치와 절연했기 때문에 청와대의 관심은 오로지 경제 살리기 밖에 없다”는 말로 기자들의 예봉을 피해나갔다.

    사실 박실장이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은 그 자리에서뿐만은 아니었다. 야당 대변인을 오래 한 까닭인지 기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그런 민감한 질문이 나올 줄 알면서도 기자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했다. 그때마다 박실장이 설파한 것은 ‘후계자 불요론(不要論)’ 더 정확히 말하면 불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후계자를 정하면 오히려 그로부터 화(禍)를 당한다는 논리였다.

    당시 박실장의 말은 이랬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후계자를 정해 정권을 물려준 사람들의 말로를 보라. 잘된 사람이 누가 있느냐. 전두환은 천신만고 끝에 노태우에게 권좌를 넘겼지만 노태우에 의해 백담사로 쫓겨갔다. 노태우는 민정계의 거센 반대를 뿌리치고 YS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면서도 YS 집권 때 감옥에 가지 않았느냐. YS도 사실상 이회창을 지지했는데, 만일 이회창이 됐으면 그도 화를 당했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님이 됐기 때문에 오히려 큰소리 치고 살지 않느냐.”

    북한산 모임에서도 박실장은 이런 기조를 유지했다. 다만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의미심장했다. ‘그(노무현)는 믿을 만한 사람’이란 표현이다.

    여기서 박실장이 ‘후계자 불요론’을 주창하면서 역대 대통령이 후계자로 점지해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당선시켜줬지만 결국 그 후계자에게 배신당했음을 강조한 부분이 주목대상이다. 역으로 해석하면 ‘배신하지 않을, 믿을 만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아야 퇴임 후가 편안하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DJ의 복심에 따라 박실장이 ‘믿을 만한 사람’ 노무현을 민주당 대선후보로 밀지 않았겠느냐는 해석이 가능한 셈이다.

    “박실장과 盧캠프 사이에 핫라인”

    이런 해석에 박실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A씨의 증언이 무게를 더 해준다. 다음은 A씨의 최근 증언이다.

    “민주당 대선후보 국민경선을 앞두고 ‘이인제 대세론’이 우세했을 때 박실장은 이를 탐탁해하지 않았다. 이인제는 기본적으로 (선거과정이나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DJ를 밟고 넘어갈 것이란 게 박실장의 판단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이인제는 (여권의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박실장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당시 박실장의 최대 관심은 ‘DJ를 밟지 않을 후보’를 찾는 일이었다. 그 메신저 역을 내가 했다. 노무현 캠프에서는 그것을 인정해줬다.”

    그렇다면 박실장은 왜 노무현 후보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간주하게 됐을까. 당시 여권에 몸담았던 핵심 관계자들에 따르면 여기에는 중요한 계기가 있다. 바로 2001년 국민의 정부와 언론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해 1월11일 연두기자회견에서 강한 톤으로 ‘언론개혁’을 언급했다. 이어 국세청이 중앙 언론사 모두를 대상으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시작했다. 특히 주요 타깃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였다. 그러자 이 세 언론과 한나라당은 언론사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역공에 나섰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정면대결이었다.

    ‘전쟁’ 초반에 서슬이 퍼렇던 청와대는 한나라당과 주요 언론사 연합군의 거센 반격이 시작되자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일부 언론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여론이 ‘원군(援軍)’이 못된 것이다.

    당시 청와대 고위인사 B씨에 따르면 청와대는 주목할 만한 상황 판단을 내렸다. 즉, 전세가 역전된 데는 ‘여당 정치인들의 전선 이탈’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본 것이다. 대선 출마를 준비중이던 민주당 중진 대다수가 침묵을 지키거나 원론적 입장만을 표명했다. 특히 그때까지 동교동계에서 민주당 대선후보로 가장 유력하게 생각하고 알게 모르게 힘을 몰아줬던 이인제 최고위원에 대한 청와대의 실망은 컸다. 당시 이인제 최고위원은 청와대가 언론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음에도 이 문제에 대해 “조세당국과 공정거래위원회의 법 집행은 정치쟁점이 될 사안이 아니다”고 말하면서 뒤로 비켜섰다.

    IJ, ‘언론세무조사’ 연설로 DJ 눈 밖에 나

    이때 이인제 최고위원이 결정적으로 DJ의 눈 밖에 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1년 5월4일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인제 최고위원은 “최근 언론사 세무조사는 언론탄압이 아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다음날 “그동안의 원론적인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나오자 이인제 최고위원은 측근을 내세워 “연설내용 중 정보기술(IT)과 통일 문제에만 이최고위원의 개인 생각이 들어갔을 뿐 나머지는 당 정책위가 만들어준 연설문을 그대로 읽었다”고 말했다.

    언론사 세무조사 부분은 개인의 소신과 상관없이 당론을 따랐을 뿐이란 설명이다. B씨에 따르면 이 보고를 받고 DJ는 이최고위원에 대해 크게 화를 냈다 한다.

    반면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은 특히 조선일보를 겨냥해 총대를 메고 나섰다. DJ의 언론개혁 발언이 나온 직후인 2001년 2월6일 노무현 장관은 해양수산부 출입기자들과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언론과의 전쟁 선포를 불사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같은 해 3월 개각으로 해양수산부 장관을 그만두고 민주당 고문에 취임한 이후에도 그의 ‘조선일보 때리기’는 계속됐다.

    그 중에서도 8월1일 민주당 수원 국정홍보대회에서의 조선일보 비판은 공개적인 선전포고였다. 노무현 고문은 이 자리에서 조선일보를 가리켜 ‘친일 반민족 신문’ ‘민주세력을 탄압한 반민주적 신문’ ‘세무조사도 받지 않겠다고 버티는 비리특권 신문’이라고 강도 높게 공격했다.

    노무현 고문의 이런 몸을 사리지 않는 지원사격에 DJ는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언론과 ‘나홀로 전쟁’을 벌이던 DJ 입장에선 노무현 고문의 적극적인 가세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던 것이다. 오죽하면 이때의 노무현 고문 연설 내용을 녹음 테이프로 들은 뒤 전국 각 지구당에 돌려 홍보자료로 이용하게 했을까.

    이런 일을 겪으면서 민주당 대선후보와 관련한 DJ의 의중이 ‘믿을 수 있는’ 노무현 고문에게로 기울었다는 게 대선과정을 지켜본 정치권 인사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당시 권노갑 고문을 중심으로 한 동교동계 구파는 이인제 최고위원을 적극 밀었다. 권노갑 고문 계열의 현역의원들과 젊은 당료들이 이인제 캠프에 속속 합류했다. 이에 신파 쪽에서 적극적인 견제 필요성을 느끼던 시점이기도 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물증은 아직 없다. 다만 몇 가지 정황은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2002년 3월부터 시작된 후보경선을 앞두고 당내의 DJ 측근들에 의해 ‘게임의 룰’이 노무현 후보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고쳐졌다. 당내 기반이 없던 노무현 후보로선 국민경선제 도입이 승리의 발판이었다. 16개 지역별로 실시된 경선 순서도 ‘노풍’을 일으키기에 안성맞춤으로 짜여졌다는 분석도 있다.

    둘째, 광주경선에서 ‘노무현 돌풍’을 일으키는 데 DJ의 청년조직이었던 ‘연청’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갖가지 후문이 있다. 광주에서 1위를 장담했던 한화갑 후보는 당시 경선 결과가 나오자 “어젯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며 의혹을 표시했다.

    셋째, ‘박지원 사람’들의 노무현 캠프 합류다. 언론과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고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점인 2001년 말에 박지원씨는 10·25 재보선 참패 후 제기된 당 쇄신 요구에 의해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직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었다. 이때 박지원씨의 핵심 측근이던 유모씨와 윤모씨가 노무현 캠프에 합류했다. 그러자 정치권에서는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를 밀기로 한 DJ의 뜻에 따라 박지원씨가 이 두 사람을 노무현 캠프에 ‘파견’한 것 아니냐는 말이 파다했다. 유씨는 이후 후보교체론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사실상 노무현 캠프 중심부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밖에도 경선 직전 일부 방송사들이 ‘노풍’을 연일 보도하는 과정에 청와대 정무수석실의 입김이 작용했다든지, 유종근 후보가 박지원 특보를 만난 직후 구속됐다든지 하는 등의 정황을 내세우는 관계자들도 많지만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DJ측이 먼저 배신했다”

    경선에서 일어났던 ‘1차 노풍’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YS시계’를 보여주며 절한 일, DJ와의 차별화 실패, 김대중 대통령 세 아들의 비리 의혹, 민주당 장악 실패, 정책 비전 결여, 경솔한 언행, 일부 언론의 견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노무현 후보의 인기는 시들어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2002년 6월 월드컵 4강 진출의 효과로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인기가 치솟았다. 결국 10월 중순에 이르러선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정몽준 대표와의 3자 대결에서 15% 안팎까지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 진영은 ‘청와대 음모론’을 제기한다. 단순히 지지율이 떨어져 후보교체를 검토하는 게 아니라 국민경선 이전에 짜여진 각본에 따라 노무현 후보 낙마를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참여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한 386세대 측근은 최근 “DJ를 등에 업은 박지원씨는 물론 한화갑씨를 비롯한 동교동측이 국민경선 이전부터 정몽준씨를 여당의 대선후보로 내세우기 위한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주장한 시나리오는 이렇다.

    ‘먼저 대세를 타고 있던 이인제를 가라앉히기 위해 경선에서 노무현을 띄운다. 이후 월드컵을 통해 정몽준이 뜨면 당내 동교동계를 동원, 노무현을 아웃시킨다. 그렇게 되면 대선은 이회창 외에 이인제, 노무현이 독자 출마해 정몽준과 대결하는 4자구도로 치러진다. 이 경우 이인제가 수도권에서, 노무현이 영남권에서 이회창의 표를 잠식하는 반면, 민주당 후보로 나설 정몽준은 호남과 수도권에서 고정표가 있는 만큼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

    이 시나리오는 가변적인 정치상황을 감안하면 일단 일방적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참여정부 실세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우리는 DJ 정부에 부채가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 후보경선과 대선을 치렀던 참여정부의 한 인사는 “DJ 사람들은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했다. 그들은 이회창을 이기고, 자신들의 기득권만 보장해준다면 누가 대통령이 돼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비난했다.

    꽃잎은 바람을 먼저 배신했기에 바람을 탓할 수 없었고, 바람도 꽃잎을 보호해줄 채무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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