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무기중개상 김영완 미스터리 총력 추적

비자금 150억원, “국제 자금세탁 조직 거쳤다”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3-07-28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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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년 5월15일자로 김씨 직계가족 주민등록 일제히 말소
    • 권노갑, 김영완 배후인물로 지목한 인물은 C 전 장군
    • 1993년 이상철 전 정통부장관과 군 통신장비 도입 놓고 알력
    • 율곡비리 사건수사 촉발시킨 익명의 무기중개상이 바로 김영완
    • 국제 자금세탁 브로커 “검찰 자금추적은 불가능할 것”
    • 정부 고위인사, 청와대 관계자도 자금세탁 요청한 적 있다
    무기중개상 김영완  미스터리 총력 추적
    무기중개상 김영완(金榮浣·미국 이름 영 킴(Young Kim)). 남북정상회담관련 대북비밀송금 특검의 수사과정에서 불쑥 튀어나온 의문의 인물이다. 김씨는 현대가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남북정상회담 추진비’ 명목으로 건넸다는 150억원어치의 양도성 예금증서(CD) 돈 세탁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지면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특히 2002년 3월 김씨의 평창동 집에 강도가 들어 수백억원대를 도난당한 사건에 대해 청와대와 경찰 고위간부들이 개입해 철통 같은 보안수사를 지시한 것으로 드러나 그를 둘러싼 의문은 더하고 있다. 거의 모든 언론은 김씨의 행적과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캐고 들어갈수록 의문이 사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될 뿐이다.

    150억원에서 시작한 비자금 추정 액수는 200억, 250억, 300억원 등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김씨는 강도사건을 당한 직후 강남의 빌딩을 사들이는 등 서울에만 무려 700억원대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관련 계좌 추적과정에서 S건설, D건설 등 새로운 기업들이 드러나는가 하면, 한때 김씨의 소유였던 빌라에 김대중 정권의 실세였던 권노갑(權魯甲) 전 고문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는 등 ‘우연’치고는 지나치다 싶은 내용들도 속속 확인되고 있다.

    특히 기자의 확인 결과 김씨를 제외한 부모와 자녀 형제 등 그의 직계가족들은 1991년 5월15일자로 모두 서울 서초구 서초4동 S아파트 X동 OOO호를 마지막 주소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다. 서류상으로 보면 가족 전원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다.

    김영완. 과연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김씨가 세탁한 비자금의 최종 종착지는 어디일까. “DJ정부에서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도입하기 위해 로비를 시도했다”는 등 그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각종 소문들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숱한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기자는 과거 김씨의 행적부터 쫓았다.



    율곡비리 터뜨린 익명의 제보자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1990년 12월3일 국방부회의실에 마련된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장. 당시 평민당 국방위 권노갑 의원이 질의를 시작했다.

    “본 위원은 국방부가 전력증강사업의 일환으로 1987년 이후 미 보잉사로부터 도입한 CH-47D(시누크)헬기 24대의 매매와 관련한 숱한 의혹을 이 자리에서 명확히 밝히고자 합니다.(중략) 당 위원회에서 본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파헤치기 위해 관련된 인사들, 즉 도입당시의 국방부장관 정호용 이상훈, 국방부차관 황인수… 삼진통상 대표 김영완, 삼진통상의 배후인물로 추정되는 전 유개공 사장 C씨 등을 증인 및 참고인으로 채택, 청문회 개최를 포함하는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를 벌일 것을 요청합니다.”

    권의원의 이날 폭로성 발언은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1993년 율곡비리사건에 대한 감사원 감사와 국회 국정조사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됐다. 이전까지 베일에 싸여 있던 무기중개상 김영완씨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파문에 비해 김씨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갓 지난 1993년 1월, 율곡비리사건에 대한 감사원과 검찰의 조사를 촉발시키는 한 건의 기사가 모 월간지에 보도된다. 그 기사는 익명의 무기중개상을 통해 군 무기도입체계에 작용하는 로비실태와 무기중개업체들의 비리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사에 등장한 무기중개업체 코바시스와 학산 등의 대표는 그 해 감사원 감사를 받은 데 이어 검찰의 수사대상에 올라 일부는 해외로 도피하고, 일부는 구속되는 운명을 맞는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익명의 무기중개상의 신원은 비밀로 부쳐졌다. 무기중개상 당사자는 물론 기사를 작성했던 기자와 데스크 등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취재원 보호차원에서 밝히길 거부해왔다.

    그런데 그 익명의 무기중개상이 바로 김영완씨였다. 이같은 사실은 기자가 최근 우연한 기회에 당시 기사내용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사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문제의 기사는 권의원으로부터 문제제기 당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또다시 군납 로비의혹을 받은 김씨가 자신의 복잡한 심경과 국방과학연구소 한 관계자와의 알력설 등에 대해 해명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기사에 등장하는 국방과학연구소 본부장 출신의 한 관계자가 DJ 정부시절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이상철(李相哲) 전 장관이라는 사실이 새삼 흥미를 더한다. 또 이 전 장관의 친형이 율곡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속 수감된 이상훈(李相薰) 전 국방부 장관이라는 관계선상에서 여러 가지 곱씹어볼 대목이 많은 기사다. 다음은 기사 내용 중 일부.

    지난(1992년) 12월10일 만난 한 무기상은 날이 갈수록 무기오퍼상 노릇이 힘들어진다며 말문을 열었다. 온갖 투서와 인신모략이 횡행하고 걸핏하면 국회나 언론에서 흠집을 내기 일쑤여서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는 이 오퍼상은 1985년부터 무기무역에 뛰어들어 8년째 활약하고 있었다.

    2∼3년 전에는 오퍼실적 상위를 랭크할 만큼 무기무역으로 재미를 보기도 했던 이 오퍼상은 국회와 언론에 로비업체로 낙인이 찍히면서 탄탄대로에 제동이 걸렸다.

    (중략) 이 무기상은 다시 심기일전, 최근 다른 무기를 군에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추가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터에 그 무기를 두고 또다시 말썽이 일기 시작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무기를 국방비를 축내가면서 도입한 것은 틀림없이 오퍼상의 로비 때문일 것’이라는 일부 군 주변관계자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특히 국방과학연구소 본부장 출신의 한 관계자가 그를 성토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본부장으로 있을 때 수뢰 루머를 퍼뜨려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사람으로 이 오퍼상을 지목한 그는 ‘결코 그 오퍼상에게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히면서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그 오퍼상이 군관계자에게 접근, 일을 성사시켜주면 돈을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가 막상 일이 성사되면 ‘나 몰라라’ 한 적도 있었다며 비난했다.

    오퍼상에 대한 비난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 오퍼상은 무기도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군요직에 있는 사람들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만들어놓고 정기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전작업을 마친 다음 군 요직과의 친분관계를 이용, 필요하지도 않은 무기를 도입해 사복을 채웠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오퍼상과 친분이 두터운 군인사로 최모 육본간부를 거명하기도 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확인을 요구하자 오퍼상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인 후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대단히 악의적’이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 사람은 아마 나와 경쟁관계에 있는 오퍼상이거나 그 주변인물일 것입니다. 내 회사를 없애면 자신들의 몫이 커지게 되니까 질투·시기하다 못해 음해하는 것이겠지요. 뇌물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모략입니다.”

    그는 이어 군 요직과의 친분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나는 원래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서 이 분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고 사실 군 요직에 친한 분들이 많습니다. 무기중개 사업을 하려면 군 요직과의 친분관계는 필수요건 아니겠습니까.”

    통신장비 수입하려 국산화 방해공작

    기사에 나타나다시피 당시 김영완씨와 이상철 전 장관의 관계는 극히 적대적이었다. 그 이유는 군 무선통신장비를 둘러싸고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국방과학연구소 본부장이자 책임연구원이었던 이 전 장관은 군장비 국산화전략의 일환으로 국방부 차세대 FM무전기, 차세대 이동전술통신망 등을 개발중이었는 데 반해, 김씨는 이를 미국에서 수입하려고 시도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과거의 악연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일까. 이 전 장관은 김씨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김영완씨는 1980년대 후반에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소개시켜준 사람이 누군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내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개발중이던 군 통신장비를 수입하려고 갖가지 방해공작을 폈다. 하지만 내 개발은 성공했고, 그의 수입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뿐이다. 김씨 때문에 내가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전 장관은 앞서 인용한 한 월가지에서 본부장으로 있을 때 수뢰 루머를 퍼뜨려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사람으로 김씨를 지목했었다.

    이 전 장관은 결국 완제품 개발에 성공해 김씨의 시도를 무산시켰지만 금품수뢰 등 군내 갖가지 소문과 잡음에 휘말려 1991년 5월 연구소를 그만두고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통신망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 과정에 군부내 핵심실세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던 김씨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서 권 전 고문이 1990년 국정감사에서 김씨의 군내 배후인물로 지목한 C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C씨는 육사 11기로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복동(金復東), 백운택(白雲澤) 등과 함께 하나회의 뿌리인 오성회를 결성했던 멤버 중 한 명이다. 그는 동기생들 중 가장 먼저 별을 단 군내 선두그룹에 속했던 인물이다.

    C씨는 12·12 쿠데타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친분 때문에 전두환 집권 이후 핵심 실세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하나회 출신을 중심으로 한 C씨의 인맥은 노태우 정권 때까지 여전했다.

    무기중개상 김영완  미스터리 총력 추적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김영완씨 소유의 건물 5층 사무실.

    그러던 1990년 7월20일, C씨는 임기를 1년6개월이나 남겨놓고 유개공 사장직에서 돌연 사임했다. 당시 C씨는 목디스크가 악화돼 더 이상 집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사임이유로 내세웠지만 일각에서는 청와대 특명사정반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특명사정반의 내사 대상은 김씨와의 관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졌다.

    이에 대해 C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내 동기다. 그런데 특명사정반을 통해 나에 대해 내사를 한다니 기분 좋을 리 있었겠는가. 건강도 안 좋았지만 기분 나빠서 그만뒀다”며 사임배경을 밝히고 “그때 내사결과 아무런 문제점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C씨는 그러나 “김영완은 10년 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을 뿐, 그 다음부터는 모른다. 개인적으로 아는 것도 전혀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와 친하다면서 내 이름을 팔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며 김씨와의 관계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C씨는 또 “당시 특명사정반의 내사도 김씨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봐라. 내가 언제 그의 비즈니스에 관여하거나 도와준 적이 있는지. 결코 그런 적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C씨는 “김씨가 경영하고 있는 회사에 육사 후배들이 다녔다”거나 “후배들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무기거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김씨와 직접적인 친분 관계는 없었다 하더라도 육사 후배들을 통한 간접적인 관계는 성립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셈이다.

    김영완씨의 장인인 장모씨도 김씨의 군내 인맥쌓기의 배후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다. 장씨는 1980년대까지 최고의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국장과 주요 해외공관 공사를 역임했던 해군사관학교 출신 군 인사다.

    김씨가 증인명단에서 사라진 까닭

    한편 국회 국방위원회는 1993년 8월27일 ‘12·12 군사쿠데타적 사건 및 율곡사업국정조사계획서’를 통해 김씨를 주요증인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김씨에 대한 증인 심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해 9월6일 서울구치소 회의실에서 진행된 국방위원회 율곡사업 국정조사장에 불려온 증인의 명단에 김씨의 이름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권 전 고문의 보좌진으로 일했던 양기문씨가 지난 6월29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국정감사에서 관련 질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씨가 국방부 관계자를 앞세워 몇 차례 만나자고 했으나 (권 전 의원은) 거부했다. 그런데 국감이 끝난 뒤 김씨가 재차 ‘이미 폭로했으니 못 만날 이유가 없는 것 아니냐’고 해 몇 차례 만났고, 권 전 고문의 집에도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때 김씨는 권 전 고문의 폭로로 국방부의 배척을 받아 무기거래를 못하게 되는 등 사실 억울한 점도 없지 않았다. 과거 문제 됐던 헬기사업 건으로 또다시 증인으로 채택되자 김씨는 ‘1990년 권 전 고문의 폭로 때문에 내가 또 당하게 됐다’며 구명을 호소했다. 그래서 권 전 고문이 민주당 소속 국방위원에게 ‘들어보니까 김씨도 억울한 점이 있더라. 질의를 하더라도 인격적인 부분은 자제해달라’고 전화를 건 것은 사실이다. 김씨는 이후 어쩌다 한번씩 권 전 고문을 찾아왔으며, DJ정부 들어서도 한두 번 정도 왔었다.”

    양씨의 주장대로라면 김씨가 1993년 9월 율곡사업 국정조사 증인에서 빠진 것은 권 전 고문의 배려 차원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악연’으로 시작된 김씨와 권 전 고문, 두 사람의 관계는 그 후 10년 넘게 지속돼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현대 150억원 비자금 세탁 혐의에 대한 특검 수사발표를 계기로 박지원, 권노갑 등 그동안 김씨의 전방위 인맥구축 작업의 흔적이 속속 드러나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김씨는 5·6공, YS, DJ정권에 이르기까지 군 및 정치권 실세들과 광범위하면서도 깊은 관계를 이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피아도 구분하지 않았다.

    김씨는 또 한때 적대적 관계였던 이상철 전 장관의 형 이상훈 전 장관과도 최근까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훈 전 장관은 최성택씨와 육사 11기 동기생이기도 하다. 이 전 장관의 한 측근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김씨와 이 전 장관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김영완씨가 둘이다. 김회장을 이야기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가 실언했다고 판단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며 황급히 말문을 닫았다.

    기자는 이 전 장관의 사무실과 자택으로 직접 통화를 시도했으나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이 전 장관의 부인으로부터 “남편에게 직접 물어봤는데 ‘김영완이라는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는 말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김씨는 또 J, C의원, K 전 장관, YS 정부 때 군 및 정보기관 실세였던 K씨, 정보기관 핵심간부 O씨 등과의 친분도 지속적으로 관리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김씨가 졸업한 중앙고 또는 고려대 출신의 동문이며, 또 다른 일부는 군 관련 인사들이다.

    여기에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등 경제계 인사들과도 상당히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김씨와의 관계를 전면 부인하면서 언급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모습이다.

    김씨가 이처럼 매 정권마다 군과 재계, 정치권 핵심실세들과 깊은 관계를 이어온 데는 막대한 자금력이 가장 큰 밑거름이었다고 한다. 박지원 전 장관과 1997년 15대 대선을 전후한 시점부터 급격히 가까워진 것도 그의 자금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김씨와 박 전 장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특검팀 한 관계자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사업을 같이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박 전 장관이 김씨에게 비자금 150억원을 이익치 전 회장에게 요청하도록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박 전 장관은 이에 대해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지난 6월18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박 전 장관은 “국민의 정부 공보수석비서관 당시인 1998년 김씨를 처음 만났다”면서 “이익치의 친구인 김씨에게 어떻게 150억원이라는 거액의 돈세탁을 맡겼겠는가”라고 항변했다. 김씨와 가깝지도 않으며, 자금을 받지도 돈 세탁을 맡기지도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법원은 박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특검으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은 검찰은 현재 김씨가 박 전 장관에게 CD를 현금으로 맞교환해준 뒤 나중에 돈세탁을 했거나, 아니면 김씨가 박 전 장관에게 미리 돈을 지불하고 나중에 현대로부터 CD로 지급받았을 가능성 등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해놓고 자금을 추적중이다. 그러나 김씨와 자금 세탁과정에서 핵심역할을 한 명동 사채업자 등이 외국으로 도피한 상태에서 검찰의 자금추적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기자는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 자금세탁 브로커를 통해 김씨의 비자금 행방과 관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정보를 전해들었다. 이 브로커는 “지금은 손을 씻었다. 땀흘린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시작한 마당에 무슨 말을 하라는 것이냐. 이야기를 잘못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라며 말문을 쉽게 열지 않았다. 수 차례 거듭된 요청에 브로커가 마지못해 털어놓은 내용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수준의 이야기였다.

    “일반인들이 들으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고, 지금도 어디선가 진행되고 있다. 한 2년 전쯤 금융권내 사고가 빈발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자주 문제가 됐던 곳이 정부의 관리대상자금을 취급하는 금융권이었다. 그런데 대부분 국제적인 자금세탁조직의 도움을 받아 돈을 해외로 빼돌려 도주한 케이스였다. 이들 조직이 가장 흔히 사용하는 세탁수법은 ‘선(先)수표’를 발행해 해외로 빼돌려 환치기하는 것이었다. 고객이 원하면 위조여권뿐만 아니라 은신처까지 마련해주기도 한다. 우리 같은 경우 미국 내에는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도피할 경우는 수수료가 조금 쌌던 반면, 유럽이나 제3국에 은신처를 마련해줄 경우에는 수수료를 비싸게 받았었다.”

    이 브로커의 설명에 따르면 IMF사태 직후인 1998년 초부터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블랙머니 클리닝(음성자금 세탁)’ 조직들이 국내 사채시장에 대거 유입됐다. 일부는 국내 사채시장에 형성돼 있는 자금세탁조직들과 연계하거나 일부는 국내 거물급 전주들과 접촉해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 이들 국제 자금세탁조직이 다루는 자금규모는 보통 한번에 수백억, 수천억원대 이상이라고 한다. 이들은 2000년도까지 왕성히 활동하다 2001년부터 자금시장에 대한 정부차원의 보안감시가 강화되면서 급속히 위축됐다.

    그런데 김영완씨가 관리했던 비자금 일부를 바로 이 브로커가 한때 관여했던 조직에서 세탁해준 적이 있다는 것.

    “자금세탁 조직들은 돈의 성격이나 소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부탁 받으면 세탁해주고 수수료를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 그 돈이 대충 어떤 돈이고 누구 것인지는 어림짐작으로 알게 된다. 한 2∼3년 전쯤 누군가의 의뢰로 환치기를 통해 세탁한 자금 속에 김영완씨의 자금도 포함됐다고 들었다. 그때 박지원씨 이름도 잠시 거론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우리와는 거래를 하지 않았다.”

    이 브로커는 “김대중 정부의 고위층 인사들뿐만 아니라 청와대 관계자들도 자금세탁을 의뢰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브로커는 이어 “현재 검찰에서 김씨의 자금을 추적하고 있는데 김씨가 나머지 자금도 국제적인 로비스트와 연결된 자금세탁 조직에서 세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자금추적은 매우 어렵다. 특히 중동지역 조직들이 개입했다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브로커의 설명대로라면 현대 150억원 비자금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김씨의 자백 이외에는 없다는 이야기다. 명동 일대에서 활동중인 한 사채업자도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자금세탁조직이 지하자금 세탁을 위해 극비리 활동중이라는 소문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라면서 “최근 경찰에 적발된 자금세탁조직도 중국 쪽 라인을 이용한 국제적인 조직이었다”고 전했다.

    “들어오기 어렵지 않겠어요”

    현재 수사를 진행중인 대검 중수부(안대희(安大熙) 검사장)는 김씨의 소재파악을 위해 미국측에 도움을 요청해 놓은 상태다.

    김씨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동부지역 부흥가인 뉴저지주에 있는 자신의 호화저택에서 칩거중이라거나,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김씨의 처가에 은신 중이라는 등 소문만 무성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근거가 크게 부족하다. 한 예로 김씨의 한 친척에 따르면 텍사스 휴스턴에는 김씨의 처가가 없다고 한다. 김씨의 처남이 그곳에서 연수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와전됐다는 것이다.

    “다시 국내에 들어올까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 친척은 “글쎄요. 아마 들어오기 어렵지 않겠어요”라며 부정적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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