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한국인 피폭자 보상 길 연 곽귀훈씨의 40년 투쟁기

“단돈 1원이라도 일본의 전쟁 책임 묻고 싶었다”

  • 글: 곽귀훈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회장

    입력2003-07-28 1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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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정부는 한국인 피폭자들의 요구에 귀를 막고 있었다.
    • 일본 법원이 “국적이 다르더라도 치료받게 해줘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일본 영토를 벗어나면 무효”라는 규정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곽귀훈씨를 비롯한 한국인 피폭자들의 끈질긴 법정투쟁은 마침내 일본 정부를 굴복시키는데….
    한국인 피폭자 보상 길 연 곽귀훈씨의 40년 투쟁기

    2심에서 패소한 일본정부가 상고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지난해 12월18일 곽귀훈씨가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회장인 이치바 준코와 감격의 포옹을 하고 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 제공)

    나는 1924년(갑자년)생으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9월 전주사범학교 졸업을 반년 남겨놓고 일본군에 징집되어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서부 제2부대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 만 20세인 갑자생은 역사상 가장 운이 나쁘고 팔자가 기구하다고 해서 “묻지 마라 갑자생”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은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에 군도인 인구 42만명의 히로시마를 눈 깜짝할 사이에 괴멸시켰다. 나는 폭심(暴心)에서 2km 지점인 공병대의 영정(군부대의 운동장)에서 고공을 선회하는 미 폭격기 B-29가 햇빛에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찬사를 발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천지를 뒤덮는 불벼락으로 히로시마는 지옥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B-29는 태평양의 고도인 사이판섬의 부속도 격인 테니 안 섬에서 출격한 비행기였고, 13kt의 우라늄탄을 탑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판명되었다.

    3일 후인 8월9일 같은 장소에서 출발한 B-29는 규슈(九州)의 고쿠라(小倉)를 목표물로 삼았다. 하지만 일기가 나빠 목표물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나가사키(長崎)로 직행, 11시2분 조선소가 많은 나가사키를 일순에 괴멸시켜 인류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욕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때의 폭탄은 TNT 22kt의 플루토늄탄이라지만 두 개 다 낙하산을 달아 지상 500m 상공에서 폭파시켰으므로 효력은 거의 같다. 뒷날 이 두 발의 원폭 투하는 반인류적인 범죄행위라고 지탄받았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참상

    당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한국인의 수는 상세히 알 길이 없고 조사할 자료도 없지만 어림잡아 7만∼8만명으로 추산한다. 이들은 나처럼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거나, 살기 위해 이주해간 사람들이었다. 당시 히로시마의 한국인 가운데 경남 합천에서 온 사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 7만∼8만명 중 원자탄 투하 당시 폭사한 사람은 4만∼5만명이고, 살아서 귀국한 사람은 2만3000명, 일본에 남아 있는 사람은 7000명 정도로 추정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 전체의 피폭자가 70만명이니까 그 10분의 1, 즉 1할이 한국인인 셈이다.

    1923년 9월1일 동경대지진 때 한국인을 7000여 명이나 학살한 일본 국민들이다.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한 단말마의 거리에서 자기 살기도 어려운데 한국사람 구해 줄 일본인이 있을 리 만무하다. 혹시나 그런 기회가 있었다 해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의도적으로 방치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까마귀가 한국인의 시체를 쪼아먹는 광경이 허다하게 발견됐다고 해 그것을 그린 마루야마(丸山) 화백의 까마귀 그림이 국보급 명화로 평가받고 있을까.

    4만∼5만명이 폭사한 지옥을 겨우 벗어나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이들에게 살 집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입에 풀칠을 하려 해도 농사 지을 전답이 있는가, 그렇다고 신체가 강건해 막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있는가. 육체는 방사선 피해로 벌집처럼 되었고, 외모는 한센병 환자와 구별이 안 되니 상대해주는 이웃도 없었다. 그러니까 거지 중에도 상거지, 사람들 눈을 피해 깊은 산중에서 움막을 짓고 살기가 일쑤였다.

    가난하고 병들고 약 사먹을 돈이 없으니 죽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살아남아 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피폭자는 2100명 정도다. 일본의 피폭자가 28만5000명이니까 한국인 피폭자는 그 1할인 3만명 가까이 돼야 하는데 10%는커녕 1%도 못 된다. 다 어디로 갔는가? 모두들 천추의 한을 품고 저승으로 간 것이리라.

    나는 그들의 참상을 직시하면서 반세기를 살아왔다. 눈뜨고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그들의 처절한 신세타령. 그들은 외치다 쓰러지면서 “내가 죽거든 시체를 일본대사관으로 가지고 가라”는 말을 남기고 죽어갔다. 그래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을 3중의 피해자라고 한다. 박수복의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나 강수원의 ‘가공 원자폭탄 투하’라는 책에는 원폭 피해자들의 참상이 실명으로 자세히 서술돼 있다.

    일본 정부의 냉대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자기가 원해서 일본에 건너가 원폭을 맞은 게 아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일본의 전쟁수행도구로서 강제로 연행돼간 사람들이다. 마땅히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구호도 하고 보상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때 이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가 언급하지 않으니까 모르는 척 슬쩍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67년 한국인들이 원폭피해자협회를 조직하고 피해보상을 요구하니까 한일협정에서 모두 청산되었다면서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부산에 사는 일본 태생의 손진두(孫振斗)란 사람이 일본에 밀항했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나는 원폭피해자로서, 원폭 병을 치료하기 위해 왔으니 치료할 수 있는 건강수첩을 교부해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원폭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어떠했던가. 일본은 패전 후 원폭문제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원폭 피해가 사회문제가 된 것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이 체결된 후다. 일본 정부는 1957년 ‘원자폭탄피해자의 의료에 관한 법’을 제정해 병 치료를 시작했다. 이어 1960년부터는 ‘특별피해자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법’을 만들어 원폭피해자들을 ‘원폭2법’으로 원호했다.

    손진두는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구금된 상태에서 일본 시민단체들의 후원으로 1972년 10월2일 후쿠오카(福岡)지법에서 후쿠오카 지사를 상대로 수첩소송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1974년 3월30일 후쿠오카 지법에서는 “원폭피해자라면 국적이 다르다거나 밀항해온 범법자라도 수첩을 교부해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손진두의 손을 들어주었다.

    같은 해 7월22일 신영수(辛泳洙) 원폭협회 회장이 도쿄도(東京都)에 건강수첩 교부를 신청하자 그 날짜로 ‘이 수첩은 일본국 영토를 벗어나면 무효’라는 후생성 공중위생국장의 ‘통달 402호’가 통첩됐다.

    반면 손진두의 수첩소송은 고법에서도 승소했고 1978년 3월30일 최고재판소에서도 승소해 확정됐다. 비록 ‘통달 402호’의 효력이 최고재판소의 판결보다도 더 큰 효력을 유지하는 기현상이 빚어지긴 했으나 이 판결로 한국인도 일본에 가면 수첩을 받을 수 있고 의료혜택은 물론 수당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일본 국경을 벗어나면 수첩이 휴짓조각이 되는 파행 현상은 1998년까지 24년간 계속됐다. 다시 강조하자면 손진두 재판을 통해 한국인도 피폭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문이 열리자 일본 정부가 ‘통달 402호’를 통해 그 효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것이다. 1978년 최고재판소가 “‘원폭2법’은 국경과 민족을 차별할 수 없는 국가보상적인 법”이라고 판결하자 일본 정부는 이듬해 후생대신의 자문기관인 ‘원폭피해자대책 기본문제간담회’라는 이상한 기구의 자문을 내세워 한국인을 제외하는 조치를 취했다. 세월은 흘러 50년 철옹성이던 자민당 정부가 무너지고 사회당과의 연립정권이 들어서자 ‘원폭2법’은 원호법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한국인에 대한 차별정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출국했으니 수당 지급 못한다”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참으로 형용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첫째가 20만 위안부 문제이고, 둘째가 8만 원폭피해자 문제, 셋째가 사할린의 5만 교포 유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말고도 여러 피해자들이 전후에 일본국을 상대로 70여 건의 전후보상 소송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손진두 재판 외에는 이겨본 재판이 없다. 시모노세키(下關) 위안부 재판에서 피해자들에게 30만엔씩을 지불하라는 일부 승소 판결이 있긴 했으나 그것도 고법에서는 패소했다. 우키지마마루(浮島丸) 생존자 15명에게 300만엔씩을 지불하라는 1심 판결을 오사카(大阪) 고법이 뒤집은 것이다.

    왜 지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명치헌법인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론, 즉 국가가 통치행위를 행사한 천왕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효(時效)다. 국제법에는 시효라는 것이 없다는데, 일본 법원은 10년, 20년 등 시효를 적용해 모두 패소 판결을 내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더러는 양심적인 법관이 있어 피해자에게 동정적인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세는 바뀌지 않고 있다. 수구 보수 세력이 천왕을 상전으로 받들고 있는 한 이런 국수 노선은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도 전쟁범죄를 속죄하려는 양심적인 시민운동가나 정치가가 늘어나는 추세이고 적지 않은 시민들이 이에 가세하고 있다.

    이런 시민단체들의 후원과 인권변호사들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그 많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소송을 벌이는 건 한국 사람만이 아니다. 중국인, 필리핀인, 그리고 대만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전쟁 피해를 보상하라고 재판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UN인권위원회나 ILO(세계노동기구) 등도 일본의 인권침해나 전범처리 문제에 대해 몇 차례 시정권고를 한 바 있지만 일본 정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가장 신경을 쓰고 무서워하는 말이 전후보상이다. 어떠한 사건도 전후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것을 저지하려고 국력을 총동원해 대응한다. 이것이 일본의 기본 국책노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재판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여러 친지가 무모한 행위라고 만류하였지만 “비록 지더라도 운동이니까 해야 한다”는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 회장인 이치바 준코(市場淳子)의 굳은 신념에 크게 고무되었던 것이다.

    1998년 5월 나는 미쓰비시 징용공 재판의 증인으로 증언을 준비하려고 오사카(大阪)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중 수첩갱신과 건강관리수당지급을 신청해 향후 5년간 매월 약 35만원씩을 지급하겠다는 오사카부 지사의 인정서를 받은 바 있다.

    한국인 피폭자 보상 길 연 곽귀훈씨의 40년 투쟁기

    일본 국회의원회관에서 의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곽기훈씨(왼쪽에서 두 번째)

    그 해 7월초 귀국하면서 계속 내 계좌에 수당을 불입해달라고 서면으로 요청서를 보내고 귀국했더니 오사카부 지사는 “출국해서 실권되었으니 수당을 지급할 수 없다”는 통지서를 보내왔다. 7명의 변호인단(교포변호사 2명)을 구성, 그 해 10월1일 오사카 지법에 오사카부 지사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실권시킨 법적 근거를 대라”는 이른바 원호법 재판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일본 정부에서 받아내려는 금품은, 비록 1원이라도 전쟁책임을 묻는 보상금이다. 그것을 받기 위한 재판에서 지금까지의 사례로 보아 강제연행이다, 체불임금이다 하면 패할 것이 뻔하다. 따라서 그런 용어는 가슴속 깊이 숨겨두고 실권시킨 법적 근거만 대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통달 402호’를 들고나올 테고 그것이 법이냐고 따지면 이길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법정에서 나는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일본군에 징집돼 군에 복무하다가 피폭했다. 그러나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피폭자가 아니다. 재판을 하기 위해 정오에 간사이(關西)공항에 입국하면 피폭자의 자격이 생긴다. 재판이 끝나 오후에 출국하면 다시 피폭자가 아니다. 무슨 법이 아침과 낮, 그리고 저녁으로 변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또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다”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원호법은 사회보장법이니까 거주도 하지 않는 외국인이나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은 수당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맞섰다.

    1심에서 통쾌한 승리

    두 달에 한 번꼴로 열리는 806호 법정은 언제나 열성적인 시민단체와 한총련 관계자들, 그리고 후원자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그만큼 기대도 컸다. 나는 언제나 “법대로 하면 이긴다. 그러나 외국인이 외국 법정에서 외국인 법관의 판결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전망이 그리 밝다고만은 할 수가 없다”고 말해왔다.

    변호사들 또한 국가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는 승리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때문에 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장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초조하게 판결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판결은 15회째 재판일인 2001년 6월1일에 있었다. 재판부는 내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을 시작한 지 2년8개월 만에 승리로 결말이 난 것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통쾌한 승리다” 하고 허공을 향하여 절규했다. 일본 언론들은 그런 내 모습을 그대로 보도했다.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아사히(朝日)신문’ 기자가 다가와 자기 회사에 난리가 났다고 귀띔해줬다. 처음에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다음날 신문을 보고 알아차렸다. 나에 관한 재판 기사가 정치면과 사회면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고 이어서 사설 칼럼(天聲人語)까지 동원해 전무후무한 사건처럼 보도했다. 다른 신문들도 모두 같은 정도의 지면을 할애했다.

    예상한 대로 미우라(三浦) 재판장의 판결은 수첩소송 당시 최고재판소 판결문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원호법에 국적조항이 없으니 외국인을 차별할 수 없고 건강수첩의 효력이 없어지는 경우는 사망했을 때지 국외로 나간 경우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 국외로 나갔다고 차별하는 것은 인권조항이 담긴 헌법 제14조에 위배될 우려가 있다고 피고측 주장을 통박했다.

    완승을 한 것이다. 재외 피폭자들에게도 원호의 길이 열리는, 아주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판결이라고 평가됐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공소(控訴: 항소의 구 용어)를 단념하고 국책 방향을 바꾸어 하루 속히 재외 피폭자들을 원호해야 한다는 것이 언론계와 국민 여론의 대세였다.

    마침 20일 전인 5월10일 한센병 환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정부측이 패한 터였다. 공소하려는 분위기가 감돌자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수상 관저를 포위하고 수상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이에 정부는 그들에게 사과하고 공소를 단념했다. 그런 전례가 있는 만큼 여세를 몰아 그렇게 하라는 분위기였다. 특히 만날 지고만 살던 교포 청년들이 기뻐하는 모습은 눈물 없이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보고회와 축하회를 가지며 나는 여러 날을 흥분 속에서 보냈다.

    공소 단념 운동은 외롭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일본 국회 안에 야당인 민주당 당수인 하토야마(鳩山)씨와 사민당 당수인 도이(土井)씨를 선두로 54명의 ‘재외 피폭자에게 원호법 실현을 적용하려는 의원 간담회(의원간)’라는 조직을 만들어 그것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터였다.

    국회에 아는 얼굴이 많아 다행이었다. 특히 사무국장인 가네코(金子) 의원과 간사 나카가와(中川) 의원은 추진력이 강한 투사들이라 나는 그들과 손잡고 각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공소 단념 운동을 벌였다.

    우선 각 당 당수들을 찾아 협조를 당부했고 당수를 만날 수 없으면 간사장을 찾아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당부하고 다녔다. 그리고 당사자인 법무성의 모리야마(森山) 대신과 후생노동성의 사카구치(坂口) 대신을 만나 간곡하게 공소를 단념할 것을 부탁했다.

    한편으로는 ‘의원간’ 총회를 열어 정세를 분석하고 전술을 협의하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정부 쪽에서 안 좋은 얘기들이 들려왔다. 후쿠다(福田) 관방장관이 “한센병 경우와는 다르다”고 말하는가 하면 후생노동성 관료들도 어떻게든 공소하겠다고 버틴다는 불리한 소식이었다. 낙관할 처지가 아니었다.

    특히 후생노동성 관리들은 뭔가 착각하는지 “히로시마에서는 소송에서 승리했다”면서 공소하는 쪽으로 밀고 나갔다. 억지도 보통 억지가 아닌 데에 놀랐고, 내 깐에는 최선을 다해서 뛰었으나 대세가 기울어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오사카로 돌아와 검진을 마치고 6월14일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 정부가 공소하였기 때문에 고등법원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담당 재판장의 이름을 보고 우리는 매우 놀랐다. 변호사들 말에 따르면 뒤집기로 유명한 재판장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과거 법무성에 근무한 경력도 있어서인지 종종 정부측 견해와 같은 판결을 한다고 했다. 그런 판사를 의도적으로 재판부에 배정해 정부측 손을 들어주려는 음모가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제1회 공판은 2001년 10월24일 하나밖에 없는 대법정에서 열렸다. 우리측은 아이러니하게도 오사카시의 공무원노조 청년부의 협조를 얻어 매회 대법정을 사람들로 가득 메워 재판부를 압박하자는 전략도 짰다. 그런데 1회 공판이 열리던 날 재판장은 다음 기일에 결심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게 아닌가.

    이에 우리 변호인단은 강하게 반발하면서 이제부터 증거도 보충하고 본격적인 심의를 해달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올 것이 온 것이라고 우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언론들도 그 저의가 무엇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도가 걱정스럽다는 관측기사를 실었다.

    질 줄 알았던 2심에서 승리

    2002년 2월5일 3회 공판 때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재판장은 심의가 끝났다고 선언했고, 우리는 재판장을 기피하는 대응책으로 맞섰다. 기피한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재판관 3인은 훌쩍 자리를 떴다. 일본 재판 역사상 재판관을 기피해서 재판관이 교체된 예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의 재판관들이 장기 근속자들이라 3월말 예정된 인사 때 전근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피 이유로 내세웠다.

    하지만 4월이 지나도 그 재판관들은 바뀌지 않았다. 기피서류는 고법 최고재판까지 올라가 6월20일에 기각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괜히 시간만 낭비하고 재판관들의 감정만 상하게 해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재판을 더욱 꼬이게 한 꼴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재판장은 한 달 전에 열렸던 징용공 재판에서 “일본은 한국에 한일협정 당시 줄 것을 다 주었으니 받을 것이 있으면 네 나라에 가서 받아라”는 상식 밖 판결을 한 사람이었다.

    마침내 12월5일 판결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패할 것으로 예측하고 다음날 일찍 귀국하려고 간단한 여장에 착잡한 심정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 나가시마(永島) 변호단장으로부터 “길게 하면 지고, 짧게 하면 이긴다”는 말을 들었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기각한다”는 네모토(根本) 재판장의 말이 들려왔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왈칵 나가시마 변호사를 얼싸안았다. “이겼다!”라는 환성이 대법정에 울려 퍼졌다. 고법에서는 패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기에 반신반의했던 1심에서 이겼을 때보다 더욱 기쁘고 통쾌했다. 하늘로 오르는 기분이었다.

    일본 정부가 상고하면 재판이 끝나기까지 어림잡아 3년이 걸린다.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재판의 생리다. 그러니 반드시 상고를 포기시켜야 했다. 그래야만 하루빨리 해외 피폭자들의 살 길이 열리는 것이다.

    지난해 6월과는 정세가 많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그간 나는 일본의 신문이나 잡지 등에 한국 피폭자들의 참상에 대한 글을 집요하게 써왔고 불합리한 일본 정부의 시책을 비판해왔다. 기고문을 통해 ‘원호법 재판은 현재 5회 연승으로 앞으로 반년 안에 10승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10전 10패가 돼야 항복하겠느냐’고 다그쳤다. 또 ‘글을 읽을 줄 알면 판결문을 똑똑히 읽어보라’고 후생노동성 관리들을 꼬집기도 했다.

    어느 의원이 내게 “이 일에 사카구치 후생노동성 대신의 목이 걸려 있다”고 귀띔해줬다. 소수당인 공명당 출신 장관이 섣불리 상고를 단념한다고 발표했다가 다수당인 자민당측에서 ‘너는 늘 상고나 단념하고 사과만 하는 장관이냐’고 힐책하면서 ‘그만두라’고 하면 목이 달아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카구치 대신이 넘어야 할 몇 개의 장애물로는, 첫째가 자민당이고, 둘째가 내각관방이며, 셋째가 후생노동성의 전통관료들이다. 그 중 하나인 관료의 저항은 거의 무력화되었다고 판단했다. 또 1심 판결 후 공소를 단념하라는 압력에 대신이 2심 판결을 지켜보겠다고 언명해왔으니 대신도 할 말은 없는 처지라고 추측했다.

    일본 국회에서 박수 받다

    나는 8일까지 오사카에서 행사를 끝마치고 9일 아침 일찍 이치바 회장과 국회로 갔다. 나카가와 의원 사무실을 본거지로 정하고 ‘의원간’의 간사들과 상고 단념의 전략을 짜고 있는데 난데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피고인 오타(太田) 오사카부 지사가 “나는 상고를 하지 않겠다”면서 “사카구치 대신을 만나 상고를 단념하도록 설득하겠다”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 뒤 오사카부 의회 공명당 의원들이 의원총회에서 상고 단념을 결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후쿠다 관방장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정치적 판단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12월11일 중의원 후생노동위원회가 열렸다. 나는 그것을 방청하기 위해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나카가와 의원이 질문하기에 앞서 방청석에 앉아 있는 나를 가리키며 노구를 이끌고 나와 있다고 소개해 나는 일어서서 목례를 했다. 그랬더니 의원들이 모두 나를 보고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사카구치 대신도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반색을 했다.

    나는 ‘이런 분위기라면 일이 잘 풀릴 수 있겠구나’ 하고 예감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일본국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으니 적수(賊首) 격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국정의 본거지인 국회에서 박수갈채로 환영한다는 것은 의례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주장이 그들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날 중의원 후생노동위원회에서는 공명당의 후쿠시마(福島) 의원이 앞장선 가운데 사민당의 나카가와 의원, 민주당의 가네다(金田) 의원과 야마이(山井) 의원, 자유당의 사토(佐藤) 의원, 공산당의 야마구치(山口) 의원 등 6명이 사카구치 대신에게 상고를 단념하라고 질문 공세를 벌였다.

    8명의 질문의원 중 6명이 2심 판결에 승복하라고 압박했으니 그날 회의는 상고를 단념시키기 위한 회의와 같았다. 다음날 열린 참의원 후생노동위원회에서는 민주당의 야마모토(山本) 의원과 사민당의 오와키(大脇) 의원이 상고를 단념하라고 대신을 다그치는 일이 벌어졌다.

    11일 국회 후생노동위원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을 때 자민당 간사인 다니하다(谷畑) 의원이 우리를 밖으로 불러냈다. 이치바 회장과 같이 나가니까 휴대전화로 누군가를 불러 “지금 어디에 있냐. 그곳으로 가겠다”고 통화한 뒤 급히 가자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뒤따라 달리고 또 달려 정문 근처에 이르니 검은 차가 있어서 그 차를 타고 달려갔다. 한 차에 다 못 타 남은 사람은 다른 차를 타고 뒤쫓아왔다.

    자민당 본부에 도착한 우리는 4층 전략본부로 안내됐다. 사무총장인 야스오카(保岡) 의원이 우리를 반겼다. 뒤따라 온 가네코 의원과 나카가와 의원, 우리 둘, 그리고 다니하다 의원을 합쳐 5명이 자리에 앉았다. 야스오카 의원은 나에게 “재외 피폭자 여러분들에게 이 고통을 더 이상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일본 정부에 상고하지 말라고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동석한 우리들은 박수를 치면서 잘 부탁한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야스오카 의원은 가고시마(鹿兒島) 출신으로 판사와 변호사를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 법무부 대신을 역임한 중의원의원으로서 전략본부의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는 자민당의 핵심 중 핵심의원이라고 듣고 있었다. 후일 인사차 찾아 간 우리에게 그는 한센병 환자 재판 때도 자기가 주동이 돼 공소를 단념시켰다고 털어놓았다.

    상고를 단념시키려는 전략은 성공해 고비를 넘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더 극적인 상황은 다음날인 12일에 벌어졌다. 우리가 참의원 후생노동위원회에서 야마모토 의원의 질문을 듣고 있을 때 나카가와 의원의 여비서가 복도에 나타나 우리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오자 여비서는 대뜸 가슴에 단 방청인 표시인 노랑 리본을 떼고는 뛰자고 했다.

    일본 국회의사당의 구조는 미궁 같아서 어디가 어딘지 구별이 안 되고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수시로 설정되어 있어 나갔다하면 되돌아오고 그 길이 그 길 같아서 미로를 헤매는 것 같았다. 얼마 동안 뛰다가 숨이 차서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거냐”고 묻자 여3당 간사장들이 나를 만나자고 한다는 것이다. 어제의 꿈이 아직도 생생한데 더 큰 충격이 밀려왔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 그러면 죽더라도 달려야지 하고 또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갔다. 자민당 간사장실은 3층에 있었고 까마귀떼 같은 기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겨우 그 사이를 뚫고 나가니 구면인 후유시바(冬柴) 공명당 간사장이 반갑게 손을 잡으며 앉으라고 했다.

    바로 옆에는 자민당 간사장인 야마사키(山崎)씨가 앉아 있고 앞에는 보수당의 니카이(二階) 간사장이 앉아 있었다.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인사를 끝내자 어제의 야스오카 사무총장이 나타나 상황설명을 한 뒤 여3당은 상고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그 뜻을 정부에 건의하자고 말을 맺었다.

    어느새 왔는지 가네코 의원, 나카가와 의원, 나카바야시(中林) 의원이 와 앉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숨이 차서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나카가와 의원이 상고를 단념토록 협조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나중에야 겨우 잘 부탁한다면서 자리를 떴다.

    일이 대충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이런 사실을 법무성에 통보해서 상고를 하지 말라고 했다는 소식이 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촌극은 겨우 10분 전에 기획돼 이루어진 것이라고 가네코 의원이 전해주었다.

    다음날인 13일은 국회 회기가 끝나는 날이다. 총회 광경을 방청하고 나오니까 사토(佐藤) 의원이 공명당 의원총회에서 간자키(神崎) 당수의 발의로 상고 포기를 의결했다고 전해주었다. 이쯤 되면 사카구치 대신의 장애물은 거의 제거된 셈이다. 오후에 자기도 상고할 뜻이 없다면서 관방장관을 찾아가 고이즈미 총리의 재가를 요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뒤 총리가 사카구치 대신에게 일임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나는 14일 원폭의 도시 히로시마를 방문, 가네코 의원의 후원회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시청 방문과 기자회견 등 분주한 일정을 보내다가 이틀 뒤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17일이 되자 기자들이 찾아와 내일(18일) 후생노동성 대신이 상고 단념을 발표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소감을 묻기에 나는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은 후노성 관리가 정직하지 못해 해괴한 작문을 작성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그러자 바로 그날 정오부터 TV에서 내 얼굴이 화면을 가득 메운 가운데 “후노성 관리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내 발언을 그대로 내보내는 게 아닌가. 나는 몸 둘 곳을 몰랐다.

    일본 정부 마침내 상고 포기

    발표시각인 18일 오후 2시가 넘어도 의원회관의 가네코 의원 사무실에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 기대와 초조한 마음으로 대기하고 있는데 발표와 동시에 FAX로 발표문을 보내주겠다던 후생노동성 관리는 연락조차 되지 않는 상태였다. 30분 가량 옥신각신하다가 겨우 A4용지 한 장의 초라한 발표문을 입수했다.

    그것을 읽은 나는 말문이 막혔다. 상고를 포기했다니 일단 큰길은 열린 셈이었다. 하지만 후생노동성의 태도는 내가 어제 예고한 대로였다. 거기에는 한마디 사과도 없이 사법부와 견해를 달리한다느니, 고령이 된 재외 피폭자를 구원하기 위한 조치라는 등 비위에 거슬리는 문구들이 나열돼 있었다. 끝으로 이것은 전후보상이 아니라 인도적인 조치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재판에서 이긴 처지에서 상고를 단념한 그들에게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에 “상고를 단념한 일본 정부의 영단을 높이 평가한다”라고만 했더니 후에 변호인단이 중대한 사건이라며 나 대신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후생노동성 관리들은 우매하고 치졸하다고 나는 오래 전부터 믿고 있었다. 그들은 법도 모른다. 판결문을 읽을 줄 아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런 집단을 거느리고 있는 사카구치 대신은 현명하지만 좀 불쌍하다고, 나는 동정하고 있었다. 그는 야당 정책위위원장 시절부터 교섭상대였다. 하지만 그의 뜻이 어디 있는지는 나도 일찍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진전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우리는 네모토(根本) 재판장을 뒤집기의 명인으로 매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판결문을 읽어보면 그가 사리가 분명하고 현명한 재판관임을 알 수 있다. 한 길 사람 마음속을 알 수 없다는 격언처럼 우리는 그의 본심도 모르고 풍문만 듣고 매도해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판결 후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사법은 살아 있다”고 그를 의식하면서 절규했다. 나중에는 관인대도(寬仁大度)란 문구로 마무리지었다. 네모도 재판장이 현명한 판결을 했다는 것은 판결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줄거리는 최고재판소나 1심 판결문과 차이가 없다. 하지만 논거가 단연 돋보인다.

    원호법 제정 당시 일본 정부의 정무위원은 국회에서 “이 법이 외국인에게도 해당이 되느냐”고 정부측의 입법의지를 확인하는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절대로 외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네모도 재판장은 바로 이 국회속기록을 들어 “이렇게 논의했음에도 법조문에 이를 명기하지 않은 것은 애초 국외로 출국한 사람도 피폭자로 인정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라고 역으로 해석했다.

    또 1심 패배 후 정부가 ‘검토회’라는 자문기구를 만들어 이른바 5억엔 지원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아무 의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또 1심 재판부가 언급했던 헌법 14조(인권 관련 조항) 위반 부분은 상고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예 삭제함으로써 일본 정부의 상고 단념에 일조했다.

    한편 매스컴의 보도태도를 보면 ‘마이니치(每日)신문’이 특별취재반을 구성해 필자와 같은 호텔에 묵으면서 일거수 일투족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귀국길 나리타(成田) 공항의 출구까지 따라와 열성적으로 취재했다. ‘아사히신문’은 결심 공판이 열리는 날 조간에 내가 투고한 ‘나의 시점’을 게재하는 등 우호적 태도를 견지했다.

    조간에 실린 내 글을 수상도 읽고 후생노동성 대신도 읽고 재판장도 읽었다고 들었다. 신문사에 따르면 독자들이 내 글을 명문으로 평가하고 이런 글을 실은 데 대해 이례적인 일이라고 놀라워했다는 것이다. 이런 신문이 상고 포기의 역사적 순간을 어떻게 보도했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당당한 보상 길 열리다

    4년3개월이나 걸린 재판에서 두 차례 승소하고 일본 정부가 상고를 단념함으로써 재외 피폭자들도 원호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이는 실로 획기적인 일이라고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일본 국외에 거주하고 있는 원폭 피해자는 5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국에 약 2500명, 미국에 약 1000명(6할은 미국 국적, 4할은 일본 국적), 중남미에 약 200명(모두 일본 국적), 북한에 약 1000명이 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건강수첩을 신청해서 교부받으면 그 수첩은 사망시까지 유효하고 85% 정도는 매해 약 400만원의 수당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상고 포기한 날을 기준으로 앞뒤 5년 동안 한번이라도 수당을 받았다가 지급이 중단됐던 사람은 5년간 밀렸던 수당을 한번에 받을 수 있다.

    현재 집계된 바로는 440명이 소급분을 받을 수 있으며 매월 자신의 통장에 35만원 가량의 수당이 일본 정부로부터 입금될 것이다. 실로 엄청난 변화다. 후생노동성 관리가 뭐라 하든 그 돈은 일본이 전쟁터로 끌고 가 원폭을 맞게 한 데 따른 보상금 성격을 띠고 있다.

    금액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원호법에 따라 당당하게 그것을 받게 된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늘 일본에게 피해만 당하던 한민족이 일본 정부를 법적으로 패배시키고 보상금을 받아냈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의료 문제도 있고, 일본에 갈 수 없는 환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인도적인 조치라고 말은 하면서 후생노동성 관리가 그와는 정반대의 태도를 견지하는 바람에 아직도 이 사업은 지지부진하다.

    이 일은 피폭 후 58년 만에, 그리고 피폭자운동을 시작한 지 37년 만에 이룬 큰 성과다. 이런 역사적인 쾌거가 헛되지 않도록 피폭자들의 인권수호에 여생을 바칠 각오를 천명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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