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오리무중 국민성금의 향방

측은지심의 정성, 정부 호주머니 속으로?

  • 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3-07-28 17: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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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풍 루사, 대구지하철 방화,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화재….
    • 참담한 천재(天災)와 인재(人災)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 그때마다 국민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호주머니를 턴다.
    • 그러나 이렇게 모인 성금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쓰이는지, 아는 이도 없고 가르쳐주는 이도 없다.
    오리무중 국민성금의 향방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지 4개월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을 위해 모인 성금은 여전히 대구시 통장에서 잠을 자고 있다. 6월29일 열린 희생자 합동 영결식

    재해와 재난 극복에 쓰라고 낸 국민성금이 최근 사상 최대액을 경신했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 태풍 루사가 5조원대의 재산 피해를 내고 25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자 전국적으로 1448억원의 성금이 모였다. 390여 명이 죽거나 다친 지난 2월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때는 669억원이 모금됐다. 이어 지난 3월 충남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숙소 화재 때도 8억4000만원의 정성이 모였다.

    그런데 좋은 뜻으로 모아진 국민성금이 이런저런 잡음을 내고 있다. 수재의연금 1448억원 중 1300억원이 수재민 구호에 쓰였는데, 이중 65억원은 국고 대신 사용돼 수재민이 아니라 국가의 부담을 덜어줬다. 그런가 하면 대구지하철 화재 피해자들에게 전달돼야 할 669억원은 아직도 대구시의 통장계좌에서 잠을 자고 있으며, 천안으로 보내진 성금 중 4억5000만원은 그 사용처를 둘러싼 시비가 법정으로 비화될 조짐이다.

    국민성금, 누구를 위한 ‘증여’인가

    “세상 떠난 아이들을 봐서 낸 성금이지, 교육청 재원 마련하라고 낸 성금이겠습니까? 보상금을 더 달라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성금을 낸 취지에 맞게 써달라는 겁니다. 아이들이 참사를 당했으니 성실하게 책임지는 선례를 남겨야지요. 지금 돌아가는 사정은 천안교육청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아요.”

    천안초등학교 화재사건 유가족의 주장이다. 지금 천안에선 성금유용 공방이 한창이다. 국민성금 중 4억5000만원이, 원래 천안교육청이 지급해야 할 유가족 보상금의 재원으로 쓰였기 때문. 교육청은 지난 5월30일 9명의 유가족에게 1인당 2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면서 1억5000만원은 교육청 예산으로, 나머지 5000만원은 성금 모금액으로 충당했다.



    유가족들은 “교육청이 위로금 명목으로 성금 모금활동을 벌여놓고는 성금을 보상금 재원으로 사용했다”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교육청은 “보상금에는 배상금, 위자료, 위로금 등이 다 포함됐다”며 “유가족들이 ‘2억원 이외에는 일절 요구하지 않겠다’던 사전 합의를 어겼다”고 대응하고 있다.

    9명이 목숨을 잃고 15명이 크게 다친 축구부 숙소 화재 후, 책임기관인 천안교육청과 유가족들은 ‘1인당 보상금 2억원을 지급한다’고 일괄 합의했다. 그리고 나서 천안교육청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충청남도지회(이하 충남지회)와 공동으로 50여 일에 걸쳐 성금 모금운동에 나섰다.

    충남지회에 접수된 성금은 모두 8억4000만원. 이 가운데 방송국, 지역신문사, ARS 전화 등을 통해 들어온 성금은 1억원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 7억4000만원은 교육청을 통해 접수됐다. 때문에 천안교육청은 “이 정도나마 성금이 모인 것인 우리가 집안 식구 같은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모금운동을 적극적으로 알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한 교육청 관계자는 “성금을 보상금 재원으로 쓰지 않으면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세금이나 성금이나 국민이 내는 것인데, 이걸 분리하면 이중 지출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허술한 성금 관리 시스템

    성금 사용처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김인회 변호사는 “유족들의 주장이 상당 부분 일리 있다”고 말한다.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낸 성금은 교육청이 아니라 유족들에 대한 ‘증여’의 성격이 강하므로 교육청에 지급 책임이 있는 보상금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 그러나 김변호사는 “다만 법정에서 모금을 주도한 교육청의 노력을 고려해줄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안교육청 관계자는 “거둬들인 성금을 보상금 지급과 관련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된 법안을 찾을 수 없었다”며 “차라리 이번 기회에 법정까지 가서 성금 사용에 대한 명쾌한 판결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이러한 잡음이 발생한 근본 원인은 허술한 ‘성금 관리 시스템’에 있다. 각종 재해·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자발적으로 성금이 걷히지만, 이 성금을 어떻게 사용하고 배분할 것이냐에 관한 구체적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 사회정책연구실장은 “성금을 유족이나 부상자에게 얼마만큼 지급할 것인가, 추모사업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등에 관해 제도적으로 마련된 바가 없다”며 “때문에 늘 이해당사자끼리 성금을 둘러싸고 ‘힘 겨루기’를 벌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 때 성금 배분 규정 등을 정해뒀더라면 천안 축구부 화재참사 때 준용(準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재난사고의 경우 국민성금을 모금해 적절하게 배분하는 기관이 없는 점도 문제다. 현재 법적으로 성금을 거둘 수 있는 기관은 두 곳으로 제한돼 있다. 전국재해구호협회(회장·최학래)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회장·한승헌)가 그곳. 여타 기관이 성금을 모금하려면 기부금품모집규제법에 의거해 행정자치부 장관이나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장(長)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매년 여름 수해가 날 때마다 방송사나 신문사는 수재의연금을 접수한다. 이는 언론사의 독자적 사업이 아니라 전국재해구호협회(이하 재협)가 벌이는 사업이다. 언론사에 접수된 성금은 모두 재협으로 집결돼 수재민 구호에 쓰인다. 재협은 수해뿐 아니라 태풍, 폭설, 지진 등 모든 형태의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국민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해 이재민 구호사업을 할 수 있다.

    ‘사랑의 열매’ 사업을 하는 곳이 바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이하 공동모금회)다. 이 기관은 예전에 정부가 하던 ‘연말연시 이웃돕기모금사업’을 물려받아 1999년 설립됐다. 공동모금회는 재협과 달리 평소에도 성금을 모아 각종 사회복지기관을 지원함으로써 성금을 사회에 환원한다.

    올해 대구지하철 관련 성금 모금은 재협이 주관했고, 천안 축구부 관련 성금 모금은 공동모금회가 주관했다. 그러나 두 곳 다 본래는 재난사고 관련 성금을 모금하는 기관이 아니다. 때문에 유족들에게 교육청과 함께 ‘공공의 적’으로 비난받고 있는 공동모금회 충남지회에서 “좋은 일 하려다 욕만 들었다”는 하소연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 충남지회 관계자는 “애초 교육청과의 협약대로 교육청을 통해 들어온 성금을 교육청에 다시 되돌려준 것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또 “충남지회에 직원이 4명밖에 없어 인력도 부족하고, 이런 일을 처리해본 경험도 없다”며 답답해 했다.

    100일 넘게 낮잠 자는 성금

    지난 5월20일 대구시청 시장실에서는 대구지하철 참사에 모아진 ‘성금 전달식’이 열렸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성금의 수혜자인 유가족과 부상자들이 없었다. 최학래 회장과 함께 전달식에 참석한 재협 관계자는 “대구시에서 성금 전달식이 열린다는 것을 사전에 발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보도자료도 전달식이 끝나고 난 뒤인 오후 2시쯤 배포했다”고 말했다.

    유가족대책위원회 윤숙기 위원장은 “대구시가 희생자들 몰래 시상식을 열었다”며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성금 전달식이 있었다는 것을 다음날 신문을 보고야 알았습니다. 유족과 부상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걱정과 정성, 그게 성금 아닙니까? 그런 국민들의 마음을 느낄 기회를 빼앗다니…. 대구시의 무성의함에 다시 한번 실망했습니다.”

    이에 대해 대구시 지하철사고수습대책반 관계자는 “시상식이 원만하게 치러지지 않을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당시는 유족들이 성금 문제에 워낙 민감하던 때였다. 시장실에 찾아와 난동을 부린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국민들이 정성스레 모아준 성금이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천덕꾸러기’가 된 셈이다.

    대구지하철 성금 모금은 재협이 맡은 첫 재난구호사업이었다. 씨랜드 화재참사 등 이전의 재난사고 때는 해당 지방자치단체나 관련부처에 모금 창구가 마련됐지만, 지하철 참사는 워낙 큰 사고인 데다 전국적으로 많은 관심이 집중돼 재협이 모금사업을 떠맡았다. 정식 모금기간인 3월31일까지 신문사, 방송사, ARS 등을 통해 접수된 성금은 658억원 가량. 이후에도 전국 각지로부터 성금이 계속 쇄도해 재협이 대구시 통장계좌로 성금을 넣어준 6월16일에는 669억원 가량이 모였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성금은 대구시 통장계좌에서 잠자며 이자만 불리고 있다. 세부적인 성금 지급규정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 물론 정부가 지급해야 할 보상금도 그 규모나 지급 시기가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

    천안 축구부 화재참사와는 달리 대구 지하철 참사에 모인 성금은 사용처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 대구는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기 때문에 유족들과 부상자들은 보상금 전액을 정부로부터 지급받는다. 보건복지부와 재협은 국민성금을 특별위로금과 추모사업비, 그리고 직접 경비로 지원하라는 방침을 내려보냈다.

    성금 지급이 늦어지자 희생자 가족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대구시가 규정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유족과 부상자 간에 성금을 어떻게 나눌지 합의를 보라며 행정업무를 미루고 있다는 것. 유족들은 “성금이나 보상금 지급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유족들이 심리적으로 지치고 단결력도 약해질 것으로 보는 것 같다”며 대구시를 향한 악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실제로 성금에 관한 대구시와 유족, 부상자 간 첫 번째 회의가 6월20일 열렸으나, 7월11일 현재 다음 회의 일정도 잡혀있지 않은 상태다.

    지난 6월29일 사망자 192명에 대한 합동영결식을 치른 후에도 여전히 유가족대책위 사무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윤위원장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털어놨다.

    “신문이나 방송에 성금이 많이 걷혔다더라, 대구시에 전달됐다더라, 그렇게 보도가 나오니까 친척들까지 ‘돈도 받았는데 거기서 뭐하고 있냐’고 합니다. 주변에서 ‘유족들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니까 돈을 못 받는다’는 오해도 받고 있습니다. 우리로선 보상금이든 특별위로금이든 빨리 해결하고서 이 일을 잊고 싶습니다.”

    오리무중 국민성금의 향방

    많은 수재민들은 “성금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지난해 태풍 루사로 수해를 당한 수재민이 개울물에 설거지를 하고 있다.

    일단 모금을 한 후에 사용처와 배분문제를 놓고 한바탕 힘 겨루기를 하는 재난사고 성금과는 달리, 거의 매년 여름 모금되는 수재의연금은 비교적 빨리, 그리고 체계적으로 지급된다. 수재의연금은 ‘재해구호법’에 따라 모금되고, 또 법에 명시된 지급기준에 따라 배분된다.

    수재의연금은 일반위로금과 특별위로금으로 지급된다. 일반위로금은 사망·실종자 위로금, 명절 위로금, 파손된 주택 수리비, 월동 대책비, 연료비 등으로 쓰인다. 또 지난해와 같이 수해가 심각할 경우 해당지역이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되는데, 이 경우 일반위로금으로 사용하고도 성금이 남으면 특별위로금을 지급한다. 지난해 재협은 1300억원 정도를 수재의연금으로 집행하면서 일반위로금으로 767억원, 특별위로금으로 466억원을 사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의연금이 ‘국고’로 둔갑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협은 수재의연금을 수재민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와 협의해 수해를 입은 각 지방자치단체에 의연금을 배분한다. 즉, 성금이 일단 시청이나 도청, 군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지자체로 들어간 성금이 실제로 수재민들에게 전달될 때 ‘국민성금으로 이 자금을 드립니다’라고 홍보한다면 성금에 대한 오해가 발생할 여지는 적다. 그러나 보건복지부 복지자원과 관계자는 “이것이 제대로 홍보되지 않고 있다”고 시인했다. 그는 “이 때문에 수재민들이 각종 구호금과 위로금을 국민성금이 아니라 그저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알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강원도 정선군 주민 지종섭(47)씨는 지난 여름 수해 때 집이 침수되어 주택 수리비 등 총 200만원을 군청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지씨는 “그 돈은 다 군청에서 준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성금이 굉장히 모였다고 방송에서 떠들던데, 군청에서 국민성금이라면서 준 건 없어요. 마을 사람들은 정선군이 30억원 정도 성금을 배당받았다고 합디다. 그렇다면 군청이 국민성금 가지고 저 혼자 생색을 낸 건가요?”

    ‘성금은 먼저, 국고는 나중’

    수재의연금 중 일부가 ‘합법적으로’ 국고를 대신해 사용되는 점도 문제다. ‘재해구호 및 재해복구부담 기준’에 근거해 의연금이 ‘법정구호비’ 재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 법정구호비란 재해를 당한 이들에게 사망·실종자 및 부상자 위로금, 이재민 장기 구호비, 생계보조비, 생계지원 등을 위해 지급되는 돈이다. 그런데 이 법정구호비 재원이 ‘의연금 또는 국고 100%’ 혹은 ‘국고 50%, 나머지는 의연금이나 국고로 충당’ 등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복지자원과 관계자는 “의연금을 쓰고 모자라면 국고로 채운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재해구호는 ‘성금은 반드시 걷힌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마련된 셈이다. 그러나 김승권 실장은 “현재 우리나라는 재해와 재난의 방지, 이재민 구호를 국가의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그렇다면 구호에 대한 비용도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법정구호비로 성금을 사용하는 것은 국가가 책무를 다하지 않고 국민에게 부담을 떠넘긴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재민 구호에 드는 기본적인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고, 국민들의 자발적 의지로 모아진 성금은 ‘플러스 알파’로 쓰여야 합니다. 가령 집이 침수됐을 때 정부는 생계 등을 위한 응급 비용을 대고, 가구를 마련한다든가 하는 비용은 성금으로 충당해야지요.”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 예산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도 성금이 국고로 오해받는 또다른 이유다. 수해 등 재해가 발생했을 때 구호나 복구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각 지방자치단체는 재해구호기금을 별도로 마련하게 돼 있다. 그런데 재해구호기금으로 응급조치를 한 후에 국고나 의연금을 받아 이 기금을 다시 채워 넣는 것. 김승권 실장은 재해구호기금의 문제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재해가 발생하면 먼저 지자체가 피해 정도를 파악합니다. 그런데 중앙정부가 복구나 구호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내려보내니까 피해 정도를 부풀리지요. 그러면 중앙정부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다시 실사합니다. 이런 일이 전국적으로 벌어지다 보니 피해규모 파악이 늦어지고, 그래서 복구나 구호사업도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어요. 매년 수재민들이 ‘정부의 대응이 너무 늦다’고 불평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는 거죠. 또한 지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은 모두 국고나 의연금으로 채워줍니다. 그러니 지자체들이 재해구호기금을 성실하게 쌓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죠.”

    실제로 전국 지자체가 재해구호기금으로 마련한 예산은 법적으로 명시된 기준의 49%에 지나지 않는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태풍 루사 때 이재민 구호를 위해 국고는 2790억원, 의연금은 1260억원이 사용된 데 비해 지방비는 671억원만 사용됐다. ‘모자라면 중앙정부가 채워준다’는 방침 때문에 지난해 몇몇 지방자치단체는 편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즉, 자체적으로 예산을 마련해 사용하면 그만큼 중앙정부의 지원이 줄어들게 되므로 자체 예산을 감춰버린 것.

    경남 하동군은 의연금 3595만원을 직접 접수하고도 이를 중앙정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강원도 강릉시와 경남 함안군은 공무원들이 나서서 15억2300만원의 의연금을 거둬놓고도 민간단체가 의연금을 모집한 것처럼 꾸몄다. 경북 김천시와 전남 광양시는 의연금 2억3300만원을 자체 집행하기 위해 재협이 아닌 공동모금회에 지정기탁 형식으로 보냈다가 다시 돌려받는 편법을 썼다. 특히 김천시 구성면은 의연금 2100만원을 모집한 후 700만원을 직원 회식비, 떡값, 격려금 등으로 사용했다.

    눈물 보여야 지갑 여는 성금 문화

    국민성금의 행방을 둘러싼 오해는 성금을 총괄해 관리하는 체계가 미흡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또 일단 모금한 성금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 넘어간 뒤 배분되기 때문에 국고와 뒤섞이는 부작용도 생긴다.

    일부에서는 “성금이나 세금이나 국민이 내는 것인데,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지만, 관계 전문가들은 “성금은 국민들이 자발적인 의사로 내는 것인 만큼 그 둘은 구분해서 사용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승권 실장은 “민간 차원에서 신뢰받는 성금 관리운용기관 혹은 민간위원회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성금을 한데 모아 일정한 기준에 따라 그 사용처와 배분 액수 등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 그는 “성금이 많이 모이면 위로금이 늘고, 적게 모이면 위로금이 줄어드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 남으면 이월하고 부족하면 이월된 성금을 가져다 쓰는 등 성금을 체계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재난이나 재해가 발생해야만 각계각층에서 성금이 쇄도하는 ‘성금 문화’는 선진국형 기부문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이화여대 강철희 교수(사회복지학)는 “미국에서는 허리케인으로 피해를 당해도 전국민적으로 성금 모금운동을 벌여 재원을 마련하진 않는다”고 전했다. 대신 국민들이 평소에 재난·재해 구호활동을 벌이는 민간기관들에 꾸준히 성금을 기부한다는 것.

    미국은 재난·재해 구호사업과 관련해 정부와 민간이 담당하는 역할을 뚜렷이 구분하고 있다. 정부는 재해관리전담기관인 연방재해관리청(FEMA)을 두어 자연재해와 인위적 재난, 전쟁 등에 신속하게 대응한다. 그리고 민간재해구호기관들은 기관마다 뚜렷한 사업 특성을 가지고 현물급여 중심으로 이재민을 지원한다. 적십자사는 임시주거제공과 급식을, 메노나이트재해서비스는 재해지역 청소와 정비를 담당하는 식이다. 국민들은 평소에 이러한 기관들에 기부함으로써 이들의 활동을 지원한다.

    강철희 교수가 2001년 벌인 우리나라 기부문화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국민 한 사람이 1년 동안 내는 기부금은 평균 5만1700원이다. 그러나 국민의 절반은 단 한푼도 내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거액을 기부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1년에 평균 2만원 정도를 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눈물을 보여야만 지갑을 여는 것은 분명 후진적인 성금 문화이다. 이렇듯 성급하게 모인 돈이 체계 없이 되는 대로 사용되거나 이해당사자들끼리 사용방법을 놓고 옥신각신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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