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唯物論 녹이는 有神論, 한국 극동방송의 對共투쟁 30년

라디오가 한반도 재통일한다

  • 글: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oon@donga.com

    입력2003-07-29 1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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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북방송 하는 KBS와 VOA, RFA, FEBC의 특징과 차이점
    • 동북 3성과 러시아에서도 들리는 국내 최대 출력의 극동방송
    • 조선족 지하교회가 보내온 2만2000달러의 눈물겨운 헌금
    • 북한의 지하교회는 500여개
    • 북한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만나오’ 라디오
    • 북한의 건전지 부족 문제 해결한 태양열 라디오
    唯物論 녹이는 有神論, 한국 극동방송의 對共투쟁 30년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3단계 통일론을 주장해온 자칭 ‘통일문제 전문가’였다. 그러나 대북송금 사건 송두환(宋斗煥) 특검팀의 수사 과정에 DJ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과 협의한 후 현대그룹으로 하여금 5억달러를 북한에 비밀리에 송금하도록 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돈은 필요하면 써야 한다. 그러나 돈을 매개로, 그것도 다른 기업의 돈을 써가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연 것은 통일문제 전문가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南南 갈등에서 北北 갈등으로

    이상(理想)이 아닌 현실(現實) 세계에서 북한과 접촉해온 전문가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 끼친 가장 큰 악영향은 햇볕정책의 앞길을 망쳐놓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길고 긴 통일의 여정에서 북한 정권과 대립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북한 주민을 화해와 협력으로 껴안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런데 햇볕정책의 기치를 들었던 김대중 정부는 비밀리에 북한에 돈을 보내고 남북정상회담을 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햇볕정책은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따라서 정작 햇볕정책을 펼쳐야 할 때에 국민들이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하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후 한국 사회에서는 이른바 남남(南南) 갈등이 적지 않았다. 남남갈등은 왜 생겨났는가? 북한문제 전문가 중에는 노무현(盧武鉉) 정부 들어 회자된 ‘코드’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를 설명하는 사람이 많다.

    “김대중류(流)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북한과의 대화 통로를 개척하려면, 달갑지는 않지만 김정일(金正日)의 코드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의 대북 비밀송금은 이러한 코드 맞추기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과 코드를 맞춰야 통일이 이뤄진다고 믿는다면 이는 큰 오판이다. 그러한 생각은 북한에서 ‘위로부터의 변화’나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인데, 독재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북한에서 위로부터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동유럽의 공산국가는 서방 국가들이 코드를 맞춰주었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동유럽 공산국가 국민들이 서방세계의 코드에 맞추려고 했기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나 무너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북한을 ‘위로부터 악수할 것인가’ ‘아래로부터 흔들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숙고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얻지 못하면 남남 갈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한반도를 재통일하기 위해서는 남남 갈등이 아니라 북북(北北) 갈등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며 “지금 북한 주민의 코드는 독재권력에 눌려 김정일 정권에 맞춰져 있다. 이런 북한 주민의 코드를 돌려 우리에게 맞추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동유럽 공산국가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코드를 서유럽에 맞추게 한 동인(動因)을 제공한 것은 서유럽의 방송이었다. 오래 전부터 서유럽의 방송은 동유럽을 파고들었다. 이 방송을 보고 들은 동유럽 국민들이 ‘자유에 대한 갈망(渴望)’을 품게 되면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방송을 통한 동유럽 주민들의 해방은 북핵 문제를 포함한 북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노무현 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얘기다.

    미국의 양대 대북방송, VOA와 RFA

    한반도에도 조선족이 많이 사는 중국과 김정일이 통치하는 북한 땅을 향해 전파를 쏘는 방송이 있다. KBS 사회교육방송과 자유아시아방송(RFA: Radio Free Asia), 미국의소리 방송(VOA: Voice Of America), 극동방송(FEBC: Far East Broadcasting Co.) ‘희망의 메아리 방송’ 등이 그것이다.

    KBS 사회교육방송은 공영방송인 KBS에서 운용하는 것이라 한국 정부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다. 과거 사회교육방송은 북한 체제를 흔드는 내용을 많이 방송했다. 하지만 ‘햇볕정책’을 주장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다음에는 눈에 띄게 ‘톤’을 낮추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연성화(軟性化)된 사회교육방송도 북한인들에게는 먹힌다는 점이다. 탈북자 중에는 ‘북한을 비난하지 않는 사회교육방송을 듣고 오히려 한국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의 독재에 너무 지쳤기에 따뜻한 것만 봐도 쉬 마음이 움직인다. 이는 북한 주민을 우리 코드로 이끄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KBS 사회교육방송이 목청을 낮추는 동안 미국계 방송들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왔다. VOA로 유명한 ‘미국의소리 방송’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2월24일 미국 전쟁정보국에서 독일군을 흔들기 위해 독일어로 방송을 내보낸 것이 그 시작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VOA는 미 국무부로 소속을 옮겼다가 지금은 미 공보처(USIS)에 소속돼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냉전이 첨예하던 시절 VOA는 구 소련의 ‘라디오 모스크바’와 함께 주로 체제 선전을 하는 대표적인 심리전 방송으로 꼽혔다. VOA는 54개 언어로 방송을 내보내는데 그중엔 한국어도 있다. 최근 VOA는 북한 주민의 코드를 좀더 강하게 밀착하기 위해 탈북자를 상대로 ‘북한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한국의 가요인가 뉴스인가’ 등을 묻는 여론조사까지 실시하였다.

    ‘미국의소리’ 방송보다 더 공격적으로 대북방송을 하는 것이 ‘자유아시아 방송(RFA)’이다. VOA는 미국 행정부에 속해 있지만 자유아시아 방송은 미국 의회의 통제를 받는다. 자유아시아 방송은 북한에 관대했던 클린턴 정부 시절인 1994년 미국 의회에 의해 설립됐다가 1996년 민간방송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운영비는 미국 의회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이 방송은 언론자유가 없는 아시아의 몇몇 나라를 위해 그 나라 뉴스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밝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북한이었다. 때문에 김정일 정권은 자유아시아 방송의 방송 내용에 대해서는 비난 성명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다.

    자유아시아 방송에서는 손꼽히는 북한 전문가인 이동복(李東馥) 전 의원과 전성훈(全星勳)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등이 자주 출연해 동북아 정세와 북핵 문제 등을 설명하고 있다. 또 황장엽(黃長燁)씨가 남북통일 방안에 대해 쓴 ‘황장엽의 대전략’을 정기적으로 낭독해주고 있다.

    KBS 사회교육방송이나 VOA·RFA는 미국이나 한국 정부(또는 의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러나 FEBC로 불리는 극동방송은 기독교 단체인 민간 기관이 주도하는 방송이다. 여타의 대북방송이 정치성 강한 프로그램을 많이 내보내는 데 비해 극동방송은 선교 위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다.

    북한을 포함한 공산국가들은 서방국가의 전파공격에 전파방해로 대항한다(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파방해를 받은 주파수에서는 세칭 ‘개구리 울음’이라고 하는 “왈왈왈” 하는 소리가 나와 방송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극동방송은 시사적인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공산국가로부터 전파방해를 거의 받지 않는다.

    한국 극동방송의 경우를 살펴보자. 종교 단체가 주관하는 민간기업인 한국 극동방송은 어떻게 중국과 북한을 뚫고 들어갔을까. 그리고 선교사들과 연계된 지금의 극동방송은 이들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한국 극동방송은 세계 34개국에서 운영되는 극동방송 중의 하나로 오키나와에 있던 극동방송이 1973년 제주도로 옮겨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후 사세를 넓혀 지금은 서울·제주·대전·창원·목포·영동(속초)·포항·울산 등 여덟 곳에 방송국을 두고 있다. 이중 서울·제주를 제외한 여섯 군데 방송국은 음질은 뛰어나지만 가청거리가 짧은(수십㎞) FM(초단파)으로만 방송을 내보낸다.

    그러나 제주와 서울의 극동방송은 한국은 물론이고 북한·중국에서도 선명히 들을 수 있는 AM(중파)으로도 전파를 송출한다. 따라서 한국 극동방송이라고 할 때는 제주와 서울의 극동방송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중에서도 대표는 한국 극동방송의 효시인 제주 극동방송인데, 제주 극동방송의 출력은 국내 AM 방송 중에서 가장 큰 250㎾이다.

    제주 극동방송은 하루 22시간 방송하는데 이중 15시간은 한국어, 5시간15분은 중국어, 1시간15분은 일본어, 30분은 러시아어로 방송한다. 따라서 AM 라디오를 갖고 있는 북한인이 1566㎑인 제주 극동방송이나 1188㎑의 서울 극동방송 주파수에 맞춘다면, 그는 15시간 동안 계속되는 한국어 선교방송을 들을 수 있다. 중국인은 중국어 방송이 나가는 한밤중에 이 주파수에 맞추면 5시간15분 동안 이 방송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극동방송은 또 하나의 기독교계 방송인 기독교방송(CBS)과 조직과 편성에서 큰 차이가 있다. 기독교방송은 선교 방송과 함께 시사 뉴스를 내보내므로 기자들이 일하는 보도국이 있다. 그러나 극동방송은 뉴스를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보도국이 없다. 기독교방송은 상업 광고를 내보내나 극동방송은 광고 없이 헌금만으로 운영한다. 방송선교를 내고 싶은 교회들은 극동방송에 헌금을 내고 선교방송을 내보내는데, 이 헌금이 극동방송의 주수입원이다.

    기독교방송은 일반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가 강하나, 극동방송은 낙태나 피임 같은 종교적인 차원의 사회문제를 거론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자기 성격을 한정시켜놓았기 때문에 극동방송은, 강력한 전파를 송출하고 있음에도 공산국가로부터 적극적인 방해전파를 받지 않는 것이다. 중국이나 평양을 방문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극동방송이 또렷이 잡히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극동방송은 공산권, 그중에서도 대(對)중국 선교를 최대 목표로 창설된 방송국이다. 따라서 한국 극동방송도 중국인 목사들이 편성한 중국어 선교방송을 내보내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미·중 수교가 이뤄지기 전까지 한국 극동방송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에 있는 극동방송들은 아무 ‘메아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다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은 1979년 홍콩 극동방송은 중국 내 청취자들이 보내온 1만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이러한 반응에 극동방송측은 크게 고무됐었다고 한다.



    唯物論 녹이는 有神論, 한국 극동방송의 對共투쟁 30년

    손잡이를 돌려 충전을 하면 건전지가 없어도 방송을 들을 수 있는 태양열 라디오.

    순수 선교방송을 지향한 극동방송의 중국 진출은 1981년 덩샤오핑(鄧小平) 집권을 계기로 활성화되었다. 덩샤오핑 정권은 서방 세계의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개혁개방을 선택했는데 그중 하나가 기독교의 ‘제한적’ 인정이었다.

    중국 정부는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외국의 기독교 단체와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고(自治), 외국 기독교 단체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헌금으로 교회를 운영하며(自養), 외국 선교사나 선교단체의 지원 없이 자기 힘으로 전도하는(自傳) 경우에 한해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러한 교회를 중국에서는 일명 ‘3자(自) 교회’라고 한다. 18세 이하는 신자가 될 수 없다는 등 많은 ‘토’를 단 허가였지만, 중국이 교회를 허가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써 마오쩌둥(毛澤東) 시절 지하로 숨어들었던 중국의 기독교회는 3자교회의 형태로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살벌했던 마오쩌둥 시절에도 중국 기독교가 지하교회 형태로 명맥을 유지해왔다는 것은 북한 선교를 모색해온 한국 기독교계에 큰 희망을 주었다. 광복 전 북한의 평안도 지방은 유난히 기독교 세가 강했다. 도산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선각자의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의 기독교인이었다. 그런 만큼 북한에도 지하교회가 살아 있으리라고 추정한 것이다.

    중국이 빗장을 열어주기 전에도 극동방송과 북한 선교를 생각해온 교회들은 대북 선교 활동을 했다. 지금도 북한은 기구(氣球)를 통해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삐라를 한국에 살포하고 있다. 냉전 시절 한국도 북한에 삐라를 뿌렸는데, 이는 합참의 심리전 부대가 맡았다. 이때 극동방송과 몇몇 교회는 합참과 함께 라디오를 기구에 달아 북한으로 띄웠다. 이 라디오를 통해 남한 방송은 물론 한국 극동방송을 들으며 지하교회를 운영해달라는 희망을 품고서….

    정신적인 양식 ‘만나오’

    그러던 차에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자 교회들은 대북한 선교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사업가 등으로 위장한 선교사를 중국에 파견했다. 중국에 진출한 선교사들은 먼저 조선족을 상대로 전도한 후 지하교회나 미션홈 등을 만들었다.

    이들 선교사의 활동을 ‘지원사격’ 해준 것이 한국 극동방송이었다. 지하교회에 모인 조선족 신자들은 한국 극동방송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다. 한국 극동방송을 듣는 조선족이 늘어나자 라디오 공급이 화급한 문제가 되었다. 개혁개방 직후 중국에서는 라디오가 귀했다. 한국 극동방송은 중국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펼쳤는데, 중국으로 들어가는 라디오를 ‘만나오’로 이름 지었다.

    구약의 출애급기(出埃及記)에는 모세가 이집트로 끌려갔던 150여 만명의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을 받았는데, 여호와는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만나(manna)’라고 하는 양식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극동방송은 중국에 들어가는 라디오는 지하교회 신자들의 정신적인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만나’에 라디오의 ‘오’자를 붙여 ‘만나오’로 명명했다.

    2만2000달러의 헌금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 1992년 극동방송은, 선교방송 사상 가장 보람 있는 일을 경험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 여인 김모씨가 2만2000달러를 갖고 극동방송 사장인 김장환 목사를 찾아온 것. 김여인은 ‘영수님’이라는 조선족 남자를 중심으로 문화혁명 시대에도 지하교회 활동을 계속해온 교인이었다. 지하교회 시절 교인들은 극동방송을 켜놓고 예배를 보았는데 그때마다 조금씩 헌금을 했다.

    그러다 영수님이 죽고 그간 불어난 헌금을 간수하기 힘들어지자, 지하교회 사람들은 중국 여행객을 만나 이 돈을 달러로 바꿔 나갔다. 이렇게 해서 2만2000달러가 만들어졌는데 이 돈은 중국 노동자가 한푼도 쓰지 않고 100년을 모아야 마련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논의에 들어간 신도들은 극동방송을 듣고 희망을 잃지 않았으니 극동방송에 헌금하자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중국은 외화 반출을 금지한다. 다른 신도들은 다 가족이 있었으나 김여인은 미혼이었다. 김여인은 가족이 없는 자신이 돈을 갖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해 이 돈을 몸에 감추고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인천항에 도착한 즉시 극동방송으로 달려와 2만2000달러를 헌금으로 내놓은 것이다.

    김여인의 헌금이 기독교 신자인 한 사업가의 부인을 감동시켰다. 그 부인은 즉석에서 5000만원을 헌금했는데, 이 돈은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 한국 극동방송을 세우는 종자돈이 되었다.

    1993년은 북한의 식량난이 극심해진 해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함경북도와 양강도에서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오는 북한인이 급증했다. 지하교회를 운영하는 선교사들은 이들을 맞아 식량을 제공하고 복음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갈 때 네댓 개의 만나오를 가져가도록 했다.

    만나오를 받아간 이들 중에는 다른 북한인을 데리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와 지하교회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함경북도와 양강도 일대에서 극동방송을 듣는 북한인이 조금씩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현상도 일어났다.

    첫째는 북한에서는 건전지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건전지가 떨어지면 극동방송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극동방송은 건전지를 수집해 대량으로 북한에 집어넣는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다른 현상에 부딪쳐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건전지는 ‘껌값’이지만, 북한에서는 귀하신 몸이다. 북한 주민의 주식량인 강냉이가 ㎏당 31원에 거래되는데 건전지는 한 개 15원 정도에 거래되었다. 따라서 만나오에 있는 건전지를 빼내 식량과 바꾸거나, 아니면 만나오 자체를 암시장에 내다파는 북한인이 생겨난 것이다.

    건전지 필요 없는 태양열 라디오

    ‘양식은 양식이되 입으로 집어넣는 양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인의 신심이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본 극동방송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태양열 라디오’에 착안했다. 옛날 전화기 중에는 전화기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뱅뱅 돌려 전기를 일으킨 다음, 그 전기로 전화를 거는 자석식 전화기가 있었다.

    태양열 라디오는 그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라디오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돌리면 라디오 안의 소형 발전기가 돌아가 발전을 하고 그 전기를 충전해 라디오를 듣게 하는 것이었다. 태양열 라디오는 부피가 크다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북한의 건전지 부족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중국에 구축한 지하교회와 미션홈은 점조직 형태로 북한의 지하교회를 지도하게 됐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북한의 지하교회 수는 5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광범위한 망이 만들어지자 이 조직은 김정일의 수령 독재에 반대하는 반북(反北) 조직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안기부에 북한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첩보원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교사를 북한으로 납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5년 북한 공작조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된 안승운 목사와 2000년 1월16일 중국 옌지(延吉)에서 북한 보위부(한국군 기무사에 해당) 납치조에 의해 납북된 김동식(金東植) 목사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선교사들은 중국의 탈북자를 한국으로 보내는 일도 벌였다. 이에 대해 북한이 항의하자 중국 공안은 한국 선교사 검거에 나섰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1년 12월29일 탈북자를 몽골로 탈출시키려다 중국 공안에 검거된 천기원(千琪元) 전도사 사건이다(김동식 목사 피랍 사건은 ‘신동아’ 2003년 3월호, 천기원 전도사 사건은 ‘신동아’ 2002년 10월호 참조).

    이렇게 선교사와 연합한 극동방송은 끊임없이 북한을 두들기고 북한 정권과 갈등했지만 때로는 북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극동방송은 국내 교회와 협력해 적잖은 생필품을 북한에 보냈는데, 북한은 주저하지 않고 이를 접수했다. 정치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오직 선교방송만 하는 극동방송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는 생래적으로 대립하지만 김정일 정권이 인정하고 방해할 수도 없는 지금의 한국 극동방송을 만들었다. 지금도 극동방송의 전파는 북한 주민의 코드를 한국과 기독교로 돌려놓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한 북한 전문가의 말이다.

    “극동방송은 북방선교 외길을 걸었기 때문에 중국과 북한이라는 철의 장막을 뚫을 수 있었다. 유물론의 공산주의는 혁명이론으로 뭉친 것이라 이를 상대하려면 그에 맞설 만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돈으로 급히 대화창구를 마련하는 편법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으로 바른 길을 걷는 것이 유물론을 제압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극동방송은 이 방법이 얼마만큼 효과적인지를 보여주었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포용정책으로도 표현했다. 햇볕정책은 영어로 Sunshine Policy로 옮겼으나 포용정책은 Engagement Policy로 표현했다. 그러나 국제정치학회는 Engagement Policy를 햇볕정책이나 포용정책으로 번역하지 않고 ‘개입정책’으로 번역한다.

    개입정책은 포용할 것은 포용하고 대립할 것은 대립하며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는 정책을 뜻한다. 여기서 전문가들은 김대중 정부는 용어를 혼란시키고 그틈을 이용해 돈을 쓰는 편법으로 정상회담을 끌어냈다가 지금 망신을 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극동방송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1972년 일-중 수교 때 오키나와에서 철수한 바 있는 극동방송으로서는 1992년 한-중 수교가 존폐의 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극동방송은 정치를 배제한 순수 선교방송만 해왔기에 한-중 수교 때 중국측으로부터 폐쇄나 이전을 요구받지 않았다. 한국 정부 또한 1972년의 일본 정부처럼 ‘알아서 기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열정이 너무 강하면 ‘편법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일관되게 정치적인 열정을 배제하고 보편적인 기독교 가치를 전파하려고 했다. 그것이 또 다른 정치적 열정(유물론)으로 무장한 북한을 눌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북한에서는 우리의 가치관에 코드를 맞추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극동방송 사례는 북한도 동유럽처럼 라디오에 의한 민주화가 가능한 지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극동방송은 지금처럼 선교 방송을 계속하고 KBS 사회교육방송은 보다 공적인 영역에서 북한 주민의 코드를 사로잡는다면, 한국 방송에 의한 북한 민주화가 요원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KBS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미국의 VOA나 RFA가 대북방송을 주도해 북한 민주화가 진전된다면, 극동방송은 한국이 아닌 미국의 방송으로 분류돼 ‘미국 방송이 북한 주민을 해방시켰다’는 평가가 나오게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당사자 원칙으로 남북문제를 풀어가겠다고 밝혔다. 한국 주도로 남북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극동방송이 펴온 대북한 개입전략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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