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난마처럼 얽힌 갈등의 현장

머리띠 동여맨 대한민국, 기대수준 안 낮추면 막나간다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3-07-29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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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은 갈등론자들의 전유물인가. 노동계 하투(夏鬪)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긴 했지만, 사회 각계에서 분출하는 갈등의 진폭은 좁혀질 줄 모른다. 참여정부 들어 전례 없이 폭증하는 사회갈등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해법은 없는가.
    난마처럼 얽힌 갈등의 현장

    7월2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앞에서 전경련을 상징하는 허수아비를 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하고 있는 금속산업연맹 소속 노동자들

    “허리 아파 어깨 아파, 골병 대책 마련하라!”“비정규직 차별 없는 주40시간 실시하라!”7월2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 민주노총(위원장 단병호) 산하 금속산업연맹의 ‘총파업승리결의대회’가 막 시작됐다. 1000여 명 가량의 수도권지역 노동자들이 금감원 건물 앞 차도를 가득 메웠다. 집회가 시작된 후에도 ‘단결투쟁’ 문구가 적힌 머리띠와 노조 조끼 차림의 노동자들을 태운 전세버스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날 집회는 서울·부산·울산·창원 등 전국 12개 도시에서 금속산업연맹 소속 노동자 9만여 명이 동시참여한 대규모 시한부 연대파업의 하나. ‘철의 노동자’ ‘파업가’ 등이 울려퍼지자 개별 단위노조들의 깃발과 피켓이 연신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노동자들의 주장은 ▲단체협약 노동시간 주40시간으로 단축 ▲근골격계 직업병 대책 마련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정규직화 ▲임금인상과 최저임금 현실화 등 이른바 ‘4대 임단협 공동요구안’을 사용주들이 받아들이라는 것. 이들은 “철도노조 파업에 공권력을 투입한 노무현 정권은 개혁할 자세부터 안 돼 있다” “공권력 투입은 전체 노동자에 대한 선전포고다” “자본가단체와 언론이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를 집단이기주의와 정치투쟁으로 오도하고 있다”며 정부와 재계, 언론을 강력히 성토했다.

    “노무현 정권의 오락가락을 보수세력이 부채질하는데, 과연 누구 목소리가 큰지 한번 붙어보자. 우린 수십 명씩 감옥에 보내면서 살아왔다. 끝까지 가보자!”는 극단적 표현들도 쏟아졌다. 그러나 몇몇 노동자는 “경찰이 새까맣게 깔렸다”며 근심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다.

    1시간30분 후 집회를 마친 노동자들이 몰려간 곳은 50m 남짓 떨어진 전경련 회관. 곧이어 “전경련 해체” 구호와 동시에 노동자들이 던진 계란들이 회관 건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기자의 머리 위로도 계란 몇 개가 지나갔다. 터진 계란들은 건물 정면에 부착된 대형 플래카드 위로 지저분한 얼룩을 남기며 흘러내렸다. 거기에 적힌 캐치프레이즈는 이랬다. ‘새 정부와 함께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열어갑니다-전국경제인연합회.’



    공교롭게도 이날 오전 7시30분부터 2시간 반 동안 같은 건물 내에선 현명관 전경련 상근부회장 주재로 ‘신(新)노사문화 확립을 위한 회원사 간담회’가 개최돼 노조의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소송, 가압류 등 가능한 민·형사상 법적 대응을 엄정하게 취할 것이란 내용을 포함한 ‘신노사문화 확립을 위한 우리의 다짐’ 결의문을 채택한 터였다.

    불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물 안팎에서 벌어진 이같은 노(勞)와 사(使)의 첨예한 대치는 최근 잇따른 사회갈등들의 한 단면을 극명히 보여준다. 갈등의 현장에서도 짭짤한 재미를 보는 이들이 없진 않다. 무더운 날씨 덕분에 얼음에 재운 생수와 캔음료를 연거푸 팔아대던 한 40대 여성 노점상은 “늘 하는 사람이 (시위)하는 바람에 매상이 오르지 않는다”면서도 곁에 있던 남편에게 혼자말처럼 툭 던졌다. “(시위대가) 저쪽으로 가면 내가 (손수레) 끌고 갈게.”

    2003년 한국사회는 갈등이 지배중

    시위현장에서 화염병과 마스크, 치약이 자취를 감춘 요즘이지만 사회 각계에서 분출하는 극한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7월2일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6말7초(6월말∼7월초)’에 벌어진 노사분규만 살펴봐도 조흥은행 노조 파업(6월23일 타결), 부산·대구·인천지하철 등 3개 노조 공동파업(6월24일), 철도노조 파업(7월1일 파업 철회), 한국노총(위원장 이남순) 하루 총파업(6월30일) 등 릴레이 파업이 꼬리를 물었다.

    다행히 당초 7월6일로 예정됐던 화물연대의 재파업 찬반투표 실시가 유보되고, 7월11일 파업을 예고했던 26개 지방공사 의료원 노조가 일단 파업을 철회함으로써 일부 단위노조의 경우를 제외하곤 노동계 하투(夏鬪)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모양새다.

    하지만 갈등은 노동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각종 집단요구의 분출도 그에 못잖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집단요구의 분출이 곧잘 정부와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진다는 사실이다.

    ‘필승! 신도시 백지화, 꿈은 이루어진다.’ ‘날강도 노무현 정권, 신도시 철회하라.’ ‘주민동의 없는 강제수용! 건교부가 투기꾼이냐?’

    7월9일 오전 10시 김포신도시 반대 투쟁위원회(위원장 이중택)의 ‘김포신도시 반대 궐기대회’가 열린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마당. 장맛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5t 화물차 적재함에 설치된 단상 주변엔 김포신도시 계획 철회를 주장하는 글귀가 쓰인 붉고 노란 현수막과 태극기가 수없이 내걸려 울긋불긋했다. 단상에선 정부의 신도시 개발계획에 대한 투쟁위원회 간부의 성토가 한창이었다. 단상과 마주한 여의도공원 내에선 김포신도시 예정지구인 김포시 운양동, 장기동, 양촌면 주민들이 “신도시 반대” 구호를 목청껏 외쳐댔다.

    이들의 주장은 수도권 주택난 해소와 서울 강남지역 집값 안정을 위해 5월9일 건설교통부가 발표한 파주·김포신도시 건설계획과 관련, 현 시가의 25% 수준인 공시지가로 토지보상을 산정함으로써 생존권과 재산권 침탈이 우려되므로 계획을 전면 철회하라는 것.

    이날 집회의 참가인원은 1300여 명(주최측 추산). 주민들이 집단상경을 위해 빌린 전세버스도 34대에 달했다. ‘25% 결사반대’라고 적힌 머리띠와 어깨띠를 일제히 두른 주민들의 모습은 매우 일사불란해 보였다.

    11시50분쯤 집회를 마친 김포시 주민들은 도시락으로 점심끼니를 때운 뒤 버스를 나눠타고 과천 정부종합청사로 향했다. 이들이 해산한 시각은 건교부 담당국장과 면담한 후인 오후 4시경. 투쟁위원회의 한 간부는 “향후 건교부의 조치가 우리의 요구조건보다 미흡할 경우 다시 대규모 상경투쟁을 벌일 것”이라며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집회·시위, 서울서만 日평균 200여건

    사회갈등이 폭주하고 있다. 위험수위에 다다랐다는 여론도 비등하다. 참여정부 들어 국민들의 각종 집회·시위 참가 빈도는 이전에 비해 가파르게 상승했다.

    서울지방경찰청 홈페이지의 ‘알림판.’ 여기에 나타난 ‘오늘의 집회·시위’ 표는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7월10일에만 해도 250여 개의 일정이 빽빽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주최 한·칠레 FTA 국회비준 저지 전국농민대회 오후 5시 여의도공원 문화마당(집회신고 인원 2만명), 통일연대 주최 6·15공동선언 훼손 새 특검 강행 한나라당 규탄집회 오전 11시30분 여의도 국민은행 앞 인도(300명), 암사정수사업소 민간위탁 저지 시민공동대책위원회 주최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 규탄집회 오후 1시 상수도사업본부 정문 우측 앞 인도(50명)….

    거의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런 유형의 집회·시위는 서울시내에서만 하루 100∼300여 개에 이른다. 며칠 혹은 몇 달간 계속되는 장기 집회·시위도 적지 않지만, 대다수는 매일 ‘업데이트(update)’되는 새로운 것들이다.

    통상 집회·시위 일정은 경찰청 정보과에서 사회·경제·노정·학원·재야·문화 등 각 분야별로 나눠 집계하는데, 아무래도 다수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 및 노정 분야의 집회·시위가 날마다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반면 문화분야의 경우 신고된 집회의 상당수는 각종 홍보성 캠페인이다.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과의 한 직원은 “예년에 비해 집회·시위 관련 업무량이 배나 늘었다. 특히 참여정부 들어 집회참가인원이 부쩍 늘어난 게 두드러진 특징”이라 귀띔한다.

    사정이 이러니 일반 시민들이 생활주변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개인적·국지적 갈등들도 곳곳에 널려 있다. 서울 여의도 LG빌딩과 대각선으로 마주한 마포대교 남단 한귀퉁이. ‘서울대 상대 나온 놈이 그것도 모르냐?’는 등의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 5∼6개가 나붙어 있다. LG그룹 계열사에서 근무하다 소위 ‘왕따’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김모씨가 6월18일부터 내년 12월31일까지 영등포경찰서에 신고해놓은 ‘LG그룹 직장 왕따 근절 및 정도경영 촉구’ 집회다.

    이는 물론 단적인 사례이지만 갈등은 개인적 문제인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여론조사는 한국사회의 갈등이 이미 극한으로 치닫고 있음을 방증한다. 청와대 정책실 사회통합기획단이 빈곤율, 실업률, 소득배율, 부패지수,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보장 지출비율 등 5가지 지표에 값을 매겨 하나의 개념으로 재구성한 사회통합성 지표를 개발, 이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지표 산출이 가능한 20개국을 놓고 비교해본 결과 한국은 최하위권인 18위에 머물렀다(6월20일 발표).

    갈등이 또 다른 갈등을 부르는 사례도 빈발한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한국노총의 공공부문노조 총파업 출정식이 열린 6월19일. 이날 낮 12시 서울역 광장에선 23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최저임금연대’가 최저임금 70만600원(월급기준·현행 월 51만원)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특이한 건 이 집회가 전혀 예기치 못한, 서울역 노숙자들의 방해를 받았다는 점. 이날 일부 노숙자들이 소위 ‘3D업종’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 30여명이 집회를 갖는 1시간여 동안 집회 참가자들 앞에 드러눕거나 구르고, 사회자의 마이크에 대고 “시끄럽다”고 외치는 등 ‘상대적 박탈감(?)’을 드러낸 것. 급기야 경찰이 출동해 노숙자들을 끌어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단순히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개운찮은 뒷맛을 남기는 일화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시민 김유석(25·한림대 언론학과 3년)씨는 “최저임금은커녕 최저주거와 사회적 발언권마저 못 가진 노숙자들이 자신들과 큰 차이가 없는 처지의 노동자들이 갖는 집회에 거부감을 갖는 것을 보고 또 하나의 갈등이 빚어진 것 아닌가 싶어 씁쓸했다”고 털어놨다.

    난마처럼 얽힌 갈등의 현장

    7월7일 경기도 과천시 중앙공원에서 ‘역(逆)시위’를 벌이고 있는 과천시민들

    경기도 과천시 주민들은 시위에 항의하는 시위, 이른바 ‘역(逆)시위’까지 벌여야 했다. 7월7일 과천지역 20여 개 시민사회단체 회원과 과천 중앙고교 학부모 등 500여 명이 과천 중앙공원에서 바른 집회문화 정착을 위한 시민결의대회를 연 것. 이들의 주장은 11개 정부부처가 입주해 있는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연일 계속되는 전국 단위의 대규모 집회·시위 때 발생하는 소음으로 인해 학교수업과 주거생활에 막대한 피해가 있으니 정부가 나서서 고성능 확성기, 징, 꽹과리 등 소음유발 도구 사용을 제한해달라는 것.

    “관계기관에 수차례 민원을 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참다 못해 나섰다. 당초 6월27일 집회를 계획했으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이날로 연기했다. 한때 정부종합청사 앞에 소음시위 자제를 촉구하는 안내판도 설치했지만, 참여정부 들어 집회·시위가 부쩍 증가해 무용지물이 됐다. 이 때문에 ‘언제까지나 살고 싶은 과천’을 모토로 한 이곳이 ‘데모하는 동네’로 비칠 정도니 주민 불편이 오죽하겠나.”

    과천시새마을회 백남욱 사무국장은 “경찰청에 사전신고했다는 이유만으로 집회·시위에서의 모든 행위가 용인되는 건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며 “과천이 살기 좋다는 소문을 듣고 비싼 집값을 들여 이사온 외지인이 막상 와서는 ‘이게 아니다’ 싶어 이사 가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과천시민들은 7월10일 ‘역(逆)시위’의 취지와 경과를 담은 건의문을 행정자치부와 경찰청, 환경부에 냈다.

    이념적 측면에서도 갈등 양상은 두드러진다.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조직들이 생겨나 기존의 보수-진보 양극화 구도를 깨면서 보수-중도-진보 성향이 혼재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 ‘안티 전교조’ 성격을 띠고 6월14일 출범한 ‘교육공동체시민연합’(상임대표 이상주 전 교육부총리), 경실련 사무총장을 지낸 이석연 변호사를 주축으로 한 이른바 ‘제3의 변호사단체’ 등이 대표적 사례다. 후자의 경우 9월쯤 결성할 예정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헌변)’과는 차별화된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보수·진보를 아우르는 인터넷 신문을 표방한 ‘뉴스앤뉴스’(대표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www.newsandnews. com)가 6월1일 공식 출범한 데 이어 안병영 연세대 교수(행정학) 등 중도 성향의 오피니언 그룹이 주도하는 인터넷 신문 ‘업코리아(www.upkorea.net)’도 8월15일 창간을 앞두고 있는 등 진보 일색이던 인터넷 공간에서도 이념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공존하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런 이념의 분화가 자칫 평행선을 달릴 경우 사회통합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기도 한다. ‘업코리아’의 창간준비위원회 운영위원인 임현진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벌써부터 주위에서 헐뜯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창간 준비과정에서부터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균열돼 있는지 체감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참여정부 들어 빈발하는 사회갈등은 DJ정부의 그것들과는 어떤 차별성을 지니고 있을까. 아쉽게도 그에 관한 연구보고서는 아직 나온 바 없다.

    “현 시점의 사회갈등 양상은 DJ정부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DJ정부 당시는 의약분업이 사회갈등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사회기득권 집단이 새로운 갈등주체로 등장했다는 의미를 갖긴 했다. 하지만 새만금간척사업이나 동강댐 건설 논란 등 다른 현안들은 사회적 이슈화는 됐을지언정 사회갈등으로까지 불거지진 않았다. 지금과는 갈등주체 및 양상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2001년 4월 ‘한국사회 갈등구조에 대한 이해’란 연구보고서를 낸 적이 있는 삼성경제연구소 김선빈 수석연구원은 “참여정부에서의 사회갈등 빈발은 정부출범 초기 이해관계 집단들과 밀월기간을 갖는 과거 정부의 ‘전통’을 잇지 못한 채 참여를 강조한 결과 사회구성원들의 기대치가 대폭 상승한 게 가장 큰 원인일 것”이라 분석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두루 갖춘 사회로 갈수록 갈등이 다양하고 복잡한 양태로 표출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갈등을 사전에 조정·해결함으로써 사회통합을 이끌어내는 기술(skill)적 측면에선 세련되지 못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특히 안일한 현실 인식이 문제다. 이를 방증하는 사례.

    5월29일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올해의 노사분규가 지난해 같은 기간의 절반 수준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얼마 후 노무현 대통령 역시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과연 그럴까. 물론 발언 당시까지의 단순 통계치만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노사분규의 양이 아니라 질에 있다.

    노동부 노사조정과(상황실)에 따르면 올 들어 발생한 전국의 노사분규 건수는 7월11일 현재(7월10일분까지 반영) 218건, 참가 노동자수는 7만5449명, 파업으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한 근로손실일수(파업 노동자수×파업일수)는 42만3094일이다. 이에 비해 지난해 같은 기간의 경우 각각 221건, 7만6011명, 92만1223일이다. 두 수치를 비교하면 올해 노사분규 건수와 참가 노동자수가 지난해의 수치에 육박함을 알 수 있다.

    노동부 노사조정과 김재락 사무관은 “노사분규 건수는 지난해와 비슷하지만 근로손실일수가 지난해의 절반 이하 수준”이라며 “지난해의 경우 38일간의 발전노조 파업 등 장기파업들이 발생했지만, 올해는 전체 조합원의 파업 참가나 큰 손실을 낳는 장기파업으로까지 확대되지 않아 노동현장의 파업 분위기는 실제 심각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부는 화물연대 파업으로 인한 물류대란 손실을 이 통계에 반영하지 않아 난센스나 다름없다. 노동법상 노조가 아니란 게 그 이유라지만, 그렇다면 화물연대의 운송 집단거부로 인한 사회적 손실은 일반 파업의 그것과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노사분규로 인해 국민들이 체감하는 사회적 혼란의 정도가 지난해보다 더 심한 이유를 노동부 통계는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의 갈등조정능력이 미흡한 수준이란 비판을 면치 못한다는 점이다. 두산중공업 분규, 화물연대 파업,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논란에 대한 정부의 미숙한 초기 대처방식은 차치하더라도 갈등해소를 위한 정책의 혼선은 여전하다. 되레 갈등을 격화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위기관리시스템도 ‘태업’중?

    7월1일 이정우 대통령정책실장이 노사관계의 새 틀을 마련하겠다며 제시한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에 대한 노동계의 반응도 떨떠름하다. 노동계와 재계 어느 쪽과도 한 마디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란 비판과 함께 해당 모델이 함의한 ‘노동자의 임금인상 억제’ ‘노동자의 경영참여’라는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노사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양측 모두, 한국 실정에 맞지 않아 되레 노동시장에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으므로 시기상조라는 입장인 것.

    더욱이 각계의 비판이 쏟아지자 고건 국무총리와 권기홍 노동부 장관은 7월10일 국회 노동분야 대정부질문에서 각각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을) 우리나라에 직접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공식적인 협의과정이 없었으며 이실장의 사견이다”고 답변하기까지 했다. 이런 오락가락 행태만 보더라도 한국노총이 노무현 정부에 붙인 ‘갈대정부’란 닉네임이 허투루 나온 건 아닌 셈이다.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정부의 경찰력 투입 이후 노동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실린 재계는 한껏 목소리를 높인다.

    “친노동자 성향의 발언을 해왔던 권기홍 노동부 장관이나 노사관련 당국자들이 화물연대 파업 이후 입을 꾹 다문 반면 오히려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말이 더 먹히지 않는가.” 전경련 이승철 조사본부장(상무)은 “정부가 초기에 노사문제에 관해 너무 오버(over)했었다는 게 재계의 기본적 시각”이라 말했다.

    정부의 갈등조정능력에 의구심을 품긴 노동계도 마찬가지. 친(親)정부적이란 평가를 받아온 민주노총마저 현 정부의 노동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노동계는 지지기반이 취약한 노무현 정부의 한계 때문에 출범 당시부터 재계와 보수세력의 공세를 제대로 막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솔직히 이회창이 싫어 노무현을 택한 노동자도 많다. 그런데 예상보다 너무 빨리, 출범 4개월 만에 ‘친노동자 정책’을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렸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경제부처가 모든 정책을 주도하는 한 노동정책은 뒤치다꺼리나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예전 노동부가 공안·치안부처의 하위개념으로 기능할 때와 다를 게 뭐 있는가”라며 “지금처럼 간다면 5년 내내 문젯거리가 될 것”이라 말했다. 한마디로 참여정부의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은 완전히 파탄났다는 것이다.

    이전 정부와 달리 참여정부엔 청와대와 관련부처를 연결하는 복지노동수석 직제가 없어 정책혼선을 더욱 부채질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DJ정부에서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을 지낸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지적.

    “복지노동수석이든 보좌관이든 해당 직제를 없앤 게 문제다. 현 정부가 그런 직제를 없앤 대신 정책실을 만들었는데 이는 부처를 제대로 관장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녀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 청와대가 전략적 기능에만 충실하는 건 좋지만, 그 때문에 청와대비서실 등이 개별적인 사회갈등 현안에 직접 개입해 갈등이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사회문제를 전담하는 수석비서관이나 보좌관을 반드시 두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그 자리를 신설하더라도 전문가를 앉혀야 한다. 위인설관(爲人設官)이 돼선 안 된다.”

    사회갈등을 조정할 기구의 부재도 문제다. 노대통령은 4월15일 국무회의에서 국무총리직속기관인 국무조정실의 주도 아래 갈등해소 원칙을 논의할 수 있는 사회갈등조정기구를 구성해 운영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까지 지지부진하다.

    7월11일 국무조정실에 따르면 현재 노사갈등 현안은 기존 노사정위원회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일반 사회갈등 현안은 5월부터 국무총리가 주2회 주재하고 있는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에서 논의하는 구조로 사회갈등에 대처하고 있다. 그러나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는 월 1∼2차례 열리던 기존 사회관계장관회의를 조금 확대한 것일 뿐, 공식적으로 별도의 사회갈등조정기구는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대통령 지시가 먹히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 국무총리실 관계자는 “대통령 말씀의 본질이 ‘지시’라기보다는 ‘검토’에 가깝다고 해석했다. 복잡다기한 사회갈등이 특정한 단일기구가 내놓는 단방(單方)으로만 해결 가능하겠느냐. 단일기구의 필요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주5일 근무제 등 ‘갈등 대기중’

    갈등양상이 조기에 수그러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노동계 하투가 마무리단계로 접어든 건 사실이지만, 새로운 갈등요인들이 잠재중이어서 ‘폭풍전야’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5일 근무제 도입을 둘러싼 노정 갈등은 올 하반기 최대 고비가 될 전망이다.

    민주노총은 여야가 7월 임시국회에서 임금·노동조건을 후퇴시킨 상태로 주5일 근무제 도입법안(정부 입법안)을 강행처리할 경우 7월23일 대(對)정부 총파업에 돌입하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에 대한 낙선운동까지 벌일 계획을 잡아둔 상태다. 한국노총 강훈중 홍보국장도 “주5일 근무제 도입은 정부도 부담을 느낄 만큼 큰 사안이다. 법안 강행처리에 대비해 저지투쟁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밝힌다.

    재계, 그중에서도 인력난, 판로난, 자금난이 겹친 중소기업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이상호 산업조사처장은 “주5일 근무제 도입은 대기업과 60%의 하청관계를 맺고 있는 중소기업 실정에선 시기상조다. 만일 그래도 도입해야 한다면 중소기업에 한해 단계적으로 유예기간을 두고, 별도의 정부지원책이 전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무원노조 허용 문제도 ‘준비된 갈등’으로 대기중이다. 64개 시민사회단체의 연대조직인 공직사회개혁·대학사회개혁과 공무원·교수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7월11일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사용자인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중인 공무원노조특별법안 입법화 일정을 중단하고 노정간 합의와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친 후 국회 심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공대위 관계자는 “6월23일부터 7월12일까지 노동부가 입법예고한 법안엔 명칭만 노조일 뿐,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실질적 교섭권은 물론 최후 수단인 단체행동권도 빠져 있고 단결권마저도 제한적이다”며 “졸속 법안을 고수하는 한 지난해 연가투쟁과 같은 노정갈등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성희 연구위원은 “올 하반기에 공공부문 임단협이 집중돼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제도개선투쟁이 큰 줄기를 이뤄 노동계가 파업보다는 시위에 주력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을 일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정책 일관성이 다소 떨어져 신뢰도가 낮고 갈등이 표면화돼야 사후처리에 급급하는 점만은 개선해야 할 것”이라 조언했다.

    해법은 원론적 접근에서부터

    그렇다면 갈등의 해법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참여정부는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수준의 현실에 비해 기대치를 지나치게 높여 잡았다. 국민소득 2만달러란 기대치부터 내려야 한다. 출범과 동시에 서민정치를 표방하며 ‘노동자는 약자다. 사회적 약자를 우선한다’는 화두를 던져놓으니 중산층 이하 사회구성원들의 요구가 동시다발적으로, 그것도 극단적 형태로 분출되면서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 것이다.”

    서울대 박효종 교수(정치학)는 “정부의 조정능력을 상회하는 무분별한 집단요구 분출은 아무리 훌륭한 시스템을 마련한다 해도 해결불가능하다. 시스템적 해법 이전에 자신을 사회적 약자로 여기는 사회계층의 가치관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도깨비방망이는 없다”고 지적한다. 결국 사회적 자원에 대한 재분배 욕구는 언제나 상존하는 것이니만큼 정부가 기대수준을 낮추는 원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갈등 없는 사회는 물론 발전이 없다. 그러나 지나친 갈등은 사회통합에 되레 저해요소가 된다. 현재 팽배해 있는 노사갈등과 이념갈등, 계층갈등에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갈등의 광풍까지 또다시 몰아친다면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갈등공화국’이 될 판이다. 사회적 상처는 더 깊어지기 전에 덧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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