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전문가·좌담적대적 관계에서 공존적 대립 관계로!!

  • 정리: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3-07-29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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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등은 때로 사회발전의 원동력일 수 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폭증하고 있는 각종 갈등들이 가뜩이나 위기상황에 처한 우리 사회를 총체적 난국으로 내모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높다. ‘신동아’는 최근 팽배한 사회갈등의 원인을 진단해보는 전문가 좌담을 마련했다(편집자).
    • 일 시 : 7월12일(토)
    • 장 소 :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무궁화실
    • 참석자 : 김석준(이화여대 교수·정치학·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 전상인(한림대 교수·사회학), 차병직(변호사·참여연대 집행위원장)
    • 사 회 : 황의봉(동아일보 출판국 부국장)
    전문가·좌담적대적 관계에서 공존적 대립 관계로!!
    사회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5개월이 채 안됐습니다. 그런데도 몇 년이 지난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만큼 국가적·사회적으로 힘든 고비들을 많이 넘겨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화물연대 파업, 조흥은행 노조 파업, 철도노조 파업이 잇달았고,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과 새만금사업 같은 국가적 시책을 둘러싸고 빚어진 극단적 대립도 아직 해소가 안 된 상황입니다. 최근엔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 문제를 놓고 평창·무주간 지역갈등 조짐마저 보여 그야말로 ‘갈등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돕니다. 이런 일련의 갈등현상을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선진국 진입은커녕 혼란과 퇴보를 면치 못할 것이란 위기감이 듭니다. 먼저 현 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갈등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말씀해주시죠.

    김석준 DJ정부에서 민주주의 공고화 단계를 어느 정도 거쳤습니다만, 아직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상황입니다. 다양한 집단의 욕구가 분출되는 데 반해 이를 조정·해결할 만한 민간부문의 자율적 능력이 부족하고, 정치권과 정부의 갈등관리시스템이나 의지도 불충분합니다. 다시 말하면 대통령의 성향, 대통령을 둘러싼 소수 권력엘리트의 문제해결 능력, 이들을 포함한 청와대 조직과 행정부처간 조정체계, 대통령과 총리의 관계, 정부와 집권여당 혹은 국회와의 관계 등 현 정부의 시스템 전반이 과거의 갈등관리시스템을 완전히 해체시켰다는 겁니다.

    그 결과 평상시의 갈등관리체계에서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사안마저 갈등으로 증폭되고 새 갈등을 유발합니다. 특히 북핵 문제 등에서 보듯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제관계에서도 미흡한 정부의 대응체계와 앞뒤가 맞지 않는 대통령의 언행 등이 되레 갈등을 증폭시킨 결과 국내 갈등과 국제적 갈등이 중층적으로 일어나 국민들이 더욱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차병직 갈등 측면에서만 보면 상당히 심각한 상태라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두고 마치 판도라 상자를 열어놓은 듯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선 정치분야를 보면 여야가 끝없이 정쟁을 벌이는데, 시각의 대립이 너무 단호해서 해결책이 안보이는 상태입니다. 노사관계와 관련해서도, 한쪽에선 파업을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주요인으로 보거나 심지어는 범죄시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선 최후 수단이라 할 수 있는 파업을 섣불리 사용하는 감도 듭니다.

    교육계에선 NEIS 논란에 따른 분쟁이 종식됐다고 볼 수 없을 것이고요. 환경분야에도 새만금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여성계 쪽도 호주제를 둘러싼 대립이 있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는 법치주의냐 불복종이냐 하는 대립도 있습니다.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 문제는 체육과 정치, 지역주의가 혼합된 갈등이죠.



    갈등의 전면화· 첨예화 두드러져

    전상인 두 분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회갈등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민주화가 진행되고 다원주의가 확대됨에 따라 각 계층의 기대수준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10년 혹은 20년 전에 비해 갈등이 확대되는 건 당연한 것이죠. 따라서 사회갈등이 분출되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억압됐던 과거 권위주의 시대를 그리워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문제는 노무현 정부 들어 사회갈등이 점점 전면화·첨예화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와 관련해서 저는 2002년 대선 후유증의 장기화를 들고 싶습니다. 정부 출범 5개월이 다 되도록 정권 출생의 비밀에 관련된 문제, 예컨대 대선자금 의혹이라든가 하는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 집권 이후 노무현 정부가 정책상의 실수를 꽤 많이 했다는 점 등이 사회갈등의 분출을 촉발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덧붙이자면, 이렇게 사회갈등이 폭발하다 보니 노동계나 시민사회단체 쪽에선 구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열렸다는 인식, 즉 세상이 바뀌었다는 인식 아래 기대치가 급상승하는 면을 보입니다. 이번 기회에 뭔가 한몫 챙겨야 된다거나 초기에 확실히 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기 어렵다는 생각들이죠. 그러다보니 최후 수단이 돼야 할 파업이 갈등 초기부터 등장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요.

    사회 현 시점의 갈등현상에 대해 개괄적으로 말씀해주셨는데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사회갈등의 심각성이 과거 정권이나 외국 사례의 그것과 비교할 때 특별히 심각한 상황인지, 아니면 사회발전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통과의례 수준인지 한번 짚고 넘어가주시죠.

    김석준 저는 지금의 갈등상황을 건국 이후 몇 번째 가는 매우 중요한 위기로 봅니다. 우리가 종종 총체적 난국이란 용어를 써오긴 했지만 그런 경우에도 정부가 최후의 보루로서 체제를 유지하려는 의지와 시스템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대통령이 위기관리자인지 아니면 위기조성자인지 모를 만큼 그야말로 국가의 존망이 흔들릴 정도로 심각합니다.

    사회 김교수는 주로 집권세력의 문제점에서 사회갈등의 원인을 찾는데요. 최근 노사갈등 얘기가 많이 나오면서 한편에선 실제 노사분규 건수는 줄었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실상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차병직 현 위기상황이 단순히 보다 공고한 민주화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기적 특성이 강해서인가, 아니면 갈등 자체의 질적 특성 때문인가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만약 후자 쪽이라면 정부의 대처능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선 정말 심각한 국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김교수의 의견과 달리 다소 낙관적이라고나 할까요, 전자 쪽이 더 우세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YS정부부터 군사독재를 탈피해서 민주화 과정에 들어섰다고 본다면 지금이 세 번째 정부인데 그 과정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갖췄는데 질적인 면은 갖추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회 전반의 개혁 요구는 좀더 조급해진 반면, 노무현 정부는 정치게임에선 승리해 정권을 차지했지만 수적으론 여전히 소수정권에 불과하단 말이죠. 소수의 권력화가 아직까진 세력균형 내지 역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에 봉착하는 것이라 보여집니다. 대통령의 말 바꾸기도 거기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이런 시기적 특성을 감안해서 노력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노동부 통계는 ‘숫자놀음’

    전상인 지금의 갈등양상이 낙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과도기적 현상이라면 참 좋겠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특수하게 일어나는 갈등이 많아 보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살아가는 시절이 특별히 어려운 때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고, 집권당에선 별 위기도 아닌데 일부 언론이 위기를 증폭시킨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지금의 갈등상황은 거의 해방 직후 정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사분규가 양적 측면에서 오히려 지난해 수준보다 떨어졌다고 정부는 설명하고 있지만, 제가 볼 땐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입니다. 지난해 파업은 4∼5월에 집중됐는데 금년엔 지금까지도 잇따르고 있거든요. 또 노동부의 파업 통계엔 화물연대 파업이 빠져 있습니다. 노동법상 노조가 아니니까. 그런 식의 숫자놀음은 굉장히 유감스럽습니다.

    노동계뿐 아니라 다른 이익집단의 욕구 분출도 거셉니다. 금년 상반기에만 대략 340개 가량의 새로운 이익집단이 사단법인 형태로 등록했고, 사단법인 지위는 못얻었지만 일단 단체를 결성한 경우가 그 2배에 달합니다. 대부분 집단이기주의 혹은 이익집단의 분출이라 볼 수 있는데, 열쇠업자라든가 프리랜서, 산삼 캐는 심마니, 대리운전자, 전국의 이장·통장들까지 전부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목적의 이익집단을 새로 결성한 걸 보면 해방공간을 방불케 합니다. 더욱이 이런 갈등이 거의 동시에 폭발하고 있는 데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도 사회갈등 간 상쇄기능이 전혀 없어 과도기적 현상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과도기적 현상 vs 제2의 해방공간

    김석준 갈등의 질적 특성과 관련한 얘기입니다. 최근 벤처기업 사장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이 회사에 노사분규가 나서 사장인 자기가 직접 노동위원회에 직권중재신청을 했대요. 중재결과가 임금 18% 인상으로 나왔답니다. 그래서 그 사장이 중재신청을 철회하고 노조랑 술자리에서 인간적으로 대화해서 결국 12%에 타결을 봤다는 겁니다. 이 일화는 정부가 노사간에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 이상으로 발을 들여놓아선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노무현 정부가 친노동자 성향의 정부라는 점이 실제 기업현장에서 부각되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최근 외신에서도 중국 대사의 표현을 빌려 ‘한국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중국보다 더 사회주의적인 나라라고 얘기한다’는 식으로 보도했는데, 실제 노동현장에서 그런 현상이 자꾸 일어나면 대기업마저 위축됩니다. 이런 문제는 곧 한국체제의 본질까지 저해하는 체제 내부의 위기가 되고 그것이 남북문제라든가 북핵문제, 특히 미국 대통령선거와 맞물려 최악의 컴비네이션이 됐을 경우 우리의 미래는 매우 심각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전문가·좌담적대적 관계에서 공존적 대립 관계로!!

    차병직 변호사

    사회 금년 들어 노사(勞使)대결보다 노정(勞政)대결 양상이 두드러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정부가 노사갈등에 개입하면서 어떤 때는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다가 다시 엄정한 법 집행을 강조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일관성 없는 노동정책으로 인해 분규의 양상이 노정대결로 표출된다는 겁니다.

    전상인 한편으론 법과 원칙, 다른 한편에선 대화와 타협. 그게 이 정부의 노동정책이라는데, 그것은 사실상 정책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법과 원칙에서부터 대화와 타협까지 스펙트럼을 넓게 가져간다는 얘기만 미리 퍼뜨려놓고 확실히 정립된 정책은 없이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혹은 포퓰리즘적으로 대처하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부 내에서도 어떤 사람은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 또 어떤 사람은 영미식 모델을 주장하고, 이게 부처간에도 다르고, 어제 했던 말과 오늘의 말이 또 다릅니다. 정부가 오히려 노사갈등, 노정 대결을 부추기는 것 아닙니까.

    차병직 사실 지금 당장의 결과만 놓고 보면 정부가 질타를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 정부에 대한 지지자들까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법과 원칙, 대화와 타협, 이 두 가지를 다 끌고가겠다는 것은 전교수 말씀처럼 일관된 하나의 정책을 밀고 나가기보다 그때그때 구체적 사안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 같은데, 그것도 큰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정책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것이 일반적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정부 내의 의사결정 시스템부터 점검해서 다양한 이익집단의 목소리를 가능하면 그대로, 강제로 조작하거나 가리지 않고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정부 내에서마저 갈등현상이 빚어지는 것처럼 외부에 비친다면 국민들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분명 있을 겁니다. 정부 소신과 무관하게 외부의 다수가 그렇게 바라본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면 정부 스스로 그런 부분을 조절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김석준 대통령 스스로는 원칙과 타협 양쪽을 왔다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어도 실제 갈등을 조정하는 주체들이 해당 사안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화물연대 파업, 울산지역 파업의 경우 그쪽의 고문변호사였거나 아니면 그쪽과 커넥션이 있었던 분들이 국가정책의 핵심을 담당했고, 그런 사람들이 노동부에까지 입장을 강권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시스템을 좌지우지하게 되고 정책 자체도 혼란스러웠으며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마저 중립적일 수 없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노사문제에 있어 노정 대결을 자초하고 있는데, 지금과 같이 그런 사람들과 시스템을 그대로 두면 앞으로도 대통령 의지와 무관하게 정책이 표류하면서 위기를 증폭시킬 우려가 큽니다.

    일관된 노동정책은 있는가

    사회 최근 노사갈등의 특징을 보면 이른바 생계형보다는 자기 몫을 더 찾겠다는 집단이기주의형이 많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자본가보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을 빼앗는다는 지적도 있었고 노동귀족이란 표현도 나왔습니다. 현재의 노사갈등을 정부의 노동정책이나 시스템의 부재 등의 문제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노동운동 자체도 과거에 비해 크게 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상인 노조 혹은 노동자 일반에도 좀 문제가 있어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반드시 노조의 잘못이라는 건 아니지만, 우선 우리 경제가 8년째 국민소득 1만달러에 멈춰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고요. 그 원인이 집단이기주의건 파업이건간에 국민소득이 멈춰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정부가 기대수준이 높아진 국민들에게 줄 게 없다는 얘깁니다. 그 다음에 갈등이 벌어지면 갈등을 처리할 수 있는 제도적 메커니즘이 필요한데도 노동자 없는 노조, 시민 빠진 시민운동, 당원 빠진 정당정치 등 사회갈등의 콘텐츠는 다 빠지고 껍데기나 간판끼리만 모여서 다 토해내기 때문에 갈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국민 빠진 정부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형적인 사례로서, 지금 노조 지도부가 노동자들의 일반적 이익과 정서를 얼마만큼 대변하고 있는지, 그 대표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전문가·좌담적대적 관계에서 공존적 대립 관계로!!

    전상인 교수

    차병직 노사갈등과 관련해서 두 가지점에 대해 전문적으로 분석했으면 합니다. 방금 말씀하신 오랜 경제적 침체, 경제 불안정의 원인이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만, 과연 노사갈등이 경기침체와 불황의 주원인이냐 하는 점은 좀더 전문적으로 밝혀야 할 것 같고요. 두 번째는 노동계의 투쟁이 자제된다고 할 때 과연 이것에 힘입어 경제가 상당 부분 회복되고 문제가 해소될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문제들, 즉 시장경제의 부작용과 빈부격차 등을 감안한다면 노동계 투쟁이 약화된다고 해서 경제상황이 과연 만족스런 수준으로 해결되겠느냐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이런 부분은 전문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또한 지금 노동운동의 순수성이랄까 노조 지도부의 대표성과 관련해서 얘기하면, 겉으로 볼 때는 대표성이 과거에 비해 박약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에도 이른바 대의제 원리가 도입되고 있습니다. 단위노조 조합원들의 의사를 일일이 확인한 뒤 거기에 기초해서 노조 지도부가 의사를 결정하고 집행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의 의사결정과정에도 어느 정도 대의제 원리가 적용되는 겁니다. 저는 노동계가 최근 파업을 철회한 사례들이 반드시 법무부 장관의 법과 원칙 천명 때문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일반적 흐름이랄까 여론을 감지한 결과 그럴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도 역시 대의제 원리가 작용했다고 봅니다.

    전상인 차변호사가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두 번째 부분은 제가 이해를 했고요. 앞 부분 말씀에 대해 혹시 오해를 할까봐 말씀드립니다. 저는 노사갈등이 경제 불안정의 원인이라고 말한 게 아니라 8년째 답보 상태인 경제수준을 감안할 때 지금 상태에서 자본영역이 노동영역에 양보할 게 거의 없다는 겁니다.

    김석준 차변호사가 제기한 (경제 불안정과 노사갈등의) 인과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여러 차원에서 검증이 필요할 겁니다. 그건 순수경제, 노동경제, 정치경제적 측면을 종합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얼마 전 어느 전문연구기관에서 한국이 N커브로 갈 건지 M커브로 갈 건지 현재 기로에 서 있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노정관계라고 지적했더군요. 여러 가지 국제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연구보고서인데, 저는 전문가는 아니니까 일단 국내외 전문가들이 발표한 것이란 점에서 그 보고서에 어느 정도 신뢰성을 두고 싶습니다. 따라서 보고서가 지적한 변수들이 우리가 2만달러 시대로 갈 거냐, 아니면 1만달러 수준에서 맴돌 거냐, 그도 아니면 더 추락할 거냐 하는 점에선 상당히 중요한 변수일 거라고 봅니다.

    다음으로 노조의 대의제 문제인데, 대의제가 제대로 구현되려면 비정규직 노동자나 청년실업자 등의 이익까지 대변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소수의 조직화된 노동자만 대변한다면, 정치권에서 대의제가 실패로 나타났듯이 결국 노동운동에서도 실패로 이어질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노동운동에 있어 대의제가 제대로 구현되려면 비정규직 등의 이익까지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나왔습니다만, 실제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우리가 좀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사회갈등 측면에서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정부 정책도 그렇고, 노사 혹은 노노간에도 그럴 텐데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핵심적인 노동문제의 하나로 규정해서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차병직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제도상으로 볼 때 사용자의 입장을 고려해준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방치하면 또 하나의 큰 갈등요인이 될 게 뻔하고 이미 갈등이 일부 표출된 단계이기 때문에 대책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그 부담을 다시 사용자측에만 떠안긴다는 건 문제가 있을 것 같거든요. 결국 국가의 능력이 된다면 부분적으로라도 사회보장의 한 형태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떠안아야 한다고 봅니다.

    전문가·좌담적대적 관계에서 공존적 대립 관계로!!

    김석준 교수

    전상인 실업문제도 고려해야 할 겁니다. 지금 몇 년째 청년실업이 문제이고 대졸자의 노동시장 신규 진입이 바닥인 상태입니다. 이것이 몇 년 더 지속되면 우리 사회의 연속성을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빨리 손을 써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노동시장의 단절을 경험할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김석준 결국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문제에 달려 있죠. 강성 노조가 있어 노동시장이 유연성을 잃어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기업의 경우도 실제 노동자들 가운데, 이건 정확한 건 아닙니다만, 노동자들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자기 보수 이상으로 생산성이 높고, 3분의 1 정도는 비슷하고, 또 3분의 1 정도는 훨씬 못한 상태라는 겁니다. 이 때문에 3분의 1의 노동자들은 노조의 복지시스템에 기댈 뿐 스스로 능력개발이나 재훈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것이 사회적 비용으로 나타나고, 그 비용을 치르는 게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청년실업자들입니다. 청년실업자들이 계속 쌓이면 사회 전체의 활력이 줄어듭니다. 따라서 강성 노조의 어떤 반대가 있더라도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노동시장의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번 대통령이 노조 지도자들과 강성 노조가 비도덕적이라고 진단한 점을 일단 높이 사고 싶고, 그 진단이 정책으로까지 연결되길 기대합니다.

    네덜란드식 모델의 문제점

    사회 노사문제의 근본 해결책으로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이 제기한 이른바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습니다. 네덜란드식 모델이란 게 임금인상 억제,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 사회보장 지출 확대, 노조의 경영참여 인정 등을 특징으로 하는데, 우리나라처럼 노사간 대립이 격화돼 있는 풍토에서 가능할 것이냐 하는 회의적 반응이 많습니다. 네덜란드식 모델의 한국적 수용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김석준 정책실장이 두어 차례 재확인까지 해가며 경제인들에게 네덜란드식 모델을 강변했는데 그저께 국회에서 총리와 노동부장관이 부적합하다고 얘기했습니다. 정부 스스로 이 모델이 적합치 않은 걸로 판단한 것 같아 다소 안도가 됩니다.

    여러 전문가들이 이 모델의 부적합성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경영참여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북유럽의 경우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고 이미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 3만달러 혹은 그 이상에 있는 나라들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국민소득 1만달러 선에서 그들을 모델링한다는 건 적합하지 않습니다.

    전상인 네덜란드식 모델이건 영미식 모델이건 간에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노무현 정부만큼 노동정책이나 다른 정책을 놓고 이렇게 특강과 토론을 많이 하는 정부도 없었던 것 같아요. 걸핏하면 대통령이 회의에서 정책을 토론하지 않나, 관료집단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지 않나. 정부는 회의하고 결정했으면 집행하면 되는 거지 무슨 특강이나 토론을 그렇게 많이 할 필요가 있습니까. 네덜란드식 모델이든 영미식 모델이든 한국식 모델이든 그것은 지난 대선 공약에서 이미 다뤘어야 합니다. 인수위원회 활동기간도 줬고, 지금도 별도로 정책기획위원회란 조직이 있는데 이제야 노사관계 모델을 놓고 정부인사들이 서로 의견을 내세우고 누구는 안 된다고 하는 걸 보면 대체 대선과정과 인수위 시절에 뭘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차병직 그 부분에 관해선 저도 그렇게 오래 끌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분야에서도 이미 경험한 바이지만, 본질적인 문제가 제도 때문에 좌우된다고 볼 수는 없거든요. 우리 머리로 고안해낼 수 있는 절대적이고 최선의 제도가 있다면 누구든지 그걸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네덜란드식 모델이 우리 실정에 맞지 않다고 방향을 선회한 것 같습니다. 사실 노동자들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사회 네덜란드식 모델 논란을 보면서 이 모델을 제시했던 측도 이를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제시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풍토가 다르기 때문에 어차피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가 제기된 것을 계기로 기존의 노사정위원회와 네덜란드식 모델을 뛰어넘는 제3의 한국적 노사관계 모델을 창출할 실마리를 찾을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김석준 그 문제를 간단히 보고 싶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계속 위기를 관리하라고 하니까 노무현 정부는 ‘시스템이 제1인자’라고 강조했거든요. 노무현 정부가 과거 DJ정부에서 나름대로 가동됐던 노사정위원회를 대체하기 위해 등장시키려던 것이 네덜란드식 모델입니다. 물론 이것이 불발로 끝났습니다만 저는 단순하게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SK문제만 하더라도 거의 SK가 외국에 넘어갈 뻔했잖습니까. 마지막 협상단계에서 노조 대표는 없었습니다. 만일 노조 대표가 1명이라도 참여했더라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노사문제에 대한 현 정부의 의도가 아직 충분히 익지 않았을 뿐이지 상당히 여러 형태로 준비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석준 우리의 경우 현재 산별 노조를 점차 강화하는 입장이고, 복수노조도 인정하고 그래서 강성노조가 강화된 상황이어서 네덜란드식 모델이건 북구식 모델이건 사회민주주의 내지 사회조합주의 형태로 나아간다는 건 현실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될 겁니다.

    전상인 결국 체제의 성격과 관련한 문제인데, 네덜란드식 모델 논쟁은 우발적인 일과성 해프닝이라기보다는 현 정부의 정책 개념화 과정에 잠복돼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도 이런 식의 이슈가 계속해서 튀어나올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차병직 네덜란드식 모델이라는 이름보다 내용이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 다행히 현재 네덜란드식 모델을 고집하는 사람은 없으니 다른 대안을 마련하긴 해야 하는데, 그건 이미 외국에서 사용중인 모델도 있고 각종 연구단체의 연구결과도 있을 겁니다. 남은 건 어떤 절차에 의해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 같고요.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사회주의’란 용어 자체에 대해 너무들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겁니다. 지구상엔 순수한 사회주의체제나 자본주의체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헌법에서도 사회주의적 요소를 수용하고 있는데 그런 추상적 부분에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다가 구체적 부분에 가서는 내용을 따지기도 전에 용어에 집착하곤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형식적인 용어 때문에 본질적 내용에 관한 논의가 막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당정치의 퇴색화도 큰 문제

    사회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갈등현상과 그 원인, 노사문제 등을 다뤄봤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나아가 사회통합을 모색해야 하는데 그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요?

    전상인 정계개편 얘기가 자꾸 나오고 있고 싫든 좋든 총선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갈등이 또다시 어떻게 연출될지 정말 걱정됩니다. 저는 사회갈등을 중재하는 데 일조해야 할 정당정치가 지금처럼 활력을 잃은 시절이 있었던가 반문해 봅니다. 특히 집권여당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부터 공당의 입후보자를 광고하면서 새천년민주당 이름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제대로 밝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후보를 내 용케 당선을 시켰지요. 그후 사회갈등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집권 이후 5개월 동안 대체 민주당이 뭘 했느냐는 겁니다. 계속 신당 논의와 당내 갈등만 빚어왔잖아요. 이도저도 못하는 집권여당, 전반적으로 정당정치의 퇴색화가 큰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대철 대표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하루빨리 여당이 집권당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 정권이 소수정권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은 채 일종의 자기도취에 빠져 있고 한쪽에선 피해의식에 가득차 있으니 문제가 제대로 풀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집권세력이 반대당 혹은 반대편 사람들을 인정하고, 또 현 정권에 대해 반대했던 이들도 정권의 실체에 대해서 인정해야 합니다. 적대적 관계로부터 대립적 공존관계로 빨리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우리나라에서는 ‘보수’라고 하면, 당하기 쉽고, 노골적으로 ‘사회주의자’란 말도 쓰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중도’라는 표현 속으로 숨거나 위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해야지 산술적 균형을 통해 중도를 지향한다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차병직 갈등 상황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 일반적 방법론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각론적 차원에서 논의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앞의 말을 이어서 하면, 중도적 입장을 우리가 확정하고 그 세력을 넓혀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중도라는 간판 아래 뭔가를 슬쩍슬쩍 숨기는 게 아니라 가능하면 조금씩 드러내게 하고, 다른 걸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원인이란 게 따지고 보면 절대적 원인보다도 상대적 원인, 즉 각 영역의 갈등들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인 것 같거든요.

    따라서 각 분야의 갈등은 이해집단간 대립을 좁히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의사소통과정에서 토론문화가 완성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과거에 비해 토론의 수는 많아졌지만 TV토론 등을 보면 토론의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것 같습니다. 논쟁을 벌이더라도 옳고 그름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서 따지는 게 아니라 뭔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좋고 싫은 감정만 있습니다. 그래서 토론을 아무리 오래 진행해도 마지막에 가서는 전화나 인터넷을 통한 형식적인 투표결과만 내놓고 끝나는 것이지요.

    김석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행위자들간의 신뢰 회복입니다. 정부든 대통령이든 청와대든 총리든 그 누구든간에 특정 이해집단을 상대로 중립적인 본연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갈등은 현장에서 끊임없이 유발됩니다. 따라서 그 갈등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해 우선 대통령 스스로 확고한 입장을 지니는 한편, 갈등을 조장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그것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려는 경향에서 벗어나라는 거죠.

    또 그동안 언론에서도 문제가 됐습니다만, 대선 논공행상을 6개월에 끝낸다고 했으면 다음 총선에 출마할 참모들을 늦어도 8월까지는 내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임을 또 다른 운동권으로 채우지 말아야 합니다. 청와대 조직도 지금처럼 비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정권에서나 청와대 조직은 초기엔 줄었다가 말기에 가서 늘어나게 돼 있는데 현 정부의 경우 DJ정부 말기의 숫자보다도 인원이 100여 명 이상 많습니다. 그리고 자문위원들을 수십명씩 배정해 가동하는, 특히 비전문가들을 앉혀놓고 가동하는 각종 위원회와 태스크포스는 마땅히 개선해야 합니다.

    국가기관부터 법과 원칙 지켜라

    전상인 저는 집권층이 지난 대선을 치르면서 부각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여전히 갖고 있고, 국민 전체의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아니라 일부 세력의 대표자와 같은 생각, 즉 대선운동 당시에 가졌던 마인드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유감스럽습니다. 현 정부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오버’하는 경향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요즘 많이 나오는 언필칭 국가개조 이야기인데, 개혁이나 변화 대신 국가개조라고 칭하는 것은 우리의 체제 성격을 감안해볼 때 단순히 말 잘하는 대통령의 재미있는 말이 아니라 심각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국가정책의 목표와 관련한 언론의 비판에 대해 정부를 헐뜯는다고 생각한다든가, 언제 너희들이 나를 대통령으로 인정했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건 명백히 현 정권의 오버입니다.

    차병직 갈등해소 의무는 전 사회구성원들에게 있습니다. 물론 갈등을 완전히 없애면 좋겠지만 대개는 완전히 해소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볼 때, 사회구성원들이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완화시키는 정도만 돼도 성공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쭉 이야기했던 우리 사회의 갈등이란 것에는 존 롤스가 말한 대로 ‘이성적 의견 불일치’ 상황이 전제돼 있다고 봅니다. 도덕성에 호소하건, 이론에 호소하건, 현실에 호소하건 관계없이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의 의견이 일치될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습니다. 결국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갈등해소 문제가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조직적 측면에서 국가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기업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각각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가 정당과 언론입니다. 특히 국가와 개인적 측면에서만 생각해보면, 국가는 이제 무엇보다도 실질적으로 투명해야 합니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국가기관의 도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 다시 말해 법치주의가 일반 국민들에게 잘 먹혀들지 않는 근본 이유는, 기본적으로 국가기관 자체가 우선 법을 잘 안 지킨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실증적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봐도 그렇고요. 오늘 이 시간에도 법정에서 국가를 상대로 하는 수많은 손해배상소송이 벌어지고 그 중 상당수가 승소하고 있는 건 다 국가기관들이 행정편의주의에 빠져 먼저 법을 안지켜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과 원칙이 사회 전체에 잘 먹혀들지 않습니다. 국기기관 스스로 먼저 법과 원칙을 지키면 사회는 당연히 투명해지고 솔직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돼야 합니다.

    다음으론 개인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일차적으론 개인의 자발성에 맡겨야겠지만 개인이 어떤 결정을 어떻게 하도록 사회가 유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는 국민들을 상대로 한 계몽적 캠페인으론 전혀 실효성이 없습니다. 이런 역할을 어느 정도 담당해줄 수 있는 게 NGO입니다. NGO가 결정적 역할은 못한다 해도 부분적 역할은 담당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NGO라고 하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운동을 주로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NGO들이 제각기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되면, 즉 국민들의 건전한 참여를 유도해낼 수 있다면 사회갈등 해소에 큰 보탬이 될 겁니다.

    NGO도 사회갈등 해소의 주체로 나서야

    사회 NGO 말씀을 하셔서 덧붙이자면, 사회갈등을 해소하는 데 사회지도층 지식인들의 역할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새만금 문제를 놓고 종교지도자들이 3보1배 고행을 했는데, 저는 그걸 보면서 상당히 공감하고 존경심을 금치 못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게 정답은 아닌데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습니다. 이런 난제일수록 합리적인 토론에 의해 문제 해결에 접근해야 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석준 저도 기본적으론 우리 사회 전체가 공동체로서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문제 해결도 하고 경쟁을 통해 미래에 선진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건 기업들뿐 아니라 시민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노조 대중과 노조 집행부간의 대의제 관계를 얘기했습니다만, 그것을 일부 보완할 수 있는 게 NGO입니다. 노조다 무슨 단체다 하면서 적나라하게 이익투쟁만 하는 집단이기주의 현상을 견제·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 이를 통해 시민사회 전체의 역량을 성숙시키는 게 NGO의 본분입니다.

    그 다음 역할이 기업의 불투명성이나 정경유착 등을 견제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NGO 자체의 역량을 키운다기보다 정치권이나 기업 등 타 영역의 잘못된 점을 고치는 쪽으로 많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물론 그 점은 국가 실패나 시장 실패라는 구조적 한계로 인해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이기도 합니다만, 시민사회도 2000년대에 들어 역량이 매우 커졌기 때문에 때로는 그런 실패과정에 적잖은 요인들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NGO는 NGO대로 그런 부분을 보완하고 각 분야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세계화된 시장에서 국민소득 2만∼3만달러의 선진국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near-government’는 곤란

    전상인 아까 새만금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저는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분들이 지난번 촛불시위 때 시청 앞에서 화형식에 참가하는 걸 보고 정말 갈 때까지 갔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반생명적인 일에 성직자들이 참여하는 걸 보니 굉장히 아찔하더군요. 조금 전 김교수의 말씀은 우리가 가야할 이상적인 방향을 설명한 것인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노무현 정부와 친한 NGO가 ‘non-government’가 아니라 ‘near-government’ 혹은 ‘new-government organization’으로서 기능하는 현상들도 나타나곤 하는데 이젠 NGO도 본연의 임무로 빨리 돌아와야 한다고 봅니다.

    어쨌든 갈등의 최종 집결지는 국가권력일 텐데, 노무현 정부의 집권과정에서의 도덕적 하자가 계속 드러나고 있고, 집권 이후 개혁정책이 계속 표류함으로써 과거 정권에 비해 확실한 비교우위를 보여주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앞으로 4년 반 동안 정권은 정권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힘든 시기를 겪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차병직 NGO 역할 문제에 대한 제 생각을 한두 가지 덧붙이겠습니다. NGO 지도자들이 뭔가를 선동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NGO활동을 사회운동의 하나로 본다면, 운동의 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하는 부분은 늘 있어왔습니다. 운동의 효율성 부분에서도 그게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입니다. 사회운동의 하나로서 벌이는 NGO 활동이 별 영향력이 없을 때는 그것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이 다소 허용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자제할 필요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를 포함한 NGO 지도자들의 행동이 전적으로 그들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건 아닙니다. 이벤트성이 있는 활동의 경우 지도자 한두 사람의 의사에 의해서 결정된다기보다는 나름대로 단체의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결정되죠.

    다음으로 NGO 역할과 관련해서, NGO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고들 하는데 본연의 임무라는 것을 정하기가 상당히 곤란한 측면이 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NGO는 경우에 따라 어떤 목적으로도 설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자기들이 내세우는 주장의 경쟁력을 얼마나 키우느냐에 활동의 성패가 달려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안정될 때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정치운동을 포함한 종합적 시민운동이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NGO가 사회의식이 없는 수많은 국민들을 흡수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사회적 의무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사회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갈등현상과 그 원인 등에 대해 다양하게 짚어봤습니다. 제 느낌으론 전체적으로 현 정부의 책임이 역시 가장 크지 않느냐, 거기서부터 문제 해결이 시작돼야 하지 않느냐는 데 대체로 의견이 접근한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기업, 노조, NGO 등 각 갈등의 당사자들이 다 함께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들이 대화와 타협의 원칙을 지키는 데서부터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만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장시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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