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미국은 ‘뉴 아시아’에 코드 맞춰라

‘포린 어페어스’ 특약

  • 번역: 송의정

    입력2003-07-29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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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의 정치·경제·사회 기상도는 한치앞을 내다보지 못할 만큼 급변하고 있다.
    • 이에 따라 한국, 중국, 일본, 북한, 대만, 아세안 국가 등을 둘러싼 안보 환경도 예측불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미국의 낡아빠진 對아시아 전략을 본질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두 아시아 전문가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2003년 7/8월호에 기고한 ‘Adjusting to the New Asia’ 기사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편집자)
    • 모튼 에이브러모위츠/미국 센추리재단 선임연구원·전 주태국 대사
    • 스티븐 보스워스 미국/터프츠대 플레처스쿨 학장·전 주한국 대사
    미국은 ‘뉴 아시아’에  코드 맞춰라
    오늘날 미국과 태평양 연안국들의 관계는 대서양 건너편 국가들과의 관계만큼이나 불확실하다. 동아시아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전략적 위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 2010년 경이면 이 지역에서 미국의 역할과 군사 정세는 2000년대 초입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같은 변화는 동아시아 내부의 변화 추세에서 그 원인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미국은 이를 통제하기도, 영향력을 미치기도 어렵다. 미국의 역할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두 가지다. 첫째는 중국의 경제적·지정학적 부상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 경제의 활력 감소인데, 이는 일본의 역내 영향력을 축소시킨다. 아시아 지역 투자 및 기술력의 원천으로서 일본은 앞으로 수년간 이 지역의 경제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아직까지는 상당한 수준이라 해도 줄어들고 있는 게 분명한 현실이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다른 국가들의 중요도는 높아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이 첫손에 꼽힌다. 한국은 놀랄 만큼 빠른 경제성장, 민주주의의 발전, 그리고 세대변화를 통해 단호하고 독립적인 새로운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

    이에 비해 오랫동안 미국의 후견 아래 경제력을 키워온 대만의 국제적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면서 점차 중국 경제로 통합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 대만 간의 평화적 화해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고조돼 있다.

    아시아 밖의 변화 또한 이 지역에서 미국의 역할에 영향을 준다.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집착을 그 첫 번째 사례로 들 수 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추구해왔다. 그런데 테러와의 전쟁은 이러한 전통만큼이나 중요하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형편이다. 이 같은 우선순위의 변화, 그리고 국제적 지원이 미미한데도 미국이 전세계적 요구를 재고하면서까지 전쟁을 벌일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아시아와 여타 지역에서 오랜 우방이었던 미국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극단주의자 증가세에 주목케 했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개입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일례로 최근 미국은 필리핀의 소규모 전투에 병력을 파견했다.

    미국은 아시아의 이러한 변화에 맞춰 1990년대의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1990년대의 전략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이 이른바 ‘중심축과 부챗살(hub and spokes)’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즉 미국과 아시아 주요국의 양자관계, 그리고 미국·중국·일본의 3국 관계에 좌우된다는 시각이다. 물론 이들 관계의 중요성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미 동아시아의 유일한 세력 균형축 노릇에서 벗어나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의 전략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상상키 어려웠던 새로운 관계를 발전시켜가고 있다.

    지역내 다른 국가들 또한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북한과 대만을 둘러싼 지속적인 긴장 때문에 어느 정도 제한받아왔지만, 이 지역 국가들의 세력과 영향력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한국 선심정책에 의존하는 북한

    지난 50년간 한국은 미국의 대(對)아시아 외교정책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반도 문제는 미·일 안보동맹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미쳐왔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상황은 미국의 대 아시아 전략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지역을 휩쓸고 있는 변화에 대해 논하려면 한반도를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남북한 관계는 이미 극적인 변화에 돌입했다. 맹렬한 적대 상태에서 벗어나 신중하되 가시적인 화해 분위기로 전환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과 중국의 관계도 확대되고 있다. 중국이 여전히 북한을 원조하고 있는데도 그러하다. 이에 비해 한미관계는 상당히 위축됐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김정일 정권의 전체주의적·군국주의적 본질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노골적으로 북한의 환심을 사려 했다는 점과 상호주의의 결여, 그리고 한국에 그릇된 안보관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지만, 그의 전략을 떠받치는 이념은 이미 뿌리를 내렸다.

    한국은 경제력을 활용해 남북한 관계를 냉전시대의 대결 국면으로부터 조심스럽지만 평화로운 공존 상태로 이끌어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주목을 끈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한간의 빈번한 접촉은 많은 한국인들-특히 남한 국민-에게 전쟁에 대한 공포를 줄여줬다. 남한 국민들 가운데 곤궁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나 미사일 능력이 적어도 자신들에게 명백한 위협이 되리라고 믿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많은 남한인들, 특히 젊은 계층은 북한이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선의 대상이라고 여긴다.

    북한은 남한의 선심성 정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경제개혁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국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데는 실제적·정치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선거운동 당시 김 전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밝힌 바 있고, 현재 한국민들은 핵무기 대책이나 포용정책에 들어가는 비용 부담보다는 북한의 붕괴를 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균형상태는 여전히 가변적이다. 만일 김정일이 자신의 공갈과 핵도발-특히 그 부작용-에 대한 한국의 인내심을 과대평가한다면 그의 벼랑끝 전술은 결국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중국은 남북한 두 나라와의 관계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신뢰는 1992년의 충격적인 한중수교 이후 다소 빛이 바랬지만, 중국은 여전히 북한에 대해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영향력은 중국이 북한 수입 연료의 70∼90%를 공급하는 등 대규모 원조를 계속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그런가 하면 한중관계의 발전 또한 인상적이다. 지난해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가장 큰 수출시장으로 부상했다. 한국 기업들은 제3세계 시장에서 중국의 저가 공세로부터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한편으로 외국 기업들과 대중국 투자 행렬에 가세하고 있다. 또한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처하는 데 있어 양국의 이해관계가 다르지 않다 보니 한중간의 정치적·군사적 유대도 탄탄해지고 있다.

    한미관계 균열은 미국에도 책임

    이렇듯 한중관계는 강화되고 있으나 한미관계는 갈수록 어려워져간다. 지금과 같은 긴장상태는 비약적인 한국 경제 성장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경제성장은 한국인들에게 행여 북한과 다시 전쟁을 치를 경우 그 손실의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겨줬다. 한미관계는 과거에도 종종 갈등을 빚은 바 있지만, 두 나라 사이엔 북한의 위협이라는 공감대가 있기에 이견을 조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인들은(물론 한국인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위협을 더 이상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주한미군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지난 대선 기간 내내 출렁이던 반미의 물결은 다소 진정된 듯하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이 한국을 불평등하게 대우하고 자신들의 관심사를 무시한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미국의 행태 또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햇볕정책의 가치가 어떤 것이냐에 상관없이 부시 행정부는 애초부터 이를 탐탁해하지 않았다. 김정일 정권과는 어떠한 형태의 거래도 하지 않으려는 듯한 부시 행정부의 태도 역시 한미관계에 균열을 가져왔다. 더구나 지난해 10월 북한이 비밀리에 핵무기 프로그램을 진행시켜온 사실을 인정하면서 골은 더 깊어졌다. 처음에는 이 문제에 대처하려는 양국의 전략이 상이했던 것이다.

    한국은 당장 대량의 재래식 무기로부터 수도 서울이 위협받고 있는 형편이라 핵 문제라든지 북한이 테러국가 등으로 핵 물질을 유출할 가능성(이것은 미국의 최대 관심사다)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이후 한미 양국은 최소한 수사(修辭)적으로나마 이견을 좁혀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인들은 미국의 진정한 의도가 대화를 통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김정일 정권의 교체에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한다. 그들은 미국의 이 같은 접근방법이 전쟁 혹은 북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둘 중 어느 경우든 한국이 지금껏 쌓아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은 ‘뉴 아시아’에  코드 맞춰라

    조선인민군 창설기념일을 맞아 평양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북한군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불화는 이미 이 지역 미군 배치 상황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존재 목적은 사실상 북한을 억지하는 데 있지만, 미국의 관료들-적어도 최근까지는-은 북한의 위협이 종결된다 해도 일부 미군은 그대로 남아 역내 균형세력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이러한 생각이 환영받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측 모두 이러한 인식에 회의를 갖고 있으며, 이 지역에 배치된 미군을 감축해야 한다는 압력이 고조됐다. 북한은 경제 침체로 인해 재래식 군사력이 위축돼가고, 한국군은 보다 강력해지고 있다.

    최근 들어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민들의 불만이 거세지자 로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주한미군의 주력부대를 서울 남쪽으로 배치하고 병력 감축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고성 발언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그간 바라던 것들에 대해 재고하게 만들었다. 한국 정부는 재빨리 주한미군 주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군 주둔에 반대해온 한국인들이 지금은 비무장지대에서의 미군 철수가 미국의 북한 핵시설 공격을 더욱 용이하게 하리라고 걱정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정일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주한미군 정책을 바꾸기로 결정한 것 같다. 우선 주한 지상군을 재배치한 다음 나중에는 병력을 감축하겠다는 것이다. 한미 양국의 이견과 북한의 현존하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주한미군 재배치 협상을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미군이 갖춘 첨단 기술을 고려하면 북한의 공격을 억지하기 위해 더이상 대규모 지상군을 전선 가까이에 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미일동맹

    주한미군의 입지 변화는 주일미군의 규모와 임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주일미군 기지들은 오랫동안 진통을 겪어왔다. 미일동맹은 근 50년간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기반이 되었다. 일본은 지금도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며, 높은 수준의 개인 소득과 첨단 기술력을 자랑한다. 여전히 가치 있는 동맹국인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경제성장의 활력이 떨어지면서 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퇴색됐다. 미국의 입장에선 일본의 전략적 중요성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1980년대에 주일 미국 대사 마이크 맨스필드는 “미일관계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단언해 주목을 끌었지만, 그의 발언은 더 이상 공감을 얻지 못한다.

    근래 일본의 안보전략은 조심스럽게 수정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는 미국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한 예로 미국은 얼마 전 일본이 미국의 대아프가니스탄 작전을 돕기 위해 인도양에 자국 군함을 파견할 수 있도록 법제화한 데 대해 호감을 표시했다. 또한 일본의 탄도미사일 방어 연구에 대한 자금 지원, 패트리어트 미사일 구매에 대한 관심, 정보 위성 발사 등도 반기는 분위기다.

    일본은 북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1998년 북한은 일본을 향해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해 충격을 줬고, 이후 일본까지 날아갈 수 있는 100여 기의 미사일을 배치했다. 이에 맞서 최근 일본 관리들은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선제공격’ 가능성을 공공연히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재일동포의 대북 송금을 제한하는 등 일련의 제재를 가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이렇듯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어도 일본은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을 공격할 경우 북한이 일본을 보복공격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일본은 단호하고 자주적인 자국 안보전략을 단기간에 수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집단 자위’라는 헌법적 함의에 대한 논란도 별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자국의 안보를 계속 미국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결국 일본의 여론과 정책은 북핵과 미사일 프로그램, 그리고 미국이 이들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 대한 일본의 신뢰 수준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일본도 늘 중국에 집착한다.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에 일본의 미래가 달려 있다. 일본은 중국군의 현대화 과정을 예의주시한다. 미중관계의 진전과 일본-중국 양자관계에도 관심이 많다. 당장 일본은 중국의 경제력과 정치력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한 듯하다. 전략을 확립할 때까지 일본의 대중정책은 혼선을 거듭할 것이다.

    결국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주일 미 지상군은 감축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해군 기지들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어떠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든 그 중요도가 매우 높다. 따라서 미일 안보동맹은 양국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에 이어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 수정에 영향을 미칠 세 번째 요인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극적인 인식 변화다. 즉 중국은 미국의 전략적 경쟁자에서 안보 협력자이자 무역 및 투자 파트너로 탈바꿈했다.

    갑작스런 변화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가 대중국 정책을 사실상 반전시키면서 비롯됐다. 이러한 전환은 1년 후 발표된 미 행정부의 ‘국가 안보 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에 반영됐다. 여기서 미국에 대한 가장 큰 전략적 위협은 ‘떠오르는 중국’이 아니라 테러리즘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미국은 또 테러와의 전쟁이 미국과 중국의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비록 인권문제가 양국의 연대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얼마 전 부시 대통령은 사교적인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을 텍사스주 크로퍼드목장에서 환대했다. 중국에 극히 회의적인 딕 체니 부통령은 올해 말 베이징을 방문할 계획이다. 고집 센 미 국방부도 중국과 고위급 군사 교류를 재개했으며, 양국은 정보 협력의 범위도 넓혀가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 사태로 골머리를 앓는 미국은 중국이 아시아의 안보를 유지하는 데 있어 보다 큰 역할을 해주기를 요구한다. 9·11 테러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상황이다. 특히 북한 문제에 관한 한 이 같은 의지는 더없이 확고하다.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대신 중국이 나서서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게 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다. 일리 있는 정책이다. 중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인접국으로의 무기 확산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미 명쾌한 협조 의사를 보여줬다. 지난 4월에 열린 3자 회담은 중국이 북한을 압박한 결과의 하나다.

    하지만 중국 관리들은 북핵 문제가 결국 북미간의 직접 대화를 통해서만 해결되리라고 본다. 그래서 이 문제는 미국과의 심각한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형태의 군사적 수단에도 강력히 반대한다. 북한의 붕괴로 인해 난민들이 국경 너머로 밀려드는 것도 달갑지 않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이 북한과의 진지한 협상을 거부하는 한 북한을 동요시킬 수 있는 일련의 강압적 수단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미·중 지도자들의 상호 불신

    이제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을 살펴보자. 지난 30여 년 동안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중국의 정치적 비중은 현저하게 높아졌다. 이에 따라 아시아 국가들은 그들의 외교정책을 미묘하지만 본질적으로 수정하고 있다. 중국 경제는 폭발적인 성장을 지속함으로써 서방의 예측을 무색케 했다. 중국과 이웃 나라들 간의 경제 교류가 큰 폭으로 확대된 것은 이들 국가가 외교정책에 고려해야 할 핵심적인 요소가 됐다.

    중국은 일본을 추월해 폭넓은 역내 무역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기 위해 협상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중국은 여러 모로 부드러운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려 애쓰고 있다. 역내에서 역할을 확대하는 데도 관심이 크지만, 지역 안정이 유지되면서 국제 경제에 확고하게 통합될 때 자국의 이익이 가장 커진다는 것 또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자신의 의도에 대한 의혹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많은 주변국가들이 이에 대해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면 미국과 중국을 저울질해보는 것도 그들의 입장에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의 주변국들은 각자 주어진 환경에 따라 성장하는 중국의 힘에 적응해야 한다.

    이 모두가 미중관계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미중관계를 떠받치는 정치적 이해관계는 가변적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미국의 파워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중국의 다수 지도자들은 미국이 UN의 승인도 없이 코소보나 이라크에 개입한 것을 보고 커다란 불안감을 갖게 됐다. 대만은 언제든지 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우파 가운데 상당수도 마찬가지로 중국을 신뢰하지 않고 중국 정부를 싫어하며, 대만이 소외될까 걱정하면서 대만의 독립을 바라고, 미국이 중국의 군사력을 키우는 데 지나치게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열차’는 또 한번 선로를 이탈할 위험을 안고 있다. 비록 양국 정부가 그러한 상황을 예방해야 피차 이익이 커진다는 것을 잘 알고는 있지만 말이다.

    아시아의 세력균형 변화는 대만에게 특히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대만은 오랫동안 미국의 군사적 억제력에 의해 평화가 유지돼온 동아시아의 또 다른 잠재적 분쟁지역이다. 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제고되고, 대만과 본토의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높아짐에 따라 대만과 중국 사이에는 화해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만은 시간이 갈수록 중국과의 진지한 협상을 거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현재 약 70만명의 대만인들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고, 1000억달러 규모 이상으로 추정되는 대만의 대중 투자도 계속 늘고 있다. 중국은 이러한 경제적 결속이 중국의 협상력을 높여주며, 분쟁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 중국의 2002년 국방백서는 중국군의 현대화 실적을 과시하고 있지만 과거와 달리 대만에 대해서는 부드러운 톤으로 언급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전반적인 수사(修辭)도 절제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재통일이 공산당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중국은 결코 대만의 독립을 인정하진 않을 것이다.

    최근 일련의 흐름을 살펴보면 대만이 미국의 역할에 대해 걱정스러워할 법도 하다. 부시 행정부는 출범 초기 대만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대만에 신무기를 팔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후 미국은 북핵 위기를 해소함에 있어 중국의 도움이 필요했고, 9·11 테러 이후 미중관계는 여러 면에서 굳건해졌다. 대만의 사기를 떨어뜨릴 만한 대목이다.

    대만인들은 핵무장한 중국과 충돌하는 상황이 올 경우 과연 미국이 대만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들이 핵 개발을 포기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만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미국은 대만에 신무기를 팔고 대만이 국제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또한 중국이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경고할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만의 안보를 계속 보장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대만의 편이 아니다. 민주화된 대만의 국내 정치 상황은 독립 선언과 같은 돌출적인 행동을 초래할 수도 있다. 중국은 대만의 독립 선언을 극단적인 도발행위로 간주할 것이다. 다수의 대만인들은 중국과의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협상-공개협상이든 비밀협상이든-은 머지 않은 장래에 열릴 전망이다. 언제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옹호해온 미국은 이같은 진전을 수용함으로써 대만해협에서 미국의 군사적 역할을 점차 줄여나가야 한다.

    미국의 동남아 딜레마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은 동남아시아에 상대적으로 덜 개입해왔으나, 테러와의 전쟁 이후 이 지역은 또다시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극단주의와 알 카에다와의 연계 가능성에 신경을 쓰게 됐고, 이에 따라 이 지역에서의 이해관계와 역할에 대해 재고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은 상업적인 부문, 혹은 아세안 같은 지역기구를 지원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현재 미국은 미얀마를 제외한 모든 동남아시아 정부들과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미 의회는 군비와 경찰 훈련 예산을 증액했다. 1990년대 들어 눈에 띄게 위축됐던 미국의 정보력은 실질적으로 강화되고 있고, 역내 국가 정보기관들과의 협력도 활발해졌다.

    지난해 10월 멕시코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말레이시아에 역내 반(反)테러센터 설립을 주도해달라고 제안했는데, 반테러센터는 현재 설립 중에 있다. 또한 필리핀에서는 미국의 특수부대가 알 카에다와 연계된 테러단체 아부 사야프를 소탕하기 위해 필리핀군과 함께 작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취하고 있는 안보 조치는 동남아시아에 확산되고 있는 급진주의를 막기에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테러리즘은 어느 날 갑자기 이유 없이 발생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처럼 정치 경제적으로 취약한 나라가 대혼란으로 빠져들거나 미국을 위협하는 정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국가들의 정치적·경제적 근대화를 돕기 위해 고삐를 죄야 한다.

    하지만 미국이 동남아시아에 깊이 개입하기란 쉽지 않다. 이 지역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한 반감이 크며, 만약 이들 정부가 미국의 압력에 굴종하는 것처럼 비쳐질 경우 정권이 위기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다. 미국은 올초 필리핀에 1700여 명의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으나 필리핀 국민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됐다.

    지금까지 논의한 복잡한 상황에 비춰보면 향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안보 기능은 여러 측면이 혼재된 양상을 띨 것이다. 단기적으로 볼 때 한반도나 대만해협에서 위기가 고조될 가능성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때문에 미군의 개입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이 한국에 대해 취하는 행동은 적대국이나 다를 바 없이 한국인들을 겁주고 있다. 이는 미국이 현재의 정책을 재검토하고 설득력을 얻어내야 함을 시사한다.

    현재 무엇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것은 가장 큰 불확실성의 원천이다-는 북한과 그들의 핵무기 프로그램이다. 이는 북한에게 본질적으로 실존의 문제다. 북한은 살아남으려면 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하다. 그러나 북한은 변화로 인해 정권이 무너질까봐 두려워한다. 따라서 북한의 전략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라크전쟁 이후 북한은 아마도 핵무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안전 보장과 경제적 지원 패키지가 김정일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 답은 협상을 통해서만 얻어질 것이다. 말싸움이 폭력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다분하다. 다만 전쟁이 일어난다면 심사숙고 끝의 결심이 아니라 오산(誤算)과 오해(miscommunications)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한국과 모종의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자신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지만, 남북한은 결국 그 같은 합의에 이를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라크전쟁이 조기 종결됨으로써 미국이 자신들에게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강경한 접근을 강요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러나 북한은 이라크가 아니다. 한반도의 군사 현실을 고려하면 미국이 북핵 문제를 군사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과 일본에 대한 북한의 보복공격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핵을 용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상상하기 어렵다. 그럴 경우 북한은 무기를 증강 배치하고 싶어할 것이고, 이는 사실상 역내 모든 국가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국 또한 미국이 동아시아 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 주요 불확실 요인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만일 이 같은 상승세가 꺾인다면 그것이 중국의 내부 안정과 외교정책,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의 경제 기상도에 미칠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으로도 심각한 경제적·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지 않았던가. 이 지역에서 확실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대만과 중국의 화해는 더 이상 먼 훗날의 일이 아닌 듯하다. 하지만 화해를 방해할 수 있는 요인들이 적지 않다. 특히 대만의 국내 정치상황이 그러하다. 일본은 중국, 북한, 그리고 미군 주둔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마침내 재무장 논의에 돌입했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을 안보의 버팀목으로 여긴다. 하지만 신중함과 부(富)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도 깊이를 더해갈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위에 열거한 모든 불확실성이 해결되지 않는 한 명확해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한반도 상황은 미국이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를 결정하는 촉매가 될 것이다.

    아시아는 미국의 시험장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시아의 경제성장에 따른 힘의 분산과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미국의 집착이 이 지역 안보에 대한 미국의 집중력을 약화시키리라는 점이다. 냉전시대의 종말과 함께 유럽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줄어든 것처럼 말이다. 일본의 방위는 일본과 중국 사이의 긴장도를 떨어뜨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양국이 실제로 군사적 충돌에 이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통합이 진전되는 데 따라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이 지역은 미국의 외교 및 경제정책, 그리고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갈수록 성공적이고 독립적으로 변해가는 국가들에 대처하는 미국의 능력을 까다롭게 시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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