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같은 변화는 동아시아 내부의 변화 추세에서 그 원인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미국은 이를 통제하기도, 영향력을 미치기도 어렵다. 미국의 역할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두 가지다. 첫째는 중국의 경제적·지정학적 부상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 경제의 활력 감소인데, 이는 일본의 역내 영향력을 축소시킨다. 아시아 지역 투자 및 기술력의 원천으로서 일본은 앞으로 수년간 이 지역의 경제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아직까지는 상당한 수준이라 해도 줄어들고 있는 게 분명한 현실이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다른 국가들의 중요도는 높아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이 첫손에 꼽힌다. 한국은 놀랄 만큼 빠른 경제성장, 민주주의의 발전, 그리고 세대변화를 통해 단호하고 독립적인 새로운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
이에 비해 오랫동안 미국의 후견 아래 경제력을 키워온 대만의 국제적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면서 점차 중국 경제로 통합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 대만 간의 평화적 화해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고조돼 있다.
아시아 밖의 변화 또한 이 지역에서 미국의 역할에 영향을 준다.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집착을 그 첫 번째 사례로 들 수 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추구해왔다. 그런데 테러와의 전쟁은 이러한 전통만큼이나 중요하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형편이다. 이 같은 우선순위의 변화, 그리고 국제적 지원이 미미한데도 미국이 전세계적 요구를 재고하면서까지 전쟁을 벌일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아시아와 여타 지역에서 오랜 우방이었던 미국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극단주의자 증가세에 주목케 했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개입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일례로 최근 미국은 필리핀의 소규모 전투에 병력을 파견했다.
미국은 아시아의 이러한 변화에 맞춰 1990년대의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1990년대의 전략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이 이른바 ‘중심축과 부챗살(hub and spokes)’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즉 미국과 아시아 주요국의 양자관계, 그리고 미국·중국·일본의 3국 관계에 좌우된다는 시각이다. 물론 이들 관계의 중요성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미 동아시아의 유일한 세력 균형축 노릇에서 벗어나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의 전략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상상키 어려웠던 새로운 관계를 발전시켜가고 있다.
지역내 다른 국가들 또한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북한과 대만을 둘러싼 지속적인 긴장 때문에 어느 정도 제한받아왔지만, 이 지역 국가들의 세력과 영향력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한국 선심정책에 의존하는 북한
지난 50년간 한국은 미국의 대(對)아시아 외교정책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반도 문제는 미·일 안보동맹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미쳐왔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상황은 미국의 대 아시아 전략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지역을 휩쓸고 있는 변화에 대해 논하려면 한반도를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남북한 관계는 이미 극적인 변화에 돌입했다. 맹렬한 적대 상태에서 벗어나 신중하되 가시적인 화해 분위기로 전환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과 중국의 관계도 확대되고 있다. 중국이 여전히 북한을 원조하고 있는데도 그러하다. 이에 비해 한미관계는 상당히 위축됐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김정일 정권의 전체주의적·군국주의적 본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