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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 故 박동진 명창의 외길인생

죽을 때까지 소리를 하고 싶다던 진정한 藝人

  • 글: 주성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won@donga.com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 故 박동진 명창의 외길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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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7월8일 인당 박동진(忍堂 朴東鎭) 명창이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박동진 명창은 ‘토막 소리’가 유행하던 우리 판소리계에 완창 판소리 바람을 일으키면서 사라져가는 소리의 맥을 다시 세웠고 국악 대중화에도 기여한 국악계의 거목이다.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 故 박동진 명창의 외길인생
지난 7월10일 서울 서초구 우면동 국립국악당 별맞이터. 장마철을 맞아 하늘은 잔뜩 찌푸렸지만, 전날까지 걱정스럽게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다. 국악인장으로 치러진 박동진 명창의 영결식. 그의 영정을 앞에 두고 자리한 600여 명의 국악계 인사들은 온통 눈시울을 붉혔다.

영결식에서 이영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은 “선생만의 걸쭉한 재담의 아니리를 더 이상 선생의 육성으로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국악인들뿐 아니라 우리 소리의 멋을 아는 모든 이들의 애끓는 안타까움”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윤미용 국립국악원장은 “선생의 숭고하고 고귀한 소리정신은 허공에 메아리쳐 흩뿌려지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세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일깨워준다. 선생은 우리 시대 최고의 소리 광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조사로 그의 업적을 기렸다.

하지만 고인에 대한 추모나 공적보다 그 자리에 참석한 국악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것은 생전 박동진 명창이 남긴 육성이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후학들이 듣고 배우라는 듯 덤덤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소리를 하고 싶어요. … 나는 종로 네거리에 벌거벗고 나가도 부끄러울 것이 없어요. 왜? 나는 우리 것을 해왔으니까. 조상들의 것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 내 운명입니다.”



아마도 영결식에 참석한 원로 국악인들은 이 대목에서 그가 ‘흥보가 완창’에 도전하던 1968년의 국립국악원 강당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만큼 그 공연은 우리 국악계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고, 박동진이라는 이름을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킨 무대였다.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이 다섯 시간에 걸쳐 흥보가를 완창한다고 나설 때만 해도 이를 곧이 믿는 사람은 없었다. 국악계에서도 “말이 안 된다”고 만류할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완창’이라는 개념조차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했다.

판소리는 1960년대 들어 쇠락기를 맞고 있었다. 1962년 국립창극단이 창설되고 1964년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긴 것은 몰락한 판소리를 정책적으로 부활시켜보려는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1950년대 여성 국극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상대적으로 판소리는 대중에게 잊혀져가고 있었다. 인기 있는 소리꾼들도 박초월, 김소희, 조금영, 박귀희, 김경애 등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설 무대가 없으니 소리꾼들도 판소리를 제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10분, 20분씩 판소리의 재미있는 대목만 따다 부르는 이른바 ‘토막 소리’가 유행했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한 자리에서 다섯 시간이나 쉬지도 않고 소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 그러나 박동진은 이 무대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다섯 시간을 쉼 없이 이어나갔을 뿐 아니라, 재치 있고 익살맞은 아니리(소리꾼이 판소리 한 대목에서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사설을 엮어가는 것)와 흥을 돋구는 너름새(소리꾼이 판소리의 극적 내용에 맞춰 하는 몸짓)로 관객들을 판소리의 재미에 푹 빠뜨렸던 것. 출중한 소리 실력이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 이날 흥보가 완창 공연은 ‘미국의 소리’ 방송이 생중계할 정도로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언론에서도 박동진을 대서특필했다.

다섯 시간 동안 흥보가 완창

쉰을 넘길 때까지 뭇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무명이었던 소리꾼 박동진은 이날 공연으로 일약 국악계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박동진 개인의 성공보다도 더욱 큰 성과는 이날 공연으로 우리 국악계가 큰 자극을 받았다는 데 있다. 판소리의 흐름은 ‘토막 소리’에서 ‘완창’으로 넘어갔고, 박동진이라는 대중적 스타의 출현으로 스러져가던 판소리는 부흥을 맞게 됐다.

박동진 명창은 이듬해 명동 국립극장에서 여덟 시간에 걸쳐 ‘춘향가’를 완창했고, 그 이듬해인 1970년 ‘심청가’와 ‘변강쇠 타령’을 완창했다. 1972년까지 판소리 다섯 마당(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춘향가)을 모두 완창한 후에도 박동진의 완창 무대는 매년 몇 차례씩 계속됐다. 특히 1973년 창작 판소리 ‘충무공 이순신전’을 9시간40분에 걸쳐 완창한 것은 국악계에서 여전히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국악계에서는 이를 기점으로 오정숙(吳貞淑) 명창이 ‘심청가’를 완창하는 등 완창 판소리를 시도하는 소리꾼들이 늘어났다. 1973년 박동진은 판소리 ‘적벽가’를 보유한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박동진 명창은 1916년 충남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재의 공주시 무릉동이 바로 그의 고향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제법 산다’는 지주였지만, 한일 합병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아버지 때에 와서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해졌다. ‘감나무골’로도 불렸던 그의 고향은 워낙 시골이었던 터라 그는 “어렸을 때 늑대나 너구리, 오소리가 개 돌아다니듯 하는 무서운 동네에서 살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박동진 명창의 할아버지는 ‘땅 재주꾼’이었다고 한다. 재주를 잘 넘어 나라로부터 ‘참봉’이라는 벼슬도 받았다고 하니 ‘예인(藝人)’의 기질은 핏줄로 타고난 듯하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아버지(박재천)에게 재주를 물려주지 않고, 그저 농사만 짓고 살라고 당부해 박동진 자신은 평범한 농사꾼의 집안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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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성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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