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모차르트 오페라와 계몽주의는 어떻게 만났는가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입력2003-07-30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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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히 ‘천진하고 괴팍한 천재’로만 알려진 모차르트.
    • 그러나 그는 동시대 어떤 음악가보다 전복적이고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다.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여자는 다 그래’ ‘마술 피리’ 등 걸작 오페라들을 통해 본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와 계몽 사상.
    모차르트 오페라와 계몽주의는 어떻게 만났는가
    모차르트(1756~91)를 흔히 신동, 천재라 한다. 문학·미술의 경우와 달리 음악의 천재성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특히 모차르트의 경우에 해당한다. 천재인 탓일까? 그의 삶이나 음악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대다수 예술가에 있어 그의 작품은 ‘그 인간’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경우는 인간과 작품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영화며 연극, 신화적 전기에 묘사된 천진난만한 천재의 모습은 그의 작품이 지닌 성숙도, 즉 풍부한 감정표현이나 사회의식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물론 ‘아마데우스’ 같은 영화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특히 영화의 기둥 줄거리인,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설정은 사실로 확인된 것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모차르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꼭 참고해야 할 작품이다.

    사실 ‘유치한 인간성에 대비되는 작품의 성숙성’이라는 현상은 비단 모차르트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모든 음악가, 아니 모든 예술가는 다 그와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문제는 사회 사상인데, 베토벤·바그너·베르디·무소르크스키 등의 음악가들은 나름의 확고한 사회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이 창작한 음악 또한 그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반면 모차르트는 사상의 측면에서조차 확실하게 알려지고 이해된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반귀족주의를, ‘마술피리’에서는 이상주의를 읽을 수 있다. 이는 당시 지배계급인 귀족에 대한 계급투쟁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천재’ 모차르트가 과연 그러한 계급투쟁 사상을 가졌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위험할 정도로 급진적인



    여기서 우리는 모차르트가 12세에 작곡한 최초의 오페라 ‘바스티앙과 비스티엔’(1768)이 당시 계몽주의자 루소의 작품을 대본으로 삼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적어도 20대 이후의 모차르트는 대단히 강렬한 정치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당시 시민혁명 이전의 사회계급, 계급차별, 계급투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혁파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이성적 휴머니즘에 공감했다. 물론 이는 모차르트만의 특성은 아니었다. 그가 20대를 보낸 당시의 사상적 특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더하여 모차르트는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자신감과 강한 자존심으로 인해 일찍부터 평등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20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귀족의 사랑을 받은 신동에서 완전히 탈피해 그에 저항하는 반항아로 변모한 것이다. 그를 증명하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25세에 벌인 대사제 콜로레도와의 충돌이다. 당시 그는 베토벤에 뒤지지 않는 인간 선언을 한다.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마음입니다. 나는 백작이 아니지만 수많은 백작보다 더 많은 명예심을 가질 작정입니다. 백작이든 하인이든 저를 모욕하는 자는 상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모차르트는 파리에까지 이르는 연주여행을 다녀와 지금 우리가 듣는 작품들의 대부분을 쓴다. 그러나 사제나 귀족으로부터 독립한 음악가의 생활은 비참하여 10년 뒤 35세의 나이로 병들어 죽는다. 그의 인간 선언은 죽기 직전 작곡한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그는 왕자입니다”라는 말에 대해 “그 이상이지요, 그는 인간입니다”라고 답하는 아리아에서 재현된다.

    그러나 25세의 모차르트가 독립을 택한 것은 그 자신의 결단이었다기보다는 시대적 경향 탓이라고 봄이 옳다. 귀족이 예술가를 보호하는 시대가 간 것이다. 1790년 하이든은 30년간 봉사한 귀족의 곁을 떠났고, 베토벤 역시 1794년 독립하여 음악시장에서 자유계약 작곡가로 살았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가들이 귀족이 아닌 대중에 영합해야 함을 뜻했다. 예컨대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질투의 화신 살리에리는 당시 모차르트보다 훨씬 인기 있는 작곡가였다. 왜냐하면 그는 경쾌한 오락으로 오페라를 작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위험할 정도로 급진적이고 너무나도 심각해 대중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만능형 작곡가였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독주곡 등 기악곡에서부터 오페라, 가곡, 교회음악 등 성악곡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에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페라 작곡이 가장 중요했다.

    이는 18세기 유럽 음악의 중심이 오페라였기 때문이다. 대규모 연주회장에서 기악곡 콘서트가 성행한 19세기와 달리 18세기에는 기악곡이 실용적인 것이어서 작곡가에게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하이든의 경우에도 작품을 말할 때는 오페라를 말했지, 기악곡은 단지 사족으로 열거하는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청년 모차르트가 뮌헨의 궁정에 취직하고자 필사적으로 매달릴 때 내세운 것도 ‘이미 이탈리아에서 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사실이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유럽 여러 나라를 방랑하던 중 세 번이나 이탈리아를 찾은 것도 오페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모차르트의 서간집을 읽어보면 오페라광인 그의 모습을 여러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모차르트 오페라는 그 극적 구성이 치밀하고 정확해 복잡한 이야기를 전혀 복잡하지 않게 전달한다. 그 완벽성은, 셰익스피어가 멋대로 등장인물들을 등장시키고 퇴장시켜 너무나도 빈번한 우연에 황당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과 대조된다.

    이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유럽 각지를 순례하며 왕후귀족으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 수많은 유형의 인간을 만나 그 희로애락을 알고 다양한 삶의 앞뒤를 눈으로 본 덕분일 것이다. 이런 특별한 체험이 모차르트를 탁월한 인간 관찰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편지에는 이러한 솔직하고 냉철하며 생생한 인간 관찰의 결과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간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예리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의 시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과도기였다. 오페라의 경우 바로크적 성격이 강한 오페라 세리아에서 리얼한 근대적 성격의 오페라 부파로 변화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빈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 일변도의 경향에 대한 반발로 독일 가극이 진출하는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었다.

    가수를 중심으로 하고 엄청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축제적 향연으로서의 오페라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대본을 중시하는 드라마로서의 오페라도 차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 궁정을 중심으로 한 귀족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시민계층도 이를 오락 삼아 즐기는 경향이 나타났다. 모차르트 오페라는 이러한 과도기가 낳은 가장 풍요한 예술적 성과다.

    당시 그를 후원한 황제 요제프 2세가 전형적 계몽군주였다는 점도 ‘후궁 탈출’ ‘피가로의 결혼’ ‘여자는 다 그래’ 등 모차르트 오페라의 계몽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돈 조반니’나 ‘마술피리’도 구질서에 대한 반역, 자아의 확대, 계몽사상, 민중적 속세주의 등의 시대정신을 포함한 작품들이다.

    계몽 군주에 대한 염원

    모차르트의 초기 작품 ‘이도메네오’는 그리스 신화에 근거한 오페라다. 조금은 심각한 내용이나 계몽군주에 대한 모차르트의 기대를 엿볼 수 있다. 노예인 여주인공 이리아와 이도메네오왕 부자의 사랑을 줄거리로 한 이 오페라는, 결국 이들이 온갖 고난을 거친 후 이상적인 왕과 왕비가 되는 극적 스토리를 통해 당시 봉건사회에 대한 비판과 계몽군주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 여주인공을 노예로 설정하는 것은 뒤에 베르디의 ‘아이다’로도 이어지나,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가 해피 엔딩임에 반해 ‘아이다’는 비극으로 끝난다.

    1782년에 작곡된 ‘후궁 탈출’의 무대는 터키다. 여주인공 콘스탄체가 영주인 셀림 파샤에게 포로로 잡혀 있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서양에서 터키는 적국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모차르트가 터키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당시 빈에서 터키 스타일이 유행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결코 호의적 관심이 아닌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당시 적국이던 터키를 비롯, 이슬람 사회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획책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생활과 문화를 관능적으로 신비화하는 등의 유럽 제국주의 사고방식을 뜻한다. 그 신비화란 것은 대체로 야릇한 이국취미로 나타났는데 그 자체는 터키를 비롯한 비유럽 사회의 실상과는 무관한 상상 속의 것이었다.

    ‘후궁 탈출’의 주제 역시 ‘이도메네오’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계몽군주를 향한 염원이다. 모차르트는 당시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계몽적이고 인간적이며 이성적인 지도자상을 터키 영주에서 구했다. 바로 포로를 용서하고 석방하는 관대하고 자비로운 지도자를 말한다. 이는 모차르트가 당시의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을 어느 정도 극복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터키의 삶 자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지도자상은 마지막 오페라인 ‘티토 황제의 자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극중 황제는 자신을 암살하려 한 친구에 대한 복수를 거부함으로써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모차르트가 ‘마술피리’ 초연을 지휘하다 쓰러지고 집에서 ‘레퀴엠’을 작곡하다 죽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마지막 오페라인 ‘티토 황제의 자비’를 작곡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어쩌면 모차르트 사상의 최후를 장식하는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를 연상시키는 ‘바보 같은 하루’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피가로의 결혼’(1786)은 초야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특권계급 지배의 구체제를 풍자한 보마르셰의 희극을 대본으로 한 것이다.

    천한 신분인 이발사 출신으로 백작의 종노릇을 하는 피가로는 백작부인의 시녀 수잔나와 결혼하고자 한다. 백작은 계몽군주로서 이미 초야권 폐지를 선언한 바 있으나 수잔나가 마음에 들어 그 부활을 추진한다. 그래서 피가로는 ‘나으리가 춤을 추겠다면’ 계략을 꾸미겠다는 유명한 도전의 아리아를 부른다. 이는 원작에 없었던 부분으로, 모차르트는 사회적 의식이 약했거나 아예 관심도 없었다는 음악계의 속설이 사실이 아님을 말해준다.

    모차르트의 사회비판은 백작의 인물창조에서도 드러난다. 백작은 ‘나는 한숨을 쉬는데, 종은 행복하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라고 노래한다. 이는 권위와 불관용, 폭력의 아리아다. 백작은 모차르트가 창조한 인물 중 가장 황폐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한편 백작부인은 ‘사랑을 주소서’라는 아리아에서 알 수 있듯 흔히 백작의 사랑에 굶주린 여인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남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계급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백작부인은 수잔나의 도움을 받아가며 백작에게 보내는 거짓 연서를 쓴다. 그 ‘편지의 이중창’ ‘나는 준비되었어요’는 영화 ‘쇼생크 탈출’ 가운데 감옥에 울려 퍼지는 노래다. 그 비애와 고립감은 감옥에서 자유를 희구하는 죄수의 심정과 잘 맞아떨어진다.

    수잔나와 백작부인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행동은 ‘피가로의 결혼’이 양성간의 투쟁을 담고 있다고도 생각하게 한다. 수잔나는 백작의 음모를 알아채 피가로가 계략을 꾸미도록 하고 이에 다시 백작부인을 끌어들이는 등 영민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수잔나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조연에 불과하나 모차르트가 이상으로 삼은 여성상이다. 게다가 피가로에게 결혼 사기를 당한 마르첼리나가 남성에 대항하는 여성의 동맹에 합세하여 부르는 아리아는 여성의 단결을 호소한다.

    ‘모든 여성은 일어서야 해 / 무자비한 남자들에 의해 부당하게 / 학대받는 슬픈 여성을 지키기 위해’

    현대 페미니즘 구호 같은 이 노래는 상연시 곧잘 생략돼 모차르트의 사회의식이 약하다는 오해를 낳게 한다. 마찬가지로 음악가 바자리오의 반귀족적 아리아, ‘높은 분과 싸우면 언제나 위험할 뿐’도 자주 생략되었다.

    ‘피가로의 결혼’에는 독창 아리아보다 다중창이 많다. 번호가 붙은 악곡 28개 중 반이 다중창이다. 이는 구조화된 복합적 사회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특히 이중창은 계급이 다른 두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유효하다. 계급으로 구분되지 않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앞에서 본 ‘편지의 이중창’에서 백작부인과 시녀는 완전한 평등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평등과 자유의 환희는 마지막 장면인 피가로의 결혼식에서 울려 퍼지는 ‘축하, 평화, 용서’의 합창으로 대단원을 이룬다.

    ‘피가로의 결혼’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3년 전에 초연된 최초의 현대 오페라였다. 이는 등장인물, 그들의 복잡하고 애매한 감정과 인간적인 고뇌가 바로 우리 시대의 것임을 뜻한다.

    바람둥이 돈 조반니의 ‘숨은 힘’

    오페라 ‘돈 조반니’는 수천 명의 여성을 사랑했다는 바람둥이 돈 후안(돈 판 또는 돈 환이란 표기는 일본식이다)의 이탈리아식 이름이다. 오페라의 정식 명칭은 ‘처벌된 방탕자 또는 돈 조반니’(1787)이다. 중세 스페인에서 전해진 것으로 처음에는 지옥에 떨어지는 악당 이야기였다가, 이후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져 예컨대 1665년 몰리에르(1622~73)가 쓴 ‘돈 쥐앙’에서는 낡은 도덕에 대항해 욕망에 충실한 근대적 인간의 전형으로 묘사되었다.

    모차르트는 더욱 나아가 그를 삶을 자유분방하게 즐기는 인간, 즉 성적 욕망을 어떤 제약이나 억제, 또는 죄악감 없이 즐기는 인간으로 그렸다. 그러나 마지막에 지옥에 떨어진 점에는 변함이 없고, 따라서 결코 영웅시하거나 이상화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모차르트는 당시 귀족이 그러한 방탕을 일삼을 수 있도록 한 특권적 계급사회 구조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그 점에서 모차르트는 몰리에르보다 더욱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돈 조반니의 이야기는 모차르트의 작품이 탄생하기 전 10년 동안 이미 7편의 오페라가 나왔을 정도로 당시에는 대중적인 소재였다. 따라서 이를 작곡하는 데에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나타난 정치적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그 원제 ‘처벌된 방탕자’에서도 알 수 있듯 ‘돈 조반니’는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다.

    모차르트 생존 당시에도 돈 조반니 같은 인간상은 실존했다. 그 대표적 예가 영화로도 소개된 사드(1740~1814)다. 사회적 인습이 아닌 자연의 본능에 따른다는 것은 루소를 비롯한 여러 계몽사상가에 의해 널리 알려진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한 ‘자연권’의 행사는 현존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모차르트 오페라와 계몽주의는 어떻게 만났는가

    바람둥이 귀족의 방탕한 생활을 소재로 하여 계급구조를 비판한 오페라 ‘돈 조반니’의 공연 장면

    ‘돈 조반니’는 ‘피가로의 결혼’처럼 계급의식을 직접 표현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주인공 백작의 성적 방종이 계급구조에 의해 가능한 것임을 명백히 표현한 ‘피가로의 결혼’처럼 돈 조반니도 귀족이었고, 여성을 유혹하는 데 귀족이라는 신분과 그 경제적 특권을 충분히 이용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역시 계급의식을 깔고 있다 할 수 있다.

    ‘돈 조반니’의 서곡은 희극치고는 너무 음침하다. 이것이 끝나면 돈 조반니의 하인인 레포렐로가 ‘누구는 아름다운 여자 건드리고 누구는 춥고 배고프고 졸린 신세로 망이나 보고’라고 투덜거리며 주인의 엽색 이력을 노래한다. 그 하인은 피가로를 연상케 한다. 그는 전형적인 시종이 아니라 주인을 비판하는 자유를 어느 정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주인으로부터 떠나고자 하나 그가 주는 돈 몇 푼에 흔들려 간단하게 자유를 포기하기도 하는 추종적 인간이다.

    제1막에서 돈 조반니는 돈나 안나의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돈 조반니’에 등장하는 3명의 여주인공 중 하나인 체를리나를 농부에게 시집갈 얼굴이 아니라며 유혹한다. 체를리나와 그녀의 남편 마제토는 하층계급을 대표한다. 마제토는 귀족을 신용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다는 노래를 부르고 막 결혼한 자신의 아내를 유혹하는 돈 조반니에 대한 격렬한 증오를 표현한다. 이것도 피가로의 경우와 너무나 닮았다.

    수잔나, 데스피나, 체를리나

    제2막에서 마제토는 무장한 농민들과 함께 돈 조반니를 죽이고자 한다. 체를리나는 그의 질투심을 책망하나 그에게는 질투 이상의 감정이 있다. 당시에는 농부의 아내를 귀족이 유혹했다 해서 그를 죽인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마제토에게는 이미 귀족사회를 거부한다는 반항심이 있다.

    여주인공 체를리나는 복잡한 인간상이다. 조반니에게 유혹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에게 속지 않는다.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수잔나나 ‘여자는 다 그래’에 나오는 데스피나처럼 또 한 명의 모차르트의 이상적 여인상인 그녀는 유약하면서도 자신을 훌륭히 통제하는 강한 모습을 보인다.

    아도르노는 그녀를 ‘로코코와 대혁명 사이의 역사적 순간에 속한다’고 평한 적이 있다. 즉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 전인 18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로코코 문화에서 프랑스대혁명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전형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돈 조반니’란 작품 자체에도 그대로 해당될 수 있다.

    ‘돈 조반니’에 등장하는 상류계급은 돈나 안나와 그녀의 아버지인 기사장, 그리고 그녀의 연인인 돈 오타비오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하층계급의 주인공들이 부르는 생기발랄한 노래에 비해 지극히 형식적이며, 인간성 묘사도 생동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모차르트가 귀족을 멸시한 탓이었다.

    조반니의 유혹 대상이 된 3명의 여성 중 마지막인 엘비라는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독립 여성으로 귀족이 아니다. 그녀는 조반니의 배신에 대해 복수를 하려고 전유럽을 뒤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에서 표면은 유지하고 있으나 실질은 이미 무너진 귀족사회를 묘사했다. 그것은 귀족계급의 특권과 부의 무책임한 남용, 그리고 마제토와 무장 농민이 상징하는 밑으로부터의 도전에 의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제1장 무도회 장면에서 세 가지의 다른 기악 앙상블을 선보이며 그 각각에 남다른 사회적 의미를 부여했다. 귀족의 미뉴에트, 평민의 이열(二列) 대무(對舞), 농민의 빠른 왈츠 등이다. 이는 질서인 동시에 무질서였다. 그것도 조반니가 체를리나를 유혹하기 위해 벌인 잔치였다. 조반니는 자신을 죽이려는 복수자가 가면을 쓰고 등장하자 ‘누구나 참여하라, 자유 만세!’라고 외치며 술잔을 치켜든다. 그러나 빈에서 상연될 때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자유 만세’라는 대목을 ‘파티 만세!’로 바꾸었다.

    ‘돈 조반니’의 원제가 ‘처벌된 방탕자’인 것처럼 조반니는 마지막 장면에서 지옥에 떨어지는 처벌을 받는다. 이때 그 처벌을 안나 아버지의 석상(石像)이 담당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피가로의 결혼’은 결국 귀족과 평민의 화해로 끝났다. 그러나 귀족 방탕자인 돈 조반니를 당시의 귀족사회에서는 처벌하지 않았다. 아직 프랑스 혁명이 터지기 2년 전이었으므로 평민이 처벌할 수도 없다. 따라서 모차르트는 처벌자로 석상이라는 초자연물을 등장시킨 것이다.

    흔히 원제 그대로 ‘코시 판 투테’라 불리는 ‘여자는 다 그래’는 ‘여자는 똑같아’로 번역되기도 한다. 본래는 ‘여자는 모두 똑같이 행동한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행동이란 바람기를 뜻한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앞의 두 작품이나 뒤에서 소개하는 ‘마술피리’가 명작 오페라의 반열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 것과는 달리 제외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그 포함이나 제외의 이유가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과 관련한 설명으로는 기껏 모차르트의 여성편력과 여성관이 소개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여자는 다 그래’는 모차르트의 어떤 작품보다 독창적이며 여성, 성과 정치, 남녀관계를 지극히 ‘불온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이 오페라에서도 모차르트는 여전히 귀족 여성들의 경박한 연애를 조롱한다. 어쩌면 제목이 뜻하는 것은 ‘귀족 여자들은 다 그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롱당하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는 귀족 남성들도 함께 경멸당한다.

    제목 ‘여자는 다 그래’는 극 중에서 냉소적 독신철학자 알폰소가 내뱉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약혼자들을 다른 인물로 변장시켜 자매를 유혹케 하는 내기를 한다. 약혼자들은 전쟁터로 끌려간 것처럼 꾸민다. 자매는 결국 새로운 애인들에게 빠진다.

    이처럼 여성 차별적인 내용에다 유혹에 사용하는 방법도 비열하여 이 오페라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특히 베토벤과 바그너가 그랬다. 그래서 19세기에 들어서는 아예 무시되거나 삭제·개정되기도 했다. 20세기에 와서 재발견되기는 했으나 무시당하기는 여전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여성을 유혹의 대상으로 삼은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오페라에서 모차르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성과 감성의 혼란이다. 제2막에는 다음과 같은 아리아가 나온다.

    ‘격심한 마음의 갈등 / 이성과 감정의 엄청난 혼란 / 그런 상태이다!’

    한편 오페라에서 가장 빛나는 여성은 두 귀족 영애가 아니라 그들의 시녀 데스피나다. 그녀는 약혼자가 사라져 슬픔에 잠긴 두 여주인공에게 인생을 즐기라고 말한다. 그녀는 피가로나 레포렐로와 같이 고용주인 귀족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레포렐로와 똑같이 그녀는 외친다. ‘누구는 팔자 좋아서 잘 먹고 잘 입으면서 사랑타령이나 하고 있고 누구는 온종일 뼈빠지게 일이나 해야 하나.’

    그녀는 자신의 인생관에 충실하다. 즉 알폰소와 같은 남성의 입장, 그리고 그녀와 관련되면서 갖는 사회적 우월성을 이용하고자 하는 남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는 방식을 몸에 익힌 여성이다. 따라서 그녀는 남성이 성실하다는 말 따위는 전혀 믿지 않는다. ‘남자에게, 군인에게 성실을 기대한다? 턱도 없이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데스피나는 ‘여자는 다 그래’라는 제목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결국 ‘여자는 다 그래’는 인간은 약하다는 본질에 대한 철학적이고 계몽적인 작품이다. 그 근본은 인간에 대한 관용이다. 모차르트의 현실인식과 인간에 대한 관용이 깊고 넓은 통찰력에 의해 빛을 발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프리메이슨 단원 모차르트

    ‘마술피리’는 궁정 극장으로부터 새 작품의 의뢰가 들어오지 않자 궁핍해진 모차르트가 시시한 마법 이야기로 돈이나 벌어볼까 하는 사설 극장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것이다. 그래서 제목도 ‘마술피리’다. 이러한 작곡 동기를 이유로 이 작품의 가치를 의심하는 입장도 뿌리깊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예술적 매력, 희극성과 더불어 윤리성과 비전을 갖는 작품이다. 그래서 모차르트 자신 그 오페라에 대해 사람들이 그냥 웃기만 하는 것을 개탄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성공은 당시 프랑스대혁명 후 고양된 시민의 정치의식이 기본적으로 이 작품에 호의를 보였기 때문이었음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돈을 벌기 위해 대중용으로 쓰여진 만큼 그 내용은 황당하나 재미있다. 제1막에서 큰 뱀에 쫓기던 타미노 왕자는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 뒤 자연아(自然兒) 파파게노를 만난다. 그 둘에게 밤의 여왕이 유괴된 딸 파미나를 구해달라고 한다. 그녀의 그림을 보고 반한 타미노는 파파게노와 함께 마술피리를 들고 악당 자라스트로의 사원으로 간다.

    ‘마술피리’에서 가장 빛나는 역인 파파게노는 모차르트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가 타미노를 처음 만나 부르는 ‘나는 새잡이’,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찾고자 부르는 ‘연인이나 아내가 있다면’과 같은 유머와 인간미 넘치는 아리아는 파파게노를 주인공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모차르트는 죽어가면서 그 아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제2막에서 타미노는 파미나를 구하나 사실은 밤의 여왕이 악하고 자라스트로가 선하다는 것을 알고 사원의 형제가 되기 위한 고행의 시련을 거친 후 행복을 찾는다. 그리고 밤의 여왕은 사라진다.

    모차르트 오페라와 계몽주의는 어떻게 만났는가

    ‘인간세계의 변혁’을 추구한 오페라 ‘마술피리’

    여기서 사원은 모차르트가 가입한 계몽주의자들의 비밀단체인 프리메이슨을 상징한다. 중세 이래 ‘자유로운(프리) 석공(메이슨)’의 단체는 축성을 주로 한 탓에 비밀을 지킬 의무가 부과되어 비밀단체로 형성되었다. 그러다 모차르트의 시대에는 석공이 아닌 사람도 가입하여 국가, 종교, 직업 등 사회적 차별을 넘는 인류애와 동지애를 강조하는 정신적 집단으로 변했다. 왕권과 교권에 대항한 지식인 단체로서 몽테스키외, 볼테르, 괴테, 하이든 등도 이에 가담했다 한다.

    그러나 다른 비밀결사와 마찬가지로 프리메이슨은 당시 권력에 의해 정치적 전복활동의 원천이자 혁명조직이라는 혐의를 받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결성 5년 만에 금지되기도 했다. 따라서 모차르트가 ‘마술피리’를 통해 그러한 조직을 공공연히 찬양하는 오페라를 작곡하고 상연하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공연이 금지된 보마르셰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을 대본으로 하여 오페라를 만들었던 용기와도 일치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20대의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저항했고, 그런 저항의식으로 인해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 그 의식은 ‘마술피리’에서도 드러나 있다. 예컨대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가는 사원은 프리메이슨을 상징하고, 사악한 밤의 여왕은 당시 오스트리아를 지배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을 비유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겉으로는 자비로우면서도 실제로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여왕은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백작과 같이 이중인격으로 묘사되었다. 게다가 가사 중에는 왕정이나 교권을 풍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왕자 타미노는 막 죽은 계몽군주 요제프 2세, 공주 파미나는 오스트리아 민중을 상징한다.

    물론 ‘마술피리’가 프리메이슨의 의식, 규범, 교의에 충실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술피리’가 프리메이슨을 그대로 반영하였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모차르트의 사상 그 자체다.

    계몽은 태양이어라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사상이 단순히 계몽주의와 일치하는 것만이 아니라 계몽주의의 근원인 유토피아적 휴머니즘과도 일치함을 명백히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모차르트의 사회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흔히 모차르트는 정치적 인간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남긴 편지에 정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으로 인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마술피리’는 물론 ‘돈 조반니’가 쓰여진 프랑스대혁명 이후에도 편지에는 혁명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그러나 이는 그가 혁명 후 2년여 만에 죽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앞에서 보았듯 모차르트가 평등주의에 대해 본능적이라 할 정도로 관심을 가졌고 사회계급에 대한 원한이나 나름의 신념을 가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1784년 이래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여 죽을 때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리메이슨은 ‘군주라 해도 다른 인간보다 결코 탁월하지 않다’는 평등주의를 그 이념의 기초로 삼아 형제애와 인류통일을 추구했다.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적 계몽의 유토피아적 이상을 표현한 작품은 ‘마술피리’만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 ‘여자는 다 그래’를 포함한 여타의 작품에서도 계몽적 이념은 분명히 드러난다. 심지어 앞에서 다룬 몇 작품 이전에 쓰여진 ‘후궁 탈출’에도 그런 요소가 있다.

    오페라 외에도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적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는 2명의 단원이 죽었을 때 그 장례를 위해 1785년에 작곡한 장대한 ‘프리메이슨 장송음악’이 있다. 또한 죽기 직전에는 ‘작은 프리메이슨 칸타타’를 작곡하기 위해 ‘레퀴엠’의 작곡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 칸타타는 제목과 달리 독창,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연주에 30분 이상이 걸리는 대작이다.

    ‘마술피리’는 탐구와 추구의 오페라로서 사랑과 개인적 행복만이 아닌 미덕과 계몽을 노래한 드라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 자질이나 덕망을 넘어, 더욱 좋고 더욱 행복한 세계를 향한 인간세계의 변혁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웅변하는 노래가 ‘마술피리’에 두 번이나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아리아다.

    ‘그때, 이 세상은 천국이 되고 / 죽어야 할 인간도 신들과 같게 되리라’

    이 노래는 제1막 마지막과 제2막 마지막에 되풀이 사용된다. 이는 이성의 태양이 곧 떠오르고 미신이 사라지며 현자가 승리하리라는 예언이다. 미신과 편견의 어둠과 그림자를 소멸시키는 태양의 이미지는 바로 계몽이다. 태양의 이미지가 당시 계몽주의의 상징이었음은 페인의 ‘인권론’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본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이 요구하고 바라는 모든 것은 바로 자유의 발현인 것이다. 태양은 자신을 암흑과 구별하기 위한 특별한 비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 정부가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자마자 전제는 충격을 받았고 사람들은 부정의 제거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술피리’ 제2막에 나오는 ‘오오 이시스여, 오시리스여, 태양의 빛남은 어두운 밤을 물리친다’는 합창은 이미 모차르트가 1773년에 작곡한 ‘이집트 왕 타모스’에서도 불려진 것이었다. 이처럼 18세기 계몽 사상을 태양에 비유한 ‘마술피리’는 위대한 성과이자 지금까지 만들어진 오페라 중 가장 윤리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다.

    여하튼 ‘마술피리’는 초연부터 성공했고 오랫동안 상연되었다. 초연 두 달 후 모차르트는 죽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는 ‘마술피리’ 초연을 지휘하다 쓰러지고 그 날 밤 죽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이는 극적 요소를 위한 가공일 뿐 사실과 다르다는 점은 앞에서도 설명했다.

    ‘마술피리’는 앞의 세 작품과 다르게 독일어로 쓰여졌다. 앞의 세 작품은 귀족들이 좋아하는 이탈리아어로 쓰여졌으나 이 작품은 독일어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민중을 감상자로 예상한 것이었다. 또한 대사의 전달보다 음악을 중시한 점도 앞의 작품들과 구별된다.

    ‘마술피리’는 시련을 통한 구제라는 주제로 뒤에 바그너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탄호이저’ ‘로엔그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그리고 모차르트에 가장 가까운 ‘파르치발’ 등이 그 결과물이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은 ‘피델리오’에서 어둠과 빛이라는, ‘마술피리’와 동일한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천재였다. 그러나 그 천재성은 사회성을 배제한 상태에서는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그를 잇는 베토벤처럼 음악으로 명확한 사회의식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변화하는 시대의 모순과 갈등을 계몽이라는 이상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예술가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음악을 비롯한 예술의 진면목을 안다고 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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