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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이오덕의 들판이야기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겨레 모둠살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겨레 모둠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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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겨레 모둠살이
내가 있는 마을에서 산기슭을 조금 돌아 내려가면 찻길이 지나가는 못고개가 있고, 그 옆에 도랑마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못고개는 충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편인데 아주 나지막한 고개가 되어 차를 타고 지나가면 재 같지도 않아서 그냥 평지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거기가 서울과 충주 사이의 길에서는 분수령으로 되어 있다. 차가 없던 옛날에는 못고개를 가고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서 근처에 술집이 많았던 모양인데, 지금은 버스 휴게소가 하나 있고, 그 옆에 음식점이 두어 군데 있을 뿐이다. 더구나 지난해부터는 바로 옆에 더 넓은 국도가 새로 틔어져서 이 길을 지나가는 차도 아주 썩 줄어들었고, 길가의 음식점도 거의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옛날에는 거기 못이 있었고, 그래서 못고개라 했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다만 여러 해 전에 그 근처가 개발을 할 수 있는 지역으로 지정이 되자 갑자기 땅 값이 올라서 여기저기 공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 공장들이 제대로 운영되는 데는 한 곳도 없고 죄다 부도가 나서 빈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그런 곳에 있는 이 도랑마에는 지금 겨우 여나믄 집이 살고 있다. 우리 마을과 다름없이 집집마다 온갖 비극의 역사를 간직하고서.

도망치는 여자들

이 도랑마에 올해 73세가 되는 할머니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는데, 성이 안씨여서 안노인이라고 한다. 농사를 짓는데 논이 서너 마지기에 밭도 그 정도 되지만 할머니도 아들도 아주 부지런하고 알뜰해서 빚 안 지고 잘살았다. 그런데 아들이 장가를 못 가서 오랫동안 어머니와 둘이서 농사일을 하다가 늦게 어찌어찌해서 서울 색시를 얻어 장가를 들었다. 그 뒤로 아들까지 나서 지금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아이 엄마, 곧 안노인의 며느리는 걸핏하면 밖에 나가 음식 사먹기를 좋아했다. 거기다가 또 술을 즐겨 마셨다. 농사꾼이 외식을 즐기고 술을 좋아한다면 그런 집의 살림이 제대로 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할머니와 그 아들은 꾹 참았다. 그러다가 두 젊은 부부는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의논한 끝에 택시 운전을 하기로 했다. 논밭을 거의 모두 팔고 빚까지 내서 4000여 만원이나 들여 일반 택시를 샀다. 그래서 낮에는 남편이 운전하고, 밤에는 부인이 운전해서 부지런히 벌었다. 여섯 달이 지나는 동안에 모은 돈이 2000여 만원이나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이 엄마가 그 저축한 돈을 가지고 어디로 사라진 것이다. 그뿐 아니다. 알고 보니 가져간 것이 저축한 돈뿐 아니라 몇 가지 카드에서도 1500만원을 빼갔고, 그밖에 모두 합쳐서 4천몇백만원의 빚을 지어놓고 도망쳤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제 남은 재산이라고는 밭 500평과 택시 한 대뿐이다. 4000여 만원이나 되는 빚을 어떻게 하나? 남아 있는 그 밭은 한때 공장도 세울 수 있는 자리라고 해서 한 평에 10만원을 준다고 해도 팔지 않았는데, 이제는 시가가 한 평에 4만원쯤은 되지만 그런 사정에서 갑자기 팔려고 하니 그 반값인 2만원만 받겠다고 해도 살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 택시를 팔면 당장 먹고 살 길이 없어진다. 그래 어찌할 수가 없어 하루는 할머니, 그러니까 안노인이 우리 아이한테 찾아와서 제발 500평짜리 밭을 살 사람을 좀 알아봐달라고 했다. 왜 땅을 그렇게 헐값으로 팔려고 하나 물어보았더니, 자기 집 사정을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해주더란 것이다. 안노인은 그런 기막힌 일을 당했지만 그때까지 친척이고 이웃 사람이고 어떤 사람에게도 며느리가 제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멀지 않아 며느리가 돌아오게 되면 남들 보기에 거북스럽지 않게 지낼 수 있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안노인은 평소에도 좀처럼 집안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한테는 며느리가 잠깐 친정에 다니러 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일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땅을 팔아서 급한 빚돈을 갚아 불을 꺼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집안 사정을 다 털어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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