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겨레 모둠살이

  • 입력2003-07-30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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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겨레 모둠살이
    내가 있는 마을에서 산기슭을 조금 돌아 내려가면 찻길이 지나가는 못고개가 있고, 그 옆에 도랑마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못고개는 충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편인데 아주 나지막한 고개가 되어 차를 타고 지나가면 재 같지도 않아서 그냥 평지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거기가 서울과 충주 사이의 길에서는 분수령으로 되어 있다. 차가 없던 옛날에는 못고개를 가고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서 근처에 술집이 많았던 모양인데, 지금은 버스 휴게소가 하나 있고, 그 옆에 음식점이 두어 군데 있을 뿐이다. 더구나 지난해부터는 바로 옆에 더 넓은 국도가 새로 틔어져서 이 길을 지나가는 차도 아주 썩 줄어들었고, 길가의 음식점도 거의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옛날에는 거기 못이 있었고, 그래서 못고개라 했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다만 여러 해 전에 그 근처가 개발을 할 수 있는 지역으로 지정이 되자 갑자기 땅 값이 올라서 여기저기 공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 공장들이 제대로 운영되는 데는 한 곳도 없고 죄다 부도가 나서 빈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그런 곳에 있는 이 도랑마에는 지금 겨우 여나믄 집이 살고 있다. 우리 마을과 다름없이 집집마다 온갖 비극의 역사를 간직하고서.

    도망치는 여자들

    이 도랑마에 올해 73세가 되는 할머니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는데, 성이 안씨여서 안노인이라고 한다. 농사를 짓는데 논이 서너 마지기에 밭도 그 정도 되지만 할머니도 아들도 아주 부지런하고 알뜰해서 빚 안 지고 잘살았다. 그런데 아들이 장가를 못 가서 오랫동안 어머니와 둘이서 농사일을 하다가 늦게 어찌어찌해서 서울 색시를 얻어 장가를 들었다. 그 뒤로 아들까지 나서 지금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아이 엄마, 곧 안노인의 며느리는 걸핏하면 밖에 나가 음식 사먹기를 좋아했다. 거기다가 또 술을 즐겨 마셨다. 농사꾼이 외식을 즐기고 술을 좋아한다면 그런 집의 살림이 제대로 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할머니와 그 아들은 꾹 참았다. 그러다가 두 젊은 부부는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의논한 끝에 택시 운전을 하기로 했다. 논밭을 거의 모두 팔고 빚까지 내서 4000여 만원이나 들여 일반 택시를 샀다. 그래서 낮에는 남편이 운전하고, 밤에는 부인이 운전해서 부지런히 벌었다. 여섯 달이 지나는 동안에 모은 돈이 2000여 만원이나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이 엄마가 그 저축한 돈을 가지고 어디로 사라진 것이다. 그뿐 아니다. 알고 보니 가져간 것이 저축한 돈뿐 아니라 몇 가지 카드에서도 1500만원을 빼갔고, 그밖에 모두 합쳐서 4천몇백만원의 빚을 지어놓고 도망쳤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제 남은 재산이라고는 밭 500평과 택시 한 대뿐이다. 4000여 만원이나 되는 빚을 어떻게 하나? 남아 있는 그 밭은 한때 공장도 세울 수 있는 자리라고 해서 한 평에 10만원을 준다고 해도 팔지 않았는데, 이제는 시가가 한 평에 4만원쯤은 되지만 그런 사정에서 갑자기 팔려고 하니 그 반값인 2만원만 받겠다고 해도 살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 택시를 팔면 당장 먹고 살 길이 없어진다. 그래 어찌할 수가 없어 하루는 할머니, 그러니까 안노인이 우리 아이한테 찾아와서 제발 500평짜리 밭을 살 사람을 좀 알아봐달라고 했다. 왜 땅을 그렇게 헐값으로 팔려고 하나 물어보았더니, 자기 집 사정을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해주더란 것이다. 안노인은 그런 기막힌 일을 당했지만 그때까지 친척이고 이웃 사람이고 어떤 사람에게도 며느리가 제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멀지 않아 며느리가 돌아오게 되면 남들 보기에 거북스럽지 않게 지낼 수 있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안노인은 평소에도 좀처럼 집안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한테는 며느리가 잠깐 친정에 다니러 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일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땅을 팔아서 급한 빚돈을 갚아 불을 꺼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집안 사정을 다 털어놓았던 것이다.



    빚돈이 4000여 만원인데, 500평 땅을 팔아봐야 겨우 1000만원밖에 안 된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시집간 딸이 이 소식을 듣고 빚 갚는 데 보태 쓰라고 1500만원을 보내주었다. 그래서 그 돈하고 모두 2500만원은 갚을 수 있으니, 남은 빚 1500만원은 앞으로 택시 운전을 부지런히 해서 조금씩 갚아 나가면 먹고 살 수는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듣고 보니 그 사정이 하도 딱해서 우리 아이가 서울 있는 친구한테 급히 알려서 그 땅을 팔 수 있도록 주선을 했다.

    땅을 팔고 난 다음 하루는 그 안노인 아들이 우리 아이를 찾아와서 고맙다면서 소개해준 수고비로 돈을 든 봉투를 주는 것을 받지 않았다. 그랬더니 돈이 적어서 안 받나 싶어 그 다음날은 더 불룩한 봉투를 가지고 와서 두고 갔다고 한다. 그래 우리 아이가 그 집에 다시 찾아가서 나는 지금까지 이런 일을 더러 했지만 한 번도 돈을 받은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그 할머니에게 돌려주고 왔다고 한다. 우리 아이가 말했다. “그런 돈 받으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끊어지잖아요. 사람은 서로 정을 주고받는 것이 돈을 주고받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지요.”

    시골 농사꾼 가운데는 아직도 이 안노인과 그 아들처럼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착한 사람일수록 온갖 재난을 당하고, 총각들은 장가도 못 가고 사기를 당하고 한다. 한편 처녀들치고 농촌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고 죄다 도시로 가 있다. 도시에서 살다 어쩌다가 시골로 돌아와 농사꾼과 결혼해서 사는 수가 있어 신통하다 싶으면 몇 해 안 가서 그만 어디로 가버린다. 아이를 몇이나 낳아서 기르다가도 다 버리고 도망을 가버린다. 빚까지 잔뜩 지어놓고. 이런 집이 한두 집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벌써 10여 년 전부터 온 나라에 나타나 갈수록 심하게 되었다. 나는 남녀평등이고 호주제 폐지고 다 찬성하지만, 여성들이 펼치고 있는 여권운동이란 것이 어째서 이런, 자신들이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일에는 아주 눈을 감아버리는지, 그것을 알 수 없다. 도시 생활이 잘못되었다고 깨닫고는 농촌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있는데, 이런 가정에서 대개 남편은 농사꾼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 부인들은 도시에서 소비생활이나 즐기고 싶어한다. 그래서 흔히 이산 가족이 되고 만다. 또 부부가 함께 와서 농사를 짓게 되는 경우에도 남편은 땀 흘려 애써 일하는데 여자들은 일을 싫어해서 도시의 사치한 생활을 그대로 흉내내려고 하고, 집이고 옷이고 겉모양만 내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자식도 남편도 버리고 집을 나가는 것이다. 하도 이런 일을 많이 듣고 보아서, 방송이나 신문에서 도시의 여성들이 온갖 수난을 겪고 인권이 짓밟히고, 윤락여성으로 팔리고 한다고 해도 그만 별로 동정이 가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제 잘못이고 ‘자업자득’이란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비극의 교통사고, 그리고 자살

    이 마을에 홀로 사는 천씨 할아버지는 아들이 삼형제다. 딸도 있는데 몇인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 세 아들 중 막내는 도시에 나가 공원으로 살아간다. 여기서는 맏아들과 둘째아들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천씨 노인은 살기가 어려운 터에 맏이가 장가를 가서 식구가 늘어났기에 그만 아들이 며느리와 같이 살지 못하도록 집에서 내쫓아버렸다. “네 식구가 먹을 것은 어디 가서 네가 벌어오라”고 한 것이다. 쫓겨난 아들이 집을 나가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무엇을 해보려고 했지만 아무데도 일할 자리가 없어 굶주리며 거지 노릇을 하다가 집이 그립기도 하여 돌아오면 아버지 천씨 노인은 또 불호령으로 쫓아내고, 그러기를 두어 해 동안이나 되풀이했다. 그래도 아들은 자꾸 집으로 돌아왔고, 흔히 집 뒷산에 숨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 아내가 시아버지 몰래 음식을 산에 갖다주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번은 맏아들이 동생집으로 찾아갔다. 동생은 서울에서 순경을 하고 있었다. 찾아갔던 그날도 동생은 직장에 나가 있었고, 맞벌이하는 그 아내도 일자리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어린 조카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맏아들은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였기에 장가를 늦게 가서 아들이 이제 겨우 두 살쯤 되었지만, 순경으로 있는 동생은 벌써 열 살쯤 되는 아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 조카하고 방에서 놀면서 동생 내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동생이 돌아왔다. 순경 동생은 술에 만취가 되어 돌아오자마자 방바닥에 쓰러져 누워버렸다. 조카가 아버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어 장난을 쳤다. 권총에는 총알이 들어 있었다. 아이는 그 권총을 자랑스럽게 쳐들어 보이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하다가 정말 큰아버지를 겨누어 쏘아버렸다. 큰아버지는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큰며느리는 그 뒤로 더한층 고된 시집살이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난 두 살짜리 아들과, 남편이 죽은 뒤 뱃속에 들어 있던 딸아이가 또 태어나서 두 남매를 키우게 되었다. 그럭저럭 또 세월이 흘러 그 아들이 장가를 갔고, 며느리의 손자, 곧 천씨 노인의 증손자가 하나 나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1학년의 첫 소풍을 가던 어느 봄날, 할머니 손을 잡고 가다가 그만 버스에 치여서 죽었다. 그 아이 아버지(천씨 노인의 손자)는 자식이 죽은 뒤로 술로 살다가 역시 교통사고로 병신이 되고 말았다. 두 다리가 거의 다 끊어지다시피 되었는데, 겨우 수술을 해서 이어 붙였다. 지금은 목발에 의지해서 간신히 발을 떼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순경을 하던, 천씨 노인의 둘째아들도 교통사고로 죽었다. 천씨 노인은 증손자가 소풍길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그 다음해에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었다. 버스에 치여 죽은 아이의 엄마는 얼마 전에 연탄불로 두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죽지 못하고 지금은 식물인간이 되어 있다.

    우리 마을이고 어느 마을이고 교통사고로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이 없는 집이 거의 없다. 뱀과 개구리들이나 그 밖에 온갖 산짐승들이 차바퀴에 깔려 죽어가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재앙을 시골 사람들은 끊임없이 덮어쓰고 있는 것이다. 또 농약의 해독으로 죽거나 병든 사람이 없는 집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온 나라의 농촌이 다 이렇게 되어 있다.



    그 옛날에는 아무리 세금과 소작료가 가혹해도 그래도 깨끗한 자연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즐거워서 살 수 있었다. 나무 열매를 따먹고, 풀뿌리를 캐어 먹고 온갖 산나물을 먹으면서 노래하며 살았다. 그래서 건강한 마음으로 이웃끼리 정을 나누면서 사람답게 지냈다. 자살하는 농사꾼이 어디 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우리 농민들이 멸종되어가는 비참한 동물이 되고 말았다. 정치는 자연과 농민을 철저하게 팔아먹고 죽이는 길로만 미친 듯이 달려가면서 조금도 반성할 줄 모른다. 다만 자기 중심으로 눈앞의 잇속만 생각하면서 앞날은 나 몰라라 하는 꼴로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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