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한나라당 인사들은 ‘뉴스 포커스’ 박근혜(朴槿惠) 대표의 근황을 ‘외롭다’는 말로 전한다. 자타 공인 ‘바른생활 소녀’ 박 대표가 “외롭다”는 고백을 당내 누군가에게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이는 박 대표의 속내를 미뤄 짐작해 대변하는 말로 통한다.
열린우리당의 공격에 날이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당이 야당 대표 몰아세우는 게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다. 박 대표를 뒤척이게 하는 이유의 8할은 정작 당내 비주류에게 있다는 얘기다. 박 대표는 이재오(李在五)·김문수(金文洙)·홍준표(洪準杓) 의원 3인방을 필두로 한 비주류와 고독한 싸움을 벌이면서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한나라당 연찬회를 복기해보자.
8월29일 일요일 아침, 한나라당 의원 90여명이 전남 구례에 있는 농협연수원 대강당에 모였다. 전날 섬진강 답사와 연극공연 등의 일정을 마친 의원들은 이날 연찬회(硏鑽會)의 하이라이트인 토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방에서 자고 나온 이재오·김문수 의원은 강당 맨 뒤편에 나란히 앉았다. 3인방의 또 다른 한 명, 홍준표 의원은 미 공화당 전당대회 참관차 외유중이어서 이날 연찬회에 함께하지 못했다. 현안 관련 발제가 끝나고 토론 순서가 됐다. 맨 처음 김문수 의원이 연단 위로 올라갔다. 강당 맨 앞자리엔 박 대표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위로부터 한나라당 이재오·홍준표·김문수 의원.
소극장만한 강당 안의 분위기가 이내 무거워졌다. 과거 사과, 정수장학회 이사장직 사퇴, 강력한 행정수도 이전 대책 마련 등을 메뉴로 삼은 비주류의 박 대표 압박은 연찬회 이전부터 예고돼 있었다. 다만 당사자를 면전에 뒀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됐다.
바통을 이어받은 박계동(朴啓東), 고진화(高鎭和) 의원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사회자가 “오후 일정이 빡빡하니 토론은 가급적 짧게 하자”고 제안하자 이재오 의원의 고성이 터져나왔다.
“일정은 무슨 일정! 밤을 새워서라도 토론해야지, 연찬회에 놀러온 줄 알아?”
이 의원은 사회를 보던 유기준(兪奇濬) 의원에게 “말미쯤에 발언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놓은 상태였다. 그는 10여명 의원이 발언한 뒤 연단에 올라 유신과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거론하며 비주류의 공세를 최종 정리라도 하듯 박 대표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공격이 거듭됐으니 이제 수비가 따라야 할 차례다. 한선교(韓善敎) 진영(陳永) 전여옥(田麗玉) 의원 등 이른바 박 대표 측근들의 엄호 발언이 나왔다. “이재오 의원이 박 대표를 공격하는 것은 서울시장을 하고 싶어서라더라”(한선교 의원), “내가 아는 박 대표는 과거사 규명에 절대로 소극적이지 않다”(진영 의원), “총선 당시 박 대표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여러 의원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전여옥 의원).
‘떠날 때는 말없이’라도 부를까
아침 먹고 시작한 토론이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일진일퇴(一進一退)했으니 끝내도 될만하다’며 시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박 대표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여러 의원의 고언을 명심하겠다’는 식의 정리 발언으로 회의는 대충 마무리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몇 차례 사과했는데 또 사과하라니 무슨 곡절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이는 순수한 뜻이 아니고 대표 흔들기다.”
박 대표의 말에 토론장엔 일순 서릿발이 섰다. 졸던 의원들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찬물을 뒤집어쓴 표정이었다. 박 대표가 마음에 묻어뒀던 말들을 하나 둘 꺼내놓기 시작했다.
“저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한 분은 박근혜가 대표가 되면 탈당하겠다고 여러 번 공언했다. 그러나 탈당 안 했다. 자기가 한 말은 정정당당하게 지키고 남을 비판해야 한다.”
토론이 진행되는 2층 대강당으로 기자들이 부리나케 몰려들었다. 또박또박 말하는 박 대표의 냉랭한 목소리가 강당 안에 울려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