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음습한 성벽에 엉겨붙은 폭군의 광기와 피의 역사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4-09-24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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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의 젖줄 템스강과 우람한 타워브리지를 긴 세월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런던성.
    • 때로는 왕궁으로, 때로는 외침(外侵)의 피난처로 쓰인 이곳은 잔혹한 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여섯 아내를 맞았던 헨리 8세. 그의 폭정 아래 수많은 이가 런던성에 피를 뿌렸다. 그 피가 훗날 대영제국의 기틀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런던성의 한가운데 본궁으로 세워진 화이트 타워. 제복을 입은 비프 이터스가 관광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계절상 한여름인 8월 중순에도, 영국의 날씨는 을씨년스럽다. 하늘이 어둡고 자주 비가 내린다. 여기에 스산한 바람까지 한몫 거든다. 대륙과는 전혀 다른 섬나라의 이런 날씨에 한기마저 느껴진다. 이걸 보면 버버리코트 깃을 세우고 긴 우산을 팔뚝에 걸고 다니는 ‘영국 신사’의 전형은 그저 생겨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여행자는 이런 날씨에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아니, 유럽에서 가장 비싼 런던의 호텔 숙박비를 생각하면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다닐 수밖에 없다. 다행히 런던에는 볼거리가 많다. 최초로 영어사전을 편찬한 영국의 극작가 새뮤얼 존슨이 일찍이 “런던에 싫증난 사람은 인생에도 싫증난 것이다. 런던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런던은 오랫동안 세계 정치와 금융의 중심지였다. 오늘날의 런던은 존슨이 살았던 18세기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효력을 갖는다.

    런던의 수많은 명소 중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앤 불린(Anne Boleyn)의 비극적인 최후가 아로새겨져 있는 런던성(城)이었다. 정식 명칭은 ‘The Tower of London’인 데도 런던성으로 부르는 이유는 한때 왕이 거주했던 데다 요새 기능을 갖추고 있어서다. 궁(palace) 또는 성(castle)은 왕권의 실체적 표현이자, 그 주인인 왕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권위의 구조물이다. 때문에 성을 자세히 살펴보면 왕실의 취향과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역사여행가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왕조의 역사가 무척이나 긴 데다 보수적인 국민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국에는 궁전 건축물이 많다.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1837년부터 영국 왕의 집무공간이자 거주지로 쓰이고 있는 런던 시내의 버킹엄궁과 런던성을 비롯해 11세기 런던 교외에 지어진 이후 왕실 가족이 주말 휴양지로 찾곤 하는 윈저성, 런던성을 떠난 헨리 8세가 한때 머물렀던 런던 외곽의 햄튼 코트궁이 위용을 과시한다. 또 험한 자연 지형을 살린 산성(山城)인 에든버러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벌인 격렬한 투쟁의 역사를 보여주고 여왕이 스코틀랜드를 방문할 때 머물곤 하는 에든버러의 홀리루드궁, 웨일스의 귀네드에 소재한 에드워드 1세성(14세기 초 에드워드 1세가 첫아들 에드워드 2세를 얻은 곳으로 1301년 이후 이곳에서 황태자의 즉위식이 거행된다)은 여행객에 왕조의 화려한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이자 종교개혁을 단행한 헨리 8세. 그의 초상화가 런던성 곳곳에 걸려 있다. 그는 “아들이 필요해”라며 왕비를 다섯 번이나 갈아치웠다.

    옥스퍼드 교외엔 처칠의 생가이자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블렌하임궁(왕이 하사한 땅에 왕의 하사금으로 지었다)이 서 있다. 이 가운데 버킹엄궁과 윈저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정복자 윌리엄이 노르망디(지금의 프랑스 서북부 지방)로부터 건너와 왕위를 차지하고는 바다로부터 침범해오는 덴마크나 노르웨이 해적에 대비해 1078년에 짓기 시작한 런던성은 런던이란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템스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찍부터 천연의 요새였으나 기원전후 로마군의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당시 잉글랜드 전부(스코틀랜드는 제외)를 손에 넣은 로마제국은 이곳을 ‘론디니움’이라 불렀는데, 그게 후일 영어화하는 과정에서 ‘런던’이 된 것이다.

    윌리엄 왕이 세운 왕궁의 중심은 하얀 벽돌과 회갈색 벽돌이 섞여 희끗희끗한 화이트 타워다. 그 안쪽 방벽에는 탑이 13개 있고, 바깥 방벽에는 탑 6개와 능보 2개가 있다. 왕궁을 배경으로 튜더 스타일의 붉은 제복을 입은 비프 이터스(Beef Eaters, 헨리 7세가 퇴역군인을 모아 창설한 런던성의 경비)가 서면 한 폭의 멋진 그림이 된다.

    ‘피’의 상징 스캐폴드

    사람들로 북적이는 성의 입구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둥글넓적한 얼굴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아랫배가 불룩 나와 배짱이 두둑해 보이는 헨리 8세의 인물화다. 헨리 8세를 런던성의 상징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를 빼고는 이 성의 역사를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곳이 왕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3세기인 헨리 3세 때. 그 뒤로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왕은 고문과 대신들을 이곳으로 불러 대처방안에 대해 자문했으며, 때로는 피란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옛 왕실 무기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런던성 안쪽 풍경. 멀리 화이트 타워가 보인다.

    높이 27m의 화이트 타워를 가운데 두고 두터운 석축의 성벽이 에워싼 런던성은 사각 구조인데 그리 넓지는 않다. 하지만 곳곳에 제 나름의 기능을 가진 부속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헨리 7세(1447~1509, 재위 1485~1509)가 세상을 떠난 1509년까지 요새 겸 왕궁으로 쓰였다. 성벽은 높고 육중하며 이중으로 둘러쳐져 있다. 곳곳에 경계를 위한 망루도 서 있다.

    동쪽 성벽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런던의 젖줄 템스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강 위로 우람한 타워 브리지가 걸려 있는데 큰 배가 지나갈 때면 옛날 부산의 영도다리처럼 가운데가 위로 들린다. 그 아래로 크고 작은 배들이 들고난다. 여름철 관광시즌이면 화이트 타워 앞 잔디밭에선 16세기의 복장을 하고 무기를 손에 든 배우들이 당시의 생활상을 코믹하게 재현한다. 활쏘기와 음악공연도 펼쳐진다. 이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런던성을 찾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런던성이 이른바 ‘피의 성’으로 바뀌게 된 것은 헨리 8세(1491~1547, 재위 1509~47)가 등극하면서부터다. 그는 왕궁을 런던 시내의 화이트홀(다우닝가 10번지에 위치한 지금의 수상 집무실)로 옮기고 이곳을 무기고 겸 감옥으로 사용했다.

    런던성의 변화는 당시(15~16세기) 영국 역사의 변화와 무관치 않다. 변방의 섬나라 영국에 절대왕권이 확립되고, 프랑스와 에스파냐, 신성로마제국(독일) 등 유럽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던 것.

    그 첫 주자는 각기 백장미와 흑장미 휘장을 달고 싸운 이른바 장미전쟁(1455~85)이 끝나면서 왕위에 올라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 그는 봉건 가신층을 해산시키고 상인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에 따라 신흥 계급의 등장이 촉진됐고 국고(國庫)가 충실해지는 등 국가의 기틀이 다져졌다. 절대왕권이란 이렇듯 정치적 산물이라기보다는 경제적 성과였던 것이다.

    그 뒤를 이은 헨리 8세는 종교개혁을 단행해 국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앵글리칸 처치(Anglican Church), 즉 성공회를 창시했다. 영국은 비로소 외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립된 국가가 된 것이다. 이렇게 다져진 왕조의 기반은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1533~ 1603, 재위 1558~1603) 시대에 꽃을 피운다.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이란 말이 나온 것도 바로 이 시기다.

    헨리 8세는 왕위에 오른 뒤 런던성을 떠났지만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런던성에는 오히려 왕의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워졌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화이트 타워 뒤편에 있는 ‘타워 그린’이다. 이름 그대로 그리 넓지 않은 녹색 잔디마당에는 도끼로 여러 사람의 목을 내리쳤던 스캐폴드(scaffold)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헨리 8세는 재위 중 두 번째 왕비 앤 불린과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유토피아’의 저자이자 자신의 일급 고문관이었던 토머스 모어 등 7명을 그곳에서 참수했다. 이런 몹쓸 전통(?)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처형된 사람들의 이름과 처형일시가 적힌 비석이 서 있다. 그 수가 결코 적지 않다.

    헨리 8세는 헨리 7세와 요크 왕가의 첫 번째 왕인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형 아서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이다. 왕위를 이어받을 형이 있었기에 그는 청년시절 스포츠와 사냥, 독서 등을 하며 자유분방하게 자랄 수 있었다. 덕분에 1509년 그가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사람들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영국에 따뜻한 봄날이 찾아올 것이라며.

    그는 왕위에 오르면서 미망인이자 형수인 아라곤 왕국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스페인어로는 카타리나)과 결혼했다. 다섯 살 연상이었던 그녀는 에스파냐 왕국의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 여왕 사이에 태어난 공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규수였다. 콜럼버스를 도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이가 바로 캐서린의 부모였다.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빅토리아 여왕 시절 세워진 타워 브리지. 런던성 옆을 지난다.

    그렇지만 헨리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얻지 못했다. 아들을 원한 헨리의 뜻과 달리 그녀는 여러 차례 유산했고, 어렵게 태어난 아이들도 유아기를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왕위를 이을 자녀는 딸 메리가 유일했다. 딸이 왕위를 계승할 경우 왕실이 정치적으로 곤란해질 것이라며 아무도 메리의 계승을 달가워하지 않자 헨리는 결국 이혼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사랑 때문이 아니라 단지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왕비를 갈아치우든지 그대로 두든지 해야 했던 헨리. 그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나 다름없었다. 노예는 불행과 통한다. 그는 결국 왕위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만다. 그 희생자는 표면적으로는 간택된 왕비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자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후일 영국의 문호 서머싯 몸이 말한 ‘인간의 구속(Of Human Bondage)’ 같은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영국은 기독교 국가로 일부일처제를 엄격하게 지킨 탓에 왕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수많은 여인을 거느렸던 중국과 한국, 오스만제국의 왕들과 비교하면 불행했던 셈이다.

    이혼을 생각하기에 이르자 헨리는 캐서린이 더욱 싫어졌다. 바로 그때 미모의 궁녀 앤 불린이 헨리의 눈에 띄었다. 처음 본 순간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일었고 이후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그때 앤 불린의 나이는 25세 전후라 말 그대로 꽃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쉽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캐서린을 그대로 두고 앤을 왕비로 맞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서둘렀다.

    국왕과 교황의 한판 승부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화이트 타워 옆 성베드로 교회 앞에 펼쳐진 타워 그린은 헨리 8세 시절 단두대가 설치됐던 곳이다.

    헨리는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로마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청원했다. 그러나 교황청의 입장에서 볼 때 캐서린은 당시 무적함대를 이끌며 교황청을 좌지우지하던 에스파냐 왕실 출신인 데다 가톨릭 교회엔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결국 그의 청원은 쉽게 들어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조용히 물러설 헨리 8세도 아닌지라 로마교황청과의 사이에 한동안 논쟁이 이어졌다.

    “법적인 부인과는 헤어질 수 없다네.”

    “그건 말도 안 돼.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그 여잔 이미 과부의 몸이었거든. 그리고 형수와의 결혼은 성서에도 금지돼 있어.”

    “하지만 그 결혼은 교황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던가.”

    “그게 하느님의 축복은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그녀는 딸 하나만 낳았네. 나머지 넷을 사산했어. 그 결혼은 하느님의 뜻에 거슬리는 게 분명해.”

    그래도 교황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헨리는 가톨릭과 결별하기로 하고 자기 생각을 그대로 밀어붙었다. 캐서린을 쫓아낸 것이다. 대단한 배짱을 갖지 않으면 못할 일을 그는 단숨에 해치우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헨리가 기독교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또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형식상으로는 가톨릭과 구별되나 교리나 내용 면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는 앵글리칸 처치다. 교회란 단어 앞에 영국을 뜻하는 ‘앵글리칸’을 넣음으로써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가톨릭과는 별도이며, 신의 대리자인 왕의 통치하에 있다는, 다시 말해 영국 왕이 그 수장임을 밝혔다. 영국의 왕이야말로 영국구교의 유일한 최고자이며 지상에 보내진 주님의 대리인이라는 이 이론은 재상 토머스 크롬웰의 작품이다.

    그것은 신의 시대가 지나고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런던성에 보관돼 있는 도끼. 앤 불린은 이 도끼에 목이 잘려 저 세상으로 갔다.

    크롬웰이 이룬 또 하나의 업적은 수도원 해산이다. 그에 따라 수도원이 소유했던 모든 재산은 왕에게 돌아갔고 성직자에게도 세금이 부과됐다. 이제까지 금기시돼 오던 일을 단행함으로써 헨리의 정치적·경제적·종교적 입지는 크게 향상됐다.

    헨리가 앤을 맞아들이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토머스 모어 경이 희생됐다.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헨리에 의해 대법관으로 발탁되었고, ‘유토피아’를 통해 이상적 국가상을 그렸던 토머스 모어. 헨리 8세는 그를 우군으로 삼아 캐서린과의 이혼을 성사시키려 했다. 그래서 친히 모어 경의 집을 방문하는 성의까지 보였다. 자신의 결혼에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숙청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던 그였지만 모어 경만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실리적인 측면도 작용했다. 모어가 그의 뜻에 따라준다면 모두 입을 닫을 것이라는 확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언론과 문인들도 두 사람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모어 경은 국왕의 신하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아들임을 내세워 교황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왕은 그를 런던성에 가두었다. 그리고 단두대의 제물로 삼았다. 왕은 그의 잘린 목을 타워 브리지에 걸어 새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라고 명령했지만 모어 경의 딸은 그걸 어기고 아버지의 머리를 집으로 가져가 죽는 날까지 간직했다. 그러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아버지의 머리를 자신의 무덤 속에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참으로 효성 깊은 여인이다.

    한쪽에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난 너를 원한다. 널 꼭 갖고 싶다”며 야곱이 라헬에게 했던 대로 왕은 앤에게 청혼했다. 1533년 꿈에 그리던 왕비의 자리에 오른 앤 불린은 화이트 타워 앞 ‘왕비의 방’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템스강의 명물 타워 브리지를 조망하기에 참으로 좋은 그곳에서.

    그러던 어느 날 캐서린이 죽었다. 앓던 이가 빠지기라도 한 듯 앤 불린은 뛸 듯이 기뻐했다. 더욱이 몸속엔 아이까지 자라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튼튼한 아들을 낳기만 한다면 내 지위는 확고부동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몇 달 뒤 그녀에게 닥친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아이가 유산되고 만 것이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히스테리에 의한 유산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녀의 시녀 시모어가 왕의 무릎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미친 듯이 날뛴 적이 있다”는 게 그러한 주장의 근거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국왕이 도도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한때나마 온갖 애교를 떨기도 했건만 앤 불린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36년의 생애 가운데 영광의 나날은 단지 2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아들을 요구하는 왕의 뜻을 들어주지 못한 게 그녀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녀 역시 무시무시한 도끼에 목이 잘려 저 세상으로 갔다. 그때가 1536년 5월19일이었다. 그 도끼는 시퍼런 날을 세운 채 런던성에 지금도 고이 모셔져 있다. 그때의 비극을 후세에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앤 불린은 짧은 기간 영광과 나락의 절정을 동시에 경험한, 역사적으로 그 예가 드문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가 낳은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에 영광을 안겨주며 앤의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케 해준 것을 생각하면 그녀를 비극의 화신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소설 ‘천일의 앤’과 1969년에 나온 동명(同名)의 영화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대관식부터 처형되기까지 1000일간의 그녀의 행적을 담아냈다. 영화는 특히 죽음을 앞두고 증오와 원망에 가득 찬 앤의 눈동자를 실감 있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녀에게 씌워진 죄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사실과는 달리 간통이었다. 간통이라면 그녀만 희생자일 수는 없을 터. 헨리 8세와 결혼하기 전 앤의 애인이었던 토머스 와이어트 경이 바로 그 희생자 가운데 하나였다. ‘소네트’라는 문학 형식을 영국에 처음 소개한 시인이기도 한 그는 런던성에 갇혔다가 천신만고 끝에 석방된 뒤 앤 불린의 죽음을 소재로 한 작품을 썼다.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줄줄이 참수

    헨리 8세의 왕비들은 하나같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앤이 처형된 지 열이레 뒤 왕은 앤의 시녀였던 시모어와 결혼했다. 세 번째 왕비가 된 제인 시모어(Jane Seymour)는 다행히도 왕자를 낳았다. 그가 헨리의 유일한 아들이자 헨리를 이어 왕이 된 에드워드 6세다. 하지만 아들을 낳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시모어는 저 세상으로 떠났다.

    헨리 8세와 대영제국의 초석 런던城

    영국 왕실의 왕관과 보검 등 진귀한 보석들이 보관, 전시되고 있는 워털루 배럭스.

    헨리는 그 후 3년에 걸쳐 찾아낸 독일 왕실 태생 클레브스 남작의 누이 앤(Anne of Cleves, 독일어로 안나) 공주와 결혼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녀는 이혼당해 쫓겨났다. 정략적 차원에서 한 결혼이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이루자 용도 폐기된 것이다.

    앤을 왕비로 천거한 사람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크롬웰이었다. 그런데 그도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그저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처형장에서 참수당한 것이다. 남을 의심하기 좋아하는 헨리가 드디어 과대망상증을 보이면서 조금만 삐딱해 보이면 가차없이 목을 날려대기 시작했는데, 크롬웰이 그 첫 희생자가 됐다. 일이 이쯤 되자 그의 앞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구든 ‘예스맨’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 맞아들인 캐서린 하워드(Katherine Howard)는 앤 불린의 조카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해야 15~16세. 왕과는 나이 차이가 많았는 데도 처음엔 부부가 즐거운 시간을 갖는 듯하여 오래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왕은 외도했다는 죄목을 씌워 그녀를 타워 그린의 이슬로 만들어버렸다. 헨리 8세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버린 뚱뚱한 몸매를 과시하기 시작한 것은 성격상 결함이 절정을 이루었던 그즈음이었다.

    정말 누구도 못 말리는 헨리 8세가 여섯 번째로 맞아들인 여자는 캐서린 파(Katherine Parr)였다. 그녀와의 사이도 그리 매끄럽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드센 사나이’ 헨리 8세는 1547년 1월28일 드디어 눈을 감았다. 19세의 나이로 등극할 때만 해도 백성이 그에 대해 가졌던 기대는 하늘을 찌를 듯했는데 결국엔 그 스스로도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한 채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가 평생 그토록 원했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던 소망은 시모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6세가 왕좌에 오름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는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타고난 약골이라 어쩔 수 없었다. 왕위는 이복누이 메리(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에게 넘어갔고,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메리 역시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나자 앤 불린의 고명딸 엘리자베스 1세에게로 이어졌다. 그 후 영국은 연속해서 여왕을 맞이하게 된다.

    사생아로 낙인찍힌 채 어린 시절을 보낸 엘리자베스는 배다른 남동생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자 반역혐의까지 뒤집어쓰고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기도 했지만 에드워드와 언니 메리가 차례로 요절하자 스물다섯의 처녀에서 일약 영국을 다스리는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녀는 45년간 왕위를 지켰다. 그것은 내외의 적들로부터 시련을 겪던 영국에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영국은 신교와 구교가 대립하고 강력한 의회에 왕권이 밀렸으며 심각한 재정적자와 과도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에스파냐와 교황청 등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탁월한 위기관리 리더십을 발휘해 영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했다. 그녀는 한마디로 난세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처녀로 살았다. “영국을 남편으로 두었기에 결혼하지 않겠다”던 대관식 때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아버지 헨리 8세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들을 얻겠다며 여섯 여인과 결혼했지만 결국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 마음에 걸려서 말이다.

    나그네는 참수의 현장인 타워 그린의 스캐폴드, 엘리자베스 1세가 공주 시절 한때 유폐당했던 벨 타워, 엘리자베스 여왕을 사모했던 월터 롤리 경이 한동안 갇혀 살며 ‘세계의 역사’를 집필했다는 블러디 타워(Bloody Tower) 등을 둘러보고는 워털루 배럭스(Waterloo Barracks)란 이름이 붙은 주얼 하우스(보석관)로 발길을 돌렸다. 윗부분에 530캐럿(크기가 달걀만하다)이나 되는 십자 형상의 다이아몬드가 달려 있어 ‘아프리카의 별’이란 이름이 붙은 왕홀과 작은 다이아몬드 조각 3250개로 만든 대관식용 왕관, 무게가 10kg에 이르는 금실로 짠 대관복과 보검 등이 진열돼 있다.

    다이아몬드! 그것은 영원한 사랑과 존귀함의 상징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다이아몬드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탄소덩어리에 불과한 원석을 누가, 어떻게 연마하느냐에 따라 디자인과 광채는 물론 감동의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신비스런 보석으로 꼽히는 인도 무굴제국의 코이누르(Koh-i-noor) 다이아몬드가 박힌, 엘리자베스 2세가 대관식 때 머리 위에 썼던 이곳의 왕관을 앞설 것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캔터베리 대성당의 기적

    피의 복수극이 펼쳐진 런던성을 둘러본 다음날 영국성공회의 총본산인 캔터베리(Canterbury) 대성당을 찾았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뿌리는 데도 런던의 빅토리아역에서 켄트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주무대인 캔터베리 대성당은 영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순례지다. 그것은 대주교 토머스 베킷이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 국왕의 신임을 받던 베킷이 영국 교회의 개혁에 관해 국왕과 견해를 달리한 게 탈이었다. 이걸 보면 영국의 역사에는 왕권이 교권까지 장악하려는 기도가 깔려 있는 듯하다.

    아무튼 베킷이 죽자 그가 살해당한 제단 위에서 승천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 기적의 현장을 직접 보겠다며 몰려드는 통에 대성당은 갑자기 순례지로 떠올랐고, 베킷 또한 성인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1173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은 종심(縱深)이 무려 160m나 되어 여러 무더기(群)의 계단을 지나야 했다. 그 좁다란 복도를 따라 걸으니 대성당 안에 감도는 경건함이 몸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성스러움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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