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 사회로의 진입 가로막는 ‘박정희 신화’
- ■ 박정희 리더십 칭송은 동양적 전제주의 발상
- ■ 독재 아니면 경제개발 안 된다는 건 세계적 논쟁거리
- ■ 밀고꾼, 기회주의자가 국가지도자 돼서야
- ■ 유신 때 덕 본 사람들은 입 다무는 게 역사에 대한 도리
유신시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던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은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독재에 대한 병적인 향수”라고 비판했다.
그런 만큼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평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그와 맞서고 있는 야당 대표가 박정희 정권 시절 퍼스트 레이디 노릇을 했던 박근혜 의원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의장은 9월초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정당회의 참석차 3박4일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인터뷰는 그가 중국에서 돌아온 직후인 9월6일과7일 이틀에 걸쳐 두 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인터뷰에서 그는 유신시절 ‘가해자’들의 참회를 요구하는 한편 ‘박정희 신화’가 우리 사회가 열린사회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인터뷰 전날인 9월5일 노무현 대통령은 MBC 시사프로그램 ‘2580’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소신을 밝혀 이 법을 둘러싼 논쟁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이 논쟁을 바라보는 이부영 의장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다. 다섯 번의 구속 중 네 번이 이 법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신시절 이 법은 전가의 보도였다. 국가안보를 지키는 법이라기보다는 정권안보를 수호하는 무법의 칼이었다.
-국가보안법 피해자로서 폐지 논쟁을 바라보는 소회가 남다를 텐데요.
“애초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들을 처벌할 목적으로 제정된 법이 정치권력에 의해 악용된 거지요. 유신시절 수많은 민주화단체가 이 법에 의해 빨갱이 조직으로 몰렸어요. 당시 공안기관에 있으면서 용공조작에 관여했거나 유신의 덕을 봤던 사람들이 현 정부를 좌파정권이라고 얘기할 때마다 묵은 상처가 도지는 느낌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은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되죠.
이번에 내가 중국에 갔다왔잖아요. 중국 공산당이 주최한 제3회 아시아정당대회였는데 35개국 82개 정당대표가 참석했습니다. 공산당에서 극우정당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정당이 모였어요. 회의장에서 필리핀 우파 정당인 라카스당의 총재인 아로요 대통령이 ‘ideological richness’, 즉 ‘이념적 풍요로움’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아시아 대륙만큼 다양한 민족과 인종, 종교가 얽혀 있는 곳도 없습니다. 각양각색의 정당을 보며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왜소하고 뒤처져 있다는 생각이 왜 그렇게 드는지…. 그들은 좌파 우파 따지지 않고 더 잘사는 방법에만 관심을 갖고 있어요. 정당의 이념과 관계없이 서로 교류하고 평화번영을 얘기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좌파니 빨갱이니 하고 따지고 있잖아요.”
‘이부영은 빨갱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음 구속된 게 동아일보 해직기자 신분이던 1975년이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데에는 정권의 압력이 작용했던 것인가요.
“알 수 없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나왔다가 6월에 끌려갔어요. 동아일보 광고 사태가 해결될 즈음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의해 좌파로 몰렸어요. 우리(동아투위)와 동아일보를 분리시킬 목적에서 그런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운동을 좌파들의 소행으로 꾸미기 위해. 그런데 잡혀가기 전에 이미 ‘이부영은 빨갱이’라는 소문이 사내에 돌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정권 차원의 공작이라고 봐야 하나요.
“권력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빨갱이로 몰아 사상적으로까지 죽인 건 심했죠.”
이 의장은 1961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애초 기계공학도를 꿈꾸었던 그가 정치학과를 지망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어난 4·19 때문이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가 시위 도중 총탄에 숨지는 것을 지켜보며 정치를 공부해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의장이 대학에 입학한 지 3개월 후 5·16이 일어났다. 이 의장에게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4·19로 움튼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은 자’일 뿐이었다.
“입학하자마자 그런 시련에 직면했어요. 5·16은 내 젊은 시절을 반독재민주화투쟁에 바치는 계기가 됐어요. 그 무렵 장준하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어디에 있는지 깨우치게 됐습니다.”
“4·19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진 후 혁명의 열기가 통일운동으로 옮아갔어요. 한편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는 감격이 잦아들면서 연일 벌어지는 시위에 대한 거부감이 표출되기 시작했죠. 특히 통일운동은 극우 반공적 분위기와 크게 부딪쳤어요. 그런 분위기를 틈타 5·16이 발발한 겁니다.”
-당시에도 박 전 대통령의 좌익 경력이 알려졌었나요.
“1963년 대선 때 윤보선 후보측에서 사상논쟁에 불을 지피면서 처음 알려졌지요. 박정희의 여순반란사건 관련사실을 폭로한 것이지요. 하지만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좌익의혹을 부채질한 건 거물간첩 황태성 사건이었어요. 5·16 직후 남파된 황태성은, 좌익활동을 하다 경찰 총에 맞아 숨진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박상희는 김종필의 장인이고요. 서울에 온 황태성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까지 만났는지는 확실치 않아요. 어쨌든 황태성은 체포돼 사형에 처해졌지요.
이런 일들로 박정희 정권이 좌파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작 학생들 생각은 달랐어요. 박정희 자신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다고 했고 4·19 이후 탄생한 많은 단체와 정당을 좌파로 몰아 탄압하고 관계자들을 죽이고 했거든요. 그런 걸 보고 좌파경력이 있는지는 몰라도 좌파는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저 (여순반란사건 때) 자기 혼자 살기 위해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죠.”
“독재만이 경제발전과 양립하는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때 좌익활동을 한 데는 형 박상희의 죽음이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상희와 황태성은 항일운동 동지다. 박상희는 구미에서, 황태성은 김천에서 활동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황태성이 박상희의 중매를 섰을 정도로 가까웠다.
대구폭동사건은 두 사람을 생과 사의 갈림길로 이끌었다.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박상희는 경찰 진압과정에 피살됐고 역시 주모자로 몰린 황태성은 몸을 피했다가 월북했다. 황태성이 5·16 직후 북한의 밀사로 남파된 데는 박정희 집안과의 이런 개인적 인연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부영 의장은 8월20일 기자간담회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군내 프락치 총책’이라고 지칭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프락치 총책’이라는 표현은 좀 심한 것 아닌가요.
“그럼, 군 내부 좌익조직의 총책이라고 하면 되나? 당시 그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제목이 ‘프락치 총책’이에요.”
-박 전 대통령이 사상적으로 투철한 좌익은 아니었잖아요. 형의 죽음과 광복 이후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요. 또 이후 그의 행적을 살펴봤을 때….
“박정희가 군에 들어갔으니 형 박상희와 선배들이 집중적으로 포섭하려고 했을 것 아니에요. 상당히 광범위하게 포섭작업을 벌였지. 여순반란 주동자인 김지회가 박정희의 육사 동기예요.”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IMF사태 이후 두드러진 ‘박정희 부활현상’은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지난 총선 때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현 대표를 내세워 기사회생한 것이 단적인 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인기가 높은데,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한마디로 정리하긴 어려워요. 옛날은 다 아름답고 그리운 것이고 과거는 다 미화되게 마련입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의 저변에는 박정희 시대에 가난을 극복했다는 신화적인 의식이 짙게 깔려 있어요. 그 시대엔 다들 엄청 고생했잖아요. 농촌이 해체되고, 농민의 아들딸이 도시에 진출해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서독에 가서 광부로 간호원으로 일하고,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목숨 걸고 달러를 벌고…. 그런 고생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들이 지금 기성세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자기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잘살게 됐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과연 민주주의시대를 거쳤다면 경제성장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과연 경제성장은 서양에서만 민주주의와 함께 가능하고 동양에서는 안 되는가. 동양적 독재만이 경제발전과 양립하는가. 그런 숙제가 남아 있는 거요.
박정희 신화는 독재를 해야만 경제성장이 된다는 논리와 연결되면서 우리 사회가 열린사회로 진보하는 것을 막고 있어요. 박정희 부활현상은 독재에 대한 병적인 향수입니다. 한 사회가 경제발전을 하는 데 독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 대해 심각하게 논쟁을 해볼 필요가 있어요. 세계적인 논쟁거리가 될 거요.”
-박 전 대통령의 경제발전 공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요.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인정한다는 거지. 그렇지만 민주주의를 하면 경제성장을 할 수 없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은 인정 못하지. 독재를 해야만 경제성장을 한다는. 아직도 한나라당 안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맹목적인 신앙을 갖고 우리 사회가 열린사회로 나아가는 데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겁니다.”
-박 전 대통령의 인기는 현실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IMF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생긴 데다 정치권의 혼란을 지켜보면서 강력한 지도자상을 찾게 된 게 아닌가 싶은데요.
“IMF사태 때 드러난 우리 경제의 구조적 결함이 뭡니까. 관치경제 정경유착의 폐해 아닙니까. 경제인들이 정부 쪽만 바라보는 습관도 그렇고. 그게 다 박정희 시절의 중앙집권적 경제개발방식에서 기인한 것 아니냐고.
지금도 우리나라처럼 경제인들이 매일 정부에 뭘 해달라고 요구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김영삼 김대중보다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중앙집권적 관치경제에 책임을 물어야지요. 거의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 모델이었지.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그리고 재벌을 비정상적으로 키운 잘못도 커요. 사회를 이중적 구조로 만든 것 아닙니까. 중소기업이 독자적 영역 없이 재벌의 부속품처럼 돼버렸잖아요. 지금 노동운동의 격렬성이 어디서 연유합니까. 유신 때 워낙 감시하고 탄압해 저런 체질이 된 것 아니냐고. 마치 지하운동처럼 생존권 운동을 펴는 것 아니냐고. 이런 것이 다 바로 박정희의 유산 아닙니까.
박정희의 부정적 유산은 구조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예를 들어 이념적으로 가장 우익에 가깝다고 보는 상이군경이나 월남참전용사들, 특히 고엽제피해 장병들,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이 이들을 얼마나 속였어요. 박정희를 가장 지지하는 사람들인데 실은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야.
또 미국이 월남파병 한국 군인들한테 주는 수당의 일정액을 정부가 무조건 떼어버렸다고. 횡령한 것 아니냐고. 이거, 앞으로 큰 문제가 될 겁니다. 또 한일협정 맺으면서 일본이 한국 민간인들에게 배상해야 할 부분을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 받은 걸로 대체했다고. 이것도 떼어먹은 것 아니냐고. 그리고는 신문에 조그맣게 개인적으로 일본에 배상청구하라고 공지했다고. 그래놓고선 정부는 책임이 없다고 했어요. 아마 사람들이 잘 몰라서 배상청구를 못했을 거예요. 원폭 피해자, 징병·징용자, 정신대…. 일본은 한국정부가 다 포기하지 않았냐고 말하고 있어요. 이건 국가권력에 의한 대국민 사기이자 횡령이지.”
-박 정권의 가장 큰 과오를 꼽는다면요.
“정상적으로 발전해야 할 민주주의를 압살한 것이지요. 북쪽은 북쪽대로 남쪽은 남쪽대로 국가의 정통성을 짓밟았어요. 북쪽은 조만식을 비롯한 숱한 독립운동가를 다 숙청하고 정부를 김일성 일파로만 채웠어요. 남쪽도 김구 김규식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등 정통 민족주의자들을 다 거세하고 이승만과 친일파가 득세했습니다. 그후 4·19 민주혁명으로 복원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다시 짓밟은 게 5·16이에요.”
-박 전 대통령의 과오를 가리는 것이 경제개발 치적입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박정희식의 경제개발 방식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었다고들 말하지요.
“논점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박정희의 개발독재로 인해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면 납득을 하겠어요. 개발독재의 혜택을 본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안 하는 것이 예의일 거요.”
-온갖 고문과 탄압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는 건가요.
“예의가 아니라, 그런 걸 자행하는 데 직간접 기여한 사람들의 경우 말을 아끼는 게 역사에 대한 도리일 거라는 얘기입니다. 이젠 어떻게 된 건지 독재의 정점에 섰던 사람의 자식까지 교육을 받고 와서 그런 얘길 하고 있어요. 제2세대죠.”
-박정희 부활현상을 과거에 대한 향수라고 말씀하셨는데, 단순히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닌 듯싶습니다. 경제개발 공 못지않게 박정희라는 지도자의 리더십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를 반영하는 것은 아닌지. 박정희의 인간적 매력에 대해서도. 이를테면 청렴, 강직, 서민적 이미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많겠죠. 청렴 이미지만 해도 그래요. 요즘 문제가 되는 정수장학회만 해도 부일장학회를 강탈해 만든 것 아니요.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다 뺏었잖아요. 영남대학 경향신문도 한때 5·16재단으로 넘어갔었잖아요. 앞으로 이것도 과거사 규명과정에서 밝혀지겠죠. 중정이 앞장서서 강탈한 거니까. 이렇게 국가권력을 이용해 강탈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런 측면에서 청렴 이미지는 허상 아닌가요.”
-개인적 축재가 드러난 건 없잖아요.
“정수장학회가 누구 소유입니까. 만약 박 전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사유화된 재산이 아니라 공적인 법인 성격을 띠고 있으니….
“부정으로 치부한 정치인 경제인들은 다 그런 식으로 전위기관을 내세워 재산을 관리하지 않습니까. 무슨 재단이니 하면서. 워낙 독재기간이 길었고 그 후에도 박 정권을 옹호하는 정권이 들어서다 보니 진실을 파헤칠 기관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던 거지요. 급기야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국가가 재정을 지원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정치권이 박정희 향수와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그런 조치까지 취한 것 아닙니까.”
기자가 “그건 김대중 대통령이 주도한 것 아니냐”고 묻자, 이 의장은 “그 얘긴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자르면서 “그러니 박정희 지지자들이 더욱 의기양양해질 수밖에” 하고 개탄했다.
독재자들의 착각
-경제발전에 대한 신념과 열정,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은 점,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대형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한 점 등을 들어 박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죠.
“동양적 전제주의의 발상입니다. 영특한 지도자론, 왕조시대 지도자론이죠. 그런 걸 계속 미화해서는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말이 많고 좀 더디더라도 국민의 집단적 합의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목표만 이루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한 결과 날림공사, 부실공사로 건축물이 무너지는 등 얼마나 부작용이 많았습니까. 실적주의의 폐단이에요. 그것이 1960∼70년대 한국 근대화의 얼굴이죠. 힘 있고 돈 있으면 여자는 얼마든지 거느려도 된다는 식의 천박한 사고방식. 목표만 정당하면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는 발상. 사람이 좀 희생되면 어떠냐, 목적 달성만 하면 되지 하는….”
-국민들한테도 그런 의식이 전파됐다고 봐야 할까요.
“그 전부터죠. 왕조시대 이래로 민주주의 시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12년 동안 독재를 한 이승만 전 대통령도 국부로 모시잖아요. 조금만 목소리가 높아지면 혼란으로 치부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요. 독재를 질서로 미화했지요. 1978년 동일방직사건 때 시위하던 여공들한테 똥을 먹였잖아요. 그건 인간에 대한 모독이거든. 그 시대엔 그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단 말이지. 사람 죽여놓고도 자살한 것으로 꾸미고.”
-근대화란 산업화와 민주화를 말한다고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이 산업화에 성공한 만큼 민주화에 발판을 마련해준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민주화를 생각하고 산업화를 했다는 뜻은 아니겠지. 산업화를, 독재권력을 장기화하고 공고히 하는 발판으로 삼았을 텐데. 모든 독재자의 착각이 그것이에요. 국민을 잘살게 해주면 영원히 추종받는 줄 알고….”
-실제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향수가 살아 있잖아요.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위대한 지도자라는.
“민주주의를 하면서도 경제발전을 이룬 사례가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래요. 경제발전은 이뤘지만 독재의 후유증이 얼마나 큽니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도 얼마나 큰 비용을 치르고 있냐 말이죠. 언론이 박정희 시대를 제대로 조명하고 분석해야 해요. 이번에 아시아정당회의에 가서 보니 우리나라는 외딴 섬이야. 경제적으로는 앞서 있는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미숙한 상태예요. 이는 남북이 마찬가지입니다. 냉전분단독재의 후유증이죠. 60년 가까이 계속된 분단독재 속에서 양쪽에 조성된 기득권이 있잖아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남쪽에서는 국가보안법이고 북쪽에서는 노동당 규약입니다.”
“궤변에는 답하지 않겠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에 대해 학계에서는 세 가지 시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절대적 긍정론으로 그 시대에는 반드시 그 모델이 필요했을 뿐더러 지금도 그 방식이 유효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옳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산업화 초기에 불가피했다는 시각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재 정당화 논리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있죠. 의장님은?
“민주화를 통한 경제발전은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담고 있는 것 아닌가요.”
-역으로 말씀하시는데, 논리적으로 꼭 일치하는 얘기 같지는 않습니다.
“박정희 모델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얘기엔 독재를 합리화하는 논리가 숨어 있죠. 내 말은 그런 걸 받아들일 수가 없단 거예요. 박정희 독재하에서 이뤄진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돌아갔다면 좋은 일이죠. 그런데 대다수 국민은 피땀 흘린 것만큼 받지 못했어요. 오히려 많이 빼앗겼지.”
-경제발전 성과는 인정하지만 그 열매가 제대로 국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돌아가지 않았죠. 그런데 그 전보다는 조금 낫게 살게 됐기 때문에 그것마저 감지덕지 감사하는 측면이 있어요. 언론을 통해 얼마나 찬양이 됐습니까.”
-조갑제씨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인권제약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배고픔 해결로 오히려 인권신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그런 궤변엔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한때는 박정희 전두환의 인권탄압을 격렬히 비판했던 사람이에요, ‘마당’이라는 잡지의 기자로 있을 때. 일관성이 없는 거지.”
8월19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여권의 과거사 진상규명 제의에 대해 “친북·용공행위와 5·16의 공과까지 포함시켜 제대로 해보자”는 역(逆)제의를 한 것이 화제에 올랐다.
“난 박근혜 대표가 아버지 생애를 잘 모른다고 생각해요. 마치 신기남 전 의장이 부친 생애를 잘 몰랐듯. 누가 박 대표에게 그런 얘기를 했겠어요. 박 전 대통령을 신앙처럼 생각하는 분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박 대표는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 중·고교를 다니고 대학도 졸업했어요. 계속 최고의 생활만 하면서 아버지의 대통령 이전 삶에 대해서는 알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누가 박 대표에게 박 대통령의 친일·좌익경력을 얘기해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걸 얘기하는 사람이 어떻게 (청와대에) 접근할 수 있겠어요. 박 대표가 만일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제대로 안다면 친일이나 친북좌경 문제에 대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관동군 장교로 있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독립군 4지대를 찾아가 변신을 시도하고, 귀국해서는 공산주의자로 변신해 남로당의 군내 프락치 총책이 돼 군인들을 포섭하고, 그게 발각되자 다 불어버리고 자기만 살아남고, 기회를 틈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이런 과정을 거친 사람이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게 옳은 일이었는가. 그런 과정 속에서 지도자로서의 올바른 철학이 형성될 수 있겠는가. 5·16 후에도 지속적으로 동지들을 배신하고 거세했잖아요. 박 전 대통령의 성장과정이나 지도자로 등장하는 과정을 보면 영구집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복이 두려워서 말이죠?
“그렇죠.”
-한나라당이 친일진상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박근혜 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한나라당은 박정희의 그늘, 박정희의 치마폭에 의존하는 정당입니다.”
-박근혜 대표는 정수장학회 문제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반납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박 대표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에요. 그거 남의 멀쩡한 재산을 강탈한 것 아닙니까.”
-박 대표가 지난번에 (언론인터뷰를 통해) 유신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까.
“뭘 사과해요. 난 들은 적이 없는데. 박 대표는 아버지의 과오를 인정 못해요. 아버지의 사고방식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박 대표도 유신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을까요.
“피해자가 아니라 포로지.”
가해자가 먼저 회개해야
인터뷰를 정리해야 할 시간이 됐다. 마지막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좋은지 물어봤다.
“우선 그 문제와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우리 국민들의 진로를 가로막지 말아야죠. 또 박 대통령 시절 득을 본 사람들이 그 시대의 과오를 합리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면에서 독일이 2차대전 이후 취한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어요. 독일은 양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프랑스에 철저히 사죄했어요.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등 독일의 침략으로 피해를 봤던 국가들, 심지어 집시들에게까지 사과하고 배상했어요. 그러니 동서독이 통일하는 데 어떤 나라도 반대하지 않았던 겁니다. EU의 핵심은 독일이에요. 독일의 힘으로 유럽통합을 이룬 겁니다. 무력이 아니라 평화적 수단으로.
이 위대한 과정을 남북한 모두 배워야 합니다. 일본도. 일본은 지금과 같은 태도로는 아시아의 이웃이 될 수 없어요. 잘못했다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혜택을 베풀었다고 생각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지난날 인권을 짓밟고 독재를 했던 세력도 잘못을 반성해야 해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도덕성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남아공의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르 클레르는 만델라를 찾아가 8시간 동안 대화하면서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고 진실 규명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그들은 진실을 규명하고 서로 화해하고 용서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우리는 왜 못 밟습니까. 잘못을 인정한다고 왜소해집니까. 더 위대해지는데. 나는 이 얘길 누구누구한테 해주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유신의 피해자 중 한사람으로서 박 전 대통령과 그 추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여쭈려 했는데, 답을 해주신 것 같네요..
“우리 역사도 위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으면 안 돼요. 위대해지려면 과오를 인정해야 합니다. 가해자가 스스로 뉘우치지 않은데 피해자가 어떻게 용서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