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를 평가하면서 경제성장의 영도력만 기억하려는 시도가 그의 유산인 IMF 환란 이후에도 지속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보편적인 규범을 잣대로 시대상황과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종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장교로, 남로당 당원으로, 쿠데타의 주동자로, 경제개발 명분으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무시하면서 장기집권한 대통령으로서 박정희는 특정 시기나 특정 활동만으로 평가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1979년 10월26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마지막 공식행사가 된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해 배수갑문 스위치를 누르고 있다.
대상 인물의 가족문제는 대표적인 사적 영역에 속한다.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가족의 재산정도, 가족의 성격, 그리고 몇째아이로 태어났는가 등은 사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요소다. 이와 함께 학업기간에 만났던 스승과 친구들, 학업성적 및 태도 등도 인물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사적 영역이다. 사적인 영역은 주로 대상 인물의 성격을 판단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공적인 영역은 주로 대상 인물이 살았던 시대, 그리고 그 인물의 사회적인 경력과 관련된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인 만큼 시대 배경과 특징은 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대상 인물이 살았던 시기의 시대적 사명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여러 가지 행동을 평가할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예컨대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에 대한 평가가 식민지 시기와 민주화된 시기에서 동일하게 나타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영역과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연구보다도 어렵다. 대상 인물의 사적인 영역에 대한 정보가 풍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이 풍미했던 시대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객관적인 인물연구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국가개입 극대화의 성공
박정희는 역사연구에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다. 지금은 과거사 청산 논란이 불거지면서 새삼 부각되고 있지만 역사학계에서 박정희를 주목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개발시대’의 정상에서 한 사회를 이끌었던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한국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는 후진국의 경제개발에 있어 ‘국가’의 역할과 관련된 논쟁이 연결돼 있다. 이는 사적인 영역보다는 공적인 영역의 문제로 개인 박정희의 역할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박정희가 주도했던 시기의 한국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의 문제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정부에서는 지도자의 의사가 정책을 최종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에 대한 평가는 곧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후진국의 경제성장과 관련해 한국의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경험은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돼왔다. 1950년대부터 여러 국가가 경제개발을 추진했지만 한국과 대만 등 극소수의 국가만이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그 비밀을 찾는 것이 연구대상이 됐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추동했던 것은 ‘개발국가’와 관련된 논의였다. 즉 한국과 대만, 그리고 두 나라보다는 좀더 일찍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의 경우에서, 국가가 경제체제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공통점이 나타났다. 자본주의적 시장논리 속에서 국가의 개입은 원칙적으로 부정됐음에도 이들 동아시아 3국에서는 경제개발 과정에 국가의 개입이 극대화됐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개발국가의 경제성장에서 국가의 개입 정도는 1929년 경제대공황 이후에 나타났던 케인스의 ‘보이는 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때로는 시장질서를 왜곡하면서까지 국가가 경제체제를 흔들었으며, 가격제도는 물론이고 금융기관을 국가가 장악하는 현상까지 있었다. 지금 국제무역제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공정거래의 대표적인 사례로 국제통화기금(IMF)나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불공정거래라고 판정받을 수도 있는 심각한 정도의 개입이었다.
일본과 한국, 그리고 대만의 경제성장 과정을 연구한 학자 차머스 존슨, 앨리스 암스덴, 그리고 로버트 웨이드는 이러한 현상과 관련, 국가 전체가 하나의 ‘주식회사’로 운영됐다고 평가했다. 국가, 경제체제, 국민이 하나의 주식회사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운영되는 형태를 띠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나중에 ‘개발국가론’으로 체계화됐다.
박정희의 좌익경력에 대한 미국의 고민
이후 개발국가론은 후진국이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 불가피한 시스템으로 평가됐다. 즉 자원과 자본이 극히 한정된 후진국에서 효율적으로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전략적인 투자가 필요한 곳을 상정하고, 한정된 자원과 자본을 전략적인 지점에 투입해 효율을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과 한국, 대만과 같이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뿐만 아니라 실패한 나라들에서도 국가의 개입이 있었다는 점이다.
경제성장에 실패한 인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물론이고,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 역시 경제체제에 깊숙이 개입했음에도 동아시아 국가들과 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경제발전에 성공하려면 국가의 ‘현명한’ 지도자가 ‘현명한’ 전략을 세우고 국민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박정희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일본의 기시와 함께 ‘현명한’ 지도력을 발휘한 ‘개발국가’의 지도자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의 경제개발이 과연 과학적인 모델을 통해 진행된 것이냐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모든 국가 정책을 경제개발에 집중한 효율성 측면에서는 박정희의 국가 운영모델에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반면 직관과 ‘배짱’으로 밀어붙인 방식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라 특수한 형태의 모델이며, 박정희 시대의 경제구조는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갖가지 경제적인 문제를 배태한 출발점이 됐다.
박정희의 개인적 경력과 관련된 논쟁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문제보다는 그의 좌익활동 경험에서 시작됐다. 논란은 먼저 미 행정부에서 불거졌다. 미 행정부는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쿠데타 주모자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논쟁의 핵심은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활동 경력이 향후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있었다.
미 행정부는 장면 정부의 무능력함에 비해 강력한 리더십을 보이고 있는 군사정부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좌익경력에 대해서는 계속 경계했다. 특히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은 비밀리에 박정희와 함께 김종필의 좌익경력을 조사했다.
그 결과, 각주까지 달린 장문의 보고서가 작성됐는데, 여기에는 이들의 해방 직후 좌익경력뿐만 아니라 6·25 전쟁 당시 가족들의 부역(附逆)의혹이 거론되는 등 두 사람의 개인행적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부에서는 군사정부가 궁극적으로 북한에 정권을 넘겨줄 것이라는 극단적인 분석까지 제시했다.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좌익혐의 세탁
1963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박정희의 공산주의 활동경력과 관련해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일명 색깔논쟁은 북한이 황태성을 특사로 파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촉발됐다. 황태성은 경상북도의 유명한 공산주의자이자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의 친구였다. 물론 박정희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러나 반공을 제1의 국시(國是)로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는 황태성의 면담제의를 거부하고 그를 체포했다. 야당이 황태성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감옥에서 그를 만났던 사람을 통해서였다.
박정희의 좌익경력은 대선 과정에서 핵심 쟁점으로 부각됐다. 반공을 국시로 한 것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명분일 뿐 실제로는 공산주의자라는 것이 박정희에 대한 야당 공세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박정희의 좌익경력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공헌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조봉암의 좌익경력이 그가 1956년 대선에서 200만표를 얻는 데 도움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좌익경력 또한 1950년대 이후 나세르의 이집트와 같은 중립국 동맹을 희구하던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인 포인트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발간한 저서에서 자신이 구상하는 한국사회의 개혁 방향과 관련해 일본의 메이지유신(維新)과 나세르의 이집트혁명을 하나의 좌표로 제시했다. 이에 동조했던 일부 지식인들이 민주공화당과 군사정부의 정책 결정자 또는 자문위원으로 정치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들은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체제와 그 정책에 회의를 품고 공화당에서 이탈했지만, 박정희가 모델로 삼았다고 언급한 ‘메이지유신’은 어떠한 논쟁도 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조선노동당과 관련된 박정희의 좌익경력은 1963년 대통령선거 이후에는 이슈가 되지 않았다. 박정희가 강력한 반공정책을 편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군사정부 시절 진보적 인사들에 대한 탄압, 1964년 6·3 사태를 전후해 발생한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과 1967년 6·8 부정선거 직후의 동백림 사건, 3선개헌을 앞둔 1968년의 통일혁명당 사건과 1971년 대통령선거를 전후한 시점에 발생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1974년 유신반대 시위를 잠재운 민청학련 사건과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 등 수많은 공안사건은 그가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유신체제는 북한에 대항할 수 있게 사회적 통합력을 극대화하고 경제개발을 위해 자원과 국민 동원을 극대화한다는 명분을 갖고 출범했지만, 민주공화정을 명시한 헌법의 정신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일거에 부정하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합리화되기 어려운 극한적인 인권탄압을 통해 유지됐다.
따라서 유신체제가 선포된 이후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사회적인 여론은 유신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뿐만 아니라 인권외교를 표방한 미 행정부와 부딪친 외교적 마찰은 안보문제에 관한 한 박정희의 정책이 국민에게 절대적 안정감을 준다는 ‘안보 신화’마저 무너뜨렸다. 자주국방이라는 모토 아래 진행된 국방정책은 핵무기 개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한미동맹을 맹신하고 있던 국민의 불안을 떨쳐주지는 못했다.
10·26 이후 서울의 봄과 광주의 참극을 거치며 유신체제로 복귀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기저에는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깔려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신군부의 집권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논란은 수그러들었지만, 1970년대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것이었다.
유신체제와 더불어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또 다른 축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난 경제적인 문제다. 겉으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높은 경제성장률이 지속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거치며 살인적인 인플레 현상이 나타나고 수입자유화 과정에서 농업정책의 실패가 두드려졌으며 실업률이 증가하는 등 긍정적 평가의 축인 경제성장 신화마저 위협받게 됐다.
특히 1970년대 후반의 경제적인 실패가 1980년대 초반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로 인한 일부 재벌기업의 몰락, 국가채무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면서 박정희는 청산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1980년대 초에 발표된 경제안정화 계획에 제시된 정책은 하나같이 박정희 시대의 핵심적인 정책에 대한 청산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다 삼저(三低)현상을 비롯 국내외 경제여건이 개선되면서, 박정희의 경제성장 신화는 다시 고개를 들었고, 유신체제의 폭압과 1970년대 후반의 암울한 경제현상은 잊혀진 과거가 됐다. 민주화를 향한 요구가 거세지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계속됐지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요구하는 국민적인 공감대 덕분에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은 하나의 시금석으로 자리매김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언론은 박정희 시대의 구호 ‘잘살아보세’를 반복했고, 때론 유신시대의 정신을 경제성장을 위한 국민통합의 정신으로 회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을 주도한 것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직후 김영삼과 박정희,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직후 김대중과 박정희의 역사적 화해를 시도한 보수 언론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박정희를 평가하면서 경제성장의 영도력만 기억하려는 시도가 환란으로 일컬어진 IMF사태 이후에도 지속됐다는 점이다. IMF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던 부실 금융체제와 재벌 문제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었음에도 IMF사태 이후 박정희 시대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개발독재의 신화는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
한편 박정희의 친일(親日)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1980년대 후반까지 금기시됐다. 한국 사회에서 반일(反日) 이데올로기가 불문율처럼 자리잡고 있었음에도, 그의 친일경력이 1945년 이후 40년이 넘도록 특별히 문제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 1949년 반민특위가 친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6·25를 거치고 반민특위 활동이 흐지부지된 뒤에는 친일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마치 공산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터부로 여겨진 때문일 것이다.
친일경력과 굴욕적인 한일협정
친일문제는 사회민주화가 진전된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에서 박정희 정부에 이르기까지 친일경력이 있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에서의 민주화운동이 계급적인 성격과 민족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는 특수성이 함께 작용했다.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반미(反美)운동과 맞물려 진행됐다는 사실도 친일문제가 부각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부에서 정확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마녀사냥식으로 친일문제를 제기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친일문제에 대한 논의는 여러 측면에서 역사연구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식민지 시기에 대한 정확한 진상 파악이 가능해졌으며, 인물연구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의 발굴과 그 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가능해졌다.
이 과정에서 논란이 된 것이 박정희의 친일문제였다.
박정희의 친일문제는 1945년 이전 그의 교육경력과 관동군 장교경력에서 출발한다. 일본 군국주의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교사를 양성하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오고 만주의 군관학교 및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가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다.
한편에서는 그가 관동군 장교로 근무할 당시 정신대를 관리하는 직책에 있었다든지 독립군을 때려잡는 역할을 했다든지 하는 근거 없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한일협정을 서둘러 추진한 것이 친일경력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군관학교 시절 은사를 만났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 일본이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굴욕적으로 한일협정에 조인한 사실은 그의 친일경력과 연결해 이해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가 대구사범학교에서 꼴찌를 한 것은 강한 민족의식 때문이었으며,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일제에 체포당한 민족주의자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사관학교에 다닌 것은 친일 차원이 아니라 직업군인이 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일제가 패망한 직후 베이징으로 가서 광복군에 자원한 것에서 그의 민족주의 성향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굴욕적인 한일협정 문제에 대해서도 경제개발을 위해 자본이 필요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관동군 활동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그러나 박정희의 친일에 대한 이러한 변명은 정확한 자료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따른 추론인 데다 광복군 자원(自願)이 민족주의 성향보다는 일본 패망 이후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박정희를 친일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하기엔 역부족이다. 지금으로서는 식민지 시기 그가 받은 교육과정, 그리고 관동군관학교에서의 경력과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본격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다양한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변화무쌍하게 진행됐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외투를 걸쳤다. 그는 공산주의 탈을 쓴 지도자로, 경제개발 영웅으로, 친일파로, 시대적인 담론에 따라서 다양한 외투를 갈아입었다. 그의 사적 영역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와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친일문제가 제기됐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 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규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유신체제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박정희에 대한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평가가 이뤄지려면 먼저 박정희 개인과 관련된 자료를 발굴해야 한다. 그의 교육배경이 됐던 대구사범학교와 만주군관학교, 그리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1945년 이후 영어군사학교, 한국군에서의 활동에 관한 기록을 찾아야 하고, 함께 수학하고 활동했던 동료들의 증언도 녹취해야 한다. 식민지 시기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수강했던 과목, 그리고 존경했던 교사, 친구들의 행적을 통해 박정희의 성향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박정희를 연구하고 있는 몇몇 학자에 따르면 박정희와 함께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던 인물들이 아직까지 만주와 일본 각지에 생존해 있으며, 관동군에 관한 기록도 공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한다. 5·16 쿠데타 당시 함께했던 군인들 중 일부도 생존해 있다. 5·16 관련 기록은 일부는 공개됐고, 일부는 공개되지 않은 채 국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다.
둘째로 개인적 기록을 통해 박정희의 지향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그의 행위가 어떠한 동기에서 나왔는가를 판단하는 일이다. 관동군에서의 활동, 한국군에서의 활동, 5·16 쿠데타, 베트남전 파병, 3선개헌, 유신체제, 경제개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그의 개인적인 지향을 판단해야만 한다.
친일경력, 전범으로 볼 수 있어
관동군에서 박정희의 역할은 친일 여부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그가 먹고 살기 위해 군인으로서 근무했다면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적극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승리를 염원하면서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가했다면 이는 전쟁범죄에 해당될 수 있다. 물론 관동군에서의 활동이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 좌우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점도 고려돼야 한다.
이는 베트남전에서 문제가 된 한국군의 양민학살에 대한 책임을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 개개인에게 물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박정희의 관동군 활동에 대한 평가는 그를 통제하고 동원했던 일본 제국주의 권력에 대한 평가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평가기준은 5·16 쿠데타, 한일협정, 베트남전 파병, 3선개헌, 그리고 유신체제에 대한 평가에도 적용돼야 한다. 이 사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권력욕과 국가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에서 평가할 수 있다.
셋째로 개인적인 사리사욕이 아니라 국가의 발전이라는 대의를 가지고 행동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국내외적인 기본 규범을 위반한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즉 박정희가 편 정책과 행위가 개인의 이해보다는 국가 경제발전을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헌법과 국제법에 규정된 기본적인 규범을 위반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지향과 관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5·16 쿠데타가 무능한 정부를 바꾸기 위한 소위 ‘구국의 결단’이었다 치더라도 명백하게 헌법을 위반한 사건이었다면 실정법 위반측면에서 짚어봐야 한다. 헌법에 위반되는 불법 수단을 통해 집권한 사실이 인정된다면 이에 대한 엄격한 판정이 필요하다. 목표와 명분으로 불법 행위가 합리화된다면 앞으로도 명분을 내세운 불법행위가 되풀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신체제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시기에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었다면 결코 합리화될 수 없다. 경제개발은 분명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경제개발이라는 수단과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이 전도돼 진행됐다면 경제개발 과정에 대한 재평가는 불가피하다.
친일문제도 민족주의적인 관점 이전에 전범(戰犯)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 전범의 경우 일반적으로 군대 내에서의 지위 고하에 따라 그 처벌이 결정된다. 일정한 계급 이상은 적극적인 동조로 판단해 처벌되지만 그 이하의 계급에 대해서는 국가권력에 의한 동원으로 판단해 처벌되지 않는다.
그러나 박정희가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17년 동안 재임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일반적인 전범 문제와는 다르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즉 그는 국가의 지도자 자리에 앉기 전에, 전쟁 부역 사실에 대해 사죄했어야 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그 진실을 밝혀야 한다.
시대성격에 대한 평가 병행돼야
이러한 개인적인 영역의 문제와 더불어 박정희가 살던 시대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도 이뤄져야 한다. 한 시대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그 시대를 살던 인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약 1945~48년을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하는 시기였다고 평가한다면, 1948년 남북한에서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을 방해한 부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반면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고 자유민주주의적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시기로 평가한다면,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박정희가 사회적인 공인(公人)으로서 활동한 시기는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다. 식민지 시기와 해방, 6·25전쟁, 독재체제, 그리고 경제개발 시대다. 따라서 각 시기가 어떠한 성격을 띠고 있는지, 그 시기에 어떠한 사회적 요구가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곧 박정희의 행위가 시대 역행적인 것이었는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바로 여기에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 혼란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현대사를 국가건설의 시기(1950년대), 경제발전의 시기(1960~70년대), 민주화의 시기(1980~90년대)로 기계적으로 나눈다면 박정희의 행위와 정책은 시대적 조류와 사명에 순응한 것으로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현대사의 전 과정을 단계별로 나누지 않고, 국가건설, 경제발전, 민주화가 동시에 진행돼야 했다고 판단한다면, 박정희의 행위와 정책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박정희의 행위와 정책에 관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대의 세계적인 추세에 대한 평가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수적이다. 1964년 이후와는 질적으로 다른 최고회의 시절 박정희의 경제정책, 역금리 정책과 세제개혁, 국가에 의한 금융체계의 통제, 특혜금융을 통한 수출산업 지원, 지불보증을 통한 외자 동원, 사채동결을 통한 기업부실구조 완화,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점 지원 등이 구체적으로 분석돼야 한다.
이러한 경제정책은 ‘개발국가론’과 관련해 후진국의 경제개발과정 초기에 국가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돼 왔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1970년대 이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비판받기도 했다. 1964년 이전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균형성장론에 근거한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은 것이었다. 국가의 금융지배, 특혜금융 등은 부실한 재벌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했고, 자본주의 체제의 생명이라고 할 공정경쟁체제를 저해했다.
후자는 1960년대 이후 세계의 정치·경제·사회 흐름에 비춰 박정희를 평가하는 것이다. 일찍이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가 규정한 것과 같이 1960년대 이후를 ‘경제개발의 시기’로 규정한다면 박정희의 정책은 세계적인 발전과정에 순응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의 경제정책과 리더십은 후진국 경제개발의 모범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후 전세계에 급격히 확산된 반전(反戰) 평화운동과 인권신장 요구를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추세로 파악한다면 박정희 시대의 강압적인 정책은 시대착오적인 정책이 된다.
이러한 평가는 베트남전 참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한 것은 한국의 경제개발에 순기능적인 작용을 했지만,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지성들에게는 힘을 바탕으로 삼은 미국의 세력 확산에 동참하는, 국가이익을 앞세운 폭력행위로 비쳐졌다.
이 문제에서 도덕적인 부분을 배제한 채 미국이 세계적인 패권국가의 역할을 지속하는 과정에 한국이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한미동맹을 강화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참전은 불가피했다고 인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 미국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했던 박정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도 지속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닉슨독트린으로 대변되는 닉슨 행정부의 대외정책변화, 그리고 카터 행정부의 인권정책은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 파병이 피를 대가로 경제성장을 위한 자본을 획득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결코 긍정적인 작용을 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를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많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던 시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때 박정희에 대한 더욱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후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변한다는 기본적인 진실이다. 물론 전 인류의 1%도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예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과정, 시대상황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를 경험한다.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음에도 인물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일반인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치부하면서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즉 그들은 변하지 않으며 일생을 통해 한 길로만 나아갔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는 평가다. 물론 연구자들은 역사적인 인물의 젊은 시절에 주목하고 그 시기의 변화를 인정한다. 반면 사회적인 공인이 된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정시기, 특정활동만으로 평가 못해
그러나 인간은 어떤 시기이건 변화하며 일생을 통해 하나의 단어나 문장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탁·반공운동을 했던 1948년 이전의 김구와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1948년 이후의 김구는 다르다. 조봉암은 식민지 시기 공산주의운동을 했지만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이렇게 보면 김구나 조봉암이나 일관된 정치노선을 걸었다고 볼 수 없다. 종교적인 활동과 연구에만 전념했던 문익환이 통일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 것도 하나의 단어로 규정할 수 없다.
물론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가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활동했던 시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사회적 활동기간이 상당히 길고 그 사이에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면 그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규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식민지 시기부터 1970년대 말까지 엄청난 굴곡의 시대를 살았고, 또 그 시대를 이끌었던 박정희를 하나의 잣대만으로 평가하거나 특정한 성격의 인물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평가라고 할 수 없다. 물론 박정희가 한국의 대통령으로 활동한 시기에 평가의 초점을 맞춰야겠지만, 그것만으로 박정희를 규정하기에는 그의 삶과 사회활동에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군인으로, 해방 정국에서는 공산주의체제를 지향했던 남조선노동당의 당원으로, 1950년대에는 부정부패한 군인과 정치인들에 대해 비판적인 정신을 가졌던 군인으로, 쿠데타 직후엔 경제정책과 민정(民政)이양을 둘러싸고 미국과 대립하다가 결국은 타협한 최고회의의장으로서,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을 힘차게 밀어붙였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무시하면서 장기집권한 대통령으로서 박정희는 특정 시기나 특정 활동만으로 평가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박정희 개인과 박정희 시대에 대한 논의는 이처럼 다양한 변화를 감안해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연구 방법은 친일문제를 비롯해 모든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 동일하게 적용돼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