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에는 보랏빛 순무가 있다. 천년 세월 이곳에서만 재배돼온 특산물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 봄엔 새싹을 먹고 여름엔 잎을 먹으며, 가을엔 줄기를 먹고 겨울엔 뿌리를 먹을 수 있는 사계절 영양채소다. 순무와 된장이 만나면 독특한 찌개가 탄생한다. 여기에 장떡을 곁들이면 안성맞춤이다.
“총장님, 오늘 연극 있는 거 아시죠?”
“알지. 그런데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안 되겠다. 내일 가마.”
“정말이죠. 내일은 꼭 오실 거죠?”
“임마, 알았다니까. 내일은 꼭 간다니까.”
“(까르르) 총장님 그럼 내일 뵐게요.”
총장에게 거리낌없이 달려드는 학생이나, 속어를 섞어가며 학생에게 친근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총장. 여간해서 보기 어려운 정경이다. 성공회대 학생들은 김 총장을 보면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김 총장은 학생들을 친손자, 손녀 대하듯 따스한 눈길과 한마디 덕담으로 반긴다.
교수들과도 격의 없기는 마찬가지. 교수들에게 김 총장은 정신적 아버지이자 인생 선배다. 김 총장의 헌신적인 자세와 열린 마음 덕분이다.
지난 2000년 김 총장이 부임한 이후 성공회대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교문과 담이 헐리고 주차장과 도서관, 식당이 주민에게 개방됐다. 총장 판공비도 사라졌다. 그 돈이면 학생 몇 명에게 장학금을 더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측은 이런 노력을 높이 평가해 지난 7월 4년 임기를 마친 김 총장을 재선임했다.
김 총장은 학교 밖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 정치·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낸다. 이라크 파병철회를 위한 국민대표단, 대통령 사과와 탄핵철회를 위한 시민사회원로들의 시국성명 등에도 종교지도자로 참여했다. 또 사단법인 ‘열린문화’의 이사장,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회장, ‘사회연대은행’ 이사장, ‘푸르메 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김 총장은 뜻이 통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어느 자리든 마다하지 않는다.
성공회대 캠퍼스에서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김성수 총장과 학생들.
존경받는 성직자로, 대학총장으로 한평생 남을 위해 살아온 김 총장. 고희(古稀)를 넘긴 지 오래라 이젠 이런 일들이 버겁기도 하련만, 그가 털어놓은 고민은 듣는 이를 숙연케 한다.
“착하게 사는 것, 말은 쉽지만 참 어려운 겁니다. 신영복 교수의 책에 이런 글이 있어요. ‘나무가 나무보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숲이 되자고’. 외롭고 쓸쓸하고 소외된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이야기죠. 착하게 산다는 게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게 참 어렵네요.”
김 총장의 고향은 인천 강화도다. 어려서부터 강화도의 특산물인 순무로 끓인 된장찌개를 즐겨 먹었다. 서른아홉에 늦깎이 결혼을 했는데, 노총각으로 지낼 때는 요리 실력도 제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언젯적 일인가. ‘신동아’의 요청으로 오랜만에 팔을 걷어붙였지만 칼놀림부터 영 서툴다. 김 총장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도전한 요리는 순무 된장찌개와 장떡.
순무 된장찌개 만들기의 첫 순서는 재료 썰기. 무는 얇고 네모나게 깍둑썰기, 호박은 나박썰기, 파와 고추는 총총썰기로 썬다. 마늘은 잘게 다져놓는다. 무청(시래기)은 2등분해 잘라놓는다.
재료가 준비되면 냄비에 마른 새우와 무를 넣고 국물을 우려낸 다음 된장을 풀어넣는다. 그 다음 시래기와 표고버섯, 파, 고추 등을 넣고 끓이다가 마지막에 호박과 두부를 넣어 한소끔 끓이면 된장찌개가 완성된다. 이때 기호에 따라 마늘 다진 것을 넣기도 하는데, 마늘 향이 강하면 된장 맛이 감해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완성된 된장찌개는 순무에서 우러난 시원함이 가미돼 된장의 담백한 맛이 훨씬 풍부하게 느껴진다.
장떡은 먹을거리가 귀하던 지난 날 서민들이 배고픔을 달래려 먹던 음식이지만 요즘엔 훌륭한 영양식으로 꼽힌다. 만들기는 더없이 간단하다. 고추장과 된장을 2대1 비율로 물에 푼 다음 잘게 썬 부추와 깻잎, 밀가루를 넣어 골고루 섞이도록 버무린다. 찹쌀가루를 조금 넣으면 소화가 잘 된다고. 버무린 재료에 참기름을 조금 떨구고 간을 본 다음 한 큰 술씩 떠서 프라이팬에 부친다. 장떡은 이날 마침 성공회대 운동장에서 축구경기를 하던 교수들의 간식거리로 제공됐다.
축구경기를 하다가 달려온 교수들이 요리하는 김 총장의 색다른 모습에 싱글벙글 웃고 있다(좌). 김 총장의 농담에 환하게 웃고 있는 백원담 교수(왼쪽). 이날 요리는 백 교수의 도움으로 진행됐다(우).
김 총장에겐 다시 4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김 총장은 “좋은 시설을 못 갖추고 고액 연봉의 교수를 못 모셔오는 게 흠이지만 학생과 교수가 서로 눈을 맞대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라며 “눈뜨면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 학교의 교육이념인 ‘열림, 나눔, 섬김’과 더불어 공부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 총장은 임기가 끝나면 고향인 강화도에 자신이 세워놓은 ‘우리마을(정신지체장애인시설)’로 되돌아가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정신지체장애인과 더불어 생을 마치는 것이 가장 기쁠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이 모자라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채워주고 싶어요. 같이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