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진실규명 통해 정의확립해야 사회해체 막는다

  • 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dckim@mail.skhu.ac.kr

    입력2004-09-22 15: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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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규명 통해 정의확립해야 사회해체 막는다

    1948년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색출과 처벌활동이 전개됐으나 얼마 가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진은 법정으로 끌려가는 친일파들.

    지난 8월15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59주년 광복절 기념 경축사에서 ‘포괄적 과거청산 필요성’을 제기한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청산의 당위성과 반대론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이 부친의 전력 문제로 사퇴하는 등 올 하반기 정국은 과거사 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거청산 문제가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현재 국회에는 13건의 법률안이 제출돼 있는 상태이고, 9월8일에는 열린우리당이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반대 속에서 국회 행자위에 제출했다.

    사실 5·18 관련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큰 쟁점이 되고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기까지 했던 지난 문민정권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과거청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해는 거의 없다. 가까이는 지난 16대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을 비롯하여 ‘과거청산 4대 법안’이 논의될 때부터 국회가 새롭게 구성되면 이 문제가 전면에 부각될 것으로 예상됐다.

    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도쿄 재판과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부터 가까이는 남아공화국의 ‘진실과화해 위원회’의 경험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 과거청산 요구는 혁명, 전쟁 혹은 정권교체, 민주화 이후 예외없이 제기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반혁명세력 숙청, 전쟁 책임 규명, 전범재판 등의 더욱 급진적인 방식으로 제기되기도 했고, 과거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 각종 공권력의 반인권 범죄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 등 온건한 방식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에 비춰보면 한국은 아르헨티나, 칠레, 남아공화국 등지에서 민주화 이후 바뀐 정권에 의해 제기된 과거청산과 현상적으로는 유사하나, 4·19혁명 직후부터 6·25전쟁 당시 학살 피해 유족들의 진상규명, 명예회복 요구가 줄기차게 진행돼온 점을 생각해보면, 사회운동 방식으로 밑에서부터 제기돼왔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권 시절 의문사 유족들이 400일 이상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해 의문사위원회 구성을 이끌어낸 일이야말로 한국이 과거청산의 살아 있는 현장이 된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과거청산 최적 시기는 4·19 직후

    그런데 왜 이 시점에서 멀리는 100년 이전의 사안에서 출발하여 가까이는 최근의 군 의문사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안이 한꺼번에 또 정치권에 의해 전면에 부각됐는가.

    우선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수많은 인권유린, 국가폭력 사태를 겪어왔지만 한번도 제대로 과거청산을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식민지체제, 전쟁, 독재가 종식됐을 때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갔어야 할 사안이다.

    가장 적당한 시점은 바로 4·19혁명 직후 시기다. 당시 6·25전쟁 피학살자 문제와 데모대에 대한 발포 책임자 문제가 전면에 부각됐고, 친일파 문제는 아직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여명의 어린 학생들에게 발포한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은 거의 전원이 일제 때 관리·경찰을 지낸 적극적인 부일협력자들이었다. 이승만 정권 자체가 바로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친일세력 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사실 부일협력자들이 바로 6·25전쟁 당시 양민 학살의 당사자였으며, 또 4·19혁명 당시 발포 책임자였으므로 그 이상으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좋은 시점은 없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이 이 모든 문제를 다시 땅에 묻었다. 이렇게 본다면 5·16군사정변은 부일협력세력, 6·25전쟁 민간인 학살세력, 군사독재 하수인들의 위기의식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정권의 성장지상주의는 일차적으로 당시 한국사회를 이끌던 세력이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경제적 성공으로 만회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결국 5·16군사정변과 이후 30년간 지속된 군사정권이 식민지 잔재 청산작업과 6·25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 문제를 뒤늦게 제기하게 된 원인이다. 물론 5·16군사정변이 없었다고 해도 과거청산이 충분히 이뤄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당시 제2공화국은 4·19혁명 당시 발포 책임자를 거의 무죄로 간주해 석방했으며, 거창 등 유족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반공법을 강화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1949년 반민특위 당시에도 당시 이승만과 한민당은 반민특위가 “빨갱이를 즐겁게 한다”, 반민법이 “우리 경제를 하루빨리 복구시키는 법이 우선이다”라고 과거청산세력을 공격하고, 또 일부 극우세력이 반민특위에 앞장선 인사들에게 협박과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이것은 과거사가 들춰지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판단한 구세력의 위기의식이 얼마나 컸으며, 그들이 과거청산을 방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국론분열론’ ‘경제우선론’ ‘정략론’ ‘진상규명 불가론’ ‘무용론’ ‘학술작업 우선론’ ‘부관참시론’ 등 오늘 한나라당과 주류 언론이 구사하는 과거청산 거부 태도도 과거 반민특위 당시의 논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모든 논리는 결국 과거청산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4·19혁명 당시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그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우선 광주 5·18 대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제3·4·5공화국 시절 인권유린, 의문사, 조작간첩으로 의심되는 사건이 수없이 발생했다. 올바르지 않은 공권력 행사가 견제되지 않고, 그러한 공권력 범죄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처벌되지 않음으로써 1990년대 초까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크게 제약받았으며, 억울한 피해자가 속출했다.

    물론 이러한 일이 전개됐음에도 우리 사회에서 과거청산의 대의에 대한 회의론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반드시 구친일세력, 독재와 파시즘의 부역자, 반인권 범죄의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이 문제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게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가권력 특히 군, 경찰, 공안기구 등에 의한 인권침해 사실이 확인되고, 억울함이 풀어진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무엇이 달라지는가를 묻는 사람도 있다. 이미 가해자나 책임자가 세상을 거의 뜬 마당에 새삼 가해자나 피해자의 상처를 들춰내서 무엇하겠는가 하는 반론도 많다. 친일진상규명 역시 이미 당사자가 거의 세상을 뜬 마당에 새롭게 시비를 가려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회의론도 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반론은 가해자나 제3자는 물론 피해자측에서 더욱 강하게 제기되기도 한다. 잊어버릴 만한데 다시 상처를 건드린다는 고통스런 항변은 국가권력의 책임 여부를 규명하고 문제해결 방안을 제안하자는 논의석상에서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건이 발생하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 시점에서 과거 공권력의 잘못을 따지고 가해자를 밝혀내는 일은 이상주의적 지식인들의 사회정의 수립운동 정도로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문제의 해결은 어떤 경제적 이득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통해 부패를 청산한다든가 사회를 바로잡는 것도 아닌 그냥 ‘옳은 일’ 정도로 보인다. 이것은 5·18 진상규명, 1980년대 의문사 진상규명 등 현재 한국사회의 다양한 과거사 진상규명 운동이 함께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친일파를 규명한다고 해서 정치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공권력 범죄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밝혀낸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한이 풀리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 보상을 받으면 정신적 위로는 되겠지만 사라진 생명을 되찾을 수는 없다.

    ‘응답가능한 공권력’ 수립의 전제조건

    그러나 필자는 과거청산으로 생겨날지도 모르는 부작용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이 해결됨으로써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이 얻을 이익, 그리고 국가발전에 장기적으로 기여하는 점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이 원한관계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희생자가 됐을 때, 그 생명의 상실과 고통의 문제는 가족 등 사적인 차원을 떠난다.

    이 경우 역사에서의 죄과, 삶과 죽음의 의미,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현재 정치경제적 지위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억울함의 해소와 물질적·정신적 보상의 문제를 떠나 법적 정의와 공권력 권위 회복의 문제가 된다.

    과거청산이 이뤄질 경우 일차적으로는 시민에 대한 정치권력의 책임 혹은 ‘응답가능한 공권력’ 수립이 가능해질 수 있다. 바우만(Zygmunt Bauman)과 같은 유태인 학살 문제 전문가들은 바로 학살의 미시정치를 통해 사회를 ‘과학’으로 인식하는 서구 사회과학의 지평에서 ‘도덕’이라는 문제를 도입했는데, 그는 학살 현장에서 생과 사의 차원, 그리고 그 문제를 받아들이는 사회적 맥락 속에 인간 도덕성의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만약 현대 한국사회가 도덕적으로 파탄난 사회가 아닌가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과거청산의 미비 특히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 군사정권 시절의 의문사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 여성을 정신대로 강제 연행해간 말단의 하수인은 동포인 조선인이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 가담한 말단의 군인들은 평범한 한국인들이었다.

    국가폭력의 대행자들과 그들의 행위를 목격하고도 방관한 사람들이 오늘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의 제반 문제를 이해하고 그 해법을 찾아나가는 데 상당히 많은 단초를 얻을 수 있다.

    다카하시 데스야(高橋哲哉)는 과거청산을 ‘응답가능성으로서의 책임’ 개념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과거청산은 신뢰 회복을 위한 출발점이다.

    파시즘 혹은 독재정권에겐 벌레처럼 보였을지 모르는 한 평범한 인간도 가족과 이웃에는 온 세계와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 개인간의 살인과 폭력사건은 엄한 사법의 심판 대상이 되지만, 정치적 살인의 가해세력은 모두 용서되고 또 그 진상이 공개되지 않는다면 누가 정치를 신뢰할 것이며, 사회 정의를 소중히 생각할 것인가.

    즉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어떤 피해가 발생했을 때 당시 현장에서는 어렵더라도 나중에라도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요건이 되는데, 개인이나 사회 전반에 분명한 피해를 끼쳤으며 피해자가 있는데도 과거 잘못된 사실이 규명되지 않거나 잘못한 사람이 책임지지 않는다면, 공권력의 신뢰성은 확보되기 어렵다.

    설사 시간이 지나서 가해자가 모두 사망하고,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과 한을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앞서 강조한 것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망하더라도 그들간에 만들어진 정치사회적 관계의 틀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국가간 관계에서도 이런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이웃에 고통을 안겨준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인정치 않을 때, 양국이 새로운 갈등이나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국가간의 진정한 평화는 구축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 공권력 범죄 집행자들의 행위를 들춰내거나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사죄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권력자의 위치에 서서 주먹과 몽둥이를 들이댔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가 법을 어긴 경우에도 그것을 정당화한다. 즉 중대한 범죄가 처벌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죄’의 개념이 수립될 수 없고, 피해자들에 대해 가해자들이 책임지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범죄자를 단죄하는 행위는 가장 중요한 공동체 유지 활동이며, 최상의 교육활동이다.

    그런데 통치 혹은 안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폭력행위에 대해 면죄부가 주어지고, 또 동료 구성원을 살해한 집단이나 개인이 사회 구성원으로 버젓이 살아 있거나 심지어 권력과 자본을 소유한 기득권으로 존재한다면 그 사회의 여타 구성원은 침묵으로 저항하거나, 적극적인 사회관계를 맺기를 포기하고 더 이상 책임 있는 주체로 행동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치의 파괴, 사회의 파괴이며 아렌트(Arendt)가 말하는 판단력의 마비상태다. 이런 파괴 혹은 판단력의 마비상태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와 사회가 건재하는지 파괴됐는지는 그것이 법과 절차, 그리고 도덕적 기준에 의해 운영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약육강식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가를 보면 안다. 그리고 판단력이 완전히 마비됐는지 건재한지는 정의의 수립 여부, 즉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가 처리되는 방식,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반민특위 그늘 아래 놓인 한국 현대사

    공권력의 행사에서 정의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을 경우 구성원의 이탈, 즉 사회의 해체를 막을 수 없다. 생과 사가 자신의 의지 밖에 있는 군사독재, 준전쟁상황에서 이러한 정의의 부재, 혹은 판단력의 마비가 가장 광범위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독재국가는 겉보기엔 유례없이 사회통합이 잘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극도의 불신을 수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감옥이나 포로수용소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 불신하며, 상대방이 한눈을 팔면 남의 물건을 그냥 훔쳐가는 등 극도의 무정부 상태가 된다.

    그런데 때로는 사회 전체가 이 포로수용소의 확대판인 경우가 있다. 사람들은 반드시 가난 때문에 도둑질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해체됐을 때, 즉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누구도 정의의 기준을 세울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폭력이 광범위하게 자행되나 그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이러한 사회해체의 징후가 드러난다.

    자신의 잘못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피해를 당한 사람이 그 상처를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고, 상처를 입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회에서 제대로 된 인간관계는 수립되지 않는다. 결국 진실 규명을 통한 정의의 수립은 사회해체를 막을 수 있는 해독제가 된다.

    ‘논어’에도 이덕보원(以德報怨), 즉 “덕으로 (바르게 세움으로써) 원수를 갚는다”는 말이 있는데, 공권력에 의한 피해를 개인이나 가족의 피해로만 보지 않고 피해의 원인과 배경 규명 작업을 통해 그러한 큰 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나아갈 경우, 개인과 가족의 한은 공동체의 문제로 승화되어 당사자의 정신적 위로는 물론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진실규명 통해 정의확립해야 사회해체 막는다

    9월8일 국회 행자위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열린우리당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상정에 반대하며

    물론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으로 보상을 해주는 일도 중요한 위로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의 규명을 현재 살고 있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것으로 만들어 왜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는지, 비극의 가해자는 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됐는지, 그리고 피해자들은 그 사건으로 인해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 모두 공감하고 이해하며 공통의 지식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진상규명, 처벌과 명예회복, 구제와 포상 등으로 이어지는 과거청산과 관련한 일련의 과정은 단순히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거나 피해를 본 사람을 구제해주는 것 이상의 문제다.

    그것은 바로 국가의 기본철학과 방향 수립이며, 국가 주도의 조직적인 국민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청산이 되지 않은 상태의 국가, 과거청산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잘못 진행될 경우의 효과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과거청산이 저지되거나 특정 정치집단의 이해에 종속되어 추진 혹은 좌절될 경우, 국민의 행동을 오도할 위험성이 크다.

    1949년 반민특위의 좌절은 자주독립 민족국가 건설 노선을 배반하고 반민주적 파시즘에 동조했더라도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하면 용서받을 수 있으며, ‘반공’의 이름을 빌린 어떠한 반사회적 행동도 용납될 수 있다는 국민교육적 효과를 발휘했다.

    이것은 독일과 일본의 예에서 잘 드러나는데 전후 독일에서 미국 주도하에 나치 협력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한 일은 독일이 유럽에서 또다시 패권주의 국가로 등장하는 것을 억제했으며, 일본에서 미국이 일급 전범들을 살려준 것은 일본의 정치나 사회가 또다시 우경화의 길을 걷도록 격려해준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오늘날 우경화의 물결 속에서 비록 독일에서 신(新)나치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고는 하나, 독일이 다시 다른 유럽국가를 침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독일이 전범재판을 통해 나치시대의 과거와 명확하게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1945년 이후 천황제 부활, 전범에 대한 불처벌, 과거에 대한 부인은 왜 오늘의 일본이 다시금 우경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즉 유럽은 통합의 길로 나서고 있으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국가간 군비경쟁과 민족주의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으며, 미국의 군사패권주의가 여전히 개입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의 이러한 극명한 차이는 바로 일본의 침략전쟁을 일본이 그리고 여타 나라들이 어떻게 정리했는가에 궁극적으로 기인한다. 그래서 한국의 현대사는 1949년 반민특위 좌절의 그늘 아래 있다고 볼 수 있고, 오늘의 독일과 일본 역시 전후 전범 처리라는 과거청산의 그늘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면, 과거를 청산하는 것 역시 그 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는 역사 만들기, 국가 만들기, 국민 만들기, 법과 질서 만들기 작업이다.

    진실규명은 사회적 관계 재수립 작업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사태는 국내 정치공동체가 전쟁과 갈등이 없는 새로운 질서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 즉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반인권적인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그리고 피해자들이 앙갚음의 방식으로 한을 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것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 권리를 보장해주는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임소재가 분명히 규명돼야 국가권력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 있다.

    과거사 진상 규명은 치유를 통한 공동체 회복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즉 과거의 국가폭력과 국가범죄 사실, 가해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상황들이 공개되고 피해 사실과 피해자들의 고통이 알려지면 사회 내에서 타인이 겪은 고통을 공감하고 그러한 고통의 배경과 상황을 공유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의 무관심과 공포에 대해서도 같이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진실의 규명과 그것을 공론화하는 작업은 바로 고통을 공유하여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 피해자 가족들과 피해자 ‘그들만의 것’으로 가슴에 묻을 것인가의 문제다. 이것은 최소한 사회 혹은 사회적 관계를 다시 수립하는 작업이 된다. 따라서 국가폭력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규명 및 처벌은 일종의 사회적 정신치료, 국가적 정신치료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병과 달리 사회의 병은 진실과 정의를 통해 치료할 수 있다(Healing with Truth). 물론 이러한 정신치료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겉으로 보기에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건강성, 즉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과 규범, 도덕률이 밑으로부터 무너진 상황이 초래된다. 용서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지만, 진상 규명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어떤 범죄가 왜, 누구에 의해 자행됐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용서와 관용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청산은 일차적으로는 정의의 수립, 인권의 보장을 위해 필요하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그것은 사회에 만연해 있는 편법, 부정, 부패, 탈법, 편의주의, 목적지상주의 등의 사회적·정치적 질병을 치료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문화와 비인간화된 정신을 치료하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학살, 테러, 고문 등은 언제나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그리고 타인의 생명은 물론 자신의 생명도 하찮게 여기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학살과 고문은 명령에 대한 복종이 다른 종류의 가치기준을 압도할 때 발생한다. 학살의 가담자들은 상대방을 ‘벌레’처럼 취급할 수 있다는 교육을 받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피의자에게 무차별적인 고문을 가한 경찰은 피의자가 국가 안전성을 해치는 암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한 사고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면하지 않는 상황이며, 이 상황은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상태로 몰아넣는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당화를 가능케 해주는 인종주의, 자민족 우월주의, 극우 반공주의, 국가지상주의는 철저히 극복돼야 하며 가해자들에게는 특별한 재교육이 필요하다.

    그것은 잠재적인 가해자가 될 수 있는 모든 국가권력의 대행자들에 대한 인권교육으로 확대돼야 할 것이다.

    과거를 대면해 미래를 창출하는 일

    과거청산이란 과거를 대면하여 미래를 창출하는 일(Confronting the Past and Creating the Future)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도 그러한 공리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반도의 역사는 한번도 과거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해보지 못했다. 또한 6·25전쟁만큼 아직도 상당한 사실들이 베일에 감춰져 있는 경우도 드물다.



    사르트르(Sartre)가 말했듯이 과거청산의 부재는 곧 존재해서는 안 될 것과 존재해야 하는 것의 공존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며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모순은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가 얼굴을 맞대고 모르는 채 살아야 한다는 기막힌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 존재하는 한, 보통의 한국인들이 그 원인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회병리적 현상들이 계속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건강성 회복을 위해 과거청산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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