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전경린의 황진이(왼쪽)와 홍석중의 황진이.
지금 우리 서점에서는 남북한 작가가 각각 써낸 두 개의 ‘황진이’가 팔리고 있다. 하나는 남한의 여류소설가 전경린이 쓴 ‘황진이’(이룸·2004)고, 다른 하나는 북한 작가인 홍석중이 쓴 ‘황진이’(대훈·2004)다. 두 소설은 황진이라는 여성의 삶을 다루면서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동시에 드러낸다. 황진이를 상사(相思)하다 죽은 총각의 상여가 대문 앞에 멈춰섰을 때 황진이의 내면을 그린 대목을 비교해보자.
“여보세요, 나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 한번 얼핏 뵈온 일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죽음으로 보여준 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압니다. 유명의 길이 달라 지금은 당신의 그 진실한 사랑에 보답할 길이 전혀 없군요. 혹시 이후 저승에서 다시 만나뵙게 될는지. 이승에서 보답할 수 없었던 사랑을 저승에서는 꼭 갚아드리렵니다. 그 약속에 대한 표적으로 제가 마련해 가지고 있던 혼례 옷을 당신의 령전에 바치오니 알음이 있으면 받아주세요. 인명이 하늘에 매였다고는 하나 인정에 어찌 애닯지 않겠나요. 생사가 영 리별이라고 하지만 후생의 기약이 있으니 바라옵건대 어서 떠나세요.”(홍석중 판본)
“나와 남이 다르거늘, 저마다의 목숨이 다르거늘, 홀로 사랑하고 내 잔에 피를 쏟아 붓고 간 이시여, 어찌 이런 사무친 일이 있단 말이오. 빌고 또 비나니, 맺힌 것을 푸소서. 이승의 일은 까맣게 잊고 훨훨 극락왕생하소서. 정녕 혼자 못 가겠거든, 내 넋까지 거두어 가소서. 정녕 혼자 못 가겠거든, 내 넋 속에 둥지 틀고 원 없이 살다 가시오.”(전경린 판본)
표현은 다르지만 황진이의 절절한 심정은 두 책에 비슷하게 드러난다. 또 있다. 두 작가가 황진이의 ‘첫 남자’로 황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연모했고 죽을 때까지 조력자가 된 인물로 만들어낸 ‘수근이’와 ‘놈이’의 존재가 그렇다. 물론 이들은 철저하게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이 창안해낸 인물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러 모로 닮아 있다. 무엇보다도 상놈의 처지에 양반집 딸인 황진이를 평생 사랑한다는 점이 그렇다.
전경린이 그린 유기공방 집 아들인 수근은 황진이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도와주면서 황진이에게 “산으로 도망가 화전이라도 일구며 살자”고 한다. 황진이가 기생의 길로 들어서자 수근은 전 재산을 황진이에게 헌납한 뒤 승려가 된다. 이후 불교 탄압에 맞서 소신공양까지 불사하는 수도자로 살아간다.
한편 홍석중이 그린 놈이는 황진이를 연모하고 그의 곁에 머물며 돕지만 황진이를 제 짝으로 삼으려는 욕심에 황진이의 정혼자에게 출생의 비밀을 토설해 혼사를 무산시킨다. 하지만 현실은 놈이의 속셈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놈이는 화적패에 들어갔다가 끝내 붙잡혀 효수형에 처해진다.
앞서 말했듯 두 소설은 다른 모습도 여러 면에서 보인다. 아마도 여성과 남성,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40대와 60대라는 두 작가의 차이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전경린의 황진이는 단아하고 차분하다. 반면 홍석중의 황진이는 활달하고 거침이 없다. 전경린의 서사가 철저하게 황진이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홍석중은 황진이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도 풍부한 사실적 실감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으로 그린다.
실존의 모순이 삶의 원동력
필자는 홍석중의 ‘황진이’를 먼저 읽었다. 이 소설은 우리가 북한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체제 선전이나 이데올로기 찬양이 일절 없고 활달한 문체로 성애묘사까지 노골적으로 한다. 홍석중의 소설은 그 자체로 매우 뛰어난 소설적 성취를 이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최근 우리 소설이 잃어버린 ‘선이 굵은’ 남성서사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또 가살스럽다, 감때사납다, 거쿨지다, 관후하다, 가물철, 검덕귀신, 겨끔내기, 겨릅불, 고래실논, 구메밥, 날가지, 노구메, 덜퉁하다, 데설궂다, 되알지다, 두억시니, 만문하다, 매시근하다, 모대기다, 모지름, 몰밀다 등과 같은 옛말과 입말, 민중들이 즐겨 쓰는 비유와 속담이 풍부하게 나타나 사실적인 실감을 불어넣고 있다. 문장이 활달하고 거침이 없어 소설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