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한국 사회의 우울한 인권 자화상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사람들의 절규, 국격에 앞서 인격을!

  • 김희연│신동아 객원기자 foolfox@naver.com│

    입력2010-01-29 17:1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009년을 마감하며 국가인권위원회는 ‘2008~09 인권상담사례집’을 펴냈다. 2008년 7월1일부터 2009년 6월30일까지 인권상담센터에 접수된 1만5627건의 사례를 추려 총 139건을 담은 책이다.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고통 받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을 그대로 그려낸다.
    한국 사회의 우울한 인권 자화상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를 상담하는 인권위 직원들.

    “제 딸(이하 피해자)은 16세입니다. 어제 피아노학원 남녀 공동화장실에서 성기를 노출한 남성(가해자)을 보고 놀라 112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피아노학원 교사는 출동한 경찰에게 동행하겠다고 했으나 피해자만 지구대로 데리고 갔습니다. 피해자에게 거의 협박조로 가해자의 행위를 재연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만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않으냐’며 조사를 하더군요. 또한 미성년자인 피해자를 부모가 동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사하고 가해자 가족들이 피해자의 얼굴을 보게 했습니다. 딸아이는 그 자체로 충격을 받은 데다 가해자 보복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펴낸 ‘2008~09 인권상담사례집(이하 사례집)’의 ‘형사절차와 자유권 보장’ 항목에 실린 내용이다. 이 사례집에는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를 같은 차에 실으려 했다는 유사 사례도 소개돼 있다. 사례집 곳곳에서는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라는 경찰이나 ‘국민의 공복(公僕)’이라는 공무원이 국민을 상대로 주어진 권한을 오남용하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건들이 한국 사회 인권의 수준을 끌어내리고 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 여기저기서 작은 예외들이 속속 생겨날 때 최후의 보루인 인권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인권침해와 차별행위를 15개 항목으로 분류

    사례집은 2008년 7월1일부터 2009년 6월30일까지 1년 동안 인권위 인권상담센터에 접수된 1만5627건의 상담사례를 분석하고 있다. 주로 전화와 방문 상담이고, 많지는 않지만 인터넷이나 편지 상담도 있다. 인권침해 상담을 대상 기관에 따라 분류하면 2007년까지는 경찰관련 상담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번에는 다수인 보호시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지방자치단체, 기타 국가기관, 검찰, 구금시설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차별행위는 개인회사 1위, 검찰과 경찰 2위, 공공기관 3위의 순이었다.

    사례집을 편집한 인권상담센터는 상담 유형에 따라 15가지 항목의 분석 틀로 사례를 분류했다. 소환에서 재판까지 형사절차 과정의 인권을 다룬 ‘형사절차와 자유권 보장’과 군대·구금시설·기타 국가기관 인권침해와 관련된 ‘국가기관과 인권’ 항목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표현의 자유와 민주적 기본권’과 ‘정보인권과 사생활 보호’ 항목도 주요 내용이다. 또한 ‘학생의 권리, 학교의 고민’ ‘폭력과 권위에 찌든 운동선수’ ‘침묵을 강요하는 성희롱’과 같이 특정한 신분이나 조건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와 차별 사례도 볼 수 있다.



    ‘사다리에서 떨어진 사회적 약자’ ‘길을 잃은 코리안 드림’ ‘나이로 줄 세우는 사회’ ‘법보다 현실이 가까운 장애인’ ‘한반도 평화와 북한 인권’ ‘차별의 그늘’ 등의 항목에서는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고 겉모습으로 상대를 재단하는 한국 사회의 낮은 의식 수준이 드러난다. 한편 강제입원, 가혹행위, 기본권 제한 등의 내용을 담은 ‘정신병원, 문을 두드리다’ 항목의 상담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경찰 등 국가기관의 기본권 침해

    “형은 말을 잘 못하고 행동이 늦어 의사소통이 조금 어렵습니다. 어젯밤 8시30분경 ○○경찰서에서 절도가 의심된다며 형을 연행했습니다. 외투, 양말도 못 신고 슬리퍼를 신은 상태로 잡혀가 다음날 새벽 4시 넘어서까지 폭행을 당하면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경찰관은 형의 동의도 없이 증거품을 찾겠다며 집에 찾아와 서랍을 뒤지고 펜치와 드라이버 등을 챙겨갔습니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정당한 절차를 지키지 않은 인권침해 사례다. 피의자의 행색이나 거동에 따라 기본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사례가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인권위는 이 사례에 대해 신체의 자유 침해로 진정해볼 것을 권했다. 이 밖에도 불심검문, 영장 없이 시행된 압수수색, 편파수사, 폭행 등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경찰이 피의사실을 주변에 알려 피의자의 사회생활을 방해한 일도 있었다.

    “○○경찰서 경찰관이 마약 전과가 있는 남편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남편 이름을 대며 마약판매자가 사는 곳을 알려달라는 등 과거 전력을 전혀 모르는 회사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며칠 후 또 경찰이 남편 회사로 찾아왔고, 수사의뢰서를 회사에 발송하였습니다. 결국 남편은 회사에서 퇴사 처리됐습니다. 또한 경찰은 옆집을 찾아가 ‘이런 사람이 사느냐, 부인이 직장생활을 하느냐’는 등 집안 환경에 대하여 물으면서 ○○경찰서에서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일로 이웃들이 ‘남편이 도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경찰이 찾아오느냐’고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퇴사 처리된 점에 대해 항의하자 J 경찰관은 ‘아,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라고 답변했습니다.”

    평범한 시민은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경우 경찰을 떠올린다. 시민의 기본권을 지키고 불편부당하게 수사를 진행해야 할 경찰이나 사법기관이 역으로 억울함을 보탠 안타까운 사례들이 보였다.

    기타 국가기관에서도 공무원의 인권의식이 평균 시민의식에 미달하는 사례들이 있었다. 사례집에는 대사가 계약직 영사보조원에게 ‘너는 나라가 고용한 개다’ ‘보잘것없는 행정원 주제에’ ‘서울대 안 나온 것들은…’이라는 비인격적 발언을 했다는 상담 내용이 실렸다. 외국공항에서 체포돼 무고하게 구금된 사람에게 적절한 자국민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사례도 충격적이다.

    언론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군대 내 가혹행위에 관한 호소도 이어졌다. 인권위에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머리를 맞은 경우, 여러 명에게 수십 차례 폭행을 당한 경우, 선임병에게 성추행을 당한 경우에 관한 상담이 접수됐다. 나아가 군대에서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살한 사례는 지금도 건강한 아들, 형제, 후배를 군에 보내고 있는 많은 시민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할 만한 것들이다.

    더불어 구치소 등 구금시설에 있는 수용자들의 인권침해 논란은 끊이지 않고 제기된다. 수용자가 격리된 곳에 있는 터라 외부의 도움을 청하기도 힘들뿐더러 ‘수용자는 기본권을 무시당해도 된다’는 암묵적인 인식이 문제를 키우고 있었다.

    촛불 들고 키보드 두드리는 시민들

    “다섯 살짜리 아이가 가는 길을 (경찰이) 막아섰다, 중증장애인을 강제 연행했다, 시위 현장을 지나가다 48시간 구금을 당했다, 시청 앞에서 하이페스티벌을 보다가 유치장에 갇혔다, 방패에 찍혀 응급실에 실려 갔다.”

    서울 광화문 일대와 전국에서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인권위에 접수된 상담내용이다. 인권위는 2009년 6월3일 “최근 우리 사회에서 집회시위의 자유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촛불집회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식은 과잉 진압 논란을 일으켰다.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집회와 시위에 관한 당국의 태도는 점차 더 완강해졌다. 사례집에는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사례가 등장한다. “경찰 폭력 규탄 기자회견을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연행했다, 시청 직원들이 강제 철거에 항의하는 1인 시위 참여자들의 사진을 찍고 있다, 500일 동안 동일 사안으로 진행하던 집회를 갑자기 불허했다.” 지난해 말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의 야간 옥외금지 조항이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다시금 환기되고 있다. 공공의 질서와 표현의 자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대목이다.

    오프라인만이 아니다. 온라인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징후가 포착된다.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무죄로 풀려난 이른바 ‘미네르바 사건’이 대표적이다. 한편에서는 정보통신망에서 타인을 모욕하는 행위를 한 자를 차별하는 사이버모욕죄가 발의됐다. 인권위는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이 법안이 발의될 때 “인터넷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민주주의 의사 형성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만큼, 국가의 규제나 형사처벌 등 직접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인권위 사례집에는 인터넷에서의 의사 표현을 문제 삼아 퇴학을 당한 학생의 상담 내용이 소개돼 눈길을 끈다.

    “○○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싸이월드 개인 미니홈피에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이 좌파 성향이라며 2008년 8월 퇴교 조치를 당했습니다. 퇴교 조치가 내려질 때까지 본인에게 소명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으며 2주 만에 퇴학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퇴교 조치 후 △△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 사건 때문에 입학 불허 조치를 받았습니다. 3개월 과정을 남기고 퇴교를 당해 다음 주 월요일에 일반병으로 입대해야 합니다.”

    블로그는 인터넷망을 뜻하는 웹(Web)과 일지나 일기를 의미하는 로그(Log)의 합성어다. 젊은 세대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마치 일기를 쓰듯 온라인에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고 의사를 개진하는 시대다. 온라인상에서의 표현 때문에 기본권을 넘어 생활이 파괴되는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을지 우려스럽다. 앞서 소개한 사례에서 인권위는 상담자에게 퇴학조치 가처분 신청을 하고 퇴학처분 무효소송을 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학교에서 인권침해를 배운다?

    한국 사회의 우울한 인권 자화상

    인권순회상담에 나선 인권위 직원들이 장애우들의 고충을 듣고 있다.

    생활의 편리함이 정보화 시대의 빛이라면, 정보 유출은 그 그림자다. 인권위에도 과도한 개인정보 수집에 관한 문의가 들어왔다.

    “경기도에 근무하는 교사입니다. 경기도교육청은 쌀 직불금과 관련해서 교사 자신과 배우자, 직계존속의 개인정보(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지 등)를 모두 기록하여 엑셀 파일로 내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경기도에 소속된 수천 명에 달하는 교육공무원 가족들의 정보를 파일로 만들어 행정안전부에서 관리하는 것은 과도한 개인정보의 수집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정보유출로 인한 피해도 우려됩니다.”

    “○○교육청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 학교가 학생들의 정보를 경찰에 제공해도 되는 것인지 문의하더군요. 경찰이 학교로 찾아와 지역에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의 신상정보와 학부모들의 주민번호, 연락처 등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상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 조회할 수 있다’는 조항을 근거로 조회를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교육청에서는 본인의 동의가 있는 경우에만 제공하도록 안내했습니다. 학교 측은 경찰과 협조관계를 고려하다보니 처신이 어렵다고 합니다.”

    정보유출은 회사, 공공기관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학생을 중심으로 가족의 정보를 수집하기 쉬운 학교에서 더욱 문제가 된다. 학교가 인권 교육이 아닌 침해의 현장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제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오늘 생선이 나왔는데 아이가 원래 생선을 먹지 않아 남겼답니다. 그러자 영양사가 화장실로 데려가 주먹으로 뺨을 때리며 한 번만 더 남기면 ‘죽여버리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있습니다. 어느 날 보니 다리(오금 부분)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더군요. 너무 아파서 걸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교실에서 벌을 받았는데 앉았다 일어나기를 500번씩 했다고 합니다. 단체로 받았고, 이전에도 그런 벌을 많이 받았으나 너무 무서워서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교사 면담을 하려고 하니 자녀는 무섭다면서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교사의 교권이 무너져 내린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나오는 동시에 한쪽에서는 여전히 체벌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멍들게 하고 있었다. 또한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교사가 직접 가위로 자르는 행위, 짧은 치마를 몰래 입었는지 보기 위해 무작위로 들추는 행위 등 옛이야기 같은 일들이 2000년대 교실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운동선수로서 학교생활을 하는 학생들의 인권침해도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배구, 핸드볼, 농구 등 어느 종목 할 것 없이 각급 학교에서 구타 사건이 일어났고 수업에 빠지고 운동을 하라며 학습권을 침해한 경우도 있었다. 운동선수는 학교장의 이적동의서가 필요한 터라 자녀의 장래를 생각할 때 제대로 된 후속 대응을 할 수 없었다는 학부모들의 상담이 여러 건 접수됐다.

    침묵을 강요하는 성희롱

    성희롱은 여전히 직장과 공공기관 내에서, 그리고 검찰 조사 과정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가해자가 상사, 의사, 교수, 교사 등 권위를 가진 위치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해자들은 성희롱을 당해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힘든데다 2차, 3차의 괴로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기관에서도 피해자의 입을 단속해 사건을 무마하려는 사례들이 있었다.

    “내담자(來談者)는 ○○소속 공무원입니다. 팀장이 부서 여직원과 타부서 여직원들의 손과 어깨를 필요 이상 만지고 ‘차를 마시러 와라, 밥을 같이 먹자’는 등 성희롱을 일삼았습니다. 팀장은 내담자가 차 마시는 것을 거절했더니 ‘저 년은 남편의 뼈를 갉아먹을 년’이라는 욕을 했습니다. 워크숍 갔을 때는 여성이 나 혼자인데도 혼숙하도록 방을 한 개만 정하라고 했습니다. ○○부에 팀장의 성희롱에 대한 고충을 제기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습니다. (가해자가)감봉 3개월에 직위해제되었으나 계속 같은 부서에 근무하도록 하여 피해자들은 일할 수가 없습니다.”

    “시청 공무원인 처형이 2009년 4월 시의원에게 성희롱을 당했습니다. 업무상 간 1박2일 워크숍에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처형은 하위직 공무원이라 과일을 깎고 술을 챙기는 일을 했습니다. 시의원은 처형의 손을 강제로 잡고 억지로 술을 먹였습니다. 또한 방 열쇠를 손에 쥐여주면서 ‘숙소가 불편하면 내 숙소로 와서 자라’는 등의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술자리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처형에게 방 번호를 알려주면서 오라고 하였습니다. 처형이 직장협의회에 성희롱 피해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근무 부서의 국장과 과장, 팀장이 처형을 불러서 ‘왜 신고했느냐, 그 술자리에 있었던 것이 문제다. 신고한 것을 취소하라’고 하였습니다.”

    “○○지검에서 성추행 사건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검사가 내담자에게 ‘성욕은 어떻게 푸느냐’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내담자가 성적 소수자임을 알고 검사가 조사와 관련 없는 질문을 하여 내담자의 인권을 침해하였습니다.”

    창문에서 떨어진 이주노동자

    인권침해나 차별행위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를 동등한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는 데서 발생하게 마련이다. 노인, 아동, 철거민,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취약 계층의 상담 사례는 보는 이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든다.

    인권위 사례집에는 용변의 양과 상관없이 네 시간 반이 지나야 기저귀를 갈아주고 노인들의 머리와 얼굴을 때리는 노인요양원, 입소자들의 개인통장을 관리하며 입소자를 폭행하는 양로원 사례가 나온다. 아동시설 가운데도 문제가 심각한 곳들이 있었다. 의사가 치료를 권고했으나 원장이 거부하며 아이를 장애가 생길 정도로 방치한 보육시설과 원장과 교사에게 맞아 일곱 살 아이의 뇌에 이상이 생기게 한 놀이방 등이다.

    앞서 제대로 된 수사나 체포 절차를 지키지 않은 경찰의 사례를 소개했다. 이주노동자에 이르면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다. 밤에 갑자기 방에 들이닥쳐 아무 말 없이 수갑을 채우더니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자 “외국인인 줄 알았다”며 사과도 없이 가버린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합법 체류 이주노동자를 주먹으로 가격하고 체포한 사례도 있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 과정에서 단속반원이 밀어 창문에서 떨어진 이주노동자도 있다. 한편 작업장 내 한국인 동료에게 맞았다는 사연도 접수됐다.

    장애인 차별 역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8년 4월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이후 장애인 인권 문제가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고, 이번 상담 기간 내 전체 차별행위의 43.5%를 차지했다. 장애를 이유로 자격증을 주지 않는다거나 고용을 거부하는 사례가 많았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위해 편의를 제공하기는커녕 학대를 일삼은 사례도 볼 수 있었다. 장애인이 충분히 이용할 수 있고 이용해야 하는 문화시설임에도 장애를 이유로 거부하는 곳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비장애인을 조건을 따져 차별하는 행위도 여럿이다. “키가 작다, 살이 쪘다, 전과가 있다, 전문대를 나왔다, 여성이다”라는 갖가지 이유로 고용을 거부하거나 해고 압력을 행사한 사례들이다. 이 밖에 나이에 따른 차별행위와 정신병원 인권침해 상담 건수도 상당하다. 이 분야의 차별과 침해 사건이 늘어났다기보다, 나이와 정신장애도 인권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결과다. 2009년 3월 연령차별금지법이 시행되면서 고령자의 고용이나 해고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경제대국의 인권 현주소

    인권상담센터에 접수되는 사례들은 하나같이 절박하게 호소하지만 답변은 그에 비해 담백하다. ‘조사할 수 있다. 진정이 가능하다. 관련 법률은 이렇게 정해놓았다’ 등이 대부분이다. 국민의 크고 작은 호소를 사실관계에 따라 조사하고 권고를 내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국가인권위 인권상담센터의 육성철 조사관은 “1만5000여 건이 넘는 사례를 정리하고 사례집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의 인권 현주소를 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사람들이 인권위에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며 “인권위가 제시하는 안들이 인권 통념의 가이드라인이 되길 바란다”고 사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몇 년 새 ‘국격’이라는 단어를 듣는 일이 잦아졌다. G20 정상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대한민국의 국격에 걸맞은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자는 말들이 나온다. ‘2008~09 인권상담사례집’은 국격보다 인격이 먼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 사회의 자기반성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인권위 인권상담센터 방문 상담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뤄진다. 전문상담원, 변호사, 노무사, 사회복지사, 치료상담사 등 전문 상담위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외국인을 위한 영어상담도 가능하다. 전화 상담은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9시까지며, 국번 없이 1331을 누르면 된다. 매주 월요일에는 수화통역사가 화상전화상담을 진행한다. 전화번호 070-7947-7331,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 주소 www.humanrights.go.kr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