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계 언론인들은 대거 숙청을 당했다. 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 등이었다. 재판장에 선 이들은 하나같이 범죄사실을 자백했고 피소 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박헌영도 여성계몽잡지 ‘여자시론’의 편집원으로 근무 중 언더우드를 만난 뒤 미국을 숭배하는 사상(숭미사상)을 품게 됐다고 고백했다. 미국에 의존해야만 조선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진술은 과연 사실일까. 왜 이들은 사형을 당하면서까지 순교자의 길을 택했던 것일까.
납북과 월북의 구분
월북 언론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6·25전쟁 이전에 자진 월북한 사람과 전쟁 이후에 북한군을 따라간 경우다. 전자 가운데는 8·15 광복 전부터 북한에 살던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월북이 아니라 원래 거주지가 북한이었던 사람인데, 한설야가 이에 해당한다. 전쟁 전에 월북한 언론인 가운데는 해방공간에 발행된 좌익신문에서 활동한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인 좌익신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민보 (1945. 9.8~1946. 9.6)
해방일보 (1945. 9.19~1946. 5.18)
일간 예술통신 (1946. 11.5~1947. 3.2) 문화일보 (1947. 3.11~9.24)
대중신보 (1947. 3.21~6.18) 노력인민 (1947. 6.19~8.17)
‘조선인민보’에서 활동하던 인물로는 김정도(金正道·사장), 홍증식(洪?植·사장), 김오성(金午星·편집국장), 임화(林和·주필)가 있었고,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권오직(權五稷·사장), 조두원(趙斗元·주필), 정태식(鄭泰植·편집국장), 해방일보의 후신인 ‘노력인민’의 홍남표(洪南杓·사장), 이상호(李相昊·편집국장), 윤형식(尹亨植·편집국장), 정진섭(鄭鎭燮·편집국 차장), ‘건국’을 발행하던 김광수(金光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한때 북에서 고위직에 올라 활동하였으나 박헌영(朴憲永) 계열의 남로당이 몰락하면서 대부분 억울하게 처형되거나 숙청당하는 비운에 처했다. 홍남표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1948.8)과 동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949년 6월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을 역임하다가 1950년 6·25전쟁 직전에 사망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북한의 언론인과 문인들의 운명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은 체제에 적극적으로 순응하고 김일성 우상화에 몸을 바쳐 출세하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숙청의 광풍에 휩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거나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이었다.
공개적인 숙청의 대상은 박헌영 중심의 남로당 계열 언론인들이었다. 1953년 8월3일부터 6일까지 4일 동안 북한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는 남로당 출신인 12명(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에 대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을 열었다.
12명 재판에 언론인 4명
재판받은 12명 가운데 언론인 또는 문인으로는 임화(시인, 조선인민보 주필), 이원조(李源朝·6·25전쟁 중 해방일보 주필), 조일명(趙一明, 조두원이라는 이름도 씀. 해방일보 편집국장, 노력인민 주필), 설정식(薛貞植·시인, 번역문학가)이 있었다. 이들의 ‘범죄’는 크게 세 가지였다.
① 미 제국주의를 위하여 감행한 간첩행위.
② 남반부 민주역량 파괴 약화음모와 테러 학살행위.
③ 공화국 정권의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의 음모행위.
세 번째 항목은 일본에서 1954년에 발행된 일본어 번역본에는 있는데, 1956년에 북한이 발행한 공식 기록에는 빠져 있다. 일본어 번역판은 재판 당시에 북한의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에 실렸던 내용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재판 당시에는 있었던 독립 항목을 제외하면서 그 내용은 살리되 추가 또는 변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55년 12월의 박헌영 재판에는 세 번째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제목을 ‘공화국 전복 음모행위’로 약간 바꾸었다. ‘박헌영 도당’이 무장폭동을 일으켜 김일성 정권을 무너뜨리려 시도했으며 박헌영이 이 모든 것을 책임졌다는 게 골자다. 당시는 김일성을 향한 어떤 세력의 어떤 도전도 허용되지 않던, 김일성이 절대적 권위를 지닌 신성한 존재였던 때였다.
재판기록은 김일성 정권이 남로당 일파를 얼마나 잔인한 방법으로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고 선전물로 이용하면서 재판을 진행한 끝에 처형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재판기록에서 본인이 진술한 언론관련 경력과 ‘범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재판 심문 순, 이름 뒤의 직책은 체포되기 전 북한에서 활동하던 직책)
조일명(趙一明·1903. 12.1) 전 문화선전성 부상.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후포매리에서 토지 약 1만5000평을 소유한 지주의 장남인데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공산당 사건으로 1929년 12월경에 체포되어 3년6개월 징역형을 언도받아 1933년 10월 만기출옥했으나 2개월 후 12월에 다시 체포되어 1934년 4월 석방되었다. 1944년 2월부터는 대화숙(大和塾) 인쇄소 주무원(主務員)으로 근무했고, 같은 기간 3개월간 대화숙 야간학교 일본어 교사를 지냈으며, 7월에는 대화숙 기관지 ‘사상보국’에 “황국 신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말을 배워야 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대화숙은 일제 말기인 1941년에 조직된 사상교양 단체다. 사상범들을 수용시켜 감시하고 지속적으로 교양하면서, 내선일체와 천황에 대한 충성 등 일제의 논리를 홍보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1945년 광복 직후 9월에 창간된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했고, 이듬해 5월 해방일보가 폐간된 후에는 남로당 부부장, 해방일보의 후신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 주필을 역임했다. 해방공간의 좌파 언론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1947년 12월에 월북하여(박헌영 재판 증언 때는 11월 초에 월북했다고 말함) 1949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본부 서기로 승진하였으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 중이던 1950년 8월 당시 서울시인민위원회 계획위원장이었다. 1951년 1월부터 ‘민주조선’ 부주필을 맡았다가, 1951년 11월에는 문화선전성 부상으로 활동하다가 재임 중인 1953년 초에 체포되었다. ‘해방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부터 미국 간첩활동을 하였다고 재판에서 자백했다.
조일명은 박헌영과는 동서간이라는 인연도 있었다. 1955년 12월 박헌영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서 “저의 처남인 동시에 박헌영의 처남인 윤대현을 6·25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후에 의용군 본부 내에 ‘특수부’라는 살인단체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로 임명했다”고 말했다. 박헌영의 첫 아내는 주세죽(朱世竹)인데 북한에서 재혼했던 이 젊은 아내가 조일명의 처제였던 것 같다.
박승원 임화의 공산당 활동
박승원(朴勝源·1913. 2.28) 노동당 중앙위원회 연락부 부부장. 경북 영주군에 2만평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 가정에서 성장했다. 보성전문 상과 재학 중 1932년 학생운동 사건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공산당 사건으로 몇 차례 체포된 경력이 있다. 1937년에 전향하여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다가 일제 말에 퇴사했다(1941년 매일신보 사원명부에도 박승원(龍元勝夫)의 이름이 들어 있다). 광복 후 ‘서울신문’ 창간 때에 정치부장을 지내고 1946년 1월부터는 남로당 선전부장 대리를 맡았다. 같은 해 6월에 월북하여 박헌영의 지시로 해주제일인쇄소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다가 1948년 말부터 부주필, 주필을 맡았다. 1949년 7월에 로동당 연락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950년 3월부터는 유격대로 참가하였으며 5월에 북으로 올라갔다. 6월에는 전라북도당 조직 임무를 맡고 다시 남한에 잠입해 있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 북한군이 광주를 점령했을 때에는 그곳에 있었다. 북한군 점령하에서 경기도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51년 5월 중앙당 연락부 부부장 재임 중에 체포되었다.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김일성(왼쪽)
광복 후인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의 외곽단체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여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1946년 7월 이전부터 ‘조선인민보’의 주필을 맡았다. 월북하기 전까지는 박헌영, 이강국 노선의 민전 기획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노력인민’이 창간될 때에는 박헌영을 극찬하는 시를 썼다. 좌익 신문 ‘문화일보’에도 ‘박헌영 선생이시어 우리게로 오시라’는 구절을 남겼다.(문화일보, 1947. 6.13)
“또다시 조국을/ 짓밟는 민족의 원들을 향하여/ 우리들이 일어났던 저 3월22일
//박헌영 선생은/ 서울, 부산, 광주/ 남조선 방방곡곡에 있었다.
//민족의 앞길에/ 돌을 던지던/ 민족의 원수들을 물리치고/ 민주정부가 서려는 오늘
//박헌영선생이시어/ 우리게로 오시라/ 우리에게 군림하시라(1947. 6.12)
임화는 북으로 올라간 후 1948년에 박헌영에게 바치는 헌시를 지어 김순남을 시켜 해주에서 열린 대표자대회에서 낭독케 한 일도 있다고 이원조가 재판과정에서 증언했다.(재판문헌, 321쪽) 임화의 시가 실렸던 ‘문화일보’ 1946년 6월13일자에는 김남천의 ‘민족 대서사시의 영웅적 주인공 박헌영 선생’이라는 글도 실렸다.
월북 후 임화는 1947년경 해주제일인쇄소에 근무하다가 6·25 때는 서울에서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북한군 서울 점령 후에 발행된 해방일보와 북한의 로동신문에 임화는 ‘전선에로! 전선에로! 인민의용군은 나아간다’(해방일보, 7.8), ‘원쑤와의 싸움에 더욱 용감하라!’(로동신문, 8.19)와 같은 시를 발표하면서 낙동강 전선에 종군까지 하였을 정도로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고, 평론가 겸 시인이었다.
목숨을 건진 이원조
이원조(李源朝·1909. 3.9)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경북 안동 출신으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의 동생이다. 이육사는 1931년부터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원조는 문학평론가로 조선일보 편집고문을 지낸 귀족 출신 이관용(李灌鎔)의 사위였다. 동생 이원창(李源昌)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일보 인천주재 기자로 근무하다가 광복 후에는 인천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사회부장을 지내기도 했다.(‘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편’, 230~234쪽)
이원조는 일본에서 니혼대학 전문부와 호세이대학 문과를 졸업했다. 졸업하던 해인 1935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 차장이었다가 1939년 7월 대동출판사 주간대리로 옮겼다. 1944년 6월에는 조선일보가 발행하던 ‘조광’에 입사했다. 광복 후에는 임화, 이태준과 함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서기장이 되었고,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6년 4월부터 9월까지는 ‘현대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민전 사업에도 참여했다. 현대일보에 미군의 정책을 반대하는 내용을 실었다가 체포령이 내리자 1947년 초에 월북하여 이듬해부터 해주제일인쇄소 편집국 차장으로 근무하던 중 국장 박승원이 그 인쇄소의 부책임자로 승격하자 국장으로 승진하여 6·25전쟁 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전쟁 후에 서울에서 발행된 ‘해방일보’의 주필이 되었다. 1951년 4월 초에는 중앙당 선전선동부로 옮겨 6월부터 선전선동부 부부장 재임 중에 체포되었다. 재판에 회부된 언론인 가운데는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다.
설정식(薛貞植·1912.9. 18)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총정치국 제7부 부원. 중국 요녕성 제3고급중학교에서 공부했고,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메지로상업학교 졸업 후 연희전문 문과 졸업, 미국 오하이오주 마운트유니언대학 영문과 졸업, 뉴욕 컬럼비아대학 연구생 등 다양한 학력을 거친 엘리트였다.
광복 후 동아일보 재건을 위한 교섭에 미군과 접촉했다고 재판과정에서 말했다.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광복 후 미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으로 근무했고, 1946년 좌익 문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외국문학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 1월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부(副)비서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2월경에는 영문일간 ‘서울 타임스’의 주필 겸 편집국장에 취임했으나 10월 초에 사임했고, 이 신문 폐간과 함께 체포령이 내려졌다. 6·25전쟁으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9월10일부터 인민군 전선사령부 문화훈련국 제7부에 들어갔다. 1951년 7월부터는 개성에서 열린 정전위원회 북한군 대표단 통역으로 근무하다가 체포되었다. 광복 후 1947년에서 1948년 사이에 시집 3권(‘종(鐘)’‘포도(葡萄)’ ‘제신(諸神)의 분노’)과 장편소설 ‘청춘’(1946)을 출간했던 문인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번역했다. 휴전회담 초기인 1951년 7월에는 북한군 소좌 계급장을 달고 연락장교로 문산에 나타나 취재하던 남한 기자들과 마주친 적도 있었다. 경향신문 기자였던 이혜복은 중앙중학과 보성전문에서 설정식에게 배운 적이 있었는데 회담장에서 만나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김일성 정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었던 가장 핵심적인 죄목이 ‘공화국 정권의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의 음모행위’였을 것이다. 박헌영 중심의 남로당 계열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획책했다는 혐의였다. 전쟁 중에 실제로 그런 기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단순히 논의에 그친 이야기를 사건화한 것으로 보인다.
기소장과 재판 과정의 진술에 의하면 김일성 정권을 전복하고 “자본가 지주 소자산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부르주아 민족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것으로, 새 정부의 조각까지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박헌영(수상), 주영하, 장시우(부수상), 박승원(내무상), 이강국(외무상), 김응빈(무력상), 조일명(선전상), 임화(교육상), 배철(노동상), 윤순달(상업상)이었으며, 로동당을 대체하는 ‘새 당’의 제1비서로 이승엽을 추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공판기록 160쪽, 일어 51쪽)
기소된 피의자들은 널리 알려진 공산주의자였고 12명 가운데 2명을 제외한 10명이 사형당하는 충격적인 재판이었지만 단심으로 종결되었다. 재판은 짜인 각본대로 일사천리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① 검찰의 기소 ② 공판심리 ③ 국가 검사의 논고 ④ 변호인들의 변론 ⑤ 피소자들의 최후 진술 ⑥ 판결 순이었다.
‘정권 전복 위한 무장폭동 음모’
재판은 1953년 8월3일부터 6일까지 4일간 진행되었다. 피소자들이 언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판결문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윤순달의 경우 그를 구속한 1953년 3월16일부터 징역형을 기산하고, 이원조는 4월12일부터 기산한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이해 3월 또는 이전부터 수사가 진행되고 관련 혐의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6개월 동안 조사를 진행하고 재판은 신속하게 끝낸 것이다.
검찰의 기소. 7월30일자로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리송운(李松雲·1952. 6~1956. 1 검사총장, 1956. 4 로동당 중앙위원, 5월 평양시 위원장, 1960. 2 주 소련대사 역임) 명의로 기소장이 작성되었다. 기소된 12명은 예심에서 통고된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시인했으며 상호진술과 증인들의 진술 및 대질신문으로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공판심리(1953. 8.3~6). 최고재판소장 김익선(金翊善)을 재판장으로 판사 박룡숙, 박경호를 성원으로 하여 서기 김영주가 입회한 가운데 공개 재판으로 진행되었다. 검사 부총장 김동학, 검사 김윤식, 리창호, 공선 변호인 지영대(이승엽), 김문평(임화, 이원조, 설정식), 리규홍(조일면, 백형복, 윤순달), 정영화(배철, 조용복, 박승원), 길병옥(이강국, 맹종호)이 참석했다.
재판장이 피소자들을 한 사람씩 진술대에 불러내어 먼저 경력을 말하라고 지시하는 방식의 재판이었다. 피소자들은 자신의 경력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환경과 성장과정 등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혀내는 방식으로 매우 주관적으로 고백하는 형식을 취했다.
김일성(왼쪽)과 김구
“저희 도당은 무장폭동으로써 현존하는 공화국 정부를 전복하고 저희들 반혁명적 도당으로써 자본가 지주의 정권을 수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저희 반혁명적 그루빠(그룹)의 이 음모는 8·15해방 직후부터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8·15해방 직후 박헌영의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소위 ‘8월 테제’에 근거하여 이 음모 활동을 개시하였습니다. 1951년 1월경에 들어서서 리승엽을 두목으로 하는 우리 그루빠는 매우 초조 불안하였습니다.”
박승원은 두 번째로 진술대에 올라가서 자신의 죄과를 자백했고, 세 번째가 임화였다.
임화는 구류장에서 자살하려고 안경알을 깨어 오른팔 동맥을 끊었기 때문에 많은 출혈로 인사불성에 이르렀으나 수혈로 생명은 구했지만 신체가 쇠약했기 때문에 앉아서 진술하도록 변호사가 요청하여 재판장이 허용하였다.
임화
임화는 자신이 일제 말기에 여러 친일행적을 남겼다고 고백했다. 일제 말기에 문인보국회에도 참여했으며, 8·15광복 직후 18일경에 “부르주아 순수문학 제창자들”인 김남천, 이원조, 이태준 등과 같이 조선문화전선중앙협의회를 조직했다고 말했다. 김남천과 이태준은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지만 임화의 진술로 보아 이때 이미 매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장폭동에 대해서 임화는 “저와 같은 추악한 간첩분자들이 미제 침략자들을 배경으로 하여 무장폭동을 조직하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이와 같은 정치적 모략운동은 해방 전후를 통한 나의 반당적 문화운동으로부터 또 개인 영웅주의와 출세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출발하여 감행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목숨을 끊어 수모를 면하려 했던 임화였지만 기력이 떨어진 몸으로 재판정에 끌려 나와서 이처럼 자신을 매도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임화 리승엽의 비참한 최후 진술
지위가 가장 높은 이승엽은 재판 2일째인 8월4일 12시부터 심문이 시작되어 2시10분까지 진행되었다. 이승엽은 북한 정권의 초대 사법상(1948. 9~1951. 12)을 지냈고, 국가검열상(1952. 5~1953. 3), 북한군의 서울 점령시에는 서울시장 격인 서울시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거물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산당 운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던 경력이 있었다.
그러나 재판정에 끌려 나온 이승엽은 과거의 공산주의 투사나 북한정권의 고위직에 올랐던 풍모는 보이지 않았다. “저는 자기의 죄과로 인하여 미제의 간첩으로 전락되어 그들에게 이용되었고, 만일 기회가 있어 정권을 얻는다면 좀 살아보고 못되면 죽든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 정부를 망상은 하였으나 구체적 계획도 없는 최후의 발악이었고, 설혹 정권을 잡는다면 소부르주아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원조는 마지막 날인 8월5일에 재판심리가 열렸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출발점은 사상적 근원이 소부르주아적인 소위 순수문학을 제창한다는 데 있었다고 자신을 비판했다. 월북 후 1948년 10월부터 해주제일인쇄소에 근무하면서 박헌영의 전집을 발간할 계획으로 자신이 검토한 원고를 임화가 조일명에게 제출하여 최후 교열까지 하였으나 출판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이원조는 ‘문화전선사’의 책임자였던 김남천이 약 20만원을 낭비한 사실을 발견하고도 비호한 사실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남천은 1947년말에 월북하여 해주제일인쇄소의 편집국장으로 남조선노동당의 대남 공작활동을 주도하였고 1953년에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설정식은 마지막에 불려나왔다. 그는 임화를 미국인 로빈슨과 연결시켜 간첩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관련된 진술 외에 임화를 고발하는 발언까지 했다. 임화가 남한의 문화계 중요 기밀을 미국 측에 계통적으로 전달한 사실이 있는데도 재판과정에서 모두 자백하지 않았으며 거짓말까지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검사의 논고 검사 부총장 김동학은 ‘이승엽 도당’의 “추악하고 음흉한 범죄행위”에 대해서 논고했다. 이승엽 도당의 배후에는 조선에 대한 미제의 침략계획을 직접 실천하는 미국 대사관 정치고문이며 이승만의 고문인 노블을 두목으로 하고 군정장관 하지의 버치(미 24군단 헌병사령관) 등 미국에서 가장 음흉한 탐정 테러배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승엽을 비롯하여 조일명, 임화, 박승원의 순으로 피소자 개개인의 죄상을 하나씩 열거했다. 그리고 피소자 10명에게 사형, 이원조 윤순달에게는 각각 15년 내지 20년의 징역형을 구형했다.
변호인들의 변론 변호인들은 피소자들이 죄상을 인정했기 때문에 범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들의 성장환경과 처했던 상황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정을 판결에 참작해달라는 요지로 변론했다.
피소자들의 최후 진술 한결같이 피의 사실을 전적으로 시인하고 재판 절차에 대해서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목숨을 바쳐도 지은 죄를 씻을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화국에 감사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승엽은 최후진술에서 “씻지 못할 엄중한 죄악을 범한” 극악한 범죄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인권 유린도 없이 인간으로서 극진한 대우를 하여준 데 대해서 감사한다고 말했다. 공판 과정에서도 자유롭게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인민 앞에 자기의 죄행을 자백 폭로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임화는 자신의 가족도 미제의 폭격에 죽었다고 말하고 “내 가족을 죽인 것은 미제보다도 자기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제 나라 제 조국 제 육친을 죽인 범인은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으로써만 죄악에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살을 시도했던 행위는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공명심과 허영심에서 일어난 일이며 “저는 인민의 심판이 두려워 죽으려고 한 것이므로 저의 행동은 더욱 간악하고 추악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온갖 추악한 죄악을 인민 대중 앞에 내놓기보다는 차라리 죽겠다는 생각이 예심을 곤란하게 하였고, 공판에서는 질서를 문란케 했는데도 자신을 인간답게 대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고재판소 판사 여러분 엄중한 죄를 범한 저에게 모든 것에 만족하고 조국에 대하여 영광을 축원할 수 있으며 만족하게 죽을 수 있는 조건을 지어준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순교자의 유언처럼 들리는 이 최후진술은 과연 진실일까.
시인은 사후에도 이름을 남긴다. 임화는 시인이면서 공산주의자였다. 사형이 구형된 처지이고 자살을 기도했던 사람이 이름을 스스로 욕되게 하면서 순교자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까. 재판기록이 사실인가 하는 점에 의혹을 품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후를 맞이하는 인간이 한결같이 이런 태도로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혹시 이들이 재판 이후에 있을지도 모를 고문과 비인간적인 학대와 모멸을 예상했거나 그런 협박에 굴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대목이다.
완벽한 연출로 이루어진 재판은 12명 중 10명을 사형하고 전 재산을 몰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살아남은 두 사람, 이원조와 윤순달은 각각 징역 12년과 징역 15년을 받았고 두 사람의 재산은 모두 몰수처분됐다. 이원조가 사형을 면한 것은 박헌영을 수상으로 하는 신정부 조직에 가담하지 않았고, 간첩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았다는 정상이 참작됐기 때문이었다.
월북한 남로당 계열 언론인들은 6·25전쟁 전까지 해주제일인쇄소를 근거지로 하여 대남 선전과 선동사업을 벌이고 있었던 사실이 재판과정에서 드러난다. 제일인쇄소의 편집국장은 김남천이었다. 박승원이 국장이었고 박승원이 부책임자로 승진하면서 편집국 차장이던 이원조가 국장으로 승진했다. 임화도 제일인쇄소에 근무했지만 어떤 직책이었는지 알 수 없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피소자 박헌영”
박헌영 재판은 1955년 12월15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되었다. 12월3일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리송운이 기소장을 제출하고 12월14일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장 최용건을 비롯하여 5명의 재판관을 임명한 이튿날이었다. 박헌영은 재판 전에 자필로 변호사가 필요 없다는 다음과 같은 각서를 제출했다.
“나의 사건 재판에 변호사의 참가를 나는 요구하지 않 합니다. 변호사의 변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함으로 그의 참가를 희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1955년 12월12일 피소자 박헌영”
박헌영은 이미 결론이 내려진 재판의 연극 무대에서 필요 없는 변론을 받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재판에는 2년 전에 사형이 언도된 이강국과 조일명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이때까지 두 사람의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던 것이고, 임화 등 다른 사형수들은 확실하지 않지만 언도 직후에 처형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박헌영의 재판에 대비하여 집행을 유예했던 것 같다.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던 권오직(해방일보 사장)도 증인으로 출정했는데 직업은 ‘노동자’였다. 숙청된 상태로 어디에선지 노동자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박헌영이 자신의 경력과 범죄사실을 자백하는 순서부터 시작되었다. 박헌영은 자신의 경력을 진술하면서 피소 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1919년 3월 경성고보(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여성계몽잡지 ‘여자시론’의 편집원으로 근무할 때에 언더우드를 만나면서 미국을 숭배하는 사상(숭미사상)을 품게 되었다고 말했다.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는 조선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월북 후에는 강동학원과 해주제일인쇄소를 이용하여 하지가 지령한 대로 남북대립과 불신임, 분열사상을 조성하는 것과 북한 당내에 세력을 부식하고 확장하는 범죄행동을 감행했다고 말했다.
증인 권오직은 박헌영이 ‘조선인민의 수령으로 자처해왔다’면서 해주제일인쇄소의 대남 출판물을 악용하여 주로 자기의 공명을 선전하도록 하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중국대사로 임명되어 가던 때에도 중국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말하였으며 그들과 교섭할 때 속을 털어놓고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고 증언했다. 박헌영은 외무상으로 있으면서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대사들과 외교관들을 멸시하고 반동선전을 한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조일명은 1946년 초부터 박헌영이 미국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해방일보, 노력인민의 주필로 있다가 박헌영의 지시로 월북하였으며 제일인쇄소에서 임화, 박승원 등을 조종하여 출판물에 박헌영을 조선인민의 지도자인 것 같이 선전하였다고 증언했다. 1951년 9월 초순에는 중앙당 이승엽의 사무실에서 공화국 전복의 무장폭동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토의했는데 이승엽을 총사령으로 하고 참모장 박승원, 군사조직책임 배철, 폭동지휘책임 김응빈, 정치 및 선전선동책임은 임화와 조일명으로 하는 무장폭동 지휘부를 결성했다고 말했다.
이강국은 박헌영의 비호 보장에 의하여 자신이 북한 인민위원회 외무국장으로 등용되었으며 박헌영의 지시에 따라 간첩활동을 수행하였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박헌영에게 과거의 심복들이 위와 같이 자신의 죄과를 증언하는 내용에 대해 논박하거나 혹은 부정확한 점이 있으면 말하라고 그때마다 물었는데 박헌영은 모두 틀림이 없다고 대답했다. 과거의 동지이자 부하들이 재판에서 자신을 매장시키는 증언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심정은 참담했을 것이다.
오후 6시까지 진행되던 공판은 잠시 휴정하였다가 10분 후에 계속되었다.
박헌영(왼쪽)과 여운형
박헌영은 최후진술에서 자신의 마수에 걸려 많은 사람이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불행하게 되었으며 그 모든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말했다. 오전 공판에서는 ‘신정부’ ‘새당’의 조직 음모와 무장폭동 음모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있었던 일이지만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진술한 부분도 한 개 궤변으로 잘못된 것이기에 취소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수정한 것이다. 그 사이 이 문제에 관해서 강한 협박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끝으로 제가 과거에 감행하여 온 추악한 반국가적, 반당적, 반인민적, 매국역적 죄악이 오늘 공판에서 낱낱이 폭로된 바이지만 여기 오신 방청인들뿐만 아니라 더 널리 인민들 속에 알리여 매국 역적의 말로를 경고하여 주십시오.”
오후 7시35분에 재판관들은 판결을 평의 표결하기 위해 일단 퇴정하였다가 8시에 개정하여 재판장의 위임에 따라 재판관 조성모가 판결문을 낭독했다. 박헌영에게 사형과 전 재산몰수가 결정됐다. 재판장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 특사를 청원할 수 있다고 통고하면서 공판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공판이 10시간에 걸쳐 진행된 것이다.
박헌영은 12월5일에 처형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그의 재판이 15일에 열렸다는 북한 측 기록으로 보아서 15일 이후 즉시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월북 언론인들의 해주제일인쇄소
남한에서 미군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공산주의를 옹호하다가 구속되거나 체포령이 내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을 전개하던 남로당계 좌익들은 북한에서는 박헌영을 추종하다가 숙청되는 운명을 맞았다. 월북 후에는 해주제일인쇄소에서 남로당의 선전활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다. 증언 과정에서 등장하는 소설가 이기영과 김남천은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나 그 후에 비참한 말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재판받은 피의자들은 언론경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그를 추종하던 남로당계의 재판을 진행하면서 이들의 ‘죄상’을 공개하여 정치적 사회적으로 철저히 매장시켜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민주조선’(내각 기관지)은 1953년 8월5일자에 기소장을 실었고, 8월7일과 8일자에는 공판정에서 피고들이 진술한 ‘범행내용’을 게재했다. ‘로동신문’(로동당 기관지)은 8월8일자에 판결문을 실었다. 두 신문은 북한정권의 관보에 해당하므로 기소장이 실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재판의 결과와는 관계없이 이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신문에 기사가 실리는 순간에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핵심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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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박헌영 일파의 공판기록을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권 전복음모와 간첩사건 공판문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편, 국립출판사, 1956)이라는 제목으로 발행했다. 이에 앞서 일본에서는 ‘폭로된 음모(暴かれた陰謀-アメリカのスパイ 朴憲永 李承燁 一味の公判記錄’(현대조선연구소, 1954)라는 제목으로 번역 발행하였다. 공판기록은 북한이 남로당을 숙청하면서 대외 선전과 함께 대내적으로는 반대파에게 심리적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남아있는 동조 세력을 완전 무력화하는 동시에 무자비한 숙청사실을 정당화하는 선전 목적으로 공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