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초 미국 사회를 억누른 금주법은 할리우드에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왔다. 법망을 피해 밀주로 부와 권력을 쌓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폭력과 살인을 서슴지 않았던 갱스터들의 이야기는 상상만으로도 은막을 그럴듯하게 채운다. 영화 ‘가을의 전설’은 금주법을 다룬 여러 편의 영화 중 가장 낭만적이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영화 ‘가을의 전설’
영화의 시대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전부터 미국의 금주법 시대를 거쳐 1930년대까지를 주로 아우른다. 미국 몬태나주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감미로운 음악을 바탕으로 장면 하나 하나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영화는 ‘원스탭(One Stab·고든 투투시스 분, 우리말로는 ‘단칼’이라고 그럴듯하게 번역됐다)’이라는 인디언이, 그가 평생에 걸쳐 하인으로 봉사했던 윌리엄 러드로 대령 일가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당시 미국 연방정부의 인디언 학살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러드로 대령(앤서니 홉킨스 분)은 전역을 결심한다. 그는 몬태나주의 외딴곳에 목장을 짓고 정착해 세 아들, 알프레드(에이단 퀸 분) 트리스탄(브래드 피트 분) 사무엘(헨리 토마스 분)을 키우며 살아간다. 아내 이사벨(크리스티나 피클스 분)은 미국 서부 산악 지대인 몬태나주의 혹독한 겨울 추위와 척박한 생활환경에 지친 나머지 가정을 버리고 떠났다.
삼형제 중 장남인 알프레드는 나이에 비해 조숙한 편이고 성격이 현실적이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해 9월에 태어난 둘째 트리스탄은 강한 기질과 반항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포함해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다. 영화 제목 ‘가을의 전설’은 가을에 태어난 이 둘째아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 사무엘은 막내답게 형들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수잔나의 등장과 참전
그러던 중 어느 해 여름, 성장해 동부로 유학을 갔던 막내 사무엘이 약혼녀 수잔나(줄리아 올몬드 분)를 데리고 고향 집에 나타난다. 뛰어난 미모에 청순함까지 겸비한 그녀의 등장은 형제 모두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어쩌면 일상의 평범한 에피소드로 끝날 수도 있는 이들의 조우는 사무엘이 당시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1914~18)에 자원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전쟁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러드로 대령은 당연히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지만, 큰아들 알프레드마저 참전 의사를 밝히자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만다. 그러고는 둘째 트리스탄에게 형제들과 함께 가서 막내 사무엘을 잘 돌보라고 부탁한다.
이들이 떠나기 전, 수잔나는 트리스탄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자기를 버리고 머나먼 유럽으로 가 참전하겠다는 사무엘의 무모한 행동을 제발 말려달라며 흐느껴 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기고 만다. 사실 수잔나는 이미 샌님 같은 사무엘과는 전혀 다른 트리스탄의 야성미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 있었다. 이들의 포옹 현장을 장남 알프레드가 우연히 목격하지만, 삼형제 모두 바로 캐나다를 거쳐 유럽으로 떠나면서 이 일은 일단 묻히고 만다.
전쟁은 사무엘의 생각과 달리 참혹했다. 결국 사무엘은 작은형 트리스탄의 열성적인 보호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총에 맞아 전사한다. 트리스탄은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진다. 그는 고향에 있을 때 인디언인 원스탭이 일러준 대로 죽은 동생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그의 심장을 꺼내면서 미친 듯이 괴로워한다. 그러고는 동생을 대신해 독일군에 철저한 복수를 한다.
트리스탄은 제대 후에도 동생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아프리카 등지를 떠돌며 방랑 생활을 한다. 한편 전쟁 중에 다리를 다친 알프레드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다. 그에게서 사무엘의 사망 소식을 들은 수잔나는 절망한 나머지 바로 몬태나를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마침 내린 폭설로 도로가 막히자 러드로 대령의 권유대로 봄이 되어 눈이 녹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기로 한다. 그때만 해도 이것이 참담한 비극의 시작일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금주법 부작용과 후유증
영화 ‘가을의 전설’
트리스탄은 막내 사무엘을 잃은 아픔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사랑하는 수잔나를 내버려둔 채 다시 집을 떠나 몇 년간 방황한다. 방랑 중에 ‘우리의 사랑은 끝났으니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는 편지를 수잔나에게 보낸다. 이를 본 러드로 대령은 충격을 받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설상가상 소 값이 폭락해 집안 사정은 점점 황폐해진다. 결국 수잔나는 알프레드의 구혼을 승낙한다. 수년 후 집으로 돌아온 트리스탄은 오랫동안 자신을 사모해온, 하인 집안의 딸 이사벨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는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금주법(1920~33)이 시행됐다. 트리스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방정부의 모든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성원 아래 밀주 제조로 돈을 번다. 트리스탄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경쟁 조직과의 갈등 과정에서 아내 이사벨이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후 이들에 대한 트리스탄의 처절한 복수가 진행되고,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힌다.
수잔나는 감옥에 있는 트리스탄을 면회하면서 사실 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사무엘과 이사벨 둘 다 죽기를 바랐노라며 그에 대한 사랑이 여전함을 고백한다. 고백 후 그녀는 자살을 선택한다. 수잔나의 죽음 앞에서 알프레드는 트리스탄에게 “너에게 졌다”고 탄식하며, “나는 모든 법과 도덕과, 주님과 사람들의 말을 따르며 살아왔다. 하지만 너는 그 모든 걸 따르길 거부하였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를 더 사랑하였다”고 고통스럽게 말한다.
트리스탄은 자신이 사랑한 모든 이가 죽는 것을 지켜보며 장수했다. 다른 사람들은 마치 그가 바위인 양 그와 부딪치면 깨져버렸다. 트리스탄은 1963년 9월에 사냥이 한창이던 북부에서 곰과 장렬한 격투를 벌이다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찾을 수 없고, 영화는 그를 언제나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기록하며 끝을 낸다.
알 카포네를 잡아들이고, “한잔 해야죠”
이 영화의 후반부는 금주법이 발효된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장남 알프레드는 하원의원으로서 금주법에 찬성하고, 그의 아버지는 정부에 대한 철저한 반감으로 아들 트리스탄에게 정부에 본때를 보이고 이익도 보자면서 밀주 제조를 권유한다. 초기에는 사업으로 큰 재미를 보지만, 결국은 경쟁 조직과의 갈등으로 인해 트리스탄의 인디언 혼혈 아내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후 트리스탄 일가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는데, 특히 경쟁 조직의 밀주 보관 창고를 가득 채운 위스키 통에서 술이 쏟아지는 가운데 트리스탄이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금주법이 시행된 당시 시대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핵심 장면이다.
사실 미국의 금주법 시대는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에 좋은 소재로 활용됐다. 한 국가가 그것도 미국 같은 거대한 나라가 어떤 이유에서든 국가 차원에서 술의 제조와 판매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대단한 후유증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술에 대한 수요를 인위적으로 통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인데다 이에 따른 각종 밀주 관련 범죄 조직의 창궐은 영화제작자들로서는 참으로 매력적인 소재일 수밖에 없다.
이런 금주법 시대를 다룬 많은 영화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언터처블(The Untouchables, 1987)’을 빼놓을 수 없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데이비드 마멧의 각본으로 브라이언 드 팔마가 감독한 이 작품은 ‘가을의 전설’처럼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진 않지만, 금주법 시대의 전설적인 시카고 갱스터 알 카포네와 미 재무성의 정의로운 수사관 네스의 대결을 스릴감 넘치게 다뤘다.
이 영화는 수사관 네스(케빈 코스트너 분)가 쓴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미국 TV 드라마에 기초를 두고 있다. 미국에 금주법이 시행된 시기는 마피아 전성기이기도 했다. 당시 금주법의 허점을 틈타 시카고 제일의 마피아조직 보스 알 카포네(로버트 드니로 분)는 밀수로 큰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는 불법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판사를 포함해 각층의 관료들을 매수해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했다.
영화 ‘언터처블’
이 영화에서는 케빈 코스트너,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강한 의지의 청렴한 아일랜드 출신 수사관 지미 말론 역을 맡은 숀 코너리의 명연기가 특히 돋보인다. 그는 이 역할로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또 종반부의 기차역(Union Station) 총격 신이 매우 유명한데, 여기서 유모차가 계단을 굴러가는 인상적인 장면은 1926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러시아 영화 ‘전함 포템킨(The Battleship Potemkin)’에 등장한 전설적인 장면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마침내 알 카포네를 법의 심판을 받게 한 네스에게 기자들이 질문하던 중, 한 기자가 ‘이제 금주법이 해제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러자 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I think I?ll have a drink(한잔 해야죠).”
범법으로 얼룩진 금주법 시행
‘가을의 전설’과 ‘언터처블’의 배경이 된 미국의 금주법(Prohibition)이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미국 역사가 청교도 사상으로 무장한 개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영향 탓인지 미국의 금주운동은 그 역사가 결코 짧지 않아 이 영화 전반부의 시대 배경이 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주류의 제조판매를 금지한 주(州)가 10여 곳에 달했다. 그러던 것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미국이 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시의 식량 절약, 작업 능률 향상, 맥주로 상징되는 독일에 대한 반감 등이 어우러졌다. 여기에 당시 가난한 이민자들의 음주로 인한 문제가 부각되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금주운동의 필요성이 추진력을 얻었다. 그 결과 미국연방의회를 통과한 미국 수정헌법 제18조에 의해 마침내 1920년 1월 금주법이 정식으로 발효됐다.
그러나 금주법의 실제 시행 과정은 부패와 범법으로 얼룩졌다. 굳이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지 않더라도, 캠페인으로 추진되어야 할 사안이 국가에 의해 법의 이름으로 강요되었으니 그 부작용은 불문가지였다.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강력한 수요에 부응해 밀주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얽힌 각종 폐해는 앞서 말한 대로 그 후 수많은 갱영화에 소재를 제공했다. 당연히 밀주 제조 및 밀매와 관련한 막대한 이익을 둘러싸고 벌어진 갱들의 주도권 싸움은 곳곳에서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살인극을 낳았다. 시카고 마피아 보스 알 카포네 역시 시대가 낳은 필연의 산물인지 모른다.
밀주와 함께 금주법을 비웃듯 무허가 술집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번창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또 다른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덩달아 정치, 사회 전반에 혼란스러운 날들이 계속됐다. 역설적인 사실은, 금주법을 통해 강제로 술을 못 마시게 하니까 이전에 술을 마시지 않던 사람들조차 호기심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해 금주법이 시행된 동안 음주율이 오히려 높아졌다. 그 와중에 1929년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발생해 경기가 극심하게 침체되면서 금주법은 사실상 그 효력을 잃고 말았다. 1933년 미국의 금주법은 온갖 부작용만 낳은 채 수정헌법 21조에 의해 폐지됐다.
영화 ‘가을의 전설’은 한 가족의 상황을 통해 금주법이 가져온 부작용의 단면을 그려나간다. 영화에서 트리스탄은 금주법 덕분에 모처럼 이룬 단란한 가정을 지켜나갈 경제적 이익을 얻지만, 결국 그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는 비극을 겪는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트리스탄이 ‘가을의 전설’로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듯이, 금주법 또한 시대가 낳은 ‘어리석은 법의 전설’로 오래 기억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