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
이 글의 일본어 전문은 일본 월간지 ‘보이스’ 2009년 9월호에 실렸다. 영문 번역과정에서 원문에 비해 비교적 강한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주지만 기본적으로 하토야마의 평소 미국관이 거침없이 표현돼 있다는 점에선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이 기고문을 읽은 워싱턴의 일본 전문가들은 실망과 동시에 심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왜 그랬을까. 먼저 하토야마는 냉전 종식 후 미국이 주도해온 세계질서를 ‘실패’로 진단했다. 미국이 그간 ‘시장원리주의(market fundamentalism)’에 기초해 세계화를 추진하다보니 인간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했고 이로 인해 인간의 존엄이 상실됐다는 것이다. 미국형 시장원리주의는 각국의 다양한 전통, 습관, 생활양식을 철저히 배제했고 일본 전통경제에도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고 비난했다. 읽기에 따라서는 미국이 구축해온 세계질서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반미의 물증
그는 이에 대한 처방으로 ‘우애정신’을 내걸었다. ‘우애정신’은 하토야마 총리의 할아버지인 이치로 전 총리의 지론으로, 손자인 하토야마가 가장 신봉해온 정치철학이었다. 하토야마 총리는 ‘우애정신’을 바탕으로 두 가지 국가목표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는 인간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가 세계화 논리로 왜곡되는 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이웃나라와의 우애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의 창설이었다.
그는 “일본의 정체성은 아시아에 있다”면서 ‘입아(入亞)’를 강조했다. 또한 미국 일방주의시대의 쇠퇴를 언급하면서 달러화의 기축통화로서의 영속성에 대한 의문을 표시했다. 중국의 부상으로 “앞으로 일본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유지하며 국익을 지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의 각국은 미국 군사력의 존재가 지역 안정에 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함과 동시에 미국의 과도한 정치적 경제적 힘을 억제하고 싶어한다고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아시아의 통화 통합과 영속적인 안전보장 등 아시아 지역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기고문은 적어도 세 가지의 정치적 메시지를 던졌다. 민주당의 일본은 더 이상 미국에 무조건 추종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독립’에 관한 메시지였다. 민주당의 선거공약에 나오는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는 일본의 ‘진정한 독립’의 추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일본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민할 때가 올 것이라는 의미였다.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끌었다. 동맹국인 미국을 중국과 동일한 선상에 둔다는 것은 자민당 정권하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세 번째는 일본이 그간 공을 들여왔던 ‘탈아입구(脫亞入歐)’에서 벗어나 아시아를 중시하는 외교를 펼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담론은 ‘미국 배제’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일본의 노무현’ 상대 안 해?
미국의 우려는 민주당 집권 후 현실로 다가왔다. 하토야마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2006년 자민당 정권이 미국과 합의한 후텐마 기지의 오키나와 내 이전약속을 백지화해 다시 검토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러한 태도는 미국의 감정을 자극했고 그 후 양국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