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하토야마 일본 총리와 미국의 악연

美군정에 파직당한 할아버지 ‘항미 DNA’ 이어받은 듯

  • 장제국|동서대학교 부총장·국제관계학과 교수 jchang@dongseo.ac.kr|

하토야마 일본 총리와 미국의 악연

2/4
미국의 불편한 심기는 여기저기서 감지됐다. 리처드 로렌스 전 미 국방 부차관은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 정부 고관들은 하토야마 총리를 ‘일본의 노무현’이라고 평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하토야마 총리를 “동맹국 지도자로 대우할 수 없고, 전략적 이야기도 같이 할 수 없으며 정보공유도 할 수 없다”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막후 일본 정책통인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국 국무차관도 공개적으로 미국의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이러한 우려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반영하듯 미국은 지난 미일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새로운 동맹 강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동맹 심화 회의’ 개최를 거부했다. 지난해 10월20~21일 일본을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후텐마 기지 이전문제에 대해 “일본이 합의를 그대로 준수하지 않을 경우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 8000명의 괌 이전과 부지 이전을 중지할 것”이라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미일 합의안은 다시 협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못 박았고 “일본이 미군철수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철수한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긴밀하고 촘촘하게 짜여 있던 미일 양국 간 인적 파이프라인도 급속도로 위축됐다. 지미(知美)파 일본 논객들의 정부정책 자문은 두드러지게 줄었다. ‘관료배제’라는 원칙으로 인해 외무 관료는 정책입안 단계에서 현저하게 약화됐다. 대미정책을 누가 입안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한 불투명성을 하소연하는 관료들이 속출하고 있는 현실이다.

워싱턴의 사정도 마찬가지로 하토야마 정권과 선이 닿는 지일(知日)파가 없어 정보 부족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한다. 양국관계를 반영하듯 올해가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임에도 오바마 정권 내에서는 이를 축하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왜 미국과의 관계를 이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일까? 도대체 하토야마 총리가 불화를 일으키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그와 미국의 오랜 인연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미·일 인적 네트워크 급랭

사실 하토야마 총리가 걸어온 배경을 보면 그는 반미주의자가 결코 될 수 없다. 기본적으로 그는 보수주의자로 자민당 출신이다. 또한 미국에 유학을 했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순탄한 인생을 살아와 좌파 반미 이데올로기로 편향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미국은 하토야마 총리에게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선물을 줬다. 먼저 미국은 하토야마 총리에게 박사학위를 안겨줬다. 그는 도쿄대 공학부를 졸업한 후 1970년 미국 스탠퍼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예정대로 1972년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연이어 1976년 ‘오퍼레이션 리서치(operation research)’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통해 미국 명문대학에서 학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면허증을 확보한 것이다.

이에 더해 미국 주류사회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수많은 스탠퍼드대 출신 인사들과의 네트워크를 안겨줬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존 루스 변호사를 주일 미국대사로 임명했는데 그도 스탠퍼드대 출신이다. 스탠퍼드대 홈페이지에는 하토야마 총리의 취임을 축하하는 기사와 함께 루스 주일 미국대사의 사진을 동시에 게재하고 있다. 루스 대사는 지난 미국 대선 기간 중 자금조달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공헌해 오바마 대통령의 개인적 신임이 매우 두텁고 강력한 스탠퍼드대 네트워크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은 하토야마 총리가 평생 동반자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금슬이 좋은 것으로 소문난 하토야마 부부가 첫 둥지를 튼 곳은 이 대학이 있는 샌프란시스코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요리점에서 일하고 있던 미유키 여사를 만나기 위해 하토야마 총리는 편도 1시간 거리의 고속도로를 수없이 질주했다고 한다. 그러한 열정적 사귐 끝에 미국 생활 5년째 되던 1975년 대학 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은 하토야마 총리에게 또 다른 꿈을 주었다. 그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동생인 하토야마 구니오 중의원은 유치원 시절부터 “나의 장래 꿈은 총리대신”이라고 하며 정치가의 꿈을 키워왔다. ‘일본의 케네디가’로 일컬어지는 하토야마가에서 장손인 하토야마 총리를 제치고 동생 구니오가 먼저 정계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하토야마 총리가 처음엔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한 하토야마를 정치에 눈뜨게 한 것이 바로 미국인들의 애국심이었다. 하토야마는 1992년 6월13일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1976년은 미국 건국 200주년으로 미국민이 새로운 여정을 떠날 것을 맹세한 해였다. (당시 미국인들의 국가에 대한) 열광을 보면서 ‘일본인의 애국심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라고 자문했다. 내가 정치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라고 했다.

2/4
장제국|동서대학교 부총장·국제관계학과 교수 jchang@dongseo.ac.kr|
목록 닫기

하토야마 일본 총리와 미국의 악연

댓글 창 닫기

2021/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