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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얼굴 사진에서 출발한 동아시아 역사 읽기

  • 고승철│저널리스트 koyou33@empas.com│

작은 얼굴 사진에서 출발한 동아시아 역사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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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얼굴 사진에서 출발한 동아시아 역사 읽기

‘탕지아의 붉은 기둥’<br>고재석 지음/ 글누림/ 363쪽/ 1만8000원

역사란 무엇인가? 대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더니 대부분이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대답했다. 영국의 사학자 E. H. 카(1892~1982)가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밝힌 정의대로다. 학생들이 그 책을 읽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카는 역사학자를 두 부류로 나누었다. 사료로부터 캐낸 사실을 신뢰하는 학자, 사료에 대한 해석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학자. 전자는 객관(과거 사실)을, 후자는 주관(현재 해석)을 중시한다. 카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곤란하다면서 과거와 현재의 적절한 조화, 즉 ‘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카는 “사회과학의 인과율로 과거를 해석하면 미래를 통찰할 수 있다”고 호언한 바 있다. 세상의 변화 양상이 워낙 복잡다단해 역사를 공부한다 해서 미래를 꿰뚫어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역사를 모르고서는 제대로 된 미래를 설계하기 어려우리라.

그런 점에서 2010년은 역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갖고 미래를 내다봐야 할 해다. 경술국치 100주년, 6·25전쟁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 의미 있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서점의 인문 코너에 한국 근·현대사 관련 신간이 부쩍 많이 보인다. 이 가운데 ‘탕지아의 붉은 기둥’이 눈에 띄었다. 제목만으로는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부제가 관심을 끌었다. ‘중화민국 초대 국무총리의 조선인 부인.’ 표지에 실린 그 부인의 빛바랜 흑백 얼굴 사진에 시선이 멈추며 호기심이 샘솟는다.

책날개에 소개된 저자의 프로필을 보니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한국근대문학지성사’ 등 여러 저서 및 역서를 낸 분이다. 뒤표지에는 둥근 테 안경을 쓴 노인 사진이 실렸다. 청나라 관료로 조선에 와 16년간 체류한 적이 있는 탕사오이(唐紹儀·1862~1938)의 기품 있는 모습이다. 그는 격동의 구한말에 주한(駐韓)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한국인 여성을 정실 부인으로 삼은 인물이다. 그는 청년 시절에 중국의 거물 정치인 리훙장(李鴻章)과 조선의 외교 고문인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도왔다. 주요 역사 인물의 측근으로 활동한 만큼 그도 역사적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책을 대충 살펴보니 저자가 그린 다양한 스케치 소품이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한·중· 일 3국의 100여 년 전 역사를 조망하는 내용에다 아름다운 그림까지 포함됐으니 금상첨화인 셈이다. 저자는 국문학 전공자이지만 개인 전시회까지 열 만큼의 그림솜씨를 가졌다. 저자는 연구년 휴식 기간을 맞아 중국 광둥성의 중산대학교 주하이 캠퍼스에서 2008년 가을에 80여 일 교환교수로 활동했다. 한국어를 강의하는 틈틈이 중국인 학생의 안내를 받아 인근 시가지를 관광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탕지아(唐家)라는 마을에 들렀을 때 탕사오이의 생가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집 마당에 있는 탕사오이의 대리석 흉상이 눈에 띌 뿐 특이점은 별로 없었다. 거실 가운데 우뚝 솟은 붉은 기둥이 기억에 남는 정도였다. 그 기둥은 아기를 낳은 후 산후조리 때 게를 먹고 급사한 두 번째 부인을 추모하려 말레이시아에서 수입한 고급 나무로 세운 것이었다.



저자는 2주일 후 탕사오이가 개인 정원을 공원으로 기증한 공락원을 찾았다. 그곳 야외 별장에서 탕사오이의 두 번째 부인의 사진을 보면서 묘한 충동을 느낀다. 그녀는 조선에서 온 정씨(鄭氏)였다. 그들 부부는 어떤 인연으로 맺어졌을까? 탕사오이와 정씨는 어떤 인물인가? 이런 의문을 풀어보고픈 열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저자는 이때부터 여러 자료를 모으고, 읽고, 분석했다. 귀국한 이후에도 ‘탕사오이와 정씨 부인’이라는 화두에 매달린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美 컬럼비아대 유학한 탕사오이

탕사오이는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서양열강에 농락당하던 때인 1862년 1월2일, 주하이(珠海)시 탕지아 마을에서 태어났다. 농민의 넷째아들이었다. 전통 한학을 공부하던 소년 탕사오이에게 미국 유학의 기회가 왔다. 중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룽훙(1828~1912)은 서양문물을 도입하려면 우수한 젊은이들을 미국에 보내 국비로 공부시켜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했다. 룽훙은 1854년 예일대를 졸업하고 중국 근대화에 앞장선 인물이다. 마침내 12~14세 소년 120명을 15년간 유학 보내는 계획이 추진됐다. 그러나 장기 유학에 반대하는 사대부 부모들 때문에 학생 모집이 쉽지 않았다. 룽훙은 고향인 광둥성을 비롯해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상하이, 닝보, 푸젠 등에서 학생들을 찾아냈다. 미국에 체류하는 어린 학생이라는 뜻에서 이들은 ‘유미유동(留美幼童)’이라 불렸다.

탕사오이는 12세 때인 1874년 제3차 유미유동으로 뽑혀 동료 30명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유미유동들은 미국 명문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탕사오이는 아이비리그인 컬럼비아대에 입학했다. 유미유동들은 1881년 갑자기 귀국 짐보따리를 싸야 했다. 미국에 너무 오래 체류하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다며 정부에서 귀국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7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온 탕사오이는 실권자 서태후(西太后·1835~1908)에게 문안인사를 올리러 갔다가 낭패를 당한다. 무릎을 꿇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그를 보고 서태후가 깔깔 웃으며 “꾸이쯔(鬼子·‘양놈’이라는 뜻의 비속어)가 다 되었네”라고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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