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원전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도 한전은 해외 원전 수주에서 잇달아 고배를 마시고 있다. 재무상태가 나빠서다. 사진은 고리원자력발전소 .
“주의 단계를 발령합니다.”
전력거래소는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분주했다. 이틀 연속 주의 경보를 발령한 것은 사상 처음. 전력거래소는 현대제철, 대한제강을 비롯해 전력 사용량이 많은 다수 기업에 공장 가동 중단을 요구했다.
비슷한 시각, 우수연(38·서울 노원구 중계동) 씨는 집 안의 아파트 방송용 스피커를 종이로 막아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전기 사용을 줄여달라는 방송이 나와서다. 8월 6일부터 전기요금이 평균 4.9% 인상된 것도 마뜩잖다.
“가뜩이나 더운데 전력 수급은 불안하다 하지, 전기요금은 올린다고 하지, 한전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서 전력 수급을 걱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한국전력공사는 무엇을 하고 있나.
시곗바늘을 지난해 9월 15일로 되돌려보자. 이날 사상 초유의 전국 순환 정전 사태가 일어났다. 이튿날 한전 관계자들은 당황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엉뚱하게’ 한전을 찾아와서다. 김우겸 당시 한전 사장 직무대행은 몸을 움츠렸다. 이 대통령은 한전 인사들을 35분 동안 꾸짖었다.
이 대통령 : (한전이) 자기 마음대로 (전력 공급을) 자르고 해도 되는 건가.
김 사장대행 : 전력거래소에서 그런 거 한다.
이 대통령 : 한전이 하는 건 뭔가.
김 사장대행 : 한전이 하는 건 전력 수요가 많아져 조절하는 부분에 대해…. 전력거래소 요청을 받아 사전에 조정했다.
이 대통령 : 거래소에서 단전하라고 하면 단전하느냐. 단전 전에 매뉴얼상 뭐가 없나.
김 사장대행 : 사전 홍보하게 돼 있다. 이번에는 워낙 계통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어서 사전 조치를 못했다.
이 대통령 : 그런 경우 단전을 자기 맘대로 해도 되나.
김 사장대행 : 급전 운영상 단전이 늦어지면 전국 계통이 무너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 그 상황은 전적으로 전력거래소 지휘를 받게 돼 있다.
김 사장대행이 언급한 ‘전국 계통이 무너지는 상황’은 블랙아웃(Blackout·전국 동시 정전)을 의미한다. 블랙아웃이 일어나면 전력 인프라가 통째로 마비된다. 복구에 최소 2, 3일이 걸린다. 복구 기간엔 전기 없이 살아야 한다. 지난해 9월 15일 한국은 블랙아웃 직전까지 갔다.
이 대통령은 이날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한전이 아닌 지식경제부 산하 전력거래소를 질타해야 했다. 참모진이 전력산업과 관련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전은 9·15 정전사태와 관련해 사실상 책임이 없다. ‘뇌’를 전력거래소에 내줘 수요 예측과 관련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전기라고 하면 으레 한전을 떠올리지만, 전력 수급과 관련해선 전권을 전력거래소가 행사한다.
‘뇌’를 떼어준 한전

7월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의류 매장이 단속을 비웃듯 에어컨을 켜놓고도 출입문은 활짝 열어둔 채 영업하고 있다.
전력거래소의 전력 수요 예측에 따라 발전 자회사가 전기를 생산해 한전에 판다. 전력거래소는 예비전력 감소 정도에 따라 발전소 가동을 늘리거나 절전을 유도하는 컨트롤 타워 구실을 한다. “자기 마음대로 자르고 해도 되는 건가” “거래소에서 단전하라고 하면 단전하느냐”라는 이 대통령의 질타는 서울역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한 격이다. 뇌가 명령하면 핏줄이 따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