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민통 리더 시절 임수경 방북 동의해준 일 후회해
- 조혁, 안희정의 반미청년회가 KAL기 폭발 테러 음모론 퍼뜨려
- 反美親中으로 흐르는 친북좌파 경계해야
-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은 주사파 지하조직인 자주민주통일그룹(자민통) 리더 출신이다.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SK텔레콤 남북경협 담당 상무를 역임했다. 현재는 통일부 자문위원, 중앙대 북한개발협력학과 겸임교수로 일한다. 그가 주사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밝히는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1994년 10월 3일 한양대 학생들이 교수들이 쓴 주사파 학생 비판 대자보를 보고 있다
이런 바람과 달리 대학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 이후에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비공개 수배를 받으면서 도망자 생활이 시작됐다. 1990년엔 주사파 지하조직 자민통 수괴로 지목돼 지명수배를 받았다. 1년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김영삼 정부가 가석방 형식으로 풀어줬다. 출소한 후 아버지는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사회변혁 운동에 대한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속병을 앓으시던 아버지는 2000년 보훈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말씀이 많은 분이 아니셨다. 6·25전쟁 유공자인 아버지가 아들이 ‘주사파’‘빨갱이’라는 이유로 도망을 다니고 교도소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으셨을지 생각하면 너무 죄송스러울 뿐이다.
누가 진정한 애국자인가
민족민주혁명당을 결성, 활동한 죄로 복역 중 교도소의 배려로 2003년 6월 24일 특별휴가를 받은 이석기 현 통합진보당 의원(오른쪽)과 먼저 출소해 석방투쟁을 벌이던 동료 하영옥씨가 대전교도소 앞에서 서로를 껴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난 지 30년 뒤 대학을 다닌 우리 세대의 일부는 신식민지, 분단, 독재라는 질곡을 혁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을 수용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 자주적 민주통일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질풍노도의 세월을 살았다. 이름 없는 민초로서 나라를 지킨다는 원초적 감성으로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하거나 부상한 이들이 진정한 애국자일까? 아니면 마르크스레닌주의·주체사상을 공부하고 변혁운동을 하던 우리가 진정한 애국자일까?
1980년대 대학가는 우울했다. 신군부가 광주시민을 학살한 사진이 전시됐다. 선배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끔찍했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서클 수준, 명망가 위주로 이뤄지던 1970년대식 민주화운동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광주의 비극을 경험한 학생운동은 사상, 조직, 대중운동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발전했다.
1980년대 서울 및 지방의 주요 대학에선 전체 학생의 과반수 이상이 ‘해방 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등 좌파 역사관에 기초한 책을 탐독했다. 필자의 추산으로는 주요 대학 학생의 10% 안팎이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주체사상을 공부했으며 일부 학생은 그것을 신념화했다. 1980년대 이전에는 극소수의 변혁운동가들만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을 수용했다. 운동가 대부분은 절차적 민주주의, 인권적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반면 1980년대 이후에는 수만 명의 대학생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그에 기초해 ‘사회주의적 변혁운동’을 추구했다. 19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은 노동계로도 퍼져나갔다. 소련식 사회주의에 경도된 이들을 PD(민중민주), 주체사상을 신념으로 삼은 이들을 NL(민족해방)이라고 했다.
요컨대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조직이 직·간접적으로 주도한 대중적 조직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구국의 소리’ 통해 지침 받아
1980년대 이전의 민주화운동이 소수의 재야인사 중심으로 이뤄진 간헐적 투쟁이었다면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활동가와 대중이 함께 움직인 상시적 투쟁이다. 지금은 486으로 불리는 386 세대는 학생운동을 했든, 그렇지 않든 1980년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소극적으로 참여한 이들 중엔 부채 의식 탓인지 나이가 들어 좌파 의견에 경도된 사람이 많다. 고(故) 김근태 의원에 대한 부채감을 피력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도 비슷한 사례인 것 같다.
민주통합당은 옛 주사파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사고 한쪽에 잔재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의 사상은 절대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북한이 남한 지하조직에 ‘KAL(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미국 중앙정보부(CIA)와 안기부의 음모’라고 가르쳤다. 주사파는 북한의 주장이 고스란히 담긴 문건을 만들어 대학에 배포했다. 주사파의 메커니즘을 구동했던 사람으로서 천안함 폭침사건 이후의 갑론을박을 보면 당시가 떠오른다.
한국 주사파의 뿌리는 통일혁명당이다. 김종태 등이 북한 노동당과 연계해 결성한 통혁당은 1968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적발됐다. 주모자들은 1968년 사형됐다. 통혁당의 흐름은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으로 이어진다. 한민전은 북한 노동당 지침에 따라 활동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1980년대 대학가엔 주목할 만한 두 개의 팸플릿(운동의 사상 노선 정책 등을 밝히는 문건)이 뿌려졌다. 하나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관계자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예속과 함성’이다. 이 팸플릿은 1985년 가을학기부터 학생운동권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속과 함성에는 대단히 선동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국 현대사를 반미투쟁의 역사로 기술했는데, 이는 북한의 역사 서술과 똑같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이 작성한 ‘강철서신’이다. 강철서신은 주체사상의 품성론을 강조했는데, 이 팸플릿은 종북세력, 친북세력을 양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북한 노동당과 한민전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지도받는 자생적 주사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 역시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 방송을 들으면서 투쟁 지침을 만들었다. 또한 평양방송, 중앙방송의 ‘김일성종합대 방송통신 강좌’를 녹취하면서 주체사상을 공부했다.
주사파가 ‘지도한’ 전대협
주사파 3대 그룹은 김영환이 이끈 구국학생연맹(구학련), 조혁 씨와 안희정 충남지사가 이끈 반미청년회, 필자가 리더이던 자민통이다. 구학련→반제청년동맹→민혁당 흐름 중 하나가 이석기 의원으로 상징되는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로 이어졌다.
1980년대 주사파 조직은 하나같이 ‘방송팀’을 운영했다. 방송팀은 ‘구국의 소리’‘평양방송’등을 녹취해 투쟁 지침과 교육 자료를 만들었다. 보통은 3명이 한 팀으로 활동했다. 필자의 후배 한 명은 3명이 할 일을 혼자서 해냈다. 주체사상에 대한 그 후배의 믿음은 거의 종교적 수준이었다. 그러한 믿음을 헌신성, 충실성으로 발현해낸 것이다. 후배는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한 후 고민의 과정을 거쳐 대순진리회라는 민족 종교에 입문해 간부가 됐다. 또 다른 후배는 종교적 성향을 가진 단월드(옛 단학선원)에 들어가 핵심 간부가 됐다. 비슷한 사례가 주사파 출신 중 적지 않게 발견된다.
자민통은 1989년부터 1992년 상반기까지 전대협 등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1990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이던 윤진호,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자민통에 의해 전대협 의장이 된 송갑석 등은 자민통의 영향 하에 활동하던 주요 인물이다.
자민통 이전에 학생운동의 헤게모니를 쥔 것은 주사파 지하조직 반미청년회다. 책임자는 조혁 씨다. 언론은 조 씨를 반미청년회 총책이라고 보도하곤 하는데, 주사파 조직은 총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중심은 북한 노동당이기 때문이다. 조 씨는 1998년 북한민주화운동네트워크에 참여했다. 반미청년회의 2인자 격이던 인물이 안희정 충남도지사다. 1987년 결성된 전대협은 사실상 반미청년회가 조직한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자생적 주사파 조직은 1986년 안기부에 의해 적발된 김영환의 구학련이다. 1980년대 후반 대학별로 주사파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강철서신이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구학련은 각 대학의 주사파 조직을 사상적으로 지도했다. 구학련은 반제청년동맹으로 이어진다.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의 리더 격인 이석기가 반제청년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구학련→반제청년동맹→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올해 4·11 총선 전후에 불거진 종북 논란과 일부 관련이 있다.
반미청년회는 고려대 운동권 중심으로 꾸려진 주사파 조직이다. 1987년, 1988년 ‘전투적학생회론’을 앞세워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주사파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에도 반미청년회가 지나치게 전투적으로 나가면서 현장의 주사파 활동가들이 술렁였으며 1989년부터 반미청년회의 영향력은 축소된다.
구학련, 반미청년회, 자민통 외에 새벽그룹이라고 불리는 주사파도 있었다. 자민통이 1989~1992년 학생운동권의 헤게모니를 쥔 것은 새벽그룹과 연계하면서다. YTN 사장을 지내고 현재는 내일신문 발행인인 장명국 씨가 새벽그룹의 브레인이었다. 새벽그룹은 NL이면서도 노동운동을 강조했다. 자민통과 새벽그룹은 교조적 주사파 반대, 노학연대 강화 등을 내세웠다. 새벽그룹은 ‘장명국 주사’라고 불렸다.
북한이 2009년 7월 15일 발행한 우표. 사진 왼쪽에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둘째는 김영삼 정부의 등장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군사정권의 비정통성 탓이 컸다.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김영삼 정부는 하나회를 척결하는 등 군사독재 잔재를 제거했다. 민주화 수단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을 주장할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1980년대의 주사파가 자생적 조직이었다면 1990년대 주사파는 북한 노동당과 직접 연결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1992년 적발된 중부지역당이 대표적이다. 김영환 하영옥 이석기가 참여한 민혁당도 북한의 지도를 직접 받았다. 1994년 구국전위 사건, 2007년 일심회 사건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북한 노동당과 연계해 강경한 노선을 고집하다보니 주사파 그룹을 따르는 이들은 극히 소수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 과정, 북한 사회주의 체제 수립 과정, 중소분쟁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발전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교조주의,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창시했다고 한다. 주체사상의 사상적 배경은 한반도가 세계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조건과 연관된다. 주체사상은 외세로부터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당해온 민족사의 아픔을 간질이면서 강력한 선동성을 갖게 됐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공(功)이 70%, 과(過)가 30%라고 할 수 있다. 공이 70%라는 것은 한국이 민주화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을 수용한 것도 본질적으로는 군사독재를 종식하기 위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수단으로 선택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주체사상을 수용하면서 한국 현대사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과오다.
주사파의 첫째 잘못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북한의 노동당과 직·간접 연계를 가졌다는 점이다. 1980년대의 거의 모든 주사파 지하조직은 한민전의 지침을 따르는 등 북한 노동당과 간접적 연계를 갖고 활동했다. 이 같은 행태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도를 넘어선 것이다. 북한은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전체주의 집단 아닌가. 따라서 김영삼 정부가 등장한 이후의 주사파는 최소한의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활동했다고 봐야 한다.
북한이 저지른 1987년 ‘KAL기 폭파 테러’를 한국과 미국의 조작으로 몰아간 것도 커다란 잘못이다. 민주화운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핵심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KAL기 폭파 테러는 북한 체제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구국의 소리’방송이 전하는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주사파는 이 사건이 조작됐다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했다. 반인륜적 테러와 관련해 거짓 여론을 확산한 것은 범죄 행위에 가깝다. 이러한 활동을 주도한 집단이 반미청년회다. 당시 관련자들의 반성과 사과가 요구된다.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의 남편인 심재환 변호사 등은 아직도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며 음모론을 주장하고 있다.
주사파 운동가의 방향 전환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보낸 것도 큰 잘못이다. 평양축전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항하는 이벤트로 거행됐다. 막대한 외화를 지출한 이 행사는 1990년대 중반 북한 주민 대량 아사(餓死)의 원인 중 하나다. 북한 경제는 이 행사 직후부터 곤두박질쳤다. 북한은 평양축전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선전하고자 했다. 임수경 등의 평양축전 참가가 통일운동의 일환이었다는 평가는 북한 체제를 잘 모르는 이들의 순진한 생각이다. 평양축전 참가 투쟁은 1989년 전후로 활동한 주사파의 또 다른 분파인 조국통일그룹이 추진했는데, 자민통 리더로서 평양 파견에 동의해준 필자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994년 여름, 주사파 조직 리더이던 김영환, 조혁, 필자 등은 방향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1년 후 푸른사람들(1기 회장 구해우, 2기 회장 김영환)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꾸렸다. 1994년 7월 8일 우리는 함께 관악산을 등반하다 주체사상의 창시자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라디오 뉴스를 통해 들었다. 푸른사람들의 창립 취지는 1980년대식 비합법 지하조직 운동을 청산한 후 조직을 합법 영역으로 끌어내 새로운 사상운동, 새로운 대중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푸른사람들의 활동은 1996년 하반기 김영환과 필자의 견해 차이로 인해 두 가지 흐름으로 갈렸다. 김영환 등은 북한 붕괴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1997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이후에는 김영환, 황장엽이 공동의 흐름을 형성해나가기 시작한다. 김영환은 1999년 북한민주화네트워크(1기 회장 조혁)를 결성해 북한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김영환은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꾸린 ‘시대정신’을 통해 사상운동을 해나가는 한편 자유주의연대를 통해 뉴라이트운동을 주도했다. 반면 필자는 2004년까지는 햇볕정책이 남북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미련을 가졌다. 2000년부터 미래전략연구원, 미래재단을 설립해 활동한 필자는 2004년 말부터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과 함께 한국 선진화 운동 및 북한 선진화 운동을 시작했다.
이렇듯 주사파 핵심 리더들은 하나같이 노선을 전환했는데도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확인되듯 1980년대와 비교해 수적으로는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종북주사파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종북주사파가 합법적 정당에 뿌리를 내린 것은 심각한 일이다. 종북주사파 활동의 본질은 이석기, 김재연 의원 같은 일개 인물 차원에서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종북주사파의 활동은 북한 노동당의 지하조직 지원 활동 및 통일전선전술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필자는 2001년 SK텔레콤 북한사업 담당 상무로 일할 때 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노동당 고위간부가 김정일과의 면담을 제안했다. SK텔레콤의 대북사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북한이 추진하는 지하당 사업에 필자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라는 것을 오랜 활동 경험을 통해 인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필자의 주사파 조직 활동과 관련한 정보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국방위원장님이 보고 싶어 한다”는 제안에 대해 “논의할 사안이 없다”며 거절했다. 필자는 현재도 북한 노동당이 통일전선전술에 따라 남한 내 조직을 지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2007년 일심회 사건을 거론하지 않더라고 현재의 통합진보당에 북한의 손길이 미치고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따라서 종북주사파 문제를 몇몇 인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상당하다.
김영환을 필두로 한 뉴라이트 및 북한 민주화운동 그룹은 1980년대 주사파의 핵심적 활동가로 이뤄져 있다. 북한을 탈출한 황장엽 등은 “북한의 주체사상은 허구다. 진짜 주체사상을 새롭게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장엽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을 ‘황장엽 주사’라고 칭하기도 한다. 북한 민주화운동 그룹은 황장엽 등의 주장에 동조했으며 황장엽 등과 교류하고 협력했다.
사상을 전환한다는 것
필자 역시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실천하면서 형성된 사고를 극복하는 데 실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를 보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1994년 봄 중국을 방문해 중국식 사회주의의 실상을 보고 나서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릴 수 있었다. 북한 체제가 불안정하지만 지속되고 있었기에 주체사상에 대한 미련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다. 주체사상의 잔영 탓인지 햇볕정책에 대한 기대도 컸다. 주체사상의 잔영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린 시점으로부터 10년 뒤인 2004년의 일이다. SK그룹에서 기업 활동을 경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이후 북한 선진화 문제에 천착해온 필자는 최근 애국주의와 공화주의에 기초한 북한 선진화 및 통일 전략에 대한 견해를 정리해 ‘김정은 체제와 북한의 개혁개방’(나남출판사 펴냄)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이 같은 사상적 전환 과정은 치열한 연구와 고민, 실천의 과정을 거친 것이기에 좌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변절이나 배신이 아니다.
사상 문제를 지적하면 색깔론이라는 반격이 나온다. 중도적인 언론에서조차 색깔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곤 한다. 사상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사상을 따지는 것은 색깔론이 아니다. 현재 사상적으로 한국 사회는 종북주사파가 아니라 친북좌파가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종북주사파는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로 한국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됐다. 그러나 종북주사파는 1980년대 전성기를 거친 후 1990년대부터 쇠락했다. 통합진보당을 통해 제도권에 진출하기는 했으나 그 세력은 현저히 약화돼 있다.
주사파는 1980년대 어림잡아 10만 명을 남한 사회에 배출했다. 안기부는 자민통의 조직원이 2만 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전국의 각 대학 주사파 조직을 간접적으로 지도하는 형태였다는 점에서 자민통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이들이 그 정도 됐을 것이다. 자민통은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1990년 전남대에서 진행한 전대협 발족식에 10만 명 가까이를 참여시킬 수 있었다. 당시 주사파가 역점을 기울인 사업은 사회과학 학습 동아리를 통해 반미친북적 사고를 퍼뜨린 것이다. 대학생들은 주사파 활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반미친북적 인식을 받아들이게 됐다.
반미친북적 사고를 가진 10만 명이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한국 사회의 현재 이념적 지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들 중 일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기득권 세력에 편입되기도 했다. 주사파로부터 잉태된 반미친북적 사고가 표출된 대표적 사례가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과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은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라 우발적 사고였는데도 10만 명 넘는 시위대가 거리로 뛰쳐나왔다. ‘광우병 촛불시위’도 마찬가지다. 시위가 수십 만 명이 참여한 반정부 투쟁으로 확대된 것에는 반미친북적 사고를 가진 이들의 선동이 영향을 미쳤다. 그들 중 대부분은 더 이상 종북주사파가 아니다. 하지만 친북좌파 성향의 정치인, 시민운동가, 언론인, 법조인 등이 한국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다.
주사파 출신의 ‘반미친중’ 성향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천안함 폭침 사건, 북한인권법, 제주해군기지 건설 문제에 대한 태도는 친북좌파를 골라낼 수 있는 리트머스시험지다. 친북좌파는 한미FTA엔 격렬하게 반발했으나 한국·EU 간 FTA에는 그러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천안함 폭침 사건과 관련해서도 친북좌파는 북한이 자행했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몰고 갔다. 이는 KAL기 폭파 사건 당시 주사파 운동권의 투쟁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친북좌파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협상 상대가 될 수밖에 없는 북한 당국이 북한인권법을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제주해군기지와 관련해선 중국을 끌어들여 반대 논리를 세운다. 친북좌파 중 일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주요 자리에 진출해 있다. 따라서 친북좌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국민에게 알리는 것은 한국의 미래와 관련해 대단히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강력한 사상투쟁도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친북좌파는 최근 친(親)중파적 성향을 띠고 있다. 중국 당국이 김영환을 고문한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미국 기관이 한국인을 고문했다면 친북좌파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친북좌파는 앞서 언급한 한미 FTA, 천안함 폭침 사건, 제주해군기지, 북한인권법 등의 이슈에서 중국 측과 유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동시에 한중협력도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한중협력의 확대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초해 추진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들어갈 수 있다.
지금은 역사적인 대전환의 시기다. 중국의 부상 및 굴기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친중파로 흐르는 옛 주사파, 그러니까 친북좌파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대응하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역사적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