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권의 정치적 중립성-인권위 독립성 흔들
- 끝내 무산된 하버드법대 특강
- 퇴임 후 프랑스 파리로 걸려온 의문의 전화
-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훈장을 사양 한 까닭
국가인권위원회의 역대 수장 중에 초대 위원장 김창국 변호사만 3년 임기를 채웠다. 그만큼 인권위원장은 힘든 자리다. 이렇다 할 권력도 없이 전후좌우 사방에 적이 포진해 있다. 인권위엔 확실한 우군이 없다. 오로지 국민(과 인간)이라는, 정체불명의 후원군에 의지해야 한다. 그 힘든 인권위의 수장 자리를 3년 버텨냈고 게다가 유례없이 연임까지 하는 사람이 있다. 나의 후임자, 현병철 위원장의 남다른 끈기와 저력이 부럽다. 취임 첫날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인권옹호자들의 끊임없는 항의와 비판, 사퇴 요청을 버텨낸 그의 확신이 놀랍다. 그의 확신은 임명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의 소신이기도 하다.
재임 기간 현 위원장이 남긴 공적이 왜 없겠는가?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 모르지만 무수할 것이다. 또한 수장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인권위가 일상 업무를 통해 많은 국민을 달래고 품었을 것이다. 본시 공직을 떠난 사람은 몸담았던 기관의 업무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다. 그게 전관으로서의 예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통념과 상례에도 불구하고 전임자인 내가 그의 연임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힘들여 쌓아올린 인권위의 위용에 결정적인 상처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독립기관 인권위의 자부심이다.
인권에는 정치의 색채를 띠지 않을 수 없는 주제와 영역이 있다. 때때로 ‘정치의 인권화’ 현상도 불가피하다. 나라 안의 문제에 인류와 인간성의 이름으로 타국과 국제사회가 간섭한다. 개입자가 표방하는 인권이라는 숭고한 이념의 이면에 감춰진 검은 동기가 있다. 군사, 경제 강대국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이렇듯 인권을 이용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인권이 먼저 정치의 선봉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인권위는 정치적 중립과 독립적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인권의 정치화를 막아야 한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인권위를 ‘좌파정부’의 유산으로 보는 정치철학의 소유자로 비친다. 그는 인권위를 무력화하는 것이 곧바로 사회적인 선이라고 믿는 듯하다. 현 위원장은 이러한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충실하게 대변해왔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중립과 인권위의 독립성을 결정적으로 훼손했다. 더 큰 잘못이 있다. 그는 자신이 수장인 기관 구성원의 화합을 앞장서서 해쳤다. 인권위는 여느 정부기관과 다르다.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합의제 기관이다. 개개인의 성향과 믿음이 존중되고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상임위를 무력화하고, 많은 위원과 조력자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다양한 배경과 철학의 구성원을 포용하는 대신 비판적 성향의 직원을 박해했다. 눈에 거슬리는 직원을 쫓아내고 남은 비판자를 징계로 다스렸다. 그들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직원들 사이에 불신과 반목의 골을 깊이 파놓았다. 이 모든 처사가 청와대와의 교감 아래 이루어졌다는 의심이 든다.
가슴으로 쓴 이임사
나는 아직도 현 위원장이 내 후임자가 된 상세한 경위를 알지 못한다. 분명히 정무직 인사에 필요한 내부 검증 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다만 바깥 사회에서 기대하는 인권위 수장으로서의 자격에 대해서는 전혀 검증이 없었다. 후일 사석에서 만난 청와대의 한 인사는 내게 “후임자가 좀 그래서…”라며 민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감해하는 그에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쨌든 낯설고 힘든 그 자리를 맡게 된 현 위원장의 처지를 내심 동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이 대통령은 그가 인권위와 인권에 낯선 인물이기에 더욱 적격자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국제사회는 물론 국내 인권사회에 이름조차 생소한 현 위원장을 임명한 이상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로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통령은 국제인권은 안중에 없었다. 그의 연임을 두고 열린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인력과 예산이 준비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하는 것을 들었다.
2009년 6월 30일, 예고한 대로 제출한 인권위원장 사표가 7월 8일자로 수리됐다. 당일 이임식을 치렀다. 언론이 주목했다. 많은 직원이 친필로 쓴 기념 앨범을 만들어주었다. 근래에 들추어보니 새삼 애잔한 마음이 든다. 특히 직장을 잃고 나서 생계수단조차 마땅치 않을 것 같은 직원들의 근황이 걱정이다. 대부분 지난 3년 동안 한 번씩은 만났다. 쓴 술잔과 메마른 한숨밖에는 건네줄 것이 없어 가슴이 아렸다.
나의 이임사는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곰곰이 생각하고 나름대로 정성을 쏟아 쓴 글이다. 사적인 소회를 굳이 감추지 않되 대통령, 정부, 언론, 시민사회, 인권단체, 헌법재판소, 인권위, 각각에 대한 비판과 건설적인 제안의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내심 작은 역사적 문서가 되기를 바랐다. 지금도 인터넷에 전문이 돌고 있다.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내 글을 나누어주고 행간에 담긴 한국 사회의 현실을 토론한 교사가 교장에게 잔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학부모가 문제를 삼았다는 후문이다.
“법이 보장한 임기 만료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앞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사유는…새 정부의 출범 이래 발생한 일련의 불행한 사태에 대한 강한 책임을 통감함과 동시에, 정부의 지원 아래 새로 취임할 후임자로 하여금 그동안 심각하게 손상된 국제사회에서의 한국 인권의 위상을 회복하고 인권 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할 전기를 마련해드리고 싶은 강렬한 소망과 충정 때문입니다…저는 인권이란 이념적 좌도 우도 아니고, 정치적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일용할 양식인 인류 보편의 가치라는 믿음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으며, 위원회와 ‘긴장 어린 동반자’의 관계인 시민사회와도 일정한 거리를 둘 것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모든 언론에 대해서 동일한 기준과 성의로 자료제공과 홍보활동을 할 것을 독려하고, 제 스스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인권의 고귀한 가치는 정권의 교체나 연장에 따라 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정권의 교체는 국민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결코 국민은 인권의 탄압이나 후퇴를 선택할 리 없습니다. … ‘선진 사회’를 기치로 내걸고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1년 반이 지난 이날까지 그 장점이 만개하지 않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인권위의 수장으로서 느낀 소감은 적어도 인권에 관한 한, 이 정부는 의제와 의지가 부족하고, 소통의 자세나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아무리 내 나라, 내 정부에 대해서 불만이 깊더라도 국제사회에서는 내 나라, 내 정부의 입장을 최대한 옹호하는 것이 공직자의 도리임을 믿는 저이지만 그간 빚어진 실로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국제 사회에서 변론할 자신과 면목이 없습니다.…권한쟁의심판의 청구를 헌법재판소에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입장이 다를수록 요구되는 정부기관 간의 대화와 소통의 부재가 빚어낸 비극이기도 합니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이끌어왔다는 칭송을 받고 있는 헌법재판소는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이 사안을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헌재는 1년 6개월 동안 판단을 미루었다. 마침내 2010년 10월 26일 본안심사를 하지 않고 각하결정을 내렸다. 인권위가 헌법에 명시된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당사자적격이 없다는 이유였다. 나는 헌재의 결정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헌재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축소해버렸다. 인권위의 주장이 법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본안결정으로 기각해도 무방했을 터다. 인권위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국민의 존중과 사랑
무엇보다도 나는 언론에 불만이 많았다. 내가 인권위에 취임할 당시 한 신문은 나를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일간지에 칼럼을 쓰는 글쟁이’라고 썼다. 그러나 인권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게 관심을 가진 언론사는 지극히 ‘편향적인’ 소수에 한정되어 있다.
“언론에도 고언을 드립니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전래의 별칭이 상징하듯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권능은 실로 막강합니다. 그러기에 언론이 짊어져야 할 책임 또한 무겁습니다. 다수의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대 언론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인권위의 생명이 업무의 독립성에 있듯이, 언론의 생명은 정확한 사실의 보도에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정 언론사의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서도 보도는 정확한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언론의 기본양식이자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 이른바 ‘북한인권’이나 ‘촛불집회’ 사건의 예에서 보듯이 인권위의 법적 권능에 대한 무지, 오해, 사실왜곡과 같은 부끄러운 언론 행태는 불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임사를 쓰면서 나는 언젠가는 인권위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작정했다. 이 나라 인권사의 사초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정치적 배경과 철학이 다른 두 분의 대통령의 재직 중에 국제적 관심이 집중된 독립기관의 장의 직을 수행한 행운은 여느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지 못한 특권과 축복이었습니다. 다만, 단 한 차례도 이명박 대통령께 업무보고를 드리지 못하고 자리를 떠난 무능한 인권위원장으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은 제 개인의 불운과 치욕으로 삭이겠습니다.…저의 후임자는 정부와 국민의 존중과 사랑을 받아, 지난 8년간 위원회가 범한 약간의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한편, 그동안 이룩한 찬란한 업적을 발전적으로 승계하기 바랍니다.”
나의 후임자는 대통령의 사랑을 받는 것 같다. 사랑뿐만 아니라 존중도 받는가? 그렇다면 국민의 존중과 사랑은? 내가 간절히 염원했던 인권위의 ‘발전적 승계’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턱 막힌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온갖 수모를 당하는 식물 위원장으로라도 넉 달을 더 버티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이지 그 때는 몰랐다. 마지막까지 나는 이 대통령의 상식과 선의를 믿고 기대했다.
마지막 구절은 맨 먼저 써두었다. 쓰면서도 이 대목이 가장 가슴에 쓰렸다. 지금도 그렇다.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사랑으로 저를 지켜주었던 동료들께 감사드리고, 위원회의 독립성을 유린하면서 강행한 정부의 폭거로 인해 창졸간에 직장을 잃게 된 동료 직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인권의 길에는 종착역이 없다는 사실을. 또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정권은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우리 가슴 깊은 곳에 높은 이상의 불씨를 간직하면서 의연하게 걸어갑시다. 외롭지만 떳떳한 인권의 길을.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이 분노와 아픔은 보다 밝은 내일을 위한 작은 시련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다집시다. 제각기 가슴에 품은 작은 칼을 벼리고 벼리면서, 창천을 향해 맘껏 검무를 펼칠 대명천지 그날을 기다립시다.”
美 출장 놓고 靑과 승강이
대다수 언론은 나의 퇴임 사실만 짧게 보도했고, 소수의 언론은 이임사의 몇 구절을 확대해 보도했다. ‘날선 비판’ ‘정권은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 그 누구도 내가 스스로 물러나는 진정한 뜻을 바로 알아주지 않았다. ‘정권은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는 구절이 나의 ‘어록’으로 남아 있다. 실인즉 내가 그때 처음 쓴 말은 아니었다.
2009년 2월 나는 미국 하버드법대 인권센터에서 보낸 강연 초청장을 들고 있었다. 이에 앞서 스탠퍼드대에서 열리는 미국 서부지역 공익인권법학회 연례총회 개막식에서 기조연설을 하기로 돼 있었다. 대한민국의 현직 인권위원장으로서 의미 있는 일로 생각돼 수락했다. 하버드대 강연 제목은 초청자 측의 의도를 존중해 ‘경제 제일 시대의 한국 인권’으로 정했다. 출국 예정일을 넉넉히 앞두고 청와대에 출장 신고서를 제출했다. 다른 정무직과 달리 인권위원장은 대통령의 ‘재가’ 없이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 내가 취임하기 전 이미 확립된 관행이지만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 말기의 일이다. 김창국 당시 위원장이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청와대의 허가를 받지 않았던 게 문제가 됐다. 시말서를 쓰라는 청와대에 대고 인권위가 직격탄을 날렸다. ‘인권위는 독립기관이다. 위원장의 해외여행은 대통령의 허가 사항이 아니다. 인권위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할 뿐이다.’ 청와대 참모들이 ‘오만불손’ ‘안하무인’인 인권위를 비난하고 나섰고 몇몇 국회의원도 동조했다. 임기 말 대통령의 권력에 누수현상이 생길 것을 우려했던 까닭이다. 이 문제는 ‘인권 대통령’의 양해로 결말이 났다. 허가 대신 신고사항으로 정리된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나는 청와대와의 전쟁을 선포한 김 위원장을 지원하는 신문 칼럼을 썼다.
인권위원장의 소략한 출장 서류를 접한 청와대가 새삼 시비를 걸어왔다. 상세한 일정과 내용을 첨부하라는 것이다. 담당 행정관이 실로 이례적인 질문을 건네 왔다. 왜 위원장과 여직원, 단둘이서만 해외여행에 나서느냐고. 그러고는 미혼인 해당 직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상례에 어긋나는 질문을 했다. 인권위는 업무상 남녀의 구분이 없다. 그 직원은 당초부터 위원장의 국제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채용한 사람이다. 사무총장이 행정관의 성차별적인 발언을 공식적으로 인용해도 좋으냐고 따지자 물러섰다. 청와대가 간섭한다는 소식을 접한 위원회의 내부 분위기가 흉흉했다. 조직축소를 둘러싼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 모두 긴장했다. 상임위원들이 조심스럽게 출장 재고를 권고했다. 무엇보다 위원장 부재 중에 급박한 사정이 생기면 어찌 하느냐는 것이다. 고심 끝에 하버드대 강연은 취소하기로 했다. 대신 스탠퍼드대 일정은 예정대로 소화했다. 하버드대에는 사실대로 전할 수 없어 ‘가족의 신병’을 이유로 들었다. 미국인이 쉽게 양해하는 사유다. 너무 급박한 결정이라 취소된 줄 모르고 당일 강연장에 나왔던 사람도 수십 명이나 됐다는 후문이다. 하버드대에 진 빚은 꼭 1년 후에 갚았다. 연 이틀에 걸쳐 세 차례나 강연을 했다. 학생, 인권전문가, 일반 지식인 등 청중이 다양했다. 학구적인 내용이 많고 기대만큼 정부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높지 않았는지 다소 실망한 표정을 짓는 청중도 더러 있었다.
위원장의 해외 나들이에 수행원이 단출한 것은 무엇보다 여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통역원은 필요 없다. 짐도 단출한 편이다. 업무를 챙길 최소한의 인력으로 족하다. 인권위원장은 장관급이기에 항공기의 일등석이 기준이다. 그러나 나는 재직 중 한 번도 일등석을 이용한 적이 없다. 비즈니스석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기관의 체면이나 의전을 따지더라도 검약은 인권위원장의 위용에 결코 흠이 되지 않는다. 첫 나들이부터 내가 고집한 약간 ‘튀는’ 결정을 직원들은 환영했으리라 믿는다. 언제나 부족하기 마련인 것이 예산이다. 더구나 나는 국제 활동을 강조했다. 내가 남긴 항공료 차액으로 직원 몇 사람의 여비가 충당될 수 있다.
의문의 여권 직권말소
2012년 7월 열린 현병철 인권위원장에 대한 인사청문회 광경. 2009년 취임한 현 위원장은 8월 13일 임기 3년의 인권위원장에 재임명됐다.
후에 들은 이야기는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더라도 소속기관이 바뀌면 새로운 소속기관의 명의로 여권을 발급받도록 하는 외교통상부의 ‘내규’가 있다고 했다. 만약 그런 규정이 있다면 누군가가 알려줬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적어도 여권을 말소하기 전에 본인에게 통지는 해줬어야 할 것이 아닌가? 외교부는 전 소속기관에서 요구하는 경우에만 조치를 취할 뿐이라는 말도 있다. 설마하니 인권위가 전임 위원장인 나의 여권을 실효시키라고 주문했을 리 없다. 인권위 실무자들은 그런 일이 결코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기막힌 일이다.
공항에서 임시여권을 만들었다. 혼자서 촉박한 시간 내에 해결해야 했다. 증명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무인사진기가 고장이다. 부스 안에 적힌 안내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걸쳐 있어 더욱 서비스가 제한됐다. 외교부 담당 직원은 냉랭했다. 재직증명서, 출장허가서 사본을 즉시 팩스로 보내라. 게다가 나의 신원을 증명할 신분증까지 요구했다. 여권 말고 무슨 신분증이 더 필요한가, 나의 반문에 그는 말소된 여권은 유효한 신분증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운전면허증 아니면 주민등록증?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누가 지참하는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 애썼지만 나도 모르게 불평이 터져나왔다. 또한 그는 발급 신청서의 사유란에 나의 ‘불찰’을 구체적으로 적으라고 했다. 불찰이라니? 세상에 이렇게 기가 막히는 일이 있는가? 어쨌든 나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추상적’으로 기재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관료적 태도, 냉담한 표정에서 ‘당신이 누군지 몰라도 내가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읽었다. 그나마 항공사 직원이 시종일관 매우 친절하게, 참을성 있게 편의를 봐주었다. 내가 법무부와 통화하는 내용을 듣고 전후사정을 감지한 듯했다. 그의 고마움을 특별히 기억하는 것도 그에게 도움보다는 부담이 될 것 같아 애써 잊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지 불과 2년 남짓인데 그의 이름은 물론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내게 임시여권을 내준 그 공무원도 마찬가지로.
씁쓸한 마무리
아직도 나는 이 황당한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한다. 귀국해 정식으로 경위를 따지려다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그해 2월 하버드대에서 한 강연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쨌든 나는 임시여권을 들고 출국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여행 중에도 일어났다. 며칠 후 파리에서 지인과 저녁식사를 하고 신용카드로 밥값을 지불했다. 미처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서울의 거래 은행인데 프랑스에서 카드를 결제한 사실이 맞느냐고 물었다. 요즘 여행자를 상대로 하는 사기가 많아서 챙긴다고 했다. 서울 시간으로 새벽 4시쯤일 것이다. 나는 고맙다고 답하고선 불과 30만원 남짓한 금액인데, 한국의 고객 서비스가 놀랍지 않으냐며 그에게 자랑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뭔가 좀 이상하다고 말했다. 전화를 건 시간도, 남자 목소리인 것도 좀 이상하지 않으냐고 했다. 파리에 오래 산 그는 1979년 10월 일어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에 관해서도 구구한 뒷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요지인즉 “당신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 알아서 처신하라”고 누군가 내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흘 전의 여권문제와 연관 지어 추리소설을 쓸 법도 하다. ‘설마 그럴 리야, 내가 무슨 중요한 인물이라고’ 하고 넘겨버렸다. 설령 진상을 알아낸다고 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으랴. 나는 아직까지 이 문제도 정식으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내게 구체적인 피해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이따금씩 생각하면 약간 불쾌할 뿐이다. 한동안 소란스럽던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대상자 중에 나는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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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봄의 일이다. 인권위의 모 국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퇴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관례와 전통에 따라 전직 위원장과 상임위원에게 정부가 훈장을 수여하려고 한다. 주무부서인 행정안전부에서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하고 상신하라고 한다’며 내 뜻을 물어왔다. 그러면서 전직 상임위원들도 모두 받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한동안 ‘나라를 말아먹은’ 전 정부의 관료들에게는 훈장을 주지 않기로 했다는 등 흉흉한 말까지 나돌았었다. 모든 전직자에게 일괄적으로 훈장을 수여하는 것도 문제이긴 하다. 심지어는 불미스러운 일로 해임된 각료들까지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일괄적으로 보류하는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다. 나는 이 정부의 출범 당시부터 노무현 정부의 각료들에게 즉시 훈장을 수여하라고 건의하곤 했다. 이제야 비로소 정부가 안정된 셈이다. 다행한 일이다. 훈장은 헌법에 따라 국가원수가 수여하는 것이다. 내게 이명박 대통령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엄연한 국가원수다. 대한민국 정부의 훈장을 받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고 준다는 것도 다소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아주 납득이 가지 않은 바도 아니다. 나의 전임자인 조영황 변호사의 경우도 현직인 내가 직접 실마리를 풀었다. 스스로 떠난 후 인권위 쪽을 쳐다보기도 싫다던 그분을 내가 나서서 설득했고 정식으로 훈장을 전달하는 의식도 치렀다. 문제는 나 자신이다. 나는 며칠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했다. 가족과도 상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결코 성공한 위원장이 아니다. 설령 내게 공적이 있다 치더라도 부하직원 40여 명의 일자리를 잃게 한 장본인 아닌가. 그런 실패한 조직의 장이 무슨 낯으로 훈장을 받겠다고 제 입으로 말할 수 있을까! 며칠 후 뜻을 전했다. 결코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양하는’ 것이라고. 사양의 사유도 밝혔다. 그런데 내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안 교수가 대통령에 대해 각을 세운다’며 섭섭해 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정부 고위층의 반응이 있었다는 뒷말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