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위기로 글로벌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다. 6월 말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서 EU 차원의 예금보장, 부실 은행 구조조정 등을 수행할 은행동맹(banking union) 설립과 은행에 대한 직접 지원 등 보다 진전된 유로존 위기 해법이 도출되긴 했다. 그러나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분리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유로존 금융시장의 불안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상황이다. EU 정상회담 이후에도 투자자들은 유로화의 미래를 우려해 유로존에서 벗어나 있는 스웨덴, 덴마크, 그리고 스위스 국채를 선호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국가의 국채 금리는 마이너스를 지속할 정도다.
그리스뿐 아니라 EU 정부의 취약국 지원에 반대하는 핀란드의 유로존 이탈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미국의 경제 예측기관인 이코노믹 아웃룩 그룹(Economic Outlook Group)은 내년 말까지 유로존을 이탈하는 나라가 출현할 확률을 50%로 관측하고 있으며, 영국 은행들은 유로존 회원국들의 이탈을 가정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하고 있다.
결제통화 변경 가능성
만약 유로 재정위기가 그리스 등 개별국의 유로화 탈퇴나 유로존 전체의 해체와 같은 결제통화 변경(redenomination)에까지 이른다면 기업들도 직간접적인 경제적 충격뿐 아니라 법적인 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 결제통화 변경은 계약의 효력, 신구(新舊) 통화 간의 결제통화 결정, 통화 가치 기준일 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우리 기업들도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기에, 유로존 결제통화 변경과 그에 따른 법적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
유로 위기가 심화될 경우 유로존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그리스와 같은 개별국의 유로존 탈퇴, 그리고 유로존 전체의 붕괴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먼저 그리스의 예를 통해 개별국의 유로존 탈퇴가 야기하는 법적 리스크를 살펴본다. 시장은 이미 그리스 탈퇴 가능성을 심각하게 인식해왔다. 2011년부터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이 거론되자 투자자들은 결제통화의 변경에 대비하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 국채를 매수할 때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발행된 국채를 매수하는 것이다. 그리스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국채는 그리스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다. 따라서 유로존 탈퇴 후 유로화가 아닌 그리스의 새로운 통화로 결제할 가능성이 있다. 또 국채 만기를 연장해 실질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반면 영국법이 준거법인 국채는 그리스가 일방적으로 유로존을 탈퇴해도 영국의 통화법(Law of Currency)과 EU법에 따라 유로화로 지급받을 확률이 높다. 투자자들이 영국법에 의한 그리스 국채를 선호하자 이 국채의 가격이 그리스법에 근거해 발행된 국채 가격의 두 배에 달하게 되었다. 지난해 그리스 국채의 94%가 그리스법, 나머지 6%가 영국법에 의해 발행되었다.
영국법 ‘준거법’으로 활용해야
그리스의 채무부담을 덜어주고 민간투자자의 손실부담을 높이기 위해 올해 3월 EU는 민간 보유 국채를 새로운 국채로 교환하는 채무재조정을 실시했다. 이는 민간 투자자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국채 교환안이었는데, 새로운 국채 액면 가치의 46.5%에 불과했다. 또 채권자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 그리스 정부가 채권의 조건을 변경할 수 있는 집단행동조항(Collective Action Clauses)이 포함되었다. 투자자들로서는 가혹한 조건이어서 교환이 실패할 우려도 제기됐다.
그러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민간투자자들 대부분이 국채 교환에 응해 참여율이 84%에 달했다. 투자자들이 이런 국채교환에 응한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국채의 준거법이 영국법이기 때문이다. 준거법이 영국법이라면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한 후에도 영국법에 따라 유로화로 결제될 가능성이 높다.
결제통화 변경에 대한 국제법상 원칙인 발권국가의 통화변경권(Lex Monetae)에 따르면, 계약에 표기된 결제통화를 발행한 나라가 통화변경권을 가진다. 즉 발권국가는 통화주권이 있기 때문에 발권국가가 통화를 변경할 경우 계약 당사자들은 해당 발권국가가 발행한 새로운 통화로 결제해야 한다. 다만 당사자들이 계약할 때 결제통화 변경 시 특정 통화로 결제하기로 합의했을 경우에는 그 합의에 따른다.
원칙적으로 이러한 발권국가의 통화변경권은 그리스 국채에도 적용된다. 이것만 놓고 보면 그리스가 유로존을 일방적으로 탈퇴하면 그리스 정부는 ‘원칙적으로’ 그리스 통화로 원리금을 지불할 수 있는 것이다.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그리스 국채에 대해서도 발권국가의 법적 권한을 인정하는 원칙이 적용된다면 그리스 정부는 유로화로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투자자들이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한 그리스 국채를 선호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영국이 EU 회원국이라는 점 때문에 그리스가 일방적으로 탈퇴한다면 발권국가의 퉁화변경권이 적용되지 않고 여전히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한 국채에 대해서는 유로화로 지불해야 한다. 그리스의 일방적 탈퇴가 EU법 위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 EU법상 유로존 탈퇴 규정은 없고 EU 탈퇴만 가능하기 때문에, 유로존만 탈퇴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는지 불확실하다. 법률가들은 그리스가 유로존을 일방적으로 탈퇴하려면 EU에서 아예 탈퇴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보고 있으며, 대체로 그리스의 일방적인 유로존 탈퇴는 EU법 위반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 국채 교환은 그리스 정부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또 시장이 우려한 결제통화 변경에 따른 법적 리스크를 줄이는 동시에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우려를 불식하는 구실도 했다. 다만 국채의 준거법이 영국법으로 바뀜에 따라 그리스 정부의 실질 채무 부담이 크게 증가했다. 이는 유로존 탈퇴 후 그리스 신통화의 가치가 크게 떨어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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