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남성의 로망, 가장 탐나는 슈퍼카

  • 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

    입력2012-08-22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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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고성능 스포츠카의 범주를 한 단계 뛰어넘은 초고성능이면서 디자인과 품질이 최상급이고 희소가치까지 있는 고가의 차를 흔히 ‘슈퍼카(supercar)’라고 한다. 슈퍼카는 경주용 차 이상의 성능(평균 시속 300㎞ 이상)을 갖췄지만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슈퍼카는 기본적으로 5P(Power, Performance, Proportion, Passion, Price)를 충족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갖췄다고 모두 슈퍼카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흥분(Excitation)이다. 슈퍼카로 불리려면 타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를 흥분시키고 감동으로 몰아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서킷을 질주하거나 우연히 골목길에서 마주쳐도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일반 자동차는 갖지 못한 슈퍼카만의 매력이다. 세상의 수많은 남성이 이 매력을 이기지 못하고 슈퍼카를 갖거나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타보기를 꿈꾼다. 지구상에서 가장 섹시한 축구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데이비드 베컴처럼.

    강력한 성능과 강렬한 원색,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모든 스포츠카를 압도하는 이탈리아의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는 슈퍼카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면서 영원한 라이벌이다. 슈퍼카에는 맥라렌F1이나 파가니존다 등도 있지만 두 브랜드에 필적해 명함을 내밀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자동차 역사 가운데 두 브랜드가 서로를 이기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워온 길을 그대로 슈퍼카의 역사라고 보면 된다.

    스피드에 목숨 건 엔초 페라리

    두 브랜드의 대결은 설립자인 엔초 페라리(Enzo Ferrari·1898~1988)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ruccio Lamborghini·1916~1993)에서 시작된다. 1898년 2월 18일 이탈리아 모데나 지방의 철공소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엔초 페라리는 10세 때 아버지와 형 알프레도를 따라 간 볼로냐의 에밀리아 서킷에서 처음 자동차경주를 보게 된다. 펠리스 나자로가 우승한 그 대회를 통해 어린 엔초는 자동차경주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이후 13세에 운전을 처음 배운 엔초는 마침 아버지가 자동차 정비소를 차려 차와 자동차경주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던 엔초는 시와 철학, 역사를 탐독했고 스포츠에도 재능을 보여 16세에 스포츠신문에 축구 기사를 기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6년 아버지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데 이어 형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자신마저 군에 입대하면서 자동차와 멀어진다. 그러나 혹독한 군 생활 도중 스파뇨라는 독감에 걸려 두 번의 수술 끝에 제대하게 된다.

    이후 엔초는 당시 세계 자동차경주를 지배하던 피아트(Fiat) 사에 지원했으나 떨어지고 트럭회사에 운전사로 취직한다. 1919년 선수들 모임에서 우연히 A급 선수였던 피아트 팀의 페리체 나자로를 만난 엔초는 그의 소개로 스포츠카 제작사인 CMN(Costruzioni Meccaniche Nazionali)에 테스트 드라이버로 취직한다. 같은 해 CMN의 경주팀장이던 시보치에게서 운전 기술을 인정받은 엔초는 파르마-베르체토(Parma-Berceto) 경주에 출전해 11위를 차지하면서 카레이서로 데뷔한다. 이어 가장 혹독한 경주이자 중앙 진출 무대인 타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 경주에 출전해 9위에 입상하면서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1920년 CMN이 적자로 파산하자 알파 로메오(Alfa Romeo) 팀으로 자리를 옮겨 타르가 플로리오 경주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 선수로서의 엔초 시대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A급 선수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1923년 어느 날 지방의 소규모 경주에서 우승한 그를 지켜본 바라카(Baracca) 백작 부부는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들 프란체스코가 생전에 아끼던 뛰어오르는 말의 모습을 담은 배지를 엔초에게 선물했다. 그 배지가 바로 지금까지 페라리를 상징하는 엠블럼이 됐다.

    당시는 피아트가 경주를 장악하던 시대였는데 엔초는 피아트를 따라잡기 위해 피아트의 기술자와 선수들을 스카우트한다. 덕분에 팀의 전력은 막강해졌지만 소속사인 알파 로메오는 자금사정이 나빠져 1925년 은행으로 넘어간다. 1929년 엔초는 경주 팀에서 나와 알파 로메오의 판매점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딴 ‘스쿠데리아(Scuderia) 페라리’라는 경주 팀을 만든다. 이 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랑프리 경주 팀으로 지금까지 세계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페라리 엠블럼의 뛰어오르는 말의 양옆에 써 있는 ‘S’와 ‘F’글자는 이 팀을 상징한다.

    자신의 팀과 함께 이탈리아의 모든 경주를 석권하면서 최고의 선수로 커가던 엔초는 1932년 아들 디노(Dino)가 태어나면서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경주 팀 관리와 경주용 자동차 제작에만 몰두한다.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왼쪽)와 페라리 창업자 엔초 페라리.

    이후에도 엔초의 경주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에서 지원한 차량으로 F1 경기에 출전해 승승장구하지만, 알파 로메오가 스쿠데리아를 흡수한 뒤 자신을 내쫓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엔초는 1938년 알파 로메오와 결별을 선언한다.

    직접 경주차 개발에 나선 엔초는 후원자에게 의존하는 경주차만으로는 회사를 경영하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고, 1939년 일반도로용 스포츠카 생산을 위한 회사 오토 바비오 코스트루치오니(Auto Avio Costruzion)를 세워 이듬해 ‘티포 815’를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1940년 밀레 말리아 레이스에 출전한 1.5L 가솔린 엔진의 이 자동차는 결국 엔진 결함으로 완주에 실패하고 만다.

    엔초는 알파 로메오와 결별 당시 향후 4년간 자신의 경주차에 페라리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 때문에 티포 815에도 페라리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첫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 엔초는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스포츠카 생산이 불가능해지자 꿈을 잠시 미뤄둔 채 항공기 엔진 부속과 공구를 만들어 군에 납품하며 큰돈을 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자동차 생산이 재개되자 엔초는 페라리 이름을 단 첫 번째 자동차인 ‘페라리125 Sport’를 탄생시킨다. 1.5L 12기통인 이 차는 1947년 5월 피아첸차(Piacenza) 서킷에 데뷔한 지 2주 만에 로마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1년 후엔 2.0L 엔진의 도로용 스포츠카 페라리166S를 내놓는다.

    이후 엔초 페라리는 4.1L 엔진에 220마력의 힘을 가진 페라리 340아메리카를 비롯해 250유로파, 375아메리카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유럽의 수많은 자동차경주에 참가한다. 페라리는 당시 모든 차량 개발의 최우선 조건을 최고시속 달성에 두고 오로지 경주에서 우승하는 데 몰입했다. 결국 엔초는 1951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당시 세계 최고였던 알파 로메오 레이싱 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첫 차를 출시한 지 불과 4년 만이다.

    평소 알파 로메오에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던 엔초는 알파 로메오를 처음으로 이긴 이 대회 우승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를 죽였다…”고. 자신을 최고의 레이서로 키워줬지만, 결국에는 배신한 알파 로메오를 향한 복수의 한마디였다. 이 말은 엔초의 승부사 기질과 당시에 느꼈던 배신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게 한다. 이후 페라리의 차들은 전 세계 자동차경주에서 5000회 이상 우승하며 지금까지 전설로 남아 있다.

    1952년 엔초는 스포츠카의 거장 피닌 파리나를 영입해 페라리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페라리는 달리는 예술품이자 전설의 슈퍼카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

    엔초의 독설이 탄생시킨 람보르기니

    람보르기니의 역사는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페루치오의 초고 성능 슈퍼카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이뤄낸 결과가 바로 람보르기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람보르기니의 역사는 1963년에 시작됐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근원을 1916년 페루치오의 탄생에서 찾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태어난 성좌(星座)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준다고 믿는데, 페루치오는 총명하고 충동적이며 의지가 굳은 황소자리를 타고났다. 그의 일생을 보면 황소자리의 성격이 그대로 나타난다.

    엔초 페라리의 숙적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레나초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용차량을 정비하는 병사로 근무한다. 전쟁이 끝난 후 결혼한 그는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길가에 버려진 군용트럭을 보고 사업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버려진 군용트럭을 끌어 모아 트랙터로 개조하는 사업을 벌여 큰돈을 번 페루치오는 자신의 피아트를 개조해 레이싱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자동차광이면서 동시에 여러 명차를 보유한 수집광이었다. 그런 그도 처음부터 자동차회사를 설립할 생각은 없었다.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카운타크 콰트로발볼레.

    페루치오가 슈퍼카를 만들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인 페라리와의 악연에서 시작된다. 1960년대 초 페루치오는 당시 인기 스포츠카였던 페라리 250GT를 소유했는데, 클러치의 결함을 발견하고 개선책을 찾기 위해 엔초 페라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엔초는 “트랙터나 만들던 사람이 어떻게 슈퍼카를 알겠는가? 트랙터나 운전하며 살라”고 면박을 주며 문전박대했다.

    엔지니어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페루치오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페라리를 능가하는 슈퍼카를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즉시 자동차회사 설립에 착수한 페루치오는 1962년 자신의 이름을 딴 ‘람보르기니’를 창업한다. 페루치오는 “무조건 페라리보다 빨라야한다”는 첫 번째 원칙을 세우고 지금의 본사가 있는 볼로냐 인근에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공장 바로 옆에 사무실을 둔 페루치오는 공장을 짓는 건설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직원들을 독려하는 동시에 최고의 기술자들을 끌어 모았다. 당시 페라리에 근무했던 파올로 스탄자니(Paolo Stanzani), 잔파울로 달라라(Gianpaolo Dallara) 등도 최고 대우로 영입했다.

    페루치오는 이때 페라리의 최신 엔진을 개발한 지오토 비자리니(Giotto Bizzarini)를 함께 영입했다. V12 엔진을 개발해 페라리를 앞지르기 위해서였다. 람보르니기의 첫 작품은 1964년 5월에 탄생했다. 바로 350GT이다. 최대출력 270마력에 최고시속 230km를 내는 이 차는 첫 작품치고는 대단하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경쟁 모델이면서 페라리의 역대 최고 모델로 꼽히는 페라리 250GTO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50GTO는 V12 엔진에 최대출력 302마력, 최고시속 273km의 성능을 지녀 350GT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았다. 첫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 페루치오는 후속모델인 400GT를 곧바로 내놔 시장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며 ‘슈퍼카 생산은 무모한 시도’라는 업계의 비웃음을 날려버렸다.

    이후 페루치오의 신임 아래 스탄자니와 달라라는 좀 더 새롭고 진보된 차를 개발하고자 2인승 레이스카인 코드네임 400TP 개발에 착수한다. 지나치게 혁신적인 아이디어였기에 두 엔지니어는 페루치오의 즉각적인 승인이 떨어지자 깜짝 놀랐다. 페루치오는 이 모델이 기껏해야 50대 정도 팔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브랜드 홍보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바로 승인했던 것이다. 1965년 10월 이 차는 이탈리아 토리노 오토쇼에서 처음 일반에 공개되며 큰 관심을 모은다. 하지만 페루치오가 오토 쇼에서 얻은 성과는 따로 있었다. 람보르기니를 세계 최고의 차 반열에 올려놓을 천재 디자이너 누치오 베르토네(Nuccio Bertone)를 만난 것이다. 400TP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호감을 느낀 베르토네가 페루치오의 팀에 합류하면서 람보르기니는 비로소 슈퍼카 양산의 기초를 다진다. 베르토네는 이후 람보르기니만의 독자적인 디자인 철학을 완성해 람보르기니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평가받는다.

    최초 ‘슈퍼카’ 미우라

    1966년은 람보르기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해다. 당대 최고의 명차이자 지금까지 최고의 슈퍼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우라가 거장 마르첼로 간디니(Marcello Gandini)와 베르토네의 손에서 탄생한 해이기 때문이다. V12 4.0L 엔진을 탑재한 미우라는 최대출력 350마력에 최고시속 295km라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성능을 내는 진정한 스포츠카였다. 성능과 품질, 아름다움에서 페라리는 물론 당시의 모든 스포츠카를 뛰어넘은 미우라는 자동차 역사상 최초로 ‘슈퍼카’칭호를 부여받는다.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페라리 공장 전경.

    미우라가 슈퍼카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더 큰 이유는 바로 최초로 미드십(엔진을 운전석 뒤쪽에 배치해 차량의 전후 밸런스를 이상적으로 맞춘 방식)을 채택해 성공했기 때문이다. 미우라 이후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를 능가하는 자동차 브랜드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미우라로 시작된 미드십 방식은 경쟁사인 페라리를 비롯해 타 브랜드들이 잇따라 따라 하면서 지금까지 정통 슈퍼카의 상징으로 이어져왔다.

    미드십 엔진 방식은 1950년 말부터 F1 그랑프리 경주차에 쓰이기 시작했지만 양산형 자동차에 바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람보르기니가 미우라에 처음으로 이 방식을 도입했을 때도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미우라는 보란 듯이 성공해 당대 최고의 스포츠카를 모두 제치고 최고시속 295km라는 경이적인 세계 기록을 세운다.

    결국 엔초도 “미드십 엔진 방식은 매우 우수하다”는 말로 패배를 인정했고, 이때부터 페라리도 미드십 방식이 적용된 모델을 생산하게 된다. 페루치오는 당시 “이제 페라리가 우리를 의식할 뿐만 아니라, 흉내까지 내고 있다”며 마음껏 조롱했다. 페라리를 모방하는 브랜드에 불과하다는 비웃음을 듣던 람보르기니로서는 일거에 통쾌한 복수를 한 셈이다.

    미우라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73년, 람보르기니는 미드십의 전설 람보르기니 카운타크(Countach)를 양산한다. 람보르기니의 존재를 확고히 알린 이 모델은 몸을 구겨 넣듯 타야 하고 꽉 막힌 후방 시야에 좁은 실내 등 여러 가지 불편함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것은 엄청난 힘과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성능, 흉내 내기도 어려운 혁신적인 디자인 덕분이다. 카운타크는 지금도 람보르기니 하면 떠오르는 시저스 도어(Scissors door·가위처럼 일자로 위를 향해 열리는 문)를 최초로 채택한 모델이기도 하다. 특유의 낮은 전고와 넓은 차체로 일반 도어를 적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차는 5.0L V12 엔진을 얹어 최대출력 446마력, 최고시속 300km라는 경이적인 성능으로 페라리를 위협했다.

    하지만 상승일로를 걷던 람보르기니도 1970년대 최대 위기를 맞는다. 첫 위기는 트랙터 사업에서 시작됐다. 남미에서 대규모 주문이 취소되면서 수요 증가에 대비해 신규 공장을 짓던 람보르기니는 큰 재정 손실을 입었고, 마침 노사분규까지 겹쳐 1974년 트랙터 사업을 피아트에 넘긴다. 여기에 1, 2차 오일쇼크까지 겹치자 페루치오는 람보르기니의 지분 대부분을 스위스 투자사에 넘기고 남은 지분마저 친구 르네 라이머(Rene Leimer)에게 넘긴 후 은퇴를 선언한다.

    페라리 또 한 번의 도약

    미우라와 카운타크에 잇달아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은 페라리는 더욱 강력한 스포츠카를 만드는 데 몰두한다. 이렇게 탄생한 모델이 슈퍼카 신드롬을 일으켰던 1984년 작품 288GTO다. 페라리 최초로 2.9L V8 엔진에 트윈 터보 차저를 장착해 최대출력 400마력, 최고시속 304km를 달성한 모델이다. 하지만 288GTO의 명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엄청난 성능과 속도를 자랑했지만, 경기 중 사고로 선수와 관중이 사망하며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페라리는 288GTO 후속모델 개발에 착수해 1987년 페라리 40주년 기념모델 F40을 발표한다. 페라리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이 차는 엔초 페라리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개발한 유작이지만, 람보르기니를 겨냥해 만든 모델은 아니었다.

    당시는 독일 스포츠카의 대명사 격인 포르셰 사의 포르셰 959가 주목받던 시기였다. 포르셰 959는 2.8L 수평 대향 V6 엔진에 최대출력 450마력, 최고시속 315㎞h를 자랑하는 4륜구동 슈퍼카로, 당대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며 스포츠카의 선두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198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된 이 차는 F40이 공개되기 몇 달 전에 양산되기 시작했다.

    결국 페라리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차’라는 타이틀을 되찾아오기 위해 F40을 시장에 내놓게 된다. 후륜구동 2인승인 F40은 무게 1100㎏에 배기량 3.0L의 DOHC V8 엔진을 탑재했다. 배기량은 크지 않으나 트윈 터보에 힘입어 최대출력 478마력에 최고시속은 무려 324㎞를 냈다. 정지 상태에서 100㎞까지 3.8초에 도달하며, 페라리는 이 차 덕분에 1987~1989년까지 세계 최고속 양산 차의 타이틀을 보유하게 된다.

    F40은 당초 400대만 한정 생산할 예정이었으나, 주문 물량이 쏟아지며 생산을 마친 1992년까지 모두 1310대가 제작됐다. F40은 특기할 점이 몇 가지 있는데 차량을 주문하고 받으려면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고, 출고 당시 약 1억8000만 원이던 차량가격은 ‘가장 빠른 차’‘엔초 페라리의 유작’이라는 별칭이 붙으며 최근엔 5억 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엔초 페라리는 F40 탄생 이듬해 사망했다.

    전 세계의 슈퍼카 중에서 못생기기로 손가락에 꼽히는 ‘엔초 페라리’는 창업자 엔초 페라리를 기리기 위해 2002년 출시한 차량으로 6.0L V6 엔진에 최대출력 660마력 최고시속 350km의 성능을 뽐낸다. 당대 최고인 페라리 F1팀에서 개발한 이 차는 일반 도로를 달리는 최고의 차를 목표로 만들어졌다. F1 드라이버 역사상 가장 우수하다는 살아 있는 전설 미하엘 슈마허가 개발에 참여해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던 이 차는 당시 349대만 한정 생산할 계획이었지만 구매자들의 요구로 550대를 추가 생산했다.


    2011년 한국에 소개된 페라리 FF는 ‘페라리 포(Four)’의 약자로 4인승과 4륜구동을 의미하며, 페라리GT 스포츠카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한 페라리 최초의 4륜구동 차량이다. 페라리가 추구하는 자동차의 미래를 읽을 수 있는 모델인 이 차는 6.3L V12 엔진을 탑재해 최대출력 660마력, 최고시속 335km의 성능을 발휘한다. 최고시속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생각해 CO₂ 배출을 낮추고 연료효율을 높였으며, 고객들이 차량의 내·외장 및 사양을 취향과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페라리는 2011년 역사상 유례없는 실적을 기록했다. 세계에서 모두 7195대의 차량을 팔아 22억5100만 유로(3조3377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추락하던 람보르기니의 부활

    1974년 페루치오가 떠난 람보르기니는 성능과 속도를 개선하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전반적인 품질 향상에 중점을 두고 자동차를 생산해냈다. 하지만 판매실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오일쇼크와 판매부진을 극복하지 못한 람보르기니는 1978년 결국 파산하고 만다.

    이후 스위스의 밈람(Mimram) 형제는 파산한 람보르기니 공장을 인수해 1980년대 람보르기니 부활을 이끈다. 형제는 1981년 3월 제네바 모터쇼에서 새로 디자인한 미우라와 카운타크S를 선보였다. 그리고 새로워진 람보르기니의 모습을 가장 장 표현한 모델 잘파(Jalpa)를 출시했다. 1985년에는 카운타크의 새로운 버전 콰트로발볼레(Quattrovalvole)를 처음 공개하는데, 이 차는 5.2L V12 엔진에 최대출력 455마력을 뿜어낸다. 콰트로발볼레는 지난 22년간 람보르기니를 대표했던 고유의 엔진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고 성능을 대폭 강화한 모델로 경쟁 차들을 앞서며 람보르기니의 부활을 알린 슈퍼카다.

    람보르기니를 부활시킨 밈람 형제는 회사를 크라이슬러에 넘기게 된다. 크라이슬러는 1990년 또 하나의 전설적인 슈퍼카 디아블로를 출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세기 투우에서 명성을 떨쳤던 황소를 뜻하는 디아블로는 492마력의 5.2L V12 엔진을 가졌다.

    하지만 모회사 크라이슬러가 재정난을 겪으며 람보르기니는 1994년 인도네시아의 부호인 토미 수하르토에 매각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1990년대 후반 경제위기로 타격을 입은 수하르토 가문은 디아블로 후속모델의 개발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람보르기니는 1998년 아우디에 인수되면서 안정을 되찾게 된다.

    아우디와 손잡은 람보르기니는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아우디의 든든한 지원 아래 개발한 무르시엘라고는 2001년 출시 이후 12기통 슈퍼카 시장에서 최고의 모델로 각광받았다. 2002년 출시돼 ‘베이비 람보르기니’라고 불리는 V10 엔진의 가야르도는 람보르기니의 고객층을 넓힌 모델이다. 이후 람보르기니는 연간 2000대 내외의 꾸준한 판매량을 유치하고 있으며 2008년에는 2430대라는 역사상 최고의 판매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죽음 놓고도 경쟁한 두 거인

    스포츠카와 자동차경주의 황제였던 엔초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1956년 외아들 디노가 심장병으로 죽었고, 이듬해에는 A급 선수였던 알폰소 데 포르타고(Alfonso De Portago)가 밀레 밀리아 경주에서 자신을 포함해 13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큰 사고를 일으켰다. 여기에 1936년 숨겨놓은 애인이 낳은 아들의 존재가 알려져 세상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아내와도 멀어졌다.

    하지만 더 큰 불행은 1950년대 말부터 F1 그랑프리나 르망 경주에서 왕좌가 흔들린 것이다. 그가 강력한 엔진의 레이스카를 만드는 데 치중하는 동안 영국 팀들은 가벼운 신소재와 에어로 다이내믹 스타일을 반영한 새로운 경주차를 만들어 페라리를 앞서갔다. 페라리 간부들은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설계를 바꾸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엔초는 번번이 이를 묵살했고 그들은 결국 하나둘 엔초 곁을 떠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거칠고 무자비한 폭군으로 변해갔고, 아내마저 회사 경영에 끼어들자 그를 도왔던 직원들은 아무도 페라리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됐다.

    1963년 불경기 속에서도 경주차 제작과 팀 운영에 많은 돈을 투자해 어려워진 엔초에게 미국의 포드는 자본을 투자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엔초의 안하무인 같은 태도 때문에 협상은 깨지고 만다. 결국 재정난을 견디다 못한 엔초는 1969년 피아트사를 찾아가 스포츠카 부문의 주식 50% 양도를 조건으로 도움을 청하게 된다. 피아트의 지원으로 활기를 되찾은 페라리는 1975년, 1977년, 1986년에 그랑프리 월드챔피언에 등극하며 다시 한 번 영광의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엔초는 영국에서 비밀리에 만들던 최신형 F1 그랑프리 경주차를 애타게 기다렸으나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88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엔초 페라리는 생전에 “페라리는 여자와 같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1973년 회사를 넘기고 은퇴를 선언한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에 있던 그의 와이너리에서 와인 생산에 여생을 바쳤다. 그의 라 포르리타 저택은 테니스코트와 람보르기니 자동차를 전시한 박물관,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그는 ‘미우라의 피’라고 불리는 컬리 델 트란시멘트(Colli Del Transiment)라는 레드 와인을 생산했다.

    그는 생전에 “엔초 페라리가 90세까지 살았으니 나는 91세까지 살아 페라리를 이기겠다”고 장담했지만, 결과적으로 페라리를 이기지는 못했다. 페라리가 숨을 거둔지 5년 만인 1993년 2월 20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2002년 출시돼 ‘베이비 람보르기니’라고 불리는 V10 엔진의 가야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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