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북한서 민중봉기 일으키겠다 내 방식 주체사상 포기 안 해”

북한 민주화운동하다 中안전부서 고문 김영환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2-08-22 17:1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내가 체포된 뒤 北 반체제 인사 중국으로 탈출
    • 북한 내 혁명 조직 점검하러 중국 간 것
    • 전기막대로 고문하고 때린 남자, 지금도 기억
    • 김일성은 딱 한 번 돈을 줬다. 금액은 40만 달러
    • 이석기파, 내게 민혁당 돈·조직·북한연락망 요구
    “북한서 민중봉기 일으키겠다 내 방식 주체사상 포기 안 해”
    젊은 시절, 그는 강철과 같은 신념과 의지로 살고자 했다. 1980년대 대학가를 붉게 물들인 ‘강철서신’의 저자다. 1990년대 후반 혁명의 타깃을 바꿨다. 주체사상의 본영을 타격했다. 동지들은 전향하려면 ‘선’(북한 접촉망)과 ‘돈’(자금)을 넘기라고 대들면서 교도소로 갔다. 변절자, 배신자라는 낱말이 따라붙었다. 김영환(49)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지금도 혁명을 꿈꾼다.

    그는 서울대 82학번이다. 1986년 ‘강철서신’이란 팸플릿을 통해 주체사상을 한국에 전파한 인물이다. ‘주사파의 대부’로 불렸다. 운동권 전반에 반미친북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1991년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났다. 1992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창당했다. 북한 정권에 환멸을 느껴 1997년 민혁당을 자진 해체했다. 북한 민주화 및 인권 문제에 천착해왔다.

    남조선 혁명을 꿈꾸던 그가 타깃을 바꿔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다 중국 국가안전부에 붙잡혀 114일 동안 중국에 억류됐다. 21세기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7월 20일 가까스로 석방돼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늘 음지에 서 있었다. 1980년대부터 온몸으로 격랑과 맞부딪치면서 한반도의 현대사를 관통해왔다. 8월 6, 9일 그를 만났다. 귀국 직후부터 수차 e메일, 전화통화도 주고받았다.

    혁명가의 삶

    그는 자신을 혁명가로 규정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혁명가의 삶을 시작했다. 이윽고 주체사상을 공부했다. 가장 핍박받는 사람에 대한 연대의식이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나의 동력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는 그렇게 심하게 고통을 받거나 핍박받는 이들이 없다. 북한의 실상을 알고 나서부터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영향을 줬던 수많은 이에 대한 부채 의식도 적지 않다. 직업으로 북한 민주화운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북한 혁명가’다.”

    ▼ 반미·친북적 분위기가 운동권에 널리 확산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나의 치명적 오류다. 북한 주민이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독재국가라는 말로는 북한을 온전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극단적 고통에 시달린다. 북한을 자유화해야 한다. 인간적인 삶을 되돌려줘야 한다. 세계의 진보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북한 민주화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일부러 삐딱한 질문을 던졌다.

    ▼ 소영웅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

    “적절한 비판이 아니다.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다. 언론에 나온 것도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던 것이 대부분이다.”

    ▼ 1990년대 전향했을 때 좌파에서는 소아병적 사고를 가졌다고 비판했다.

    “나의 결함을 거꾸로 본 것이다. 지나치게 신중한 게 문제다.”

    그는 중국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마음의 상처는 가시지 않는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가 나를 추적한다는 소문을 들어 신경이 쓰였지만 그런 끔찍한 일을 겪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북한서 민중봉기 일으키겠다 내 방식 주체사상 포기 안 해”

    김영환 고문대책회의가 8월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옥인교회 앞에서 ‘김영환 고문대책회의 발족 및 고문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중국 정부의 책임 있는 해결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중국 국가안전부 조사실은 26년 전 우리나라 국가안전기획부 조사실과 비슷했다. 손발이 묶인 채 비명을 질러대야 했다. 고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협박이다. 중국 안전부 수사관이 히죽거리면서 말했다.

    “4월 15일이 김일성 생일이다. 너를 보내면 최고의 선물로 여길 것이다.”

    북송(北送)해버리겠다는 협박을 15차례 넘게 들었다. “사건과 관계없는 친척, 친구도 안전국으로 소환하겠다”는 겁박도 했다.

    북한은 ‘김일성 교시’를 어긴 그를 배신자로 여긴다. 김일성 교시와 ‘김정일 말씀’은 헌법 위에 군림한다. 그는 1991년 강화도에서 북한 잠수정을 타고 월북해 김일성을 만났다.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민혁당을 조직했다. 민혁당은 1997년 그의 주도로 해체됐다. ‘수령님의 교시’로 만든 조직을 ‘제멋대로’ 해산해버린 것이다.



    살갗에 벌레가 기어 다녔다

    “북한 보위부가 나를 넘겨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면서 북한에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북송됐더라면 굉장한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안전부 요원은 “북한 보위부에서 당신들에 대한 정보를 줬다. 오랫동안 추적해 당신을 체포했다”고 말했다.

    그는 3월 23일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점검하러 방중했다. 베이징에서 지인을 만난 후 3월 27일 다롄(大連)으로 이동했다.

    “다롄에서 활동가들의 체력을 측정했다. 중국 현지 활동이 고되다. 우리 활동은 강한 체력을 요구한다.”

    3월 29일 오전 호텔에서 회의를 마치고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또 다른 활동가를 만나고자 제3의 장소로 옮긴 것이다.

    “북한이 나를 쫓는다는 정보를 입수한 터라 보안에 각별히 신경 썼다.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합승이었다. 택시에 합승한 승객이 내리는 순간 안전부 요원들이 택시를 둘러쌌다. 호텔 앞부터 나를 미행한 것으로 보인다. 혁대로 나를 결박했다. 두려움이 일었으나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안전부 요원들이 그의 얼굴에 복면을 씌웠다. 모든 것이 캄캄했다. 이튿날 오전 단둥(丹東) 안전국으로 이송됐다. 안전국 요원들은 처음엔 그가 ‘강철’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고문은 체포 사흘째부터 시작됐다. 의자에 앉힌 뒤 손을 뒤로 하게 해 수갑을 꽉 조였다. 한 달 동안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얘기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변호사, 영사 접견이 이뤄진 후 진술하겠다”고 맞섰다.

    6일간 잠 안 재우기 고문

    4월 10일부터 6일간 잠을 못 자게 했다. 악명 높은 ‘잠 안 재우기’ 고문이 시작된 것이다. 6일 동안 2, 3초를 졸은 게 수면의 전부인 것 같다.

    “잠이 들려는 찰나마다 수사관들이 뭔가를 두드려 굉음을 내거나 목덜미를 때렸다.”

    ▼ 사람이 6일 동안 자지 않고 살 수 있나.

    “넋이 나가지는 않는다. 멍해진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 살려달라고 읍소하지는 않았나.

    “나는 읍소 같은 것 못하는 성격이다.”

    어느 날은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서 있어야 했다. 높이가 25㎝가량인 의자에 40시간 넘게 앉아 있은 적도 있다. 다리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4월 15일 수사관이 그의 얼굴에 복면을 씌웠다. 심전도 검사, 혈압 검사를 했다. 그날 오후부터 구타가 시작됐다. 얼굴을 주로 때렸다. 50㎝ 길이의 전기막대가 들어왔다. 고문한 자의 얼굴이 몽타주를 그릴 수 있을 만큼 지금도 또렷하다.

    “괴력의 남자가 있었다. 엄청난 힘으로 나를 때렸다. 석고상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초저녁부터 시작한 전기고문은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전기막대를 옷 속으로 집어넣어 등과 가슴에 연거푸 갖다 댔다. 어떤 말로도 나타낼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얼굴 구타와 전기 고문을 번갈아 했다.

    ▼ 전기막대로 몸을 지질 때 느낌은.

    “고통스러워 어떤 생각도 들지 않는다.”

    4월 16일 묵비권을 포기하자 고문은 중단됐다. 조사를 받은 한 달 동안 수갑을 찬 채 의자에 앉아 잠을 자야 했다. 살갗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500군데 가까이 화상을 입었다. 몸에서는 토할 것 같은 냄새가 났다. 30일 동안 이를 닦지 못했다. 머리칼도 몇 가닥씩 엉겨붙었다. 4월 29일 단둥구치소로 이감되고 나서야 머리를 감았다.

    “북한서 민중봉기 일으키겠다 내 방식 주체사상 포기 안 해”

    북한 민주화운동가 김영환 씨가 중국에 억류된 지 114일 만인 7월 20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 중국 안전부가 왜 고문했다고 보나.

    “우리 조직을 낱낱이 들춰내려고 한 것 아니었겠나. 여하튼 미스터리다. 단둥이 변경(邊境)이다 보니 세상 물정 모르고 그랬다는 얘기도 있으나 베이징과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 당국은 전화 감청, 인터넷 감청, 미행을 통해 우리 조직과 관련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함께 잡힌 3명의 진술을 통해 파악한 것도 적지 않다. 나에 대한 조사는 감청, 미행, 취조를 통해 얻은 정보를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중국 당국이 지목한 죄목은 둘이다. 첫째는 중국인을 이용해 북한 정권 전복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인은 조선족, 북한에 거주하는 중국 화교를 아우르는 말이다. 둘째는 중국 영토에서 우방인 북한을 상대로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고문하면서 요구한 것은, 두 가지다. 묵비권을 철회하는 것, 두 가지 죄목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었다.”

    “26년 전 안기부 떠올라”

    ▼ 중국 및 북한 내 조직과 관련해 진술하라는 게 아니라 죄를 인정하라는 게 고문의 주목적이었나.

    “안전부가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나한테는 조직망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다.”

    그는 전기막대 고문을 당하면서 26년 전 안기부에서 고문당할 때가 떠올라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나는 고문에 이력이 나 있다. 고통만 따지면 안전부의 고문이 안기부의 그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고문 기술도 더 능숙했고.”

    안기부는 1987년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의 서울대 법대생 김영환·하영옥·박○○군을 체포했다. 그는 안기부에서 47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수사관들이 처음 20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몽둥이질을 했다. 몸이 푸석푸석해졌다. 팔, 다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푹 들어갔는데, 손가락을 떼어도 피부가 원상 복구되지 않았다. 175㎝, 55㎏의 말라깽이 시절이었는데 부어오른 데를 연거푸 때려 겉으로는 뚱보처럼 보였다. 원산폭격 같은 기합을 받을 때는 공포가 밀려오지 않아 편했을 만큼 고문은 가혹했다. 안기부 수사관은 강철서신을 두고 “23세 대학생이 쓴 글이 아니다. 배후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내가 강철서신을 썼다”고 자백했지만 “믿을 수 없다”며 고문을 계속했다. 준(準)혁명조직을 표방했으나 지하 서클 수준이던 구학련은 이후 반제청년동맹을 거쳐 북한과 직접 연계된 민혁당으로 치닫는다.

    “북한서 민중봉기 일으키겠다 내 방식 주체사상 포기 안 해”

    김영환 씨가 8월 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회견에 참석해 중국에서 당한 전기고문 등 인권침해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안기부에서 당한 고문과 중국에서 당한 고문은 어떻게 다른가.

    “한국에서는 전선을 신체에 연결해 특정 부위를 고문했기에 상처가 남았다. 전기막대를 이용하면 한 군데 큰 상처가 생기는 게 아니라 점(點) 모양으로 온몸에 상처가 남는다. 어림잡아 500개가량의 상처가 생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상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과거보다 고문 기술이 상당히 발전한 것 같다.”

    중국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66㎏이던 몸무게가 56㎏으로 줄었다. 석방된 후 체중은 정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정신적 고통도 심했다. 절망과 고립감이 밀려왔다. ‘이대로 주저앉아야 하나.’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당할 동지들이 떠올라 밤잠을 설쳤다.

    ▼ 음식은 먹을 만했나.

    “아침에는 소 없는 찐빵과 옥수수죽이 나왔다. 점심, 저녁엔 멀건 국과 소 없는 찐빵을 먹었다. 원래 위가 안 좋다. 식사 시간이 10분밖에 안 돼 주는 걸 다 못 먹었다.”

    그는 2001년 위암 수술을 받았다.

    ▼ 노역도 했나.

    “단둥교도소에서 하루 13시간씩 노역을 했다. 플라스틱으로 조화 만드는 일을 했다. 객관적으로 아주 힘든 노역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몸으로 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 기소도 안 된 사람을 노역 시키는 법이 어디 있나.

    “그러게 말이다.”

    안전부 인사는 중국 법률을 위반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안전부에서 당한 가혹 행위를 함구한다고 약속해야만 석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석방되면서 중국 안전부 인사들을 향해 외쳤다. “당장 사과하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그가 말을 잠시 멈추고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켠다.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 앉은 덩치 큰 남자가 이따금씩 인터뷰 장면을 쳐다본다. 그를 경호하는 경찰이다. 8월 2일부터 신변보호를 받고 있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성명을 통해 그를 처단 대상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북한 협박 두렵지 않다”

    ‘우리 주민을 유인, 납치한 범죄자에 대한 처단을 비롯한 상응한 조치가 뒤따를 것이다. 김영환은 극악한 민족 반역자, 추악한 변절자다.’

    ▼ 두렵지 않나.

    “북한의 천박한 대응이다.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다. 북한이 그만큼 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북한의 특성을 볼 때 단기적으로는 별일 없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떤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닌가. 독재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보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사에서 소규모 그룹이 커다란 일을 한 사례가 적지 않다.”

    ▼ 당신은 이상주의자인가.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보는 쪽이다. 운동가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5~10년 안에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냉정하게 본다. 다만 단기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작은 것은 희망적으로 본다. 사회주의 운동할 때도 당대에 공산주의가 실현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100년이든, 200년이든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100년 후, 200년 후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심을 두는 것은 운동가로서 당연한 것이다.”

    ▼ 북한에서 5~10년 안에 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보는가.

    “그럴 소지가 꽤 있다고 본다. 봉기가 한꺼번에 불길처럼 번지는 형태로 일어나기보다는 소규모 봉기가 연거푸 일어나고 잔혹하게 탄압되는 과정이 수차 반복되면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북한은 인구 대비 군인 비율이 매우 높다. 군인가족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군인과 민간인의 정(情)적인 유대 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다. 군대를 이용한 잔혹한 탄압이 군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가 매우 중요하다. 군인들이 동요할 소지가 크다고 본다.”

    “북한 봉기 돕는 일 한다”

    ▼ 가까운 장래에 북한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건가

    “그렇다.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

    ▼ 북한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돕는 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의 형태로만 북한의 변화를 추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북한 내 네트워크와 연결되는 인사와 접촉하려 다롄을 찾았다고 한다.

    ▼ 북한 내부에 구축한 네트워크가 북한 전역을 아우르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 북한이 당신들에게 느끼는 실체적 위협은 어느 정도라도 보나.

    “중국 당국이 이번 조사를 통해 확보한 정보 일체를 북한에 넘겨준 것 같지 않다. 북한 처지에서 우리의 실체를 제대로 알면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탓에 과대평가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 북한 내 네트워크에 속한 사람 수가 늘어나고 있나.

    “말하기 어렵다.”

    ▼ 늘고 있다는 뜻인가.

    “…”

    ▼ 북한에서 반체제 활동을 하는 이들은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나.

    “주도적 위치에 있는 분들은 한국의 대북정책 변화에 관심이 매우 높다.”

    그는 “내가 체포돼 있을 때 우리와 연계해 북한 내에서 활동하던 핵심 반체제 인사가 무사히 중국으로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7월 27일 강원 춘천시의 한 폐교에 북한 인권운동가 100명가량이 모였다. ‘김영환 그룹’이다. 114일간 중국에 억류됐다 석방된 4명을 환영하는 행사였다. 참석자들은 그를 ‘리더’로 여긴다.

    ▼ 춘천에 모인 사람은 모두가 동지인가.

    “아무래도 뜻을 같이하니까.”

    ▼ 네트워크를 어떻게 운영했기에 중국 당국의 안테나에 걸려들었나.

    “중국의 네트워크는 기본적으로 단선연계를 추구하지만 민혁당의 그것만큼 철저하지는 않다. 한국에서는 북한 민주화운동이 불법이 아니지 않은가. 한국에서 활동할 때는 단선연계가 아니므로 중국에서 완벽한 단선연계로 조직을 운영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그는 점 조직으로 이뤄진 지하당을 이끌면서 조직 관리 및 보안과 관련한 노하우를 체득했다고 한다.

    ▼ 북한 내부 망이 이번에 얼마나 드러났나.

    “조직의 상당 부분이 드러났다. 중국 정부가 북한 당국에 자신들이 조사한 것을 얼마나 알려줬는지가 가장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하영옥, “線, 돈을 내놓으라”

    ▼ 중국 처지에선 국가안전위해죄 적용을 검토해볼 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 정권 전복 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는 그런 활동을 했지만. 중국 땅에서 제3국의 정보를 취득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인을 끌어들인 것도 불법이다. 중국인을 동참시킨 것은 증거가 있었다.”

    ▼ 중국에 아직 수감돼 있는 동지는 없나?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같은 구치소에 수감된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7월 25일 석방됐다. 내가 고문당한 사실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다시 구금될 것 같지는 않다. 주요 관련자를 점검해봤는데, 구금당한 사람이 더는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른 소문에 따르면 우리와 관련된 사람 대여섯 명이 구금돼 있다고 한다.”

    ▼ 첫 기자회견 때 고문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은 그들의 신변을 걱정해서였나. 아니면 정부의 요청 탓이었나.

    “국정원과 외교부가 신중하게 판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압력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개인적 판단으로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아예 말을 안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아직 귀국하지 않은 한국인 관련자가 있었다. 조선족 관련자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파악해야 했다. 상황을 봐가면서 공개하려고 했는데 언론 보도가 나오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민혁당은 그와 하영옥·박○○ 씨 3인으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했다. 1997년 민혁당 중앙위원회는 표결을 통해 해체를 결정했다. 하영옥은 김영환을 변절자로 여기면서 민혁당 산하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를 관리했다. 이석기, 이상규 통합진보당 의원이 민혁당 출신이다. 하영옥은 김영환에게 전향하려면 선과 돈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 김일성에게 돈은 얼마나 받았나.

    “1991년 딱 한 번 받았다. 40만 달러.”

    ▼ 선과 돈은 어떻게 했나?

    “돈은 남아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남은 게 있어도 넘겨줄 수 없다고 덧붙였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활동에 쓰일 게 분명한데 돈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선도 마찬가지다. 내가 반대하는 방향의 일에 활용될 것이 분명해 넘겨주지 않았다.”

    그는 전향한 뒤에도 1997년까지 북한 접촉망을 유지했다. 선을 끊어버리면 북한이 다른 조직원에게 접근할 소지가 있다고 봤다. 조직원을 모두 전향시킬 시간을 벌고자 했다.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전향했고, 나머지는 설득하는 것이 단기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선을 완전히 끊어버린 게 1997년이다.

    ▼ 어떤 방식으로 북한과 연결됐나.

    “사람을 통해서 연결돼 있었고, 북쪽에서 라디오 방송을 이용해 암호문을 보냈다. 남에서 북으로 연락할 때는 무전기를 사용했다.”

    ▼ 민혁당은 지금껏 생명력이 이어지는 이례적인 지하당이다.

    “민혁당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중앙위원 3명과 내가 직접 지도한 간부들은 실체를 웬만큼 안다. 직접 지도한 사람 중 자수하지 않은 사람은 하영옥이 유일하다. 이석기는 하영옥의 지도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하영옥이 관리하던 조직원 수가 많았다. 하영옥은 나만큼 주체사상을 몰랐다.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굉장히 강했던 것을 제외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강한 사람이었다. 하영옥 외엔 최○○, 이석기, 영남위원장 하던 이의엽(전 통합진보당 정책위의장)이 리더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 다만 이의엽은 카리스마와 권력욕이 약하다. 얼마 전 들은 얘기에 따르면 하영옥, 최○○는 운동을 그만뒀다고 한다. 생각의 변화 덕분인지, 헤게모니 다툼에서 밀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뭔가를 숨기기 위해서 위장한 것일 수도 있고.”

    이석기, 전략적 사고에 약하다

    “북한서 민중봉기 일으키겠다 내 방식 주체사상 포기 안 해”

    김영환 씨가 8월 3일 국회 본청에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왼쪽) 등 국회인권포럼 소속 의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그는 3월 23일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명단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느닷없이 이석기가 수면으로 나온 것이다. ‘지하활동을 포기한 것인가’ ‘이석기가 어떻게 지상으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하영옥, 최○○, 이석기의 관계가 어떻게 됐는지 잘 몰랐다. 민혁당에서 하영옥의 서열이 이석기보다 위다. 하영옥이 이석기를 지도했다. 이의엽은 초기에 최○○의 지도를 받았다. 주사파 조직 리더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당시엔 하영옥이 지하에 있으면서 이석기를 수면으로 내보냈다는 생각을 했으나 한국에 돌아와 얘기를 들어보니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 사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잠 안 재우기 고문을 당할 때 이석기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화나지 않나.

    “그게 화를 낼 일인가.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지.”

    ▼ 이석기는 통합진보당의 사퇴 요구를 거부했다.

    “이석기가 원래 그랬다. 전략적 사고가 떨어진다.”

    ▼ 7월 27일 춘천시에서 열린 석방 환영대회 때 “이석기는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다. 지시한 것은 반드시 이행했다. 조직에 대한 헌신성이 대단했다”고 평가했다고 들었다.

    “이석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다. 민혁당 할 때는 장점이 많다고 봤다. 가족과 같은 단결력을 과시했다. 선배가 조직과 후배에게 무한하게 헌신하면서 후배에게도 똑같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3000만 원짜리 전세에 사는 조직원에게 2500만 원을 당에 내놓고 500만 원 월세 방으로 이사하라고 해 활동자금을 충당한 사례도 있다. 가족과 같은 단결력을 과시하다보면 부정, 부패에 둔감해진다. 조직원 상호 간 인권침해가 일어날 소지도 크다. 한국외대 용인캠퍼스는 주체사상을 받아들이기 전인 1986년 이전부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경기동부적 요소는 주사파 주류에서 볼 때는 이단적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부분이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당 중앙의 지시도 잘 따랐다. 그들의 특성이 혁명 과정에서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하영옥은 언제 마지막으로 봤나.

    “2005년, 아니 2006년. 정확한 시점은 모르겠다. 서클 후배 장례식장에서 마지막으로 봤다.”

    둘은 갈라선 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조우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상규가 하영옥 옆에 앉아 있었다. 셋은 같은 서울대 서클 소속이었다.

    “내가 악수를 청했더니 하영옥이 얼떨결에 악수를 받았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하영옥이 따라 나왔다. 하영옥이 말했다.

    “영환아! 너는 변절자요, 배신자다.”

    하영옥은 그가 배신자, 변절자인 이유를 길게 설명했다.

    “하영옥과 이상규는 당시까지 하나도 바뀌지 않았더라. 5, 6년 전까지 1980년대와 똑같았단 예기다. 법대 1년 후배인 이상규가 국회의원이 된 것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 이상규는 이석기보다 사상 문제에서 융통성이 있었나.

    “이상규 학번을 지금도 기억한다. 8312-2222. 이상규 역시 합리적이지 못했다. 한번 믿으면 앞뒤 안 가리고 행동했다.”

    그가 이끈 서울대 서클 이름은 고전연구회다.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전을 읽었다. 단재사상연구회라는 지하 서클도 운영했다. 하영옥, 이상규는 두 서클 모두에서 활동했다. 김미희 통합진보당 의원은 단재사상연구회에만 속해 있었다.

    “김미희는 하영옥, 이석기, 이상규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민혁당에 가담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지시하면 토 달지 않고 지고지순하게 따르는 스타일이다. 성남에서 지역 활동을 하다 경기동부에 합류했다.”

    최홍재 김영환석방대책위원회 대변인은 경기동부는 묵가(墨家)를 닮았다고 말했다.

    “경기동부는 운동 기풍(氣風)이 굉장히 강했다. 묵가 집단 같았다. 일종의 공동체였다. 경기동부의 기풍에선 개인적 요소가 등장할 수 없었다. 합숙하면서 새벽에 함께 기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또한 개인 소유가 없었다.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오면 공동체에 내놓았다. 경기동부가 통합진보당 당권까지 장악한 것에는 이러한 기풍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묵가(墨家) 닮은 경기동부

    묵가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의 사상가 묵자(墨子)를 계승하는 학파를 가리키는 말이다. 묵가 집단은 거자(巨子)를 지도자로 삼아 강력한 단결을 자랑했다. 거자는 묵학도의 법을 범한 자에 대해 생살여탈권을 가졌다. 맹자는 “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며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적었다.

    ▼ 민혁당 잔류파는 당신을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서울대 출신이 1980년대 주사파의 중심이었다. 철저한 단선연계 조직이던 터라 하부 조직원은 중앙위원장(김영환)은 물론이고 중앙위원이 어느 학교 출신의 누구인지 몰랐다. 경기동부 쪽은 이론적· 사상적으로 무지한 측면이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여긴다는 느낌을 그쪽에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통합진보당 구당권파를 생계형 조직으로 깎아내리는 시각도 있다.

    그는 “그렇게 보긴 어렵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경기동부가 조직력이 탄탄해 부각됐을 뿐이지 그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고 보기 어렵다. 민혁당 영남위원회 쪽과 경기동부가 갈라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1990년대 기준으로는 영남 쪽이 세가 더 강했다.”

    ▼ 당원 100명 중 전향한 사람은?

    “자수한 사람이 30명에 못 미친다. 나머지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도 민혁당이라는 이름을 쓰는지 궁금하다. 신민혁당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들이 하나의 조직으로 묶여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형태로든 조직이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 종북파의 궁극적 목적이 뭐라고 보나.

    “용공 정부를 수립해 북한 주도로 통일을 이루는 것일 소지가 대단히 크다고 본다. 종북주사파는 생각을 바꾸면 리더십을 유지할 수 없다. 조직원을 설득해 생각을 바꾸게 할 리더십을 가진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기본적인 사상뿐 아니라 노선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영남위원회와 경기동부가 갈라지지 않았는가. 양쪽을 아울러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은 하영옥과 최○○뿐이다. 통합진보당에서 영남 쪽과 경기동부가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협력하고 있지 않은가. 통합진보당에서 현재 벌어지는 일은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 수면으로 떠오른 종북주사파는 빙산의 일각인가.

    “조직력이 강할 뿐이지 종북파는 소수만 남아 있다.”

    “김일성도 주체사상 모르더라”

    1991년 그가 방북했을 때의 일이다. 김일성에게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일성이 학자 여럿을 붙여줬다. 학자들에게 “수령이 오류를 범하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다. 학자들은 화들짝 놀라 횡설수설했다.

    “학자들이 정확히 어떻게 답변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황하면서 동문서답을 했다. 아, 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얘기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현재도 주체철학을 틀로 삼아 세상을 본다. 젊은 시절 꿈꾼 ‘이상 사회’를 아직 폐기하지 않은 것이다.

    ▼ 민혁당 강령에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넘쳐나는 완전히 자주화된 사회’라는 구절이 나온다. 아직도 그런 사회를 지향하나.

    “그렇다.”

    ▼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넘쳐나는 완전히 자주화된 사회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

    “더 이상 해석이 필요 없는 글자 그대로다. 그 문장에 주체철학의 핵심 개념이 담겨 있다. 소유, 계급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기본적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이 지금 가진 사상을 인간중심사상, 인간중심의 철학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그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폐기한 것은 주체철학의 틀로 봤을 때 북한이 형편없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의 동지라고 생각해온 북한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오랜 고민 끝에 한국 주도로 주체사상을 발전시켜 새로운 길을 북한에 제시하겠다고 다짐했다. 인터뷰에 앞서 그에게 e메일로 보낸 질문 요지엔 주체사상과 관련한 내용이 가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이런 내용이 지금 나가도 되는지 저도 판단이 잘 안 되고 여러 사람의 자문을 구하느라 늦어졌습니다. 이런 사상적인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하지만 신동아의 독자들이나 지금 우리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분들이 쉽게 우리의 사상을 이해할지 의문이 듭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이런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는 것은 무척 뜻 깊은 일이고 우리의 이런 면이 알려지는 것이 언젠가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지금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듯합니다.”

    실제로 그를 만나서는 인간중심 철학과 관련한 문답을 오랜 시간 주고받았으나 글로 옮기지는 않는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부연하면 그가 말하는 주체철학과 북한의 주체사상은 출생지를 제외하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주체철학은 마르크스 계급주의와 수령절대주의, 전체주의에 반대한다.

    “주체사상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김일성이 만든 민족공산주의, 황장엽 선생이 만든 주체철학, 북한 선전부가 만든 수령론이다. 민족공산주의와 수령론은 존중할 만한 내용이 없다. 핵심은 주체철학이다. 실제로 만나본 김일성은 주체철학에는 관심이 없더라. 주체철학의 내용이 뭔지 알지도 못했다”

    황장엽과 그는 서로 다른 곳에서 주체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황장엽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과 생각의 지점이 비슷한 노(老)철학자의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북한에서 재건의 삽 뜨겠다”

    그가 과거에 쓴 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국가보안법이 없었더라면 나는 주사파 리더의 위치를 활용해 활발한 공개적 논의를 통해 거의 대부분의 주사파를 사상 전환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직간접적으로 만나서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던 사람들만 함께 사상 전환을 하게 되었다.”

    ▼ 지금도 비슷한 생각인가.

    “수동적인 것보다는 능동적이고 공세적인 것을 좋아한다. 국가보안법 없애고 정면으로 맞붙는 게 낫다. 국가보안법이 없었다면 종북주사파가 더 일찍 사라졌을 것이다.”

    ▼ 당신을 두고 극좌에서 극우로 이동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핍박받는 민중에 대한 연대 의식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지금도 핍박받는 북한 주민을 돕고 있다.”

    ▼ 활동자금은 넉넉한가.

    “늘 부족하다. 국민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지·응원해줬으면 좋겠다.”

    ▼ 살면서 지금처럼 주목받은 적이 있나.

    “신문 1면을 장식한 게 이번 말고 두 번 더 있다. 1987년 강철서신 사건, 1999년 민혁당 사건이 발표됐을 때다.”

    ▼ 대입 학력고사 점수 기억하나.

    “340점 만점에 318점. 문제가 어렵게 나왔다. 문이과 합쳐서 전국 25등.”

    ▼ 부모님의 기대가 컸을 텐데….

    “법관이 될 거라고 생각하셨다.”

    ▼ 2004년, 2008년 총선 때 새누리당으로부터 입당 제의를 받은 것으로 안다. 왜 거절했나.

    “하태경 의원과 나는 북한 민주화운동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다르다. 나는 상징적, 지도적 지위에 있다. 지금껏 해온 일이 국회에서 하는 일보다 중요하다.”

    ▼ 10년 뒤에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나.

    “북한 재건을 돕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북한 주민이 해방되는 날을 기다린다. 재건의 삽을 들고 북한에서 일할 날을 꿈꾼다. 조바심이 난다. 목이 빠진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