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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 이제는 우주다

부활호에서 T-50까지 그리고 KFX를 향해

한국의 항공산업

  • 김종대 /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jdkim2010@naver.com

부활호에서 T-50까지 그리고 KFX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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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공산업 없이 우주산업 없다.” 과거 30년은 날고 싶은 ‘거위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이 일관되게 항공산업 정책을 펼쳐온 기간이었다.
  • 앞으로의 30년은 이 꿈을 실현하는 기간이다. 항공·우주산업을 성공적으로 육성하려면 정권에 따라 바뀌지 않는 일관된 항공정책이 있어야 한다.
  •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의 항공산업이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부활호에서 T-50까지 그리고 KFX를 향해

1 한국이 최초로 독자 개발한 KT-1 기본훈련기 2 한국 최초의 초음속기인 T-50

조선시대에 ‘비차(飛車)’를 만들어 타고 날았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는 항공기에 대한 오랜 염원과 역사가 있다. 그러나 근대화에 실패해 세계의 변방이 되면서 항공은 단지 꿈으로 전락했다. 항공 불모지였던 우리나라가 다시 항공기를 향해 눈뜨게 된 계기는 식민지 경험과 전쟁 체험이었다. 우리나라의 항공에는 식민지와 전쟁, 산업화를 관통하는 파란만장한 현대사가 압축돼 있다.

조선인 최초의 조종사 안창남은 ‘금강호’를 몰고 식민지인 조국에 나타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전쟁의 사연을 담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우리나라 최초 설계의 ‘해취호’와 그 뒤를 이은 ‘부활호’‘통해호’.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자주국방의 표상으로 추진된 ‘제공호’와 산업화·민주화 시대를 관통해 항공기 수출 시대를 연 기본훈련기 KT-1과 고등훈련기 T-50의 생산 과정은 대한민국 현대사 그 자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제 대한민국은 중견 항공 국가로 세계와 우주를 향해 비상하고자 한다. 외국 전투기에 의존해온 굴레를 벗고 “독자적으로 항공기를 개발해보자”는 의지와 비전은 밝은 면이다. 자주국방을 표방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해 국산 항공기 개발의 초석을 놓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2000년대 한국형 전투기를 만들겠다’며 선진 항공기술 도입을 전제로 한 한국형 전투기사업(KFP)을 펼쳤다. 그리고 지금 한국형 전투기를 개발하는 KFX사업을 펼치고자 한다.

항공산업의 빛과 그림자

KFX사업은 항공 분야의 산업과 기술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한국 항공업계가 반드시 달성해야 할 분명한 중간 목표다. KFX사업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한국은 KFX를 넘어 그 이상의 세계로 날아가야 한다. 항공력을 외국에 의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림자도 있다. 항공 선진국이 보유한 최첨단 기술과 막강한 인프라에 눌려 지레 겁을 집어먹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한들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패배주의와 비관주의가 큰 장벽이다. 소수의 백인 국가가 주도하는 항공 분야에 후발 주자인 우리가 막대한 투자를 한들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경되는 항공정책과 국산 항공기보다 외국 항공기의 직구매를 선호하는 군의 정서도 항공산업 발전을 어렵게 한다. 미래에 필요한 핵심기술 축적을 곤란하게 하는 형식주의와 관료주의, 그리고 전략적인 사고능력의 결핍 등 대한민국 항공이 날아야 할 창공엔 두꺼운 먹구름이 끼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항공산업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대립했다. 우리의 산업화는 기계산업으로 출발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전자, 통신, 소재 분야로 발전했다. 이것이 선진 항공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자 다양한 국제협력을 이끌어내는 도약대다. 다른 나라들이 백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항공 선진화를 30년 만에 이룬 비법이다.

일반적으로 항공산업은 창 정비→라이선스 조립(면허생산) 및 부품 국산화→독자개발 및 국제공동개발 순으로 발전한다. 교과서적인 이러한 발전 경로를 걷게 된 것은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한 후의 일이다. 그전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항공기 제작 경험을 쌓았다.

건국기, 부활호, 해취호…

전쟁 시인 1952년 우리나라에서 설계해 만든 최초의 항공기 부활(復活)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부활호는 85마력짜리 왕복엔진을 장착한 길이 6.6m, 폭 12.7m, 높이 2.07m의 경비행기급으로 총 3대가 제작됐다. 1954년 비행시험을 했다는 기록을 남긴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2004년 경북 경산의 한 고교 지하창고에서 기체가 발견됐다. 이름대로 역사 속에 부활한 부활호는 현재 공군사관학교에 영구 보존된 문화재가 되었다.

해취호(海鷲號·물수리라는 뜻) 제작은 부활호보다 앞선 1951년 이루어졌다. 해취호는 미군이 쓰다가 추락해서 버린 AT-6 텍산 연습기를 주어다 부낭(浮囊·바다나 호수에 떠 있게 해주는 공기주머니)을 달아 해상에서 사용하도록 개조한 수상비행기다. 새로 만든 게 아니라 개조한 것이니, 들어간 것은 ‘현란한 손재주’다.

한국인이 최초로 제작한 항공기이기는 하지만 미군 항공기를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이기에 국산 항공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같은 시기 우리는 미국의 T-6 연습기를 개조한 NK-1 통해호도 제작했다. 그러나 통해호는 취역 석 달 만에 바다에 추락했다. 해군 항공반은 새로운 수상항공기 제작에 도전해 1954년 6월 서해호를 세상에 내놨다. 미 공군의 L-5 연락기 엔진을 토대를 제작한 서해호는 평화선을 넘어오는 일본 어선을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25전쟁 전 우리가 최초로 보유한 군용기는 L-4 연락기였다. 1940년대 제작돼 1948년 9월 13일 공군의 전신인 육군항공대가 미군으로부터 10대를 인수한 프로펠러 비행기다. L-4는 여수·순천사건이나 지리산 공비 관련 작전에 투입됐다. L-19 연락기가 도입되면서 1954년 퇴역했다. L-4와 함께 운용했던 L-5 역시 무장이 없고 골조도 간단한 연락기였다. 이어 한국은 한결 나은 T-6 텍산 훈련기를 캐나다에서 10대가량 사왔다. 이러한 군용기는 정부를 세울 때 들어온 것이라 ‘건국기’로 통칭됐다.

6·25전쟁기 한국 공군은 미 공군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F-51D 머스탱을 도입해 지상공격용으로 투입했다. 우리는 이 전투기를 흔히 ‘무스탕’으로 불렀다. 북한군의 중요 보급루트 중 하나인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성공시킨 것이 바로 머스탱이었다. 그러나 머스탱은 제트엔진을 달지 않았다. 당시 제트엔진은 첨단 전투기에만 탑재됐다. 제트엔진을 단 F-86 세이버는 미 공군만 운용해 미그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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