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지구패권 이어 우주패권도 잡는다

미국의 우주 개발사

  • 정홍철 / 스페이스스쿨 대표 wrocket@chol.com

    입력2012-08-27 17: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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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미국은 우주 초강대국으로 꼽힌다. 그러나 미국의 우주 개발 과정은 자체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노력만이 아니라 행운과 시대적 상황, 정치적 결단이 맞물려 이뤄진 것이다. 현재 작은 좌절을 겪으며 우주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우리에게 미국의 우주 개발사는 어떤 교훈을 주는가.
    지구패권 이어 우주패권도 잡는다

    아폴로 11호 달 착륙 영상을 전송한 TV 화면.

    미국의 공식적인 우주 개발 역사는 1958년 익스플로러-1호를 궤도에 진입시키면서부터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노력은 1920년대부터 진행되었다. 라이트 형제가 동력으로 비행하는 항공기를 띄운 것이 1903년이니 항공을 시작하고 바로 우주 개발에 나선 것이다.

    시작은 1919년 한 대학 교수가 발표한 작은 논문이었다. 논문 제목은 매우 거창해서 ‘초고도에 도달하는 방법’, 저자는 클라크대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로버트 H. 고다드(Robert Hutchings Goddard) 박사였다. 국내외에서 발간된 우주 관련 책은 대부분 고다드가 우주여행을 꿈꾸며 이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고다드가 이 논문을 쓴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머리말에도 나오듯이 고다드는 당시의 고고도 비행체인 풍선보다 더 높은 곳(고도 32km 이상)까지 관측 장비를 실어 보낼 추진 장치로서 로켓 활용성에 대해 언급했다. 현대의 ‘사운딩 로켓(Sounding Rocket·과학관측 로켓)’의 가능성을 예측한 것이지 우주비행사를 태우고 비행하는 우주선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액체로켓 최초 발명

    공학도답게 그는 많은 수식(數式)이 들어간 지루한 문장의 논문을 만들었다. 그는 초고도의 타깃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 ‘달(Moon)’을 거명했다. 이것이 미디어의 관심을 끌어 그의 로켓은 SF소설에 등장하는 ‘달 로켓(Moon Rocket)’이 되고 말았다. 1920년 1월 12일자 뉴욕타임스는 고다드 박사가 지구 대기를 넘어 달까지 도달할 수 있는 고효율의 로켓을 발명하려는 내용의 논문을 썼다고 보도했다.



    이 과장된 보도로 고다드의 로켓은 도달 고도가 32km에서 38만km로 잘못 알려지고 말았다. 이런 시선이 고다드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그 후 고다드는 평생을 바쳐 연구했건만 그의 로켓이 도달한 고도는 애초 목표의 10분의 1도 안되는 2.7km에 불과했다.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로켓 개발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고다드의 업적은 화약을 이용한 고체추진제의 비효율을 실험실 수준에서 확인하고, 대안으로 액체추진제 로켓을 발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20년간 214개의 로켓 특허를 획득했으니 가히 현대 로켓의 발명자라고 할 만하다. 고다드가 숨진 뒤인 1960년 NASA(항공우주국)가 고다드 특허 무단 사용을 인정해 미망인에게 100만 달러를 지불하기도 했다.

    고다드가 찾아낸 액체추진제는 가솔린과 액체산소였다. 가솔린과 액체산소는 구하기 쉽기에 주목을 받았다. 이 연료를 사용하는 최초의 액체로켓 비행이 1926년 매사추세츠 주 클라크대학에서 가까운 그의 친척 농장에서 이뤄졌다. 외피 없이 골조만으로 이루어진 4.7kg짜리의 원시적인 액체로켓은 2.5초 동안 56m를 날았다. 도달고도는 12.5m에 불과했다. 로켓의 자세를 제어할 만한 장치가 없었기에 수직으로 날기보다는 수평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 실험으로 고다드는 로켓 비행에는 추진력과 더불어 자세 제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자세 제어 장치 개발에 노력을 쏟아 부었다.

    이런 업적에도 고다드의 로켓은 미국 로켓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폐쇄적인 연구 방식과 연구비 부족이었다. 그는 다섯 명 정도의 보조 인력을 이끌고 연구했다. 대서양 횡단비행을 한 영웅 찰스 린드버그의 소개로 알게 된 구겐하임재단으로부터 지원받은 연구비로 그가 완성할 수 있는 로켓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로켓은 1940년에 만든 길이 6.7m, 무게 107kg짜리였다. 적은 인력과 적은 자금이 지구 반대편에서 진행된 독일의 V-2로켓(길이 14m, 무게 12t)과 현격한 차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고다드가 미국 우주 개발에 미친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달 로켓 발명가로 미디어에 소개되면서 공개된 그의 연구내용과 논문은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던 아마추어 로켓 연구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1930년 미국로켓협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폐쇄적인 성격의 고다드와 정보를 교류하지 못했다. 미국로켓협회에서 만든 로켓도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1938년 제임스 와일드가 만든 재생냉각형(2겹의 연소실벽 사이로 연료를 흘려보내는 방식) 엔진은 모든 로켓 개발자에게 골칫거리였던 엔진 냉각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와일드를 비롯한 미국로켓협회 회원 일부가 1941년 세계 최초로 로켓엔진 개발 회사를 설립했다. 제너럴 모터스를 본떠 ‘리액션 모터스(Reaction Motors)’로 사명을 정했다.

    미국 동부에 아마추어 로켓협회가 있었다면 서부에는 프로페셔널에 가까운 조직이 있었다.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구겐하임 항공연구소(GALCIT)가 그 것이다. 미국이 우주 개발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구겐하임재단의 역할은 매우 컸다. 구겐하임 항공연구소는 고다드보다도 이후의 미국 우주 개발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연구소의 중심인물은 헝가리 출신의 항공역학자인 테오도르 폰 카르만(Theodore von Karman)이었다. 이 연구소는 미 육군의 도움으로 파사데나 계곡의 땅을 빌려 ‘자살특공대’란 별명을 얻으며 위험한 로켓 연소 실험을 해나갔다.

    이들의 연구 목적은 미 육군으로부터 의뢰받은, 비행기 이륙보조용 추진장치(JATO) 개발이었다. 1943년 제트추진연구소를 설립한 이들은 고체추진제 연구에서 오늘날 복합추진제로 불리는 연료의 토대를 놓았으며 액체추진제 연구에서는 상온 보관이 가능하고 자동점화 기능이 있는 하이퍼골릭(Hypergolic) 추진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연구는 독일에서 급속히 진행된 연구에 비하면 아마추어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외국 수혈통해 급성장

    미국이 걸음마를 하던 1940년대 독일은 놀라운 진보를 이뤘다. 주인공은 우주여행을 꿈꾸던 아마추어 로켓동호회 출신의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이었다. 그는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받았기에 세계 최고의 로켓 전문가가 되었다. 고다드는 최대 5명을 데리고 연구했지만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은 폰 브라운은 3000여 명의 인원을 거느렸다. 많은 대학과 연구소, 회사들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1944년 탄생한 것이 V-2였다. 그러나 독일의 패망으로 이 기술은 고스란히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폰 브라운을 비롯한 120여 명의 핵심 인력이 미국 망명을 선택한 것. 이때 상당량의 자료가 소련으로도 넘어갔다. 미국은 소련보다 먼저 V-2 제작 공장이 있는 노르트하우젠과 미텔베르크에 도착해 V-2 100여 기를 만들 수 있는 완성품과 부품을 획득했다. 미국은 V-2 연구원들이 몰래 숨겨둔 설계도도 입수했는데 이것이 미국 우주 개발의 핵심 토대가 되었다.

    미국 항공회사들은 V-2 기술을 나사 하나까지 복제해가며 익혔다. 그리고 성능을 개선해가며 V-2 파생품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번째 작품이 미국 최초의 우주발사체가 되는 레드스톤 미사일이다. 이 미사일 개발에는 6·25전쟁이 기여한 바 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탄도미사일의 전략적 가치를 간과해, 탄도미사일을 시급히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폰 브라운은 텍사스 주 포트 브리스에서 V-2 복원 발사를 하는데 자문을 하며 허송세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6·25전쟁을 계기로 미사일 필요성을 절감한 미 육군은 폰 브라운을 앨라배마 주 헌츠빌의 레드스톤 병기창에 전속 배치해 미국형 V-2인 레드스톤을 개발하게 했다. 그러나 폰 브라운은 미사일이 아니라 우주선을 실어 나르는 우주발사체 제작을 꿈꾸고 있었다. 1951년 폰 브라운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V-2 세례를 받았던 런던에서 열린 제2회 국제우주대회에 참석해 유인 화성 탐사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기도 했다(2009년 한국은 대전에서 이 대회를 개최했다). 사거리 325km의 레드스톤 미사일이 완성되기 전 그는 화성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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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폰 브라운(아래)과 V-2로켓 모형

    1952년 폰 브라운은 ‘콜리어스(Collier’s)’란 잡지에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 우주정거장이나 우주왕복선, 달 탐사선을 묘사한 총천연색 그림을 넣었는데 적잖은 로켓 개발자가 그의 몽상가적 비전에 냉소했다. 그러나 일반 미국인의 반응은 달랐다. 월트 디즈니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폰 브라운의 우주 비전에 매료돼 그의 이론을 영상으로 옮긴 세 편의 우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디즈니랜드에는 우주여행을 테마로 한 놀이시설을 마련하도록 했다. 특유의 과학 세일즈 능력 덕분에 폰 브라운은 우주여행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전쟁 말기의 독일은 궁핍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V-2 개발을 계속하려면 폰 브라운은 세일즈를 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에 온 그는 국가적 지지가 없으면 우주로 갈 수 없다고 보고 숨어 있는 능력을 꺼낸 것이다. 우주 개발은 국민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어야 발전한다. 그는 우주 개발 전도사 역할을 했다. 한국에도 우주 개발 전도사가 필요하다. 왜 우리는 우주 개발이라고 하는 하드웨어에만 집중하고 그 토대가 되는 꿈을 만드는 일은 등한히 할까.

    그런데 중요한 순간 폰 브라운에게 좌절이 찾아왔다. 지구물리학계의 11개 분야 학자들은 지구와 지구환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일정 기간 지구와 지구환경을 연구하는 ‘국제지구물리관측년(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 제도를 만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1957년 7월 1일부터 1959년 12월 1일 사이에 펼쳐진 3차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었다.

    뱅가드의 불행, 불운…

    3차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 확정된 1955년, 미국은 인공위성을 발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미국에서는 각 군이 우주 개발에 도전하고 있었으므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줄 발사체로 무엇이 선택될지 관심이 집중됐다. 미 육군은 폰 브라운이 개발해온 레드스톤 미사일을 개량한 주피터-C를 이용해 위성을 발사하는 ‘오비터 계획’을 제안했다. 미 해군은 고공 과학탐사용 바이킹 로켓을 발전시킨 뱅가드를 이용한 ‘뱅가드 계획’을 내놓았고, 미 공군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아틀라스를 이용한 ‘월드 시리즈 계획’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자고 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미 육군의 오비터 계획이었다. 인공위성은 저궤도에서 초속 7.7km의 속도로 궤도를 돌아야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 속도를 내려면 강력한 발사체로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로 쏘아야 한다. 중거리탄도미사일의 실험용이었던 주피터-C의 탄두부는 대기권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데, 그때 속도가 초속 7km 정도였다.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려놓는 속도 7.7km에 상당히 근접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군은 발사시험은 하지 못하고 겨우 설계를 하는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은 군사가 아닌 과학 사업이라는 이유로, 해군연구소가 과학용으로 개발하고 있는 뱅가드 계획을 선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소심함 때문에 미국은 이런 선택을 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인공위성을 이용한 소련의 정찰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군사용 위성이 정찰을 위해 적국의 상공을 지나면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리고 군사용 발사체를 이용한 인공위성 발사를 회피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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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육군의 레드스톤(왼쪽) 미사일과 주피터-C 발사체.

    해군의 뱅가드는 3단이었다. 뱅가드 1단의 추력은 주피터-C 1단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12t 짜리였다. 2002년 우리나라가 발사한 KSR-3의 추력이 13t이었으니, 이보다 낮은 추력으로 위성을 띄우는 우주발사체를 제작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기간이 짧은 탓에 뱅가드 발사체 완성 시기를 국제지구물리관측년에 맞추지 못했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인류 최초의 위성 발사는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해냈다.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질책이 쏟아지자 다급해진 백악관은 그해 12월로 예정된 뱅가드의 3차 시험발사를 실제 발사인 것처럼 과장해 발표했다. 그때부터 뱅가드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다.

    뱅가드는 여러 시스템이 미완성 상태였기에 여러 차례 시험발사가 필요했다. 그런데 정치적 이유로 3차 발사를 공개 발사로 전환했다. 1957년 12월 6일 뱅가드는 발사 직후 바로 추락해, 미국은 세계적인 망신을 사게 되었다. 이것이 폰 브라운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스푸트니크 쇼크를 받은 미국인들은 미국인이 만든 것이든 독일인이 만든 것이든, 과학용이든 군사용이든 따지지 않게 된 것이다. 냉전의 상징인 우주전쟁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냉전은 미국의 우주 개발을 발전시킨 최대의 원동력이었다.

    ‘구원 투수’ 폰 브라운의 성공

    폰 브라운이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V-2는 생산 후 시일이 지나면 성능이 저하됐다. 이 때문에 미 육군은 1956년부터 새로 만든 주피터-C 여러 기를 창고에 장기 보관하는 시험을 했다. 위성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폰 브라운은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제29호 주피터-C 로켓에 운명을 걸었다. 폰 브라운은 발사체에 대해서는 자신했다. 그러나 위성 쪽은 불안해했다.

    스푸트니크-1호를 제작한 소련의 세르게이는 발사 날짜를 앞당기기 위해 ‘꼼수 위성’을 제작했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 임무를 수행하려면 실험장비를 탑재한 위성을 올려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해 그런 장비가 없는 위성을 올린 것. 시간이 부족하기는 폰 브라운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아이오와주립대학의 제임스 반 앨런 박사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장비를 갖춘 위성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58년 1월 31일 V-2에 뿌리를 둔 레드스톤 미사일의 변형인 주피터-C가 발사됐다.

    우주발사체로서 주피터-C는, ‘주노(JUNO)-1’으로 명명되었다. 주노-1은 익스플로러-1호 위성을 성공적으로 지구 궤도에 올려놓았다. 미국 최초의 위성인 익스플로러-1호는 지구 주위의 방사능 띠를 발견하는 등의 혁혁한 성과를 올리며 1970년 3월 31일까지 궤도에 남아 있었다. 이 성공으로 나치의 과학자인 폰 브라운은 일약 주전투수가 되었다. 다음 경기는 그가 독일우주여행협회의 꼬맹이였던 시절부터 꿈꾸던 유인 우주비행과 달 비행이었다. 익스플로러-1호 성공으로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소련에 추월당해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미국은 연구기구의 설립을 추진했다.

    그에 따라 1958년 10월 1일 오늘날까지 가장 유명한 연구·행정기관인 국립항공우주국(NASA)이 출범했다. NASA는 X-1이란 초음속 로켓기 등을 개발한 국립항공자문위원회(NACA) 산하의 연구센터인 랭글리·에임즈·루이스·에드워드공군기지와 미국 최초로 탄도미사일을 개발한 제트추진연구소, 뱅가드 로켓과 위성을 연구하던 미 해군연구소(그후 고다드우주비행센터로 개칭)와 폰 브라운이 이끌어온 육군 탄도미사일개발국(그후 마셜우주비행센터로 개칭)을 흡수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군의 우주 조직은 빠졌다는 점이다. 덕분에 공군은 군사 목적의 우주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미 공군은 우주사령부를 설치해 수많은 군사위성과 지상에서 발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관리하게 되었다.

    NASA 출범 불구 소련에 또 뒤져

    NASA는 출범 5일 만에 원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유인 우주비행인 ‘머큐리(Mercury)계획’을 세운 것이다. 미국 과학계는 유인 우주비행과 관련한 제반 기술을 쌓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머큐리 계획은 해볼 만한 도전이었다. 신뢰성 있는 발사체인 레드스톤이 있고, X-1 유인 로켓기가 초고속으로 고고도 비행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ICBM의 탄두 재돌입체 귀환실험을 통해 우주선 귀환과 관련된 기술도 확보해 놓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도 유인 우주비행을 준비할 것으로 예측했다. 미국은 유인 비행에서는 소련을 앞서기로 하고 최우선으로 머큐리 계획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NASA와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 조직과 항공우주 산업계, 교육기관 등에 200여만 명의 인력을 투입했다. 국가 과학 인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개발자들은 ‘깡통(Can)’이란 별명으로 불린 1인승 유인 캡슐과 이 캡슐을 싣고 발사할 수 있도록 레드스톤의 설계를 변경하는 일에 매달렸다. 발사가 잘못됐을 때 캡슐에 있는 우주비행사를 비상 탈출시키는 하드웨어 개발도 추진했다.

    그리고 유인 우주비행을 할 우주비행사 선발을 추진했다. 1959년 4월 최초의 우주비행사 후보로 군인 신분의 시험비행조종사들이 대거 선발되었다. 그러나 시스템 완성 일정이 불분명했다. 1.3t의 머큐리 우주선을 궤도에 진입시킬 방법은 당시 공군이 개발해 발사체로 쓰는 ICBM 아틀라스를 개량하는 것뿐이었다. 시스템 완성 일자가 불확실했던 것은 아틀라스를 개조한 발사체 개발 일정이 불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준비를 갖추자 시험을 할 필요가 있었다. 신체구조가 사람과 가장 비슷한 침팬지를 태우고 쏘아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궤도비행에 앞서 준(準)궤도(포물선)비행을 준비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처럼 우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비행체에 사람을 태워 발사해보는 것이다. 미국은 최초 유인 우주선 발사 일정을 1960년 10월로 잡았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연기했다. 그러는 사이 소련에 또 선수를 빼앗겼다.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을 태운 인공위성 보스토크-1호가 지구 궤도에 올라가 선회하다 지구로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5월 5일 미국은 앨런 셰퍼드를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선정했다. 그러나 앨런 셰퍼드는 15분간의 준궤도비행을 했을 뿐이다. 진정한 궤도비행은 가가린보다 10개월 늦은 1962년 2월 20일 머큐리-아틀라스6호를 탄 존 글렌 우주비행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발사체인 아틀라스 개발이 지체됐기 때문에 미국은 최초의 우주인 탄생에서도 소련에 뒤진 것이다.

    이는 미국과 소련의 발사체 성능 차이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추진력을 높여가며 여러 발사체를 개발했으나 소련은 R-7이라는 대추력 발사체를 바로 개발했다. R-7은 추력이 워낙 셌기에 간단한 변형만으로 무인·유인 우주선을 모두 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미국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 결과 소련의 우주기술을 과대평가해 소련을 이기기 위해 몇 단계를 뛰어넘는 극약처방을 쓰게 되었다. 유인 달 착륙, 아폴로(Apollo) 계획을 세운 것이다.

    9년 만에 이룬 달 착륙

    유인 달 착륙은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됐다. 정치가 개입했으니 미국의 우주 개발 과정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그 후유증을 미국은 지금도 겪고 있다. 미국은 유인 우주비행 성공 20일 뒤인 1961년 5월 25일 유인 달 착륙 계획을 내놓았다. 미 국회 상하의원 특별합동연설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0년대 이내에 우주비행사를 달에 착륙시키고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달 표면을 찍은 변변한 사진 하나 없던 시절, 미국은 9년 안에 달까지 갈 로켓과 우주선, 착륙선, 우주복 등을 완성하기로 한 것이다. 경험이 쌓인 오늘날에도 위성을 기획해 발사하는 데 5~7년이 걸리는데, 그러한 경험이 없는 시절 9년 안에 달에 가겠다고 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국민적 관심이다. 현재의 기술을 뛰어넘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정치적 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은, 한국형 발사체 개발에 노력하는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적절한 우주 개발 과정은, 1단계로 유인 지구 궤도 비행을 하고, 2단계에서는 정기적인 우주비행을 할 수 있도록 우주왕복선과 우주정거장 등을 짓는 것이다. 3단계에서 달이나 화성으로 유인 우주비행을 한다. 이러한 단계를 밟아야 하니 폰 브라운도 1980년대에 이르러야 달 비행이 가능하다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은 2단계를 건너뛰어 바로 3단계로 달려갔다. 달 착륙을 한 후 우주왕복선과 우주정거장을 만들게 된 것이다.

    케네디 연설 이후 유인 달 착륙을 위한 여러 비행법이 제안되었다. 논란 끝에 짧은 기간에 목표 달성할 수 있지만 위험성을 내포한 비행법이 채택되었다. NASA 랭글리 연구센터에 근무하는 존 후볼트의 끈질긴 설득으로 채택된 이 비행법은 ‘달 궤도 랑데부’ 방식이었다. 우주선과 착륙선을 명확히 나눠, 착륙선의 일부를 달에 버리고 최소한의 무게만으로 지구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장점은 개발 가능한 로켓으로 비행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단점은 머나먼 달 궤도에서 일부를 버리고 달에서 이륙한 착륙선의 일부와 우주선을 도킹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비행법이 확정되자 NASA가 다음으로 할 일은 랑데부와 도킹, 우주유영 등의 비행 기술을 마스터하는 것이었다. 달 로켓 개발도 ‘우주여행 전도사’인 폰 브라운에게 맡겨졌다. 이 사업은 제미니(Gemini) 계획으로 명명됐다. 3.8t인 2인승의 제미니 캡슐은 미국 최초의 진정한 우주선이라 하겠다. 유인 우주비행을 위한 머큐리 계획에서 우주선은 자세제어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궤도 변경 같은 우주비행은 불가능했다. 우주비행사가 타고 있었지만 그는 할 일이 없었다.

    제미니 우주선(캡슐)은 궤도 변경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최장 14일간 우주인의 생활이 가능했다. NASA는 자체 발사체를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군이 ICBM용으로 만든 타이탄(Titan)-2를 발사체로 사용했다. 타이탄은 중국의 창정(長征) 발사체처럼 독성 추진제를 사용했다. 그러나 제미니 계획도 2인승 우주선 보스호트를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소련의 보스호트 계획에 한발 뒤졌다. 제미니 계획에 따라 미국은 1965~1966년 10회 우주비행을 했다. 이를 통해 달 착륙에 도전할 우주비행사들은 우주 기동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달 착륙을 하기 위해 폰 브라운이 이끄는 NASA 팀은 ‘새턴(Saturn) 시리즈’라는 새로운 발사체 개발에 나섰다. 이들이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개발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최초의 새턴인 새턴-1은 H-1 엔진을 8개 묶어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업이 새턴-5의 완성으로 승부를 보게 되었다. 새턴-5 발사체는 3 명의 우주인이 탄 우주선과 착륙선 등 45t의 화물을 초속 11.1km라는 엄청난 속도로 38만km 떨어진 달까지 운반할 수 있어야 했다.

    성공, 그러나 한여름 밤의 꿈

    이륙 무게(2800t)가 워낙 무거웠기에 1단은 케로신과 액체산소를 추진제로 사용해 680t 추진력을 내는 F-1엔진 5개로 구성했다. 2단은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추진제로 사용해 105t 추진력을 내는 J-2엔진 5개로, 3단은 J-2 엔진 1개로 구성했다. 무지막지하게 크고 우수한 발사체를 만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달 탐사 경쟁은 초대형인 1단 로켓 개발에서 승부가 갈렸다. 거대한 케로신 엔진의 단점인 연소 불안정성을 미국은 기술적으로 극복해냈으나 소련은 그러지 못했다. 그 결과 소련은 F-1보다 훨씬 작은 155t 추력의 NK-15 엔진 30개를 묶어 ‘N-1’으로 명명한 1단을 만드는 무리수를 두었다. 당시 소련에는 30개의 엔진으로 구성된 N-1로켓을 연소시험해볼 수 있는 지상 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어려운 사정을 알지 못했다. 1968년 9월 19일 미국의 정찰위성 KH-8이 소련이 달 여행을 위해 만들고 있는 N-1 발사체가 바이코누르 발사장에 세워진 모습을 촬영했다. 웅장한 N-1의 모습은 미국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유인 달 착륙마저 소련에 선두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빠졌다.

    백악관과 CIA는 NASA에 빨리 사업을 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는 아폴로-1호의 화재사고로 3명의 우주비행사를 잃고(1967년) 다시 유인 비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소련에 앞서려면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아폴로-8호의 임무를 변경해 달을 향하도록 했다. 그 시기 소련의 우주비행사들도 N-1 탑승을 주장했지만 로켓 시스템이 불안전해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 결과 1968년 12월 21일에 발사된 미국의 아폴로-8호가 유인 달 선회 비행에 먼저 성공하게 된다. 달 주변을 돌고 왔으니 남은 것은 착륙이었다. 몇 번의 시험을 걸쳐 1969년 7월 21일 2명의 우주비행사가 탄 아폴로-11호의 착륙선 이글호가 ‘고요의 바다’로 명명된 달 표면에 내려앉아 성조기를 꽂는 데 성공했다.

    1957년부터 진행된 12년간의 우주 경쟁은 미국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그 후 달 비행은 하룻밤의 꿈처럼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20호로 계획된 아폴로 사업은 17호로 중단되었다. 달 경쟁에서 승리한 미국이나 패배한 소련은 모두 막대한 예산을 사용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 결과 우주 개발은 긴 침체기를 맞는다. 시간이 지나자 정치적이 아닌 실용적, 순수한 과학 탐사 목적의 우주 개발이 조용히 부활했다.

    사람 사로잡는 것은 정보

    미국은 태양계 행성 전체에 대한 탐사도 실시했다. 이 사업도 소련과의 경쟁 속에 시작됐지만 소련은, 미국을 따라갈 수 없었다. 소련은 코룔로프 연구소를 중심으로 폐쇄적이고 독점적으로 우주 개발을 진행했으나, 미국은 NASA가 중심이 돼 산학연이 모두 참여하는 개방적이고 경쟁적인 구도로 진행한 것이 이 차이를 낳았다.

    1970년대 미국은 달과 행성, 행성 공간의 기초 조사를 위한 ‘파이어니어 프로그램’, 유인 달 탐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레인저 프로그램’(달 근접 사진 획득이 목적)과 ‘서베이어 프로그램’(로봇 탐사선의 달 착륙 목적), 수성·금성·화성에 행성 간 로봇 탐사선을 보내는 ‘마리너 프로그램’, 2대의 화성 착륙선을 보내는 ‘바이킹 프로그램’, 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을 그랜드 투어하는 ‘보이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한 마디로 1960~70년대는 우주 탐사의 황금기였다.

    주춤해진 우주 개발

    지구패권 이어 우주패권도 잡는다

    2800t의 무게를 쏘아 올리기 위해 3400t의 추력을 발휘하도록 만든 새턴-5 발사 사진.

    이러한 우주 개발에서 노다지를 건져낸 것은 위성통신 분야였다. 1960년 8월 미국은 30m 크기의 알루미늄 코팅 풍선인 에코1호를 이용한 전파 반사시험을 했다. 1962년 미국 통신회사 AT·T 소유의 최초 민간위성 텔스타(Telstar)-1호가 신호를 수신-증폭-발신하는 방식으로 컬러TV 프로그램을 대서양 너머로 전송했다. 위성통신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우주를 통해 전송된 최초의 영상은 미국 자유의여신상과 프랑스의 에펠탑이었다.

    미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시험 통신위성 릴레이(Relay)-1호는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을 지구 반대편인 일본으로 신속히 중계해, 일반인도 우주 개발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을 사로잡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로 옮겨지는 정보였던 것이다.

    텔스타나 릴레이 같은 저궤도위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텔스타는 150분에 지구를 한바퀴 도는 빠른 주기(週期) 때문에 20분 정도만 통신이 가능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고도 3만5786km에 정지위성을 띄워야 한다. 1964년 미국은 최초의 정지위성인 신콤(Syncom)-3호를 올려 도쿄(東京)올림픽을 중계하는 성과를 올렸다. 위성통신 분야는 급속히 상업화되었다. 그 결과 정지통신위성을 관리하기 위해 국제기구인 인터샛(INTERSAT)을 워싱턴DC에 두게 되었다. 소련은 지리적으로 적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정지위성 부문에서도 미국에 뒤졌다.

    유인 우주비행에서 우주비행사의 눈을 통해 지구관측의 실효성을 깨달은 미국은 ‘인공 눈’인 카메라를 위성에 탑재하게 된다. 이 위성 덕분에 군사적인 정찰, 기상 관측 등 다양한 지구 관측이 가능해졌다. 1961년 발사된 타이로스(Tiros)-3호는 미국 최초의 기상위성이다. 기상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항법용 GPS 위성 분야다. 위성항법기술은 잠수함 발사 핵탄두인 폴라리스 미사일에 위치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1983년 대한항공의 민항기가 소련 영공에서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을 맞고 격추되자 미국은 민간에도 GPS 정보를 제공하게 했다.

    부분 재사용 하는 왕복선 사업 승인

    1980년대 이후로 미국의 우주 탐사는 주춤해졌다. 1980년대 우주왕복선의 개발과 운영에 막대한 예산이 쏠리면서 우주 탐사는 암흑기를 맞았다. 허블우주망원경이나 갈릴레오 탐사선 등 일부 대형 프로젝트는 진행됐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예전만 못했다. 돌파구는 주어진 예산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맞춤형 프로젝트의 진행. ‘보다 빠르고 보다 좋고 보다 값싸게’란 모토로 디스커버리 프로그램이 진행되었고,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화성로봇차량(Mars Pathfinder), 소행성 근접(NEAR Shoemaker), 혜성 충돌(Deep Impactor), 혜성물질 수집(Star Dust) 등이 저렴한 비용으로 성과를 이루었다. 옛날만큼 화려한 성과는 적었지만 과학 교과서의 빈칸을 채우는 과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1958년부터 현재까지 미국은 1700여 개가 넘는 위성을 우주로 발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마지막으로 아폴로-17호를 발사하기 전 미국은 다음 목표를 준비했다. 아폴로 사업에 천문학적 예산이 들어가는 동안 미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나빠졌기에 경제적으로 우주에 접근할 수 있는 우주 수송시스템이 요구되었다. 핵심은 1회용이 아닌 재사용 로켓을 만드는 것이었다.

    재사용 우주선의 개발은 오래전부터 예측되었다. 폰 브라운의 ‘페리 로켓’이 대표적이다. 재사용 우주선은 달로 가는 터미널 역할을 할 우주정거장 건설에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주 개발 초기 미국은 일종의 우주왕복선인 X-20 등 우주비행기의 가능성을 검토했지만, 러시아와의 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개발이 쉬운 1회용 로켓과 캡슐형 우주선 개발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 초 미국은 우주왕복선과 함께 우주정거장 개발을 진행했으나, 예산 문제로 우주왕복선 개발만 진행했다. 우주왕복선 개발은 우주정거장 건설 지원이 아니라 우주실험실과 군사 및 상업위성을 저렴하게 발사하고 인공위성을 수리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그러나 완벽히 재사용하는 왕복선 개발 사업은 예산 부족으로 포기되고, 부분 재사용하는 왕복선 사업이 의회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1972년). 이것이 훗날 우주왕복선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게 된다.

    우주왕복선 개발에는 신기술이 요구되었다. 재사용 가능한 고성능 엔진과 열방호 시스템 개발이 지연됐기에 1979년으로 예상되던 처녀비행은 1981년으로 늦춰졌다. 우주왕복선의 궤도선에 부착되는 3개의 메인 엔진은 재사용을 보장할 만큼 고성능이어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극저온의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사용하는 엔진을 만들었다. 한 방울도 헛되게 버리지 않고 모두 사용하는 ‘다단 연소’방식을 통해 세계 최고의 비추력(比推力)인 453초를 달성했다.

    우주왕복선의 영욕

    예산상의 이유로 저렴한 고체추진제 부스터가 유인 발사체에 처음 사용되었다. 한번 불이 붙으면 끌 수 없는 것이 고체추진제의 단점이지만, 미니트맨 ICBM 개발 등을 통해 확보한 고체추진제 기술이 있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채택했다. 1986년에 폭발한 챌린저호 사고는 고체 부스터 부품의 문제와 함께, 적절하지 않은 날씨에 발사를 강행한 것도 원인이었다. 당시 NASA는 우주왕복선에 냉담해진 국민의 관심을 다시 일으키고자 학교선생님을 임시 우주비행사로 뽑아 우주로 보내는 이벤트를 펼쳤다. 발사과정은 전국의 학교에 생중계하기로 했다. 그런데 몇 번의 연기로 이벤트가 망쳐질 것 같자 기술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발사를 강행했다가 대형 사고를 냈다. 이 사고를 계기로 고체부스터를 개조했기에 고체부스터는 우주왕복선이 폐기될 때까지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우주왕복선의 핵심인 궤도선은 소형 여객기 크기다. 삼각형 날개를 갖고 초음속에서 활공비행을 한다. 우주선으로는 처음으로 우주비행사가 조종해 착륙시킬 수 있다. 7명이 탑승할 수 있는 거주공간이 마련돼 있고 대형 화물을 운반하기 위한 화물칸도 있었다. 우주로 갈 때는 24.4t, 귀환할 때는 14.4t의 짐을 실을 수 있다.

    1984년에는 궤도에 올라갔다가 고장 난 위성 2대를 회수해 지상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2대의 위성은 수리 후 다시 우주로 발사되었다. 우주왕복선의 진면목을 보여준 활약이었지만 챌린저호 사고 후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이런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다.

    궤도선의 안전한 지구 귀환을 위해서는 1회용 우주선의 열방호 시스템과는 다른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이런 요구로 개발된 것이 내열 실리카 타일이었다. 타일이라고 하지만 90%가 공기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실제 느낌은 스티로폼에 가깝다. 2003년 컬럼비아호가 공중에서 폭발했을 때 약한 내열 타일이 원인으로 지적받았다. 하지만 분석 결과 의외의 결론이 나왔다.

    독립조사위원회의 사고 재현 실험 결과 궤도선에 부착된 열방호 시스템 중에서 강도가 높은 날개의 전면에 부착된 강화 카본-카본 패널에 구멍이 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구멍은 발사 도중 외부 연료탱크에서 떨어져 나온 스프레이식 폼 타입의 단열재와 충돌로 생긴 것이었다. 이 사고로 우주왕복선 안전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으며 왕복선 사업의 폐기를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우주왕복선은 컬럼비아(1981년), 챌린저(1983년), 디스커버리(1984년), 아틀란티스(1989년), 엔데버

    (1992년)가 완성돼 2011년까지 135회의 비행을 했다. 1998년부터는 우주왕복선 본연의 임무인 우주정거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이런 성적에도 2회의 사고로 14명의 우주비행사를 잃었다. 비상탈출 장치가 없는 위험한 시스템과 고액의 발사 및 유지비용, 그리고 노후화 등으로 우주왕복선은 퇴역하고 말았다.

    대신 민간 우주선을 빌려 쓰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상업용 궤도 수송 서비스 계획에 따라 NASA가 개발비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민간 우주선 개발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2012년 5월 스페이스X사의 드래곤 호가 국제우주정거장과 도킹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민간 우주 시대의 장이 열렸다. 정부의 지원으로 성장한 풍부한 기술과 인력이 우주를 비즈니스 무대로 보는 벤처기업가들과 만나 신사업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ISS와 우주산업 생태계 재편성

    우주 개발의 궁극의 목표는 무엇일까? 우주 몽상가뿐만 아니라 과학자들도 꿈꾸어온 ‘우주 거주’일 것이다. 거주를 위한 우주 공간 마련과 우주정거장 건설은 우주 개발의 종착점이다.

    197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 확대로 NASA의 예산을 축소했다. 그에 따라 우주정거장 계획을 취소하고 우주왕복선에만 올인했다. 하지만 소련이 1971년 살류트 우주정거장을 띄우자, 실험형 우주정거장인 스카이랩 계획을 체면치례 차원에서 진행하게 된다. 1981년 우주왕복선이 완성되고 소련과 신냉전을 벌이면서 우주정거장 프로젝트를 부활했다. 미국은 유인 달 착륙처럼 소련이 쫓아올 수 없는 규모의 사업으로 우주 헤게모니를 잡고자 했다. 우주 경쟁으로 공산주의를 제압하려 한 것.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은 새로 마련하려는 우주정거장의 이름을 ‘자유(Freedom)’로 명명했다.

    미국은 자유진영의 유럽, 일본, 캐나다를 끼워 넣어 이 사업을 펼쳤지만, 1986년 챌린저호 폭발사고로 설계도만 그리고 더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1991년 소련 붕괴로 신냉전이 종식되자 자유호 계획은 폐기됐다. 소련 붕괴로 만들어진 화해 무드는 우주정거장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1986년부터 미르우주정거장을 운영해 우주체류 기술에 경쟁력이 있는 러시아가 미국의 자본을 만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노후한 미르를 대체하는 미르-2와 축소된 자유호를 결합한 ‘국제우주정거장(ISS)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조금 지연된 형태로 나아가던 ISS 건설은 2003년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폭발사고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 사고로 2006년 조시 W. 부시 행정부는, ISS를 짓기 위한 목적의 우주왕복선 비행만을 허용해 2011년에야 ISS는 완공될 수 있었다. 이 시기 우주왕복선 사업이 종료됐다. 우주정거장을 완성했으면 우주인과 물자를 실어 나를 왕복선이 있어야 하는데, 우주정거장 완성이 목전에 달했을 때 정작 왕복선 사업은 종료되는 엇박자를 넣은 것이다.

    ISS는 현재 러시아의 실험모듈을 결합하는 마지막 숙제를 남겨놓고 있다. ISS는 419t의 무게에 길이가 108m에 달한다. 330~410km의 고도를 유지하며 매일 지구 둘레를 15.7회 돌고 있다. ISS에는 11년째 우주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우주왕복선을 폐기한 후 미국은 전적으로 러시아의 우주선에 보급을 의존했다. 그러다 지난 5월 25일 스페이스X사의 민간우주선(드래곤)이 도킹에 성공함으로써 민간 우주선으로 보급하는 길을 열었다.

    개척정신 DNA 가진 미국

    수송의 한계로 현재 ISS에는 겨우 3명이 생활하고 있다. 1명당 하루 숙박료는 750만 달러 정도다. 천문학적 숙박료이지만 지난 14년 동안 우주인들은 돈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500여 건이 넘는 과학실험을 실시했다. ISS의 가장 큰 문제는 노후화다. 미국은 2020년까지 유지보수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2028년까지 ISS는 성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도 정권 교체에 따라 하던 사업들이 춤을 춘다. 백악관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달 재방문과 화성 유인 탐사, 소행성 유인 탐사 사업이 오락가락한다. 하지만 분명한 원칙은 있다. ‘근(近)지구’는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을 후원하는 차원으로 추진하고, ‘심(深)우주’는 정부가 담당한다는 점이다.

    지구패권 이어 우주패권도 잡는다
    정홍철

    1967년 마산 출생. 동의대학교 졸업. 한국우주정보소년단 과학팀장, 천문우주기획 우주팀장 역임. 국내 최초로 우주비행사캠프 운영. 저서 ‘우주개발 숨은 이야기’ 등


    20세기 과학과 정치가 오묘하게 맞물린 덕에 급성장한 미국의 우주 개발은 21세기에는 상업적인 영역에서 번성할 것이다. 이러한 재편성을 통해 미국은 여전히 우주 주도권을 잡으려 할 것이다. 미국은 미지에 도전하는 개척정신이 돈보다 귀한 유전인자임을 알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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