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인류 최초’ 신기록 쏟아낸 우주 자이언트

러시아의 우주 개발사

  • 임석희 /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shlim@kari.re.kr

    입력2012-08-28 10: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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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은 미국과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를 오래 맺어온 탓에 러시아를 잘 알지 못한다. 러시아의 전신인 구 소련은 인류 최초의 위성 발사,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 등 숱한 ‘인류 최초’ 기록을 세우며 탐험해온 우주개발 최강국이다. 뒤늦게 나로호 제작을 통해 접하게 된 러시아의 우주 개발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 러시아에서는 어떤 조직이 우주 개발을 이끌어왔는가.
    • 통시적인 관점에서 소련과 러시아의 우주 개발사를 살펴본다.
    ‘인류 최초’ 신기록 쏟아낸 우주 자이언트

    소련이 탄생시킨 세계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왼쪽)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1호.

    우리에게는 ‘우주학’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다. 20세기 들어 과학의 한 분야로 시작된 우주학은 실생활에 응용됨으로써 우주 개발 선진국에서 학문 분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단시간에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하늘과 우주에 대한 인류의 꿈과 희망, 상상은 인류가 시작되던 시기부터 존재해왔다. 각종 신화에 남겨진 비행에 대한 동경과 우주에 대한 환상은 ‘과학 혁명기’를 거쳐 비로소 이론화됐고, 실험을 거쳐 실생활에 응용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지구를 알게 해준 우주학

    ‘인류 최초’ 신기록 쏟아낸 우주 자이언트

    우주학의 아버지 치올코프스키.

    초기에 인류가 생각한 우주여행과 우주 개척의 꿈을 이루는 길은, 토네이도나 허리케인 같은 초자연적 힘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등장한 공상과학소설에는 우주여행과 우주 개척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기술 장치로 열기구와 대형 대포, 로켓엔진 같은 것들이 나온다.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 허버트 웰스의 ‘타임머신’ 등이 그 시기 대표적인 우주여행 문학작품이다. 공상소설 작가들과 과학자들은 상상력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꿈을 현실로 이끌어냈다.

    20세기 초반 소련에서는 치올코프스키, 찬데르, 콘드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우주학 관련 이론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학·과학교사였던 치올코프스키는 지상에 국한되어 있던 인류의 활동 범위를 우주에 이르게 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우주 탈출 속도를 계산해 우주비행에 대한 이론적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발표함으로써 ‘우주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지구는 인류 문명의 요람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요람에서 살 수는 없다”고 했지만, 택일을 강요하진 않았다.

    치올코프스키는 지구를 탈출하거나 버리기 위한 존재로 보고 ‘우주로 나가야 한다’고 한 적이 없다. 반대로 우리의 지성을 발휘해 지구 자연을 합리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후 사람들은 지구 표면과 대양, 대기, 식물을 연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찾음으로써 치올코프스키의 말을 증명해왔다. 덕분에 인류는 오랫동안 인류에게 적합한 곳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지구가 ‘어떤 곳인지’ 알고 살게 되었다. 앞으로 인류는 날씨를 조절하게 될 것이고 태양계 구석구석까지 진출하게 될 것이다.



    우주 개발 신기록 제조국

    우주기술에 관한 한 소련과 러시아가 이룬 성취는 세계 우주 개발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달 착륙을 제외한 우주학 분야의 기술적 성취는 거의 대부분 소련이 최초로 이뤄냈다. 인공위성 발사, 생명체 궤도 비행, 유인궤도비행, 우주 유영, 그룹 우주비행, 우주비행체 도킹, 달 이면(裏面) 촬영 등 우주학 분야에서 소련이 이룬 ‘세계 최초’는 너무 많기에 이 글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언급을 자제했음을 밝힌다. 지면의 한계로 소련과 러시아의 업적을 모두 열거하기는 어렵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류가 본격적인 우주 개발을 시작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에서 개발된 로켓기술을 소련이 도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이 단기간에 이를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토대가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서양으로 건너간 흑색 화약은 무기로 쓰였는데 이러한 토대 위에서 러시아는 1884년 무연(無煙) 화약 개발에 성공했다. 이때 치올코프스키가 반(反)작용 원리를 이용한 우주비행 가능성에 대한 이론을 연구하고, ‘달에서’와 ‘우주로켓여행’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우주탐험에 대한 인류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찬데르는 이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화성 여행에 대한 글을 쓰고, 행성 간 탐사에 대한 기초 연구를 수행했다.

    1928년에는 티코미로프가 이끈 가스역학실험실(GDL)이 로켓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1929년에는 글루쉬코가 이끄는 레닌그라드대학교 실험실이 여기에 합류해, 전기로켓엔진을 연구하다 후에는 로켓엔진을 연구하게 되었다. 1930년 중앙항공기엔진연구소(TsIAM)에서 근무하게 된 찬데르는 액체로켓엔진의 전신인 1.5뉴튼급(0.18kg의 추력) 제트추진엔진 OR-1, 이어 500뉴튼급(51kg의 추력) 액체로켓 엔진인 OR-2를 개발했다. 그는 ‘행성 간 공간이동’이라는 책에서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이용하는 4단형 로켓 개념을 설명하고, 중력장 안에서의 물체 이동뿐만 아니라, 미세중력 상황(지구 중력이 약하게 작용하는 대기권 밖의 상황)에 있는 우주비행체의 가속과 정지에 대한 연구 결과도 얻어냈다.

    1931년 찬데르의 지도로 반작용추진연구그룹(GIRD)이 결성돼 1932년 코룔로프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33년에는 가스역학실험실과 반작용추진연구그룹이 통합해 반작용연구소(RNII)가 설립됐다. 초대 연구소장은 클레이묘노프였고, 연구 부소장은 코룔로프였다. 소련 시절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이끈 양대 산맥은 코룔로프와 티혼라보프였다.

    1945년 초반 티혼라보프는 반작용연구소 연구진과 고고도용 로켓장치(2인용 캐빈)를 이용한 유인 우주비행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상층대기 연구를 목적으로 한 이 프로젝트에 체르니셰프, 이바노프, 갈코프스키, 모스칼렌코 등이 참여했다. 훗날 VR-190으로 명명된 이 연구를 위해 고도 200km까지 올라가는 1단형 액체로켓이 사용됐다. 이 연구에서 밀폐공간에서 인간이 짧은 시간 자유비행할 경우 받게 되는 미세중력의 영향과 캐빈의 무게중심 이동, 발사체에서 분리된 비행체의 운동, 상층대기에 관한 정보 획득 등의 성과를 거뒀다.

    VR-190 연구로 위성 발사 본격화

    VR-190 프로젝트를 통해 연착륙을 위해서는 △감속(減速)로켓 엔진이 있어야 하고, 이 엔진을 점화하기 위해서는 전기접촉봉이 있어야 한다. △캐빈의 안전한 대기권 하강을 위해서는 낙하산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캐빈은 생명유지 장치가 달린 밀폐형 구조여야 한다. △고밀도의 대기영역을 통과할 때는 소형 추력기를 이용해 캐빈의 자세를 안정화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 등이 확인되었다. 이때 발견한 시스템이 21세기 우주발사체에도 대부분 사용되고 있다.

    1946년 티혼라보프는 VR-190 프로젝트의 연구 결과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1947년부터는 과학자들과 함께 여러 개 단이 묶인 배치(batch)형 발사체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 나와 있는 기술로도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우주속도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확인돼, 1950년 발사체와 인공위성을 만드는 연구가 본격화했다.

    최초의 인공위성이 될 ‘PS-1’ 발사 준비를 위해 코룔로프를 위원장으로 한 고위설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50년대 초반 코룔로프가 시제설계국-1을 만들었다. 시제설계국-1은 OKB-1으로 약칭됐는데, 소련 해체 후 OKB-1은 에너지기계중앙설계국→에네르기아 주식회사 등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코룔로프는 우주 개발 연구와 산업체를 총지휘하는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총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해 지구궤도를 돌게 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은 또 하나의 승전고를 울렸다. 인류 최초로 유인 우주비행(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 후 소련은 그룹 우주비행과 우주 유영을 성공시키고, 우주정거장이라고 하는 궤도선 살류트와 미르를 우주공간에 건설했다. 이 우주정거장들은 오랫동안 떠 있으면서 유인 우주비행 프로그램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는 한 번 발사로 한 기의 위성을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한 번 발사로 여러가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에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이다.

    미·소 우주선 도킹 성공

    우주비행체가 비행하는 데 필요한 우주속도는 운반수단인 우주발사체로부터 얻는다. 우주학은 우주속도를 얻고 위성엔 궤도비행이 가능한 속도를 주기 위해 고추력의 대형 액체로켓엔진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이 분야에서는 글루쉬코의 업적이 돋보인다. 그의 연구팀은 엔진을 대형화하고 고추력화하기 위해 터보펌프의 손실을 거의 없애는 등 다양한 기술을 개발했다.

    글루쉬코와 이사예프 박사는 세계 최초로 실용 로켓엔진개발학파를 만들었다. 이 학파의 이론적 토대는 1930년대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로켓 개발 기술을 근거로 했다. 그리고 여러 형태의 발사체와 액체로켓엔진 개발을 시도함으로써 열역학, 유체역학, 가스동력학, 열전달 이론, 구조강도 이론, 고강도 금속학, 내열소재, 추진제 화학, 측정기술, 진공 기술, 플라스마 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을 유도했다.

    1950년대 초반 켈디쉬, 코첼니코프, 이쉴린스키, 세도프, 라우셴바흐 등은 우주비행과 관련된 수학모델링과 탄도항법에 관한 이론을 연구했다. 이로써 우주비행을 실현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이 해결되고 무중력 이론 등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새로운 수학적 해법을 적용하고, 최신 성능의 컴퓨터가 개발되면서, 우주궤도역학 설계, 비행 프로세스 제어 같은 가장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학문인 우주비행역학이 탄생했다.

    먀시셰프, 첼라메이 등이 이끌었던 설계국-52(OKB-52, 현재는 NPO Mashnostroenie)는 대륙간탄도로켓인 UR-200, UR-500,UR-700 등에 꼭 필요한 특수 고강도 외피의 대형화에 성공했다. 이 기술은 국제우주정거장의 모태가 된 유인 우주선 살류트, 알마스, 미르를 개발하는 데 사용되었다. 국제우주정거장을 만드는 데 사용된 각종 모듈인 크반트, 크리스탈, 프리로드, 스펙트르, 자랴, 즈뵤즈다 등을 개발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설계국-52는 흐루니체프 공장과 협력해 새로운 발사체 시리즈인 ‘앙가라’, 소형 우주선, 그리고 국제우주정거장용 모듈 개발을 성공시켰다. 설계국-52와 흐루니체프 공장을 합병해 러시아 최대의 우주과학생산 센터인 흐루니체프사가 만들어졌다.

    1975년 7월 세계 우주 개발의 기념비적 사건이 일어났다. 초속 7.8km에 달하는 우주속도로 운행 중이던 소련의 소유즈 우주선과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우주공간 도킹에 성공한 것이다. 이 성공으로 국제협력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국제우주정거장이라는 국제 공동 프로그램이 탄생한 것. 흐루니체프 사가 기술적 리더로서 국제협력을 주도했다.

    탄도미사일 기반의 우주발사체 개발은 얀겔이 지도하는 설계국 유즈노예(SDO Yuzhnoye, 현재는 우크라이나 소속)가 수행했다. 이 설계국은 우트킨의 지도로 중형 발사체인 ‘제니트-2’를 개발했다. 제니트-2는 2세대 로켓의 대표주자다. 저궤도위성 발사체로 제니트-2보다 뛰어난 것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발사체와 우주선의 유도제어 시스템도 급속히 발전했다. 독일에서 로켓 기술을 습득한 빌류긴은 1946년 제어 관련 설계국인 ‘연구소-885’를 설립해 초기 로켓인 R-1의 자이로스코프 유도제어 시스템과 비행용 컴퓨터를 개발했다. 이 설계국은 상당히 신뢰성이 높은 발사체 제어 시스템도 개발했다. 그리하여 위성을 지구 저궤도에 투입하던 1957~58년엔 수십km의 궤도 투입 오차가 발생했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달에 내릴 때 목표지점에서 5km 이내에 착륙할 수 있었다.

    우주학의 발전으로 이제 우리는 우주통신, 텔레비전 방송과 재송출, 항법 등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게 됐다. 1965년 인류는 지구에서 2억km 떨어진 화성에서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낼 수 있었다. 1980년엔 15억km 거리의 토성을 찍어 지구로 전송했다. 코룔로프의 시제설계국 OKB-1의 분소로 출발한 ‘응용기계 과학생산연합(NPO PM)’은 레셰트네브 지도하에 우주선 개발을 선도하는 기업이 되었다.

    목성 화성에도 탐사선 착륙

    이제 세계는 운용지점 두 곳만 있으면 거의 모든 나라와 연결될 수 있는 통신위성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이 시스템은 신뢰도가 높고, 경제·기술적으로 매우 우수하다. 이런 재송출 시스템 덕분에 위성이나 우주선, 탐사선 같은 우주비행체에 대한 동시 제어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제어를 위해 위성항법 시스템이 개발됐는데, 이 시스템은 오늘날 바다와 하늘, 우주를 떠다니는 모든 운송수단에 적용되고 있다.

    유인 우주선 분야에도 질적인 발전이 있었다. 1960~70년대에 이미 우주선 밖에서 작업이 가능함을 증명했고, 1980~90년대에는 인간이 미세중력 하에서 장기간(1년 정도) 거주하며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구물리와 관련된 실험과 천문학과 관련된 실험들이 유인우주비행 프로그램을 통해 수행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는 우주의학과 생명유지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중요했다. 장기간 우주비행을 할 경우, 사람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초기의 우주 실험은 지구 촬영이 대세였다. 우주에서 지구를 관찰함으로써 지상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자연자원을 새로 발견해 개발하게 되었다. 지구 자원의 합리적인 개발과 활용의 다양성을 깨달은 것이다. 코즈로브가 이끈 시제설계국-3(OKB-3, 오늘날은 ‘프로그래스 중앙설계센터’로 불린다)는 수많은 지구 관측사진을 찍고, 이를 지도로 만들었다. 지구 자연자원을 연구하고 환경을 모니터링했으며 R-7A를 기본으로 하는 중형 발사체도 개발했다.

    최초의 우주 도킹 성공

    1967년 소련은 두 개의 위성인 ‘코스모스-186’과 ‘코스모스-188’의 무인 도킹을 성공시킴으로써, 우주공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우주비행체의 접촉이나 연결과 관련된 복잡한 과학기술적 문제를 해결했다. 덕분에 러시아는 아주 짧은 시간에 세계 최초로 우주궤도선(우주정거장)을 개발할 수 있었고, 미국은 달에 도달하는 우주선의 최적 비행경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반세기 사이에 이뤄진 놀라운 우주 개발로 지구 주위에는 무수한 인공위성이 형성한 띠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위성들이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지구와 태양으로 떨어지는 전하입자 간의 상호작용을 깊이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행성 간의 우주비행은 태양풍과 태양폭풍, 유성우(流星雨) 같은 자연 현상에 크게 영향 받는데,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달로 발사된 우주장치(탐사선)들은 달 표면을 찍은 정보를 지구로 보내왔고, 지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달의 반대편 모습을 찍는 데도 성공했다. 1960년대 후반 소련은 달 표면에 자동 무인착륙선인 루나호드-1호와 루나호드-2호를 보냈다. 1970년에는 루나호드-16호를 보내 달 토양을 채취했다. 금성과 화성에도 탐사선을 착륙시켰고, 목성·토성·수성에 대해서는 한층 정밀한 관측을 했다.

    무인 탐사선이라고 하는 자동우주장치 덕분에 행성의 모양과 중력장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지구와 지구 자기장에 대한 정보도 더욱 정확히 알게 되었다. 다른 행성으로 발사된 자동우주장치(우주탐사선)는 원격으로 조종된다. 우주라고 하는 지극히 낯선 환경에서도 원격조종에 의해 제대로 작동되도록 정교하게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가 정밀한 전자부품 개발을 가속화했다. 랴잔스키, 구세브 등이 개발한 자동화된 지상제어 시스템은 오늘날 러시아 위성의 궤도 그룹화를 가능하게 했다.

    1962년 코스모스-4호 발사 성공을 계기로 소련은 우주를 군사적인 관점에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은 초기에는 ‘연구소-4(NII-4 MO)’가 수행하다 ‘중앙연구소-50 MO’로 이관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길, 우주장치를 활용하면 무력(병력) 효율이 1.5~2배 높아진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들어 적대적 대치상황에서 우주의 중요성이 지속적으로 커졌다. 우주관측, 우주통신, 우주항법 장치 덕분에 자국군을 알듯이 적군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실질적인 군사력 투입 없이도 군사정보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주기술은 적국의 핵미사일 공격도 막아내게 했다. 그로 인해 ‘우주군’이라고 하는 새로운 군사력이 생겨났다.

    모듈화된 발사체 제작

    러시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코누르와 블레세츠크 발사장을 운영하고 있다. 만주 북쪽에는 시험발사를 전문으로 하는 스바보드늬 발사장을 짓고 있다. 러시아는 이 발사장에서 모듈화된 발사체를 발사하려고 한다. 모듈화된 발사체란 표준화된 발사체를 뜻한다. 과거 러시아는 미국도 그랬지만, 여러 개의 발사체를 만들고 발사체에 탑재하는 탑재체도 각기 다르게 설계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발사비용이 크게 올라가는 문제가 생겼다. 이에 미국의 팰콘 시리즈처럼 안전하고 경제적인 로켓을 만들고 그 로켓을 다양하게 조합해 여러 발사체를 만드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러시아의 우주사업의 수익성을 높여줄 것이다.

    대기권 밖에서처럼 지구 중력이 약하게 작용하는 것을 ‘미세중력’이라고 한다. 미세중력 상태에서 반도체를 제작하면 수율이 아주 높아진다. 따라서 우주 공간 활용 기술이 발전하면 우주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영토가 넓기에, 우주를 통한 인터넷망 구축을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 그로 인해 전국적인 텔레비전 방송망과 통신망도 함께 구축되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러시아는 광대역 우주통신 채널을 확보해 인터넷 정보 전달의 고속화를 이룰 것이다.

    ‘인류 최초’ 신기록 쏟아낸 우주 자이언트
    임석희

    1973년 강원 속초 출생. 인하대 화학공학과(학사), 러시아 모스크바 바우만공과대 파워엔지니어링학부 로켓엔진학과 액체로켓엔진 전공(석사), 모스크바 항공대 연수. 항우연에서 KSR-3 개발에 이어 현재는 나로호와 KSLV-2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주과학기술은 러시아연방우주청 지도하에 즈니마쉬, 켈디쉬와 같은 연구소와 대기업인 흐루니체프, 에네르기아, 프로그래스 중앙설계국, KBOM, KBTM 등이 이끌고 있다. 그러나 작금의 러시아 우주학은 황금기를 보낸 듯이 보인다. 그런데도 러시아의 과학자들은 21세기형 우주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다. 신흥 경제국 러시아가 우주에 투자하는 비율을 서서히 올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는 이 분야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새로운 발사체 개발사를 써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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