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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학과 정치학의 교묘한 만남

우주발사체와 발사장

  • 이정훈 /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우주학과 정치학의 교묘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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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주발사체는 미사일 발사 기술에서 나왔다.
  • 이 때문에 발사체 개발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 이러한 제악을 뚫고 한국형 발사체를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지리적으로 발사장 조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선으로 발사하는 모험까지 택했다. 우주발사체를 만들기 위한 남북한의 경쟁, 발사장을 둘러싼 자연적·지정학적 조건 등 접하기 힘든 비밀을 공개한다.
우주학과 정치학의 교묘한 만남

나로우주센터 조감도. 왼쪽 평지가 발사장이다.

우주 개발에 도전하려면 위성과 함께 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리는 우주발사체(SLV· Space Launch Vehicle)를 만들어야 한다. 우주발사체는 ‘발사체’로 약칭한다. 한국은 위성 분야에서는 꽤 앞서가고 있으나 발사체 쪽은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우주 개발 선진국들은 발사체 개발에 중점을 뒀다. 이유는 국방 때문이었다. 발사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폰 브라운 박사가 이끈 독일의 페네뮌데 연구소에서 개발한 V-2 로켓에서 비롯됐다. 폰 브라운 박사 이전 미국에서는 고다드 박사가 로켓을 만들었지만, 로켓으로 사거리가 긴 무기를 만들어 실전에 사용한 것은 폰 브라운이 최초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은 V-2 로켓으로 영국을 공격했다.

ICBM 전력에서 앞섰던 소련

미국이 ‘리틀보이(우라늄탄)’와 ‘팻맨(플루토늄탄)’이라는 원자폭탄을 개발해 사용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무기는 V-2 로켓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해 독일을 분할 점령한 소련과 미국은 V-2를 토대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했다. 원폭 개발 경쟁에서는 미국이 앞섰지만 ICBM 경쟁에서는 소련이 앞에 있었다.

소련이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인 R-7을 실전배치했을 때 미국은 중거리탄도미사일인 ‘주피터’를 운용했다. 소련은 ‘스푸트니크-1호’로 명명한 인공위성도 미국보다 먼저 지구 궤도에 올렸다. 최초의 우주비행사(유리 가가린·1961년)와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발렌티나 테레슈코바·1963년)도 소련에서 나왔다. 그제야 원폭 2발로 제2차 세계대전을 끝냈다고 자신하던 미국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미국은 패전국가 독일에서 기술을 배울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에 독자적으로 로켓을 개발하려다 소련에 뒤지게 된 것이다. 원폭과 수소폭탄 개발에서 근소한 차이로 미국에 뒤졌던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과 발사체 개발에서 앞서가자 미국은 전율했다. 미국인들은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소련 위성이 미국을 향해 핵무기를 떨어뜨릴 것을 우려했을 정도니 당시 소련에 대한 미국인의 적대감과 경쟁심은 극에 달했다고 하겠다.

1961년 취임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1970년이 오기 전에 달에 사람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의 우주 개발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항공우주국(NASA)을 가동했다. 총력전 덕분에 미국은 소련보다 먼저 달에 사람을 착륙시켜, 우주개발 분야에서도 소련을 앞서나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 중국 인도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등 내로라 하는 나라들도 ‘뒤지면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우주 개발을 추진해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뒤지면 죽는 것’이니 그 시절의 우주 개발은 미사일로 전용할 수 있는 발사체 개발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도 국방을 위해 로켓 개발에 눈을 돌렸다. 1968년 한국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1·21사태와 울진과 삼척 지역을 일시 점령하는 울진·삼척사태를 겪었다. 그해 북한은 원산 앞바다로 접근한 미 해군 정보함인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이듬해에는 함남 해안으로 접근한 미 공군의 EC-121 정찰기를 미사일로 격추시켰다.

안보 위해 시작한 로켓 개발

그로 인해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극에 달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모토로 국산무기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국방과학연구소(이하국과연)를 만들었다(1970년 8월 6일). 이듬해 박 전 대통령이 국과연에 유도탄(미사일) 개발 가능성을 검토하라는 극비 지시를 내려 추진된 것이 그 유명한 ‘백곰 사업’이다. 이 사업의 목적은 미군이 한국군에 이양한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이하 나이키)을 모방 생산하는 것이었다.

1978년 9월 26일 국과연은 박 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곰 미사일 시사회를 열었다. 결과는 멋진 성공이었다. 백곰 사업을 통해 한국은 최초로 고체로켓엔진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박 전 대통령은 핵 개발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고 새로 들어선 전두환 정부는 미국을 의식해 핵 개발은 물론이고 미사일 개발까지 중단시켰다. 적잖은 국과연 직원이 일자리를 잃고 민간 기업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다행히 국과연은 백곰을 통해 개발한 로켓 기술을 폐기하지는 않았다.

북한군에서는 ‘방사포’라고 하는 것을, 한국군에서는 ‘다연장로켓’이라고 한다. 국과연은 백곰 사업으로 습득한 고체로켓 기술로 한국형 다연장로켓인 ‘구룡’을 만들었다. 구룡 사업이 한창 추진될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버마(지금의 미얀마) 아웅산국립묘지를 방문했다가 북한이 설치한 시한폭탄이 터져 정부 각료 등 수십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전두환 정부는 미국의 협조를 얻어 미사일 개발을 재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평양까지 도달하는 사거리 180km이내의 미사일만 개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동의하고, 한국에 관련 기술을 이전해주었다. 그 결과 국과연은 백곰보다 훨씬 성능이 좋고 사거리도 길어진(150→180km) ‘현무’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었다. 현무와 백곰 나이키는 모두 고체로켓을 탑재했다. 군용 미사일은 신속하게 발사해야 하기 때문에 고체로켓을 탑재하는 경우가 많다.

V-2로켓은 액체연료를 사용했다. 액체연료는 물성(物性)이 예민해 미사일이나 발사체를 똑바로 세워놓고 주입하고 주입한 다음에는 빨리 발사해야 한다. 발사를 미루면 액체연료의 물성이 변하기 때문이다. 미사일 측면에서 보면, 액체연료 주입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큰 약점이다. 상대의 선제공격을 받으면 탄두와 함께 액체연료도 폭발해 엄청난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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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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