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2 전투기.
모방에서 창조로
항공기 관련 사업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주체는 ‘임시군용기구연구회’였는데, 이 조직은 육군성, 해군성, 문부성의 3성이 공동으로 설립한 것이었다. 초기 일본의 항공산업은 군이 추진해 산업화가 더딘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상황은 바뀌었다. 세계대전으로 기체와 엔진의 수입이 어려워지자, 일본 자체적으로 모방생산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인 만큼 모방생산한 엔진은 성능이 불안정하다는 등의 기술적 한계를 드러냈지만, 일본은 독자적으로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을 축적했다. 항공기 개발의 실행 주체였던 임시군용기구연구회가 육군의 직속단체로 바뀌자, 해군은 1916년 함정본부에 해군항공기술연구위원회를 설치했다. 문부성도 항공학조사위원회를 설립함으로써 3성은 별도로 항공기 개발을 추구했다. 독자 노선을 걸으면서 육군과 해군은 대립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모방생산을 본격화한 시기 민간에서 항공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육군과 해군이 해외에서 항공기를 수입하면서 일부 소요를 민간기업에 맡기기로 한 것이 계기였다. 1919년 나카지마 비행기, 1920년 미쓰비시의 고베 내연기제작소가 설립되고, 이어 가와사키, 가와니시 등 훗날 일본 항공기산업의 핵심이 될 기업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신생 제작사들은 설계능력이 없었다. 군이 기체나 엔진 제조권을 해외기업에서 구입해주면, 해외기업이 보내준 기술자가 일본에 와서 지도생산을 하는 식이었다.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한 항공기의 재고가 쌓여 항공시장이 포화 상태였기에 우수한 서구 기술자들이 일본 항공기산업에 투입되었다. 일본은 1922년 체결된 워싱턴 조약으로 영·미에 비해 주력함 건조비율 면에서 불리해졌다. 일본 해군은 전력 열세를 항공력 강화로 극복하고자 했다. 육군은 해군에 뒤질세라 1924년 육군항공본부를 설치했다. 육·해군이 동시에 항공력 강화에 나선 것이다.
덕분에 항공기 제작 국산화에 속도가 붙었다. 생산능력도 일취월장해 군의 조병창을 능가하는 항공기 제작사들이 등장했다. 그로 인해 1930년 민간에서 개발한 항공기가 해군의 연습기와 함상전투기로 채택되었다.
일제의 제국주의적 확장정책은 항공기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2년의 상해사변을 겪은 일본군 수뇌부는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효율적인 작전을 위해 더 많은 군용기를 요구했다. 군의 요구에 맞는 최신예기종을 개발·양산하라고 일본 항공산업계에 요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