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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굴

‘일본판 쉰들러’ 후세(布施辰治) 변호사

항일투쟁 조선인 구원에 평생바친

  • 정준영

‘일본판 쉰들러’ 후세(布施辰治)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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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쌀쌀한 늦가을 면민들 수천 명이 손에 몽둥이와 장작개비를 하나씩 들고 메고 동곡리 일본인 가미야(神谷) 집에 숨어 있다는 동척조합장 염규환을 잡아죽인다고 쳐들어갔다. 그때 세지면 주재소 야마구치(山口) 순사부장이 일본도를 빼들고 면민들을 내리칠 듯이 위협하는 순간 그 근처 죽동리에 살던 나사만이 내리친 장작개비에 야마구치가 뒤통수를 맞고 그 자리에 쭉 내뻗었다. 이를 신호로 피아간에 혼전이 벌어지면서 죽여라 죽여라 하는 함성이 그 일대 내정리, 대산리까지 반경 4km의 들녘을 완전히 휩쓸어버린 것이다. 동곡대전이라고 불린 이 사건은 지금도 이 지방의 자존심으로 회자된다.

그 다음날 28일에도 또다시 모인 면민들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동양척식에 소작료를 바친 자가 5,6명을 훨씬넘어 24명이나 된다”는 소문을 확인하고자 보무도 당당하게 동척 영산포출장소로 쳐들어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곧장 나주경찰서로 발길을 돌린다. 이때에 가담했던 주봉순, 나치구, 김원석, 염경선, 윤효병 등은 일경에 붙잡혀 고생하다 1926년 4월2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농민대표들은 이와 같은 투쟁이 결국 동양척식 앞잡이들의 소작료 납부 저지에만 국한된 것이지 혈서로 맹약한 근본적인 ‘토지무상회수운동’에는 별효과가 없음을 깨닫는다. 농민대표들은 작전을 변경하여 일본의회에 탄원하기 위하여 이화춘, 나재기, 박승효, 최태중 등을 선출하여 파견하기로 하였으나 이 또한 무위에 그쳤다. 이도 저도 무산되자 농민대표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당시 명성이 자자하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선생에게 농민들의 토지회수 투쟁경과와 피의 연판장에 날인한 혈장을 제시하고 민사소송을 의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솔직히 후세 변호사는 도쿄를 중심으로 개업한 만큼 조선으로 건너오기란 여러 여건이 맞지 않았다. 더구나 재야법조인으로서 전후 세 번씩이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처지에 헐벗고 굶주린 조선인 관련사건은 그에게 결코 호재(好材)가 될 수 없었다. 후세 선생은 후일 조선을 다녀온 뒤 쓰게 된 ‘여행개요’라는 책에서 문제의 그 ‘피의 서약서’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926년 3월5일 드디어 후세 변호사는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을 조사하기 위해 광주를 거쳐 영산포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 전후 총독부로부터 온갖 방해와 협박을 받았다. 총독부는 후세의 방문이 면민들을 더욱 고무시킬 것으로 판단했다. 주무당국으로서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세, 영산포에 오다

결과적으로 후세 변호사의 조사가 동양척식의 방해로 별 성과 없이 끝났으나 후세 변호사의 조사 강행 및 당국에 대한 성토 그리고 전국 각 사회단체(조선노농총동맹, 전라노농연맹, 광주소작인연합회, 광주청년연맹, 전남청년연맹)의 성원으로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수탈에 대한 반대여론은 전국적으로 한층더 높아졌다. 이와 같은 전국적인 반대여론은 동양척식을 더욱 더 궁지로 몰아넣었다. 1927년 1월21일 모 일간지는 발빠르게 ‘동척의 양보로 해결의 실마리’라고 대서특필했다. 이를 요약하면 동양척식의 해결안에 농민대표들이 합의도장을 찍고 당시 경무국장 미쓰야(三矢)도 이를 조인할 때 “몹시 기쁘다. 면민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특별히 취한 조치”라고 생색까지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보면

1) 묘전(墓田) 40정보를 관계 문중에 무상양도함.

2) 가대(家垈)는 즉시 무상양도 하는 것 등이 합의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이것은 새발의 피였다. 이것은 면민들이 그 지긋지긋한 일제의 폭력앞에 한발짝씩 물러선 것을 뜻한다. 농민들이 회수하려 했던 토지 1700정보 중 무상 반환된 것은 묘전과 가대를 합해 겨우 100정보에 불과했다. 설혹 농민들이 10년 연부상환을 문제없이 이행한다 하더라도 문제의 850정보는 여전히 동양척식회사 소유로 남아 있는 것이다. 무상반환은 17분의 1에 불과해 농민들의 농지회수 목표량의 50%에도 못미치는 것이었다.

후세 선생은 이런 와중에 두 번이나 투옥되었으니 그 가족들도 많은 어려움에 시달렸을 것이다. 인생의 종말을 기다리던 1953년 5월 어느 날 후세 선생은 편한 의자에 앉아 “앞으로, 앞으로 가라고 호령하기 보다 일어나서 함께 뛰지 않으면 대중의 진정한 고통을 모른다. 사회적 약자, 피압박자들과 함께 투쟁하는 것이 진정한 민중운동이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지난날 나주농민항쟁이나 진주형평사운동 등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1953년 9월13일, 후세 선생은 그의 큰딸 집에서 외손자의 통곡 속에 임종을 맞았다. 동경 신주쿠 이케부쿠로 상재사에 있는 그의 묘비명에 새겨진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어서도 민중을 위하여’라는 생전의 좌우명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타계한 지 10년이 지난 1963년 선생의 장남(布施柑治)이 집필한 부친의 전기 ‘어느 변호사의 생애’는 우리에게 또 다른 감회를 안겨준다. 현재 후세 선생의 가족 중 ‘노부코’란 큰딸이 생존해 있다. 91세의 노부코 여사는 노환으로 도쿄 근교에서 와병중이다.

1953년 9월13일, 후세 선생 서거 이후 뜻있는 일본인들은 그를 추모하는 모임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1959년 후세 선생 7주기 추모의 밤 안내장을 보면 ‘피압박자 해방을 위해 조선인과 중국인을 위해, 70여 년의 생애를 마친 위대한 선각자 후세 변호사의 재인식을, 이 기념의 밤에!’라고 쓰여 있다. 파란만장한 후세 선생의 일생을 두고 그 누구도 한마디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판단기준조차 시대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일부 권력자로부터 ‘좌익변호사’라든가 ‘공산당 변호사’로 매도된 것은 반론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이 같은 표현은 그의 훌륭한 행적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보편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주로 일본우익)들이 무책임하게 붙인 말이다.

그는 어느 법정에서 “나는 약한 자를 변호하는 해방운동자이지 결코 마르크스나 레닌을 표방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못박고 있다. 또 일본 변호사 열전(森長英三郞 著) 62쪽 상단에도 ‘후세의 본질은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순수한 인도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1923년 8월1일, 총독부 코앞 ‘천도교당’의 만당한 자리에서 “조선해방은 결코 조선에만 국한된 조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고 외치며 국제적인 연대를 강조하면서 조선문제를 적극적인 세계평화운동으로 파악했다.

패전 후 후세 선생 평가

1927년 9월13일에는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조선총독정치 비판연설회를 개최했다. 또 그해 10월18일 당시 조선의 김병로, 이인, 허헌 변호사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사건을 변호하면서 이 사건을 ‘반항할 수밖에 없는 조선민족 전체의 사건’으로 규정하고 “재판소는 양심에 따라 조선민중의 비통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1933년 초에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향하여 “조선인들이 기대할 만한 대(對)일본 경고가 없다”고 하면서 미국 대통령의 용기없는 행동에 실망을 토로한 바 있다.

이처럼 후세라는 큰 그릇을 두고 그 일부만 평가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일 뿐이다. 여하튼 전후 일본에서 조총련과 재일거류민단 간의 대립 속에 후세 선생은 조금은 난감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후세 선생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겼다. 1949년 후세 다쓰지 탄생 70년 축하 인권옹호선언대회에 참가한 3000여 명 중 조선인이 800여 명이었다.

후세 선생은 대회 이틀 전 거류민단 어떤 간부로부터 아주 유쾌한 항의를 받았다. 그 간부의 말은 “우리는 사상과 이념을 초월해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조선독립운동에서 실제로 선생님의 도움을 받은 자는 조련측 공산주의자들보다 우리 아나키스트계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저희는 결코 선생님의 은덕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회를 개최하면서 저희를 배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받고 후세 선생은 “아주 유쾌한 항의”였다고 껄껄 웃으며 “이는 이 대회를 주관하는 주최측이 모두 조련측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해명했다. 이 역시 우리 동포들에 대한 후세 선생의 절대적인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민단측 사람들이 이 대회에 자유롭게 참석하게 된 것은 후세 선생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1980년 후세 선생의 고향인 미야기현 이시마키시에 현창비가 세워졌다. 후세 다쓰지 연구에 관한 한 단연 일인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모리 다다시(森正, 나고야시립대) 교수는 “현재 일본은 정신적인 토양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물질만능주의의 폐해까지 겹쳤다”고 한탄하면서 “후세 선생 같은 선각자에게 배우겠다는 전통을 일본은 별로 갖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한국 역시 그들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 바야흐로 신사년 새해를 맞이하여 한일우호협력이란 거역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지난날 후세 선생이 보여준 한일간의 우정과 동지적 유대를 앞으로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공동개최를 앞두고 양국간 상호협력무드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된 가운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마당에 지난날 후세 선생의 인도주의와 국제평화주의에 매료된 한국과 일본인들이 후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해마다 서울, 대구, 광주, 문경, 김해, 진주, 나주 (평양) 등의 역사현장을 교환 방문할 수 있도록 거국적인 관광사업을 추진해 보는 것도 양국관계에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신동아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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