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정·관·학계의 명문 ‘張在植 패밀리’

  • 윤영호 <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 noname01@freechal.com

    입력2005-05-23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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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한전사장 장영식
    • 산자부장관 장재식
    • 여성개발원장 장하진
    • 고려대 교수 장하성
    • 케임브리지대 교수 장하준
    • 정계, 관계, 학계, 시민운동권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한 집안 출신이다. 3대에 걸쳐 내로라하는 재목들을 잇따라 배출한 이 호남 명문가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참, 장 교수는 작은할아버님이 왜 3대 의원 선거에 출마하시지 않았는지 아시는가?”

    1999년 봄 대통령 비서실 주선으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장하성(張夏成·48) 고려대 교수(경영학부)는 김 대통령의 느닷없는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데 대해 쓴소리를 하려고 단단히 별렀던 장 교수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

    독립운동 뛰어든 호남 명문가

    “아버님이나 삼촌들도 모르는 일인데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장 교수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장 교수의 작은할아버지가 누구이기에 김 대통령이 그토록 관심을 갖고 있었을까. 장 교수의 작은할아버지는 김 대통령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3대 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을까.

    장 교수의 작은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장홍염(張洪琰·1910∼1990) 씨를 말한다. 장홍염 씨는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광복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여생을 바쳤다. 전남 무안에서 제헌 국회의원과 2대 의원에 당선돼 반(反) 이승만 투쟁에 앞장섰던 그는 3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기만 하면 당선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게 가족들의 회고다. 김 대통령도 이를 기억해내고 장씨가 끝내 출마하지 않은 이유가 새삼 궁금했던 것이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장씨는 3대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 정권이 그의 참모와 운동원을 감금, 협박, 폭행해 더 이상 출마를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선거운동원 300여 명을 석방한다는 조건으로 “다시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4·19 직후 실시된 5대 총선에서는 서울로 지역구를 옮겨 사회대중당 후보로 나섰으나 의사당 진출에 실패했다.

    그가 3대 의원 선거 출마 당시 관권 탄압의 표적이 된 것은 반 이승만 투쟁의 선봉에 섰기 때문. 그는 이승만과는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중국에서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의 노선을 좇아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그로서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아무래도 미덥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제헌의원으로서 이승만의 헌법제정 개입에 앞장서 반대했다. 내각책임제 헌법을 주장하던 그는 대통령제를 주장하는 이승만을 겨냥해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소위 ‘맨더토리(Mandatory) 운동’을 벌여 한국 주권을 미국에 바치려 하다 쫓겨난 이승만이 또다시 독재로 나라를 망치려 한다”고 비난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장씨는 광복 후 목포지구와 전남지역 치안위원장을 맡아 권력 공백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건국에 앞장섰다. 김 대통령과는 이때 함께 일한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의 기억에 따르면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김 대통령은 치안위원장을 맡고 있던 장씨를 따르는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

    장홍염 씨는 장영식(張榮植·69) 전 한국전력 사장과 장재식(張在植·66) 산업자원부 장관 형제에게는 작은아버지가 된다. 장 전사장 집안은 현 정부 들어 갑작스레 유명해진 듯하지만 사실은 선대부터 호남의 명문가였다. 그들의 선대 형제들은 각기 나름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을 뿐 아니라 광복 후에는 모두 한민당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맡아 전남 지방의 정치 지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DJ에게 정신적 영향

    장홍염 씨는 아버지 장진섭(張鎭燮) 씨와 어머니 하동 정씨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 형제들은 차례로 병준(柄俊·1893∼1972), 병상(柄祥·1899∼1958), 홍재(洪載) 씨다. 셋째 홍재 씨는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타계했기 때문에 후손도 없다. 집안에서는 장영식 전사장을 홍재 씨의 아들로 입적해 제사를 모시도록 했지만 장 전사장도 1958년 미국으로 갔기 때문에 제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장진섭 씨는 근방에서 손꼽히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는 김 대통령의 고향인 인근 하의도에도 땅이 있을 정도였다는 것. 그랬기에 아들들을 서울은 물론 일본과 중국까지 유학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장남 병준 씨는 일본에 유학해 일본대 법과를 졸업했으며, 병상 씨는 서울 중동중과 보성전문을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해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홍염 씨는 목포 연안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휘문학교에 입학한 후 베이징 국민대학을 졸업했다.

    이들의 고향인 전남 무안군(현재는 신안군) 장산도와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하의도는 뱃길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양쪽 섬 사람들의 통혼이 많았다고 한다. 김 대통령의 어머니 장씨가 바로 장진섭 씨의 사촌이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김 대통령은 병준 씨 형제들을 깍듯이 형님으로 모셨다는 것. 그들이 김 대통령의 정치적 성장과정에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런 사연에도 불구하고 병상 씨의 넷째 아들인 장재식 장관과 김 대통령의 정치적 인연은 훨씬 후에 맺어졌다. 1992년 14대 총선 당시 전국구를 받아 비로소 정계에 입문한 것이다. 그는 정계 진출은 늦었지만 정계 입문과 동시에 김 대통령의 직할부대로 활동해왔다. 동교동계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김대중 사단’의 대표적인 경제통으로 인정받아 온 것.

    장 장관은 호남 출신으로는 드물게 국세청 차장과 국책은행 시절의 주택은행장을 역임한 경력이 말해주듯 조세와 금융 전문가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1992년 대선에서도 섀도 캐비닛 멤버 1순위로 지목됐으며, 1997년 대선 직후에는 김용환 당시 자민련 부총재가 이끌던 ‘12인 비상경제대책위’ 멤버로 전면에 등장해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 설정과 환란 대응에 참여했다.

    이런 커리어 때문에 현 정부 출범 당시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 물망에 올랐으나 재경부 장관이 자민련 몫으로 결정돼 입각이 좌절됐다. 당시 장 장관은 재경부 장관에 자신이 적합하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으나 “대통령의 뜻이라면 뜻을 접는 게 당연하다”고 물러섰다. 결국 장 장관은 그가 자민련으로 당적을 바꿔 ‘DJP 공조’가 복원된 후에야 입각할 수 있었다.

    장 장관의 정계 입문이 늦어진 것은 작은아버지 장홍염 씨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장씨는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기 얼마 전에 ‘전남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헌 때는 한민당으로, 2대 때는 무소속으로 당선됐고, 5대 때는 사회대중당으로 출마해 낙선했는데, 너무 많은 시련을 겪어 가족 중에 누가 정치한다면 극구 반대합니다. 재식이가 정치한다고 했다가 혼이 났지요.”

    김만제·이종찬과의 인연

    장 장관이 일찍 정치에 입문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주택은행장으로 있던 그는 친형 장영식 전 사장을 따라 동교동으로 가서 김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교편을 잡다 귀국해 1975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빙 연구원으로 와 있던 장영식 전사장은 그보다 전에 이미 김 대통령을 찾아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자문해주고 있었다. 김 대통령이 이들 형제를 반갑게 맞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1980년 5·17은 김 대통령뿐 아니라 장 장관 형제에게도 좌절을 안겨줬다. 장 장관은 이 일로 주택은행장에서 해직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고, 장영식 전사장은 급거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도피하는 처지가 됐다. 그런 상황에도 두 사람을 배려해준 이들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지금도 이들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장영식 전사장에게는 김만제(金滿堤) 당시 KDI 원장(현 한나라당 의원)이 있었고, 장재식 장관에게는 이종찬(李鍾贊) 당시 안기부 기조실장(김대중 정부 출범 후 초대 국정원장 역임)이 있었다.

    장 장관은 5·17 이후 공무원 숙정 바람이 불 때 이종찬 안기부 기조실장의 도움을 받았지만 끝내 살아남지는 못했다. 이종찬 실장은 숙정자 명단에 국책은행장이던 장 장관의 이름이 올라 있자 전두환(全斗煥) 장군에게 “아까운 인재이니 구제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뜻을 밝혔다. 이실장은 부인 윤장순 여사로부터 이미 장 장관의 사람됨에 대해 듣고 있었다. 윤 여사는 장 장관의 부인인 최우숙 여사와 경기여고 동기생.

    그러나 신군부는 이미 장 장관의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 전두환 장군은 이종찬 실장에게 호통을 치더니 부관에게 “테이프 가져와!”라고 했다. 가져온 녹음테이프에는 놀랍게도 동교동에서 오간 얘기가 모두 담겨 있었다. 장 장관의 목소리를 들은 이 실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장 장관은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이종찬 실장에게 호감을 갖게 됐고,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종찬 씨가 국민회의에 입당하자 장 장관이 유별나게 그를 챙겼다고 한다.

    한편 장영식 전사장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직후 황급히 일본으로 출국해 신군부의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일본에서 김만제 KDI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에 와 있다”고 전하자 김 원장은 “몸도 안 좋으시고 하니 미국에 가 계시지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으니 국내 일은 염려하지 마세요”라면서 귀국하지 말 것을 암시했다.

    장 전사장은 그 길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온 지 얼마 후에 서울에서 장 전사장의 짐이 부쳐 왔고, 퇴직금 명목으로 상당한 금액의 돈도 송금됐다. 김만제 원장의 배려였다. 장 전사장이 현 정부 들어 한전 사장으로 부임한 이후 김만제 씨를 한전 상임고문으로 영입한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장 전사장은 과거의 배려에 대해 보은하겠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김씨의 경험을 활용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가 경제부총리를 지낸데다 포스코 회장까지 역임했기 때문에 그의 국제적인 안목이나 인맥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본 것. 또한 경제전문가인 그를 여권 주변에 붙들어두면 여권의 인재 풀을 넓힐 수 있다는 나름의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다.

    그러나 장 전사장의 이런 뜻은 도리어 정치적인 오해를 낳았다. 김씨가 김영삼 정권 시절 포스코 회장으로 있을 때, 포항제철의 산 증인으로 당시 정치적 낭인생활을 하고 있던 박태준(朴泰俊) 전총리의 손때가 곳곳에 묻어 있는 포스코에서 ‘박태준 지우기’를 시도했다는 게 박 전총리측의 시각. 따라서 박태준 당시 자민련 총재는 ‘김만제의 한전행’을 곱게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

    장 전사장은 김씨를 한전 상임고문으로 영입하면서 사전에 사정당국의 양해를 구했기 때문에 이런 시각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은 정치판의 게임 논리로 봤을 때는 지극히 ‘순진한’ 발상이었다. 당장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불쾌감을 표시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할 수 없이 김씨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장영식·재식 형제 외에 장진섭 씨의 손자 가운데 장손인 경식 씨를 빼놓을 수 없다. 장진섭 씨의 큰아들 병준 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경식 씨는 고향에서 조부를 모시면서 장산중학교(현재는 공립) 이사장을 지냈다. 장산중학교 설립에 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나 생전에 장홍염 씨를 수차례 만났던 정일화 전 한국일보 북한부장은 한 칼럼에 이렇게 쓰고 있다.

    “…홍염은 광복 직후 선친에게서 논 1500마지기를 물려받자 바로 그날로 소작인을 모아놓고 500마지기를 무상으로 넘겨주고 나머지 1000마지기는 소작인들의 주관하에 판매한 후 그 돈으로 광복 후 사단법인 제1호가 된 장산중학교를 설립케 했다.”

    경식 씨의 자녀들(6남2녀)은 사업가, 샐러리맨 등 평범한 생활인들이다. 이들 중 막내 하운 씨는 고려대 운동권 출신으로 현재 서울시의회 의원. 자산운용사를 경영하는 하석 씨도 고려대를 10년 만에 졸업했던 운동권 출신. 그의 후배들에 따르면 그가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후배들을 자상하게 챙겨줘 따르는 후배가 많았다고 한다.

    병상 씨의 자손들 가운데는 학자가 많다. 아들 4형제 가운데 큰아들 정식은 전남대 의대 안과 교수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하종 씨도 조선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병상 씨의 둘째 아들인 충식 씨는 부부가 함께 4·19 유공자이자 한국은행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는데, 그의 자녀 2남1녀는 우리에게 낯익은 얼굴들이다.

    최근 여성개발원장에 취임한 딸 하진(夏眞·50) 씨는 학생운동권 출신의 시민운동가이자 학자. 이화여대 69학번으로 민주당 이미경 의원, ‘내일신문’ 최영희 사장과 함께 이화여대 초기 학생운동의 트로이카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여성학자 모임인 ‘여성연구회’를 ‘한국여성연구소’로 발전시켰고, 1999년에는 여성을 정치 세력화하기 위해 ‘여성 정치세력 시민연대’ 창립을 주도했다.

    장하진 원장의 남편은 조선대 총장을 지낸 김홍명(金弘明·56) 교수다. “주위 소개로 만나 처음에는 별 감정이 없었는데,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생했다는 얘기를 듣고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는 게 장 원장의 회상. 장 원장은 취임 전후 여러 차례 가진 인터뷰에서 집안 얘기에 부담을 느낀 듯 자신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봐달라”고 거듭 밝혔다.

    장 원장의 동생인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시민운동의 ‘중심’. 그가 참여연대에서 처음 소액주주운동을 주창할 때는 “시민운동을 하면서 무슨 소액주주운동이냐”는 비판의 소리가 시민운동권 내부에서 있었지만 지금은 소액주주운동이 시민운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때 아시아를 변화시키는 지도자 50인 중 한 명으로 꼽혔을 정도로 그의 소액주주운동은 정치·사회적인 영역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장 원장의 또 다른 동생 하원 씨는 KDI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6년부터 KDI에 근무하고 있다. 현재 국가 산업정책의 장기 비전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촉망받는 학자 형제

    장영식 전사장의 1남1녀는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고, 장 장관의 아들 형제는 해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소장 학자. 큰아들 하준(夏準·38) 씨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기 1년 전인 27세 때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로 취임, 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가 1991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산업정책의 정치경제학’은 산업정책을 분석하는 데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 요소를 함께 고려한 것으로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후로도 잇따라 주목받는 논문을 발표해 ‘신경제학의 샛별’로 불리고 있으며, 한국인 가운데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사로 꼽힌다. 그의 동생 하석(夏碩·34) 씨 역시 영국 런던대 과학철학과 교수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장홍염 씨는 슬하에 1남5녀를 두었다. 아들 웅식 씨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교직에 몸담았다가 현재는 사업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홍염 씨의 사위 다섯 명 가운데 서울 출신인 넷째 사위만 제외하고 모두 경상도 출신이라는 점. 그의 둘째 사위는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의 박경석(朴敬錫·64) 전의원(현 배재대 초빙교수)인데, 박 전의원은 고향 포항 출신의 2대 국회의원이었던 최원수 씨의 중매로 결혼했다. 최씨와 홍염 씨는 2대 의원을 역임하면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박 전의원은 결혼 전에도 물론 장인을 알고 있었다. 1959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자마자 정치부로 발령받았던 그는 이듬해 4·19 직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혁신계 정당 취재를 담당하면서 장인과 인연을 맺었다. 장인 홍염 씨는 당시 사회대중당에 참여했다가 장건상 등과 함께 혁신당을 결성, 조직위원장과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지주 진섭 씨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데는 아버지의 교육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진섭 씨는 큰아들 병준과 둘째아들 병상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 넓은 세상을 체험하게 했는데, 당시로선 장산도뿐 아니라 전국 어느 곳의 부자라 해도 두 아들을 일본에 유학 보낸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장진섭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들 형제의 독립운동 노선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형제간의 나이 차이로 인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점이 달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첫째 병준 씨가 우파 민족진영을 대표한다면 30년대 이후 중국에서 무장 투쟁을 벌였던 홍염 씨는 생전에 “나는 민족주의자요 사회주의자로 자칭하고 살아왔다”고 말하곤 했다.

    병준 씨 형제들 사이에 형성된 이런 사상적 스펙트럼은 우리 현대사의 명암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광복 후 좌우 대립의 혼란기에 가족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을 법도 하지만 그런 흔적은 없다. 다만 아나키즘 쪽에 기울었던 홍염 씨는 나중에 반 이승만 투쟁이다, 혁신계 활동이다 해서 뛰어다니는 신난한 삶을 살아갔다.

    그렇다고 홍염 씨의 사상이 우리 사회가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불온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는 사실 순박한 것이었다. 북한 김일성 집단의 독재적 공산주의와 남한의 독재적 자본주의 모두 우리의 길이 아니라는 게 그의 뜻이었다. 이렇게 보면 그는 일찍이 ‘제3의 길’을 주장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북한 공산주의와도 타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6·25 당시의 행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반 이승만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지만 북한 공산주의 역시 독재라고 판단한 그는 6·25가 발발하자 고향인 목포와 광주에서 의용군을 모집해 국군에 편입시키는 등 반공 활동을 맹렬히 전개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큰형 병준 씨의 영향 때문이었던 듯하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병준 씨는 고향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후 일경의 체포령을 피해 곧장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해 임시 의정원 전라도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군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한 병준 씨는 일경에 체포돼 3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도 1929년에 신간회 목포지회장을 역임하고 중앙대표로 선출되는 등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72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광주에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는 독립유공자인데도 국립묘지가 아닌 고향인 무안에 묻혀 있다.

    병상 씨는 형 병준 씨와 동생 홍염 씨가 주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국내에 있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철도 공무원이 돼 이양·능주역장 등을 지냈다. 당시에는 한국인이 역장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부모와 함께 가산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는 한편, 형과 아우를 뒷바라지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홍염 씨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인 1929년에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서 그는 베이징대 학생이라는 합법적인 신분을 이용해 육혈포로 무장하고 베이징, 상하이, 만저우 등지를 오가며 일경과 밀정을 처단하는 등 맹활약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체격이 건장하고 사격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일경과 헌병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홍염 씨는 중국 망명 당시 엿장수로 가장해 서울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길을 한 달이나 걸어 국경선을 넘었다고 한다. 사위인 박경석 전의원은 “이런 점에서 장인은 도피와 변장술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박 전의원의 말.

    “4·19 직후 생겨난 혁신계 정당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 순진했다. 5·16 직후 쿠데타 주역들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 혁신계 사람들을 거리에서 만나면 이들은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장군은 여순반란 사건에 연루됐다고 하는데, 이로 미뤄 우리 혁신계와 얘기가 통할 수 있는 사람 아닌가’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러나 장인은 쿠데타의 성격을 어떻게 알았는지 5·16 직후 바로 도피, 혁신계 검거 선풍을 피할 수 있었다.”

    홍염 씨는 생전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는 허위가 많다. 내가 진상을 얘기하면 독립운동사가 많이 바뀐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일경의 밀정 노릇을 하던 사람이 독립유공자 명부에 올라 있고, 정작 진짜 유공자들은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박경석 전의원은 장인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독립운동은 장인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단 하나의 기록이라도 정확히 남겨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설득해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 얼마 후 홍염 씨는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평소 워낙 건강했기 때문에 회고록 같은 것을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기억력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그의 구술을 받았다면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됐을 것이라는 게 박 전의원의 아쉬움이다.

    인촌의 금고

    홍염 씨에 의해 제대로 평가받은 사람 가운데는 인촌 김성수(金性洙) 선생도 있다. 홍염 씨는 휘문고보 재학시절 중앙고보에 다니고 있던 인촌의 아들 일민 김상만(金相万)과 나이가 같아 친하게 지냈다. 홍염 씨는 그 인연을 믿고 중국에 망명한 이후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을 때 무작정 인촌의 집을 찾았다. 그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인촌은 빙그레 웃더니 금고 문을 열어놓고는 슬며시 나가버렸다. 홍염 씨는 곧 인촌의 뜻을 알아채고는 거금을 ‘훔쳐’ 나왔다고 한다(이상은 서병조의 ‘시대의 증언’에서 인용).

    독립운동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던 홍염 씨 형제들은 광복 후에야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이들 모두가 한민당에 참여한 것이다. 병준 씨는 광복 이듬해 한민당 광주지부장에 선임됐고, 병상 씨는 광주역장으로 재직하면서 한민당 전남도당 감찰위원장이 됐다. 홍염 씨도 광복 후 광복군 단체에서 활동하다 무안에서 한민당 소속으로 제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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