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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21세기 제품, 19세기 유통

용산전자상가

  • 정철영 < 자유기고가 >

21세기 제품, 19세기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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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전자상가의 잘못된 유통관행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상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수법은 이런 것들이다.

‘간판 바꿔 달기’: 제품을 구입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나 다시 찾았을 때 예전 매장이 사라지고 없는 상황을 종종 접하게 된다. 사업이 안 돼 폐업한 경우도 있지만, 주인은 그대로인 채 종업원과 간판 상호만 바꾸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간판 바꿔 달기’ 수법을 쓰는 것은 ‘그레이’ 제품 위주로 영업을 하다 소비자에 대한 애프터서비스의 부담을 지지 않거나 부가가치세를 내지 않기 위해서다.

‘찍기’ 또는 ‘돌려 팔기’: 가격 조사차 여러 점포를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 값이 싼 매장을 만나게 된다. 다른 곳도 둘러보다 결국 그 점포로 다시 돌아가게 되지만, 여기서 문의한 제품을 구입하려고 하면 그 제품이 불량이 많다든가 성능이 딸린다든가 하는 이유를 들면서 다른 제품의 구입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영업 수법을 상인들은 ‘찍기’ 또는 ‘돌려 팔기’라고 부른다. ‘찍기’는 꼭 컴퓨터 업종만 아니라 도소매를 겸하는 상가에서는 일반적인 영업수법이지만, 컴퓨터 유통 쪽에선 이런 업체들일수록 통신이나 인터넷 광고를 활발히 하기 때문에 골탕 먹는 소비자들이 더 많다.

‘끼워 팔기’: 제품사양과 가격정보에 어두운 고객을 꼬드겨 악성 재고나 마진이 높은 구형 제품을 함께 처분하는 수법을 일컫는다. PC 본체를 구입하려 할 때 당하기 쉬운 수법인데, 상인들은 본체에서는 적당한 마진만 남기는 대신 끼워 팔기 하는 물건에서 폭리를 취한다. PC처럼 주변기기가 같이 필요한 제품은 정상적인 상행위와 충동구매를 유도하는 끼워 팔기 행위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부품 바꿔치기’: 조립PC 업체들이 상담할 때 어수룩해 보이는 소비자를 상대로 견적을 산출할 때의 부품과는 다른 부품을 장착하는 수법이다. 컴퓨터 부품은 모델별로 핵심부는 동일하지만 사소한 차이가 많이 난다. 전문 지식과 상당한 주의력이 없는 한 소비자가 당초 주문했던 부품대로 시스템이 구성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쉽지 않다. 부품 바꿔치기는 소비자가 요구했던 부품이 공급부족으로 구하기 힘들거나 단종되었을 때 불가피하게 이뤄지는 경우도 있지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몰래 바꾸는 경우는 이윤을 높이려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용산식 ‘벤치마크’

‘업글병’(업그레이드 병)에 걸려 있는 파워유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제품간 성능비교 테스트인 벤치마크(Bench Mark)다. 컴퓨터 사용자 사이에서 벤치마크란 모범적인 기업을 선정해 그 장점을 배워 자사의 시스템을 혁신한다는 경영학적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벤치마크란 비슷한 제품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평가해 종합 점수를 매기고 그 장단점을 비교해주는 테스트다. 신제품 성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과거 제품과 신제품을 벤치마크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25만원 대의 컬러 잉크젯프린터 5종 성능 비교’ ‘60기가 용량의 하드디스크 7종 비교’처럼 신제품 중에서 인기가 있고 경쟁이 치열한 품목을 선정해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용산을 이용하는 소비자에게는 벤치마크의 결과가 중요한 구매 가이드가 된다. 용산전자상가의 여론을 좌우하는 잣대는 바로 벤치마크라고도 할 수 있다.

벤치마크는 소비자의 알 권리를 신장하는 제도다.

“한 백화점에서 비슷한 가격대의 유사 상품들을 판매한다면, 그 중에서도 집중적으로 ‘미는’ 제품이 있을 것이다. 백화점에서 판단할 때 가격과 비교해 성능이 우수한 제품일 경우도 있겠지만, 담당자끼리 친해서일 수도 있고, 마진이 많아서일 가능성도 있으며, 뒷돈이 오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소비자는 별다른 지식 없이 광고를 많이 접하거나 눈에 띄기 쉽게 진열되어 있거나, 판매원의 추천 때문에 그 제품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컴퓨터 시장은 제품 외적인 요소가 별로 작용하지 않는다. 벤치마크는 정말로 시시콜콜한 것까지 비교해 경쟁상품들의 장단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한다. 용산 고객들은 단돈 15만원 짜리 부품을 살 때도 1500만원짜리 자동차를 구입하려는 사람이 그 모델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온다. 벤치마크 결과를 더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가 뭐가 좋다는 식의 일방적인 추천을 해봐야 전혀 안 먹힌다.”

한 부품업자의 설명이다.

K-Bench(www.kbench.com)의 김일기 사장은 벤치마크에 대한 사용자들의 관심을 비즈니스로 연결해 성공한 사람이다. 컴퓨터 관련 최신 정보와 부품에 대한 정밀 테스트 결과를 보여주고, 이와 관련된 토론의 장을 마련해주면 상당한 호응을 얻으리라는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요즘 K-Bench 사이트의 하루 방문자는 7월 기준으로 약 15만명. 그만큼 벤치마크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김사장은 컴퓨터 부품에 대한 벤치마킹이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컴퓨터 관련 제품은 기술 변화 속도가 워낙 빠르고 라이프사이클이 아주 짧기 때문에 전문가라 해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극히 어렵다. 경쟁 또한 치열해서 출시 시기 맞추기에 급급한 기업들은 종종 완성도가 떨어지는 제품을 내놓는다. 인텔처럼 거대한 회사도 버그 투성이의 820 칩을 내놓았다가 리콜 당한 적이 있지 않은가. 벤치마크는 소비자 입장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유행처럼 번지는 벤치마크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벤치마크의 유용성에 대한 의문이다. 테스트 후 제품마다 수치상의 우열이 매겨지는 데, 기실 그 차이는 사용자들은 체감하기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또 PC마다 용도가 다르고 부품별 조합이 다른데 이런 변인을 다 제거하고 실험실에서 테스트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벤치마크가 소비자의 올바른 판단을 돕는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하드웨어의 과소비를 낳는 부작용도 크다는 지적이 있다. 테스트가 고가의 최신 제품 위주로 이뤄지고, 별다른 차이가 없는데도 직전 세대 제품에 비해 향상된 수치를 과장해서 제공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부분까지 중요한 것인 양 부풀리는 태도는 소비자를 오도할 우려가 크다는 주장이다.

다른 한편 민관 합동으로 벌이는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단속도 싼 가격과 함께 ‘푸짐한’ 최신 소프트웨어 제공이 경쟁력이던 ‘메이드 인 용산’ PC를 위협하고 있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한글 윈도는 PC를 작동하려면 반드시 설치되어야 하는 운영체제인데다가 가격이 10만원 이상이기 때문에 불법복제의 개연성이 높다. 용산과 MS사는 불법복제 단속과 공급 정책을 놓고 몇 년째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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