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정신과 지식인의 임무
지난 두 번에 걸친 대선도 이에 버금가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2002년에는 진보 세력이 단독으로 정권을 잡았다면, 2007년에는 보수 세력이 10년 만에 권력을 되찾아왔다. 이명박 정부 초기만 하더라도 보수의 시대가 계속될 것으로 보였지만, 2010년 6월에 치러진 지방선거는 보수와 진보의 새로운 균형을 가져왔다. 바야흐로 보수 대 진보의 새로운 경쟁시대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정치적 경쟁은 언제나 담론적 경쟁과 결합된다. 그리고 이 담론 경쟁은 시대정신(Zeitgeist)에 대한 경쟁으로 구체화한다.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시대의 문화적 소산에 공통되는 인간의 정신적 태도와 양식 또는 이념을 말한다. 시대정신은 한 사회의 발전에서 북극성의 구실을 담당한다. 어느 사회든지 시대정신을 어둠 속 망망대해에서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북극성처럼 미래 좌표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주조하는 이들이 곧 지식인이다. 지식인은 지식 또는 진리 탐구가 직업인 이들이다.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독해하는,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게 지식인의 본분이며, 이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시대정신 탐구라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분야의 지식인이 시대정신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하는 인문·사회과학자에게 시대정신 탐구는 매우 중대한 과제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봐도 적지 않은 지식인이 산업화와 민주화 같은 시대정신을 일궈왔다.
최근 시대정신의 의미와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가 선진화 담론이다. 법학자 박세일이 주조한 이 말은 보수적 시각에서 민주화 이후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현실정치 영역에서도 보수 세력의 재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이명박 정부가 내걸었던 ‘선진일류국가’는 선진화 담론의 대중적 버전이었다.
개인적으로 박세일의 연구에 공감하면서도 선진화 패러다임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대정신 탐구에 헌신해온 그의 학문적 열정에는 경의를 표한다. 우리 역사를 돌아볼 때 박세일은 ‘경세가로서의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경세가가 세상을 다스려나가는 사람이라면, 박세일은 시대정신 탐구와 정책대안 개발을 통해 세상사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인이 담당해야 할 사회적 책무와 역할을 다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가야 할 방향을 잃은 채 혼돈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지식인의 역할을 과대평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식인의 일차적 과제가 진리 탐구에 있다면,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서 그 탐구의 중대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자기 사회의 미래에 새로운 계몽의 빛을 비춰주는 것, 곧 시대정신의 모색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지식인의 존재구속성과 자유부동성
3년 전 나는 한 지면을 통해 정부수립 60주년을 기념해 우리 현대사를 대표해온 지식인들의 책과 담론을 살펴본 바 있다. 올해에는 시대정신 탐구라는 주제로 지식인의 모험을 우리 역사 전체로 확장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