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생아이자 동성애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기독교의 세기에 무신론자의 길을 간 레오나르도는 시대의 이단아였다. 다원성과 구체성의 삶을 치열하게 살다 간 그의 걸작 ‘모나리자’에는 어떤 진실이 숨어 있는가.
동양사상은 전통적으로 비이분법적이었으나 20세기 전후에 서양의 이분법에 젖어들고 말았다는 견해가 있다. 인간사를 온통 선과 악으로 구분짓는 근본주의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가 그렇다는 것인데, 그 점에서 남북한은 모두 이원론적 병을 앓고 있는 ‘한통속’이라는 것이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책 ‘예수는 없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 동양사상의 대표격이 도가사상이나 화엄사상이라지만, 과연 그것이 동양적 사고의 전통인지는 의문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유교, 그중에서도 주자학만이 유일하게 인정받았고, 불교를 비롯한 다른 사상은 배척되었다.
그런 배타주의의 정신풍토에서 역시 배타주의적인 근본주의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가 뿌리박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극복해야 할 대상은 배타주의이지 어느 종교나 사상이 아니다. 그 어느 것이든 본질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 ‘예수는 없다’ 역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지 말고 예수처럼 완전한 자유인이 되자고 주장한다.
이 책은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기독교, 불교, 유교가 서로 만나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마르크스주의를 포함시켜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이 ‘배타적인 근본주의 기독교는 이미 여러 지역에서 비판당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듯,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는 공존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통일을 위해서도.
여러 종교의 대화로 모든 것이 해결될까? 지금 우리가 믿는 근본적인 이념은 무엇인가? 그 실질이야 어떻든 남북한 모두, 아니 세계의 남북 모두 주장하는 기본이념은 민주주의가 아닐까? 그런데 그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민주주의를 하나의 생활양식이라고 한다. 그것은 자유로운 지성을 갖춘 시민의 삶이다. 그리스나 로마, 르네상스의 민주적 인간상은 개성을 가진 개인이자 공사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인간이다. 특정 분야에서의 전문성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으로서의 능력이다. 하나의 직능만을 전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유인과 어울리지 않는 비열한 행위로 간주되며, 특히 최대이윤을 추구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는 것은 경멸의 대상이 됐다. 그 생활양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 정신이나 사고 일변도가 아닌 육체와 정신의 합일을 인정한다. 육체 부정이 아닌 육체 긍정이다. 인간의 본능을 모두 인정하며 그를 어떤 하나의 가치에 환원시키지 않는다. 육체관계의 양식도 고정될 수 없으므로 이성애나 동성애 모두 사랑으로 존중한다. 신체에 대한 과학적 관심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둘째 생활양식인 다원성과도 연결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구별이나 경계 짓기에 따른 배타가 아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다원성의 인정이다. 하나의 절대(絶對)가 아닌 다수의 상대(相對)다. 단수가 아닌 복수다. 배타는 고립 아집 분열이나 다원은 연합 연결 연대다.
셋째, 다원성은 유일한 도그마나 교리가 아닌 다양한 사고 경험 실천을 존중한다. 보편이 아닌 특수의 인정이며, 일반적 원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특수한 상황의 상호 이해다. 논리적 조작이 아닌 수사적 이해이며, 이상의 수학적 이론화가 아닌 현실의 상황적 이해다. 공간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의 자리나 형상에 짜넣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서로 다르게 묘사하고 설명하고 이해하며, 시간적으로는 초시간의 영원이 아닌 특정 시점의 상황을 그대로 인정한다.
넷째, 따라서 다원성은 억압이나 구속이 아닌 자유, 상하의 계급이 아닌 평등을 전제한다. 육체나 정신의 구속은 있을 수 없다. 정신적·육체적 자유는 극한까지 인정되어야 하고, 범죄가 아닌 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어떤 제한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을 제한하는 ‘불의’에 대해서는 ‘순종’이 아닌 ‘저항’이라는 사회적 태도가 생긴다. 모두가 자유인만큼 모두는 평등하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이 없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다섯째, 전문화가 아니라 통합화다. 일부러 경계를 지어 보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전체로 보는 것이다. 인간사를 공과 사로 구분하지 않고 일치시키며, 지성이나 감성의 여러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통일시킨다. 나아가 예술·과학·철학도 구분하지 않는다. 따라서 프로페셔널이 아니라 아마추어다. 정치적으로는 전문관료에 의한 것이 아닌, 시민이 모든 분야에 참여하는 방식을 추구한다. 물론 시민이 모든 정치기구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까닭에 대표가 필요하나, 그 대표에게는 시민의 감시를 통해 책임을 지운다. 참여와 책임,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정치의 원리다.
르네상스가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구가한 시대는 아니나, 민주주의 생활의 토양이 어느 정도 형성된 때인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토양에 나는 자연에 대한 사랑을 더하고자 한다. 르네상스에서 자연을 재발견한 것은 아니나, 17세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을 주장하기 전, 인간은 자연 속에 존재함을 르네상스는 ‘당연히’ 인정했다. 그런 ‘자연애’의 자세로부터 우리는 레오나르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레오나르도를 만능인이라고 한다. 화가 건축가 음악가 과학자 정치가 등등. 그러나 그는 먼저 자연인이었다. 이는 어린 시절을 보낸 조용한 시골에서 형성된 고독한 자연관찰, 자연사랑에 기초한다. 그후 도시에서 보낸 날들은 그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에게 도시는 거대한 자연 속의 작은 인간사회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도시에 운하를 파거나 건물을 지을 때 언제나 자연 전체로부터 조감하는 자세, 즉 멀리서 바라보는 자세를 취한다. 그는 늘 도시의 에트랑제였다. 웅대한 자연 속의 ‘모나리자’가 그것을 상징한다.
레오나르도는 1452년 4월15일, 피렌체 부근의 빈치에서 태어났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40km 정도 떨어진, 사탑으로 유명한 도시 피사로 가는 길에 있는 올리브와 포도의 마을이다. 그가 태어난 시골 오두막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마을은 얼마 전까지도 한갓 시골에 불과했으나, 1993년 그곳에 ‘유토피아예술과 지구문명에 관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기념관이 들어서면서 다시 눈길을 모으게 됐다. 그런데 그 이름이 흥미롭다. 레오나르도의 예술이 유토피아적이며 그 학문이 ‘지구문명적’이라는 시각은 그의 전인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고향 풍경과는 달리 레오나르도는 사생아라는 불행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 점은 오히려 그를 권력이나 부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평생 직장도 없이 아이들처럼 장난감을 만들거나 들판을 누비며 순진하고 자유로운 삶을 산 숙부는 레오나르도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는 그를 레오나르도의 동성애 형성자로만 보았고, ‘모나리자’를 비롯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상의 양성적 요소를 강조하는 견해도 있으나, 그가 정말 동성애자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레오나르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은 그가 그 시대와 결코 친하지 못했고 도리어 시대를 반역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동성애자였다면 그 점도 시대에 대한 반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반역은 무신론자였다는 점이다. 이는 정치도 경제도 과학도 도덕도 전쟁도 모두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시대에는 대단한 반역이었다.
당시 가톨릭에 저항하는 것만도 대단한 반역이었는데, 무신론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형에 처해질 범죄였다. 따라서 그는 결코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밝히지 않았고 과학연구나 예술 표현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냈을 뿐이다.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도 과학연구에서 비롯한 생명의 신비에 대한 탐구에 바탕을 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미술이나 건축뿐 아니라 자연과학·의학·물리학(광학)·항공학까지 여러 학문에 정통해 근대 예술과 과학의 막을 열었다. 우리는 흔히 예술과 과학은 상극이라 생각한다. 예술가와 과학자는 전혀 다르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에서는 예술과 과학은 물론 어떤 문화도 서로 구별됨 없이 모두 하나였다.
레오나르도를 더욱 뚜렷한 개성의 소유자로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은 청소년기에 한 아틀리에 그림 공부다. 이는 레오나르도만이 아닌 르네상스 예술가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어서 더욱 중요하다. 즉 개인주의적 예술가의 탄생 비밀이 아틀리에 교육에 있다는 것이다.
당시 아틀리에는 단순한 개인 작업실이 아닌 거대한 공동작업실이자 미술연구소이며 또한 유일한 미술교육 장소였다. 말하자면 미술 그 자체, 미술의 전부였던 셈이다.
르네상스 이후 아카데미가 생겨 미술교육의 중심이 되었으나, 우리나라의 종합대학교 미술대학에서처럼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은 극히 드물었다. 서양에서는 아틀리에든 아카데미든 간에 입학시험부터 졸업까지의 미술교육 전체가 그야말로 ‘미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교육 성과를 시험하는 모든 대학 공통의 획일적 입시제도(물론 실기시험이 있으나 그 비중은 크지 않다)를 기본으로 해 획일적인 미술교육을 시킨다.
이런 방식을 통해 ‘천재’ 예술가가 탄생할 수 있을까는 중대한 의문이다. 물론 이는 지난 반세기, 대학에서 배출된 ‘천재’ 예술가들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함에 불과하다.
르네상스 아틀리에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생활하며 제자가 스승의 작업을 돕는 과정에서의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 그야말로 몸으로 기법을 익혔다. 그래서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과 보편성의 근본원인을 아틀리에 교육에서 찾는 학자가 적지 않다. 삶·노동·지성·사회와 함께하는 예술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은 르네상스 고전양식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고전양식이란 간결(최소한의 요소로 가장 단순하게 완벽을 추구), 자연스러움과 진실함, 전체의 균형과 비례, 적절한 형식에 의한 주제의 정확한 전달(한눈에 주제가 명백하게 보일 것) 등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복잡하고 부자연스러우며 일부가 압도적으로 강조되거나 전체가 부분을 압도하는 불균형 또는 난해한 주제는 모두 반고전주의적이다. 즉 고전양식의 특징은 균형이다. 이는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의 ‘회화론’에 따르면 ‘부분과 전체의 비례, 부분과 부분의 비례’를 말한다.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강조된 전체(국가)와 개인, 개인과 개인의 민주적 비례를 반영한다. 이는 절대주의 시대에 압도적 과잉과 복잡함을 특징으로 하는 바로크가 풍미한 것과 대응된다.
‘최후의 만찬’은 대단히 단순한 구도의 원근법에 의해, 하나의 큰 상자 속을 들여다보듯 안정된 느낌을 준다. 모든 선이 중앙의 그리스도를 향해 집중돼 있어 그림의 초점이 확실하다. 좌우에는 각기 6명의 제자가 앉아 있는데 각 3명씩 한 덩이로 묶여져 있다. 그렇게 완전한 대칭을 보여주나, 결코 도식적이지 않다. 열두 제자의 표정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놀라는 사람, 화내는 사람, 어이없어 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방관하는 사람, 침묵하는 사람,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식의 표정을 짓는 사람 등등. 그리스도가 그들 중 누군가 배반한 사람이 있음을 알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것에 대한 각양각색의 반응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이 얼마나 리얼한지는 같은 주제로 그려진 다른 그림과 비교해보아야 확실해진다. 예컨대 14세기 초 지오토가 그린 그림은 원근법을 따르지 않아 공간과 인물의 배치가 매우 불분명하고 공간과 양감의 합리적인 표현법도 결여돼 있다.
15세기 길란다이요의 그림은, 공간과 양감은 합리적으로 표현돼 있으나 인간의 심리는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다. 더욱 특징적인 점은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달리 홀로 반대쪽에 앉아 있는 점이다. 이는 유다를 다른 제자와 구별하는 가톨릭 전통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유다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는다.
물론 전혀 구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두 빛이 비치지만 그는 빛을 받지 않고 앉아 있다. 그렇더라도 그의 놀라는 표정은 다른 제자의 얼굴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특별히 사악하다는 느낌도 주지 않는다.
이처럼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눈에 보이는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주제가 갖는 사상적, 정신적인 진실, 즉 본질을 표현해낸다. 객관과 주관이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그림에 녹아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육체를 가진 인간의 다양하고 살아 숨쉬는 모습들을 존중한다. 전통적 교리에 따른 표현 대신 다양한 인간들의 특수한 상황을 조명하고 있다.
성당 벽화인 ‘최후의 만찬’에 비해 ‘모나리자’는 너무나 작다. 가로 53cm, 세로 77cm에 불과하다. 멀리서 보면 손바닥만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작은 포플러 나무판 위에 그려진 이 눈썹 없는 여성의 초상화 한 장은 지난 50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을 감탄케 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추앙받아 왔다. 즉 명화 중의 명화, 명화의 대명사라는 것이다.
‘모나리자’는 보통 ‘영원한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겨진다. 특히 그 미소는 ‘영원한 수수께끼’라고 불린다. 그러나 눈썹을 미는 묘한 취미를 가진 여성이 아닌 이상, 굳이 그 얼굴을 ‘최고’라고까지 볼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사실 모나리자는 결코 미인이라고 할 수 없다. 레오나르도 또한 ‘미인도’를 그릴 생각은 아니었다. 미인도란 동양화에서 하나의 장르로 존재할 뿐 서양화에는 없다. 그것은 여성을 사군자처럼 물건으로 취급한 봉건사회의 유물이 아닐까?
흔히 모나리자를 두고 ‘영원의 미소’ ‘신비의 미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미소’라고들 한다. 그 얼굴을 자세히 보면 입술이 약간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나, 눈은 전혀 웃지 않는 듯 보인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아예 웃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 ‘웃음’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런 미소가 ‘모나리자’만의 것은 분명 아니다. 누구나 그 정도의 미소는 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모나리자’가 갖는 특별한 의미란 도대체 무엇인가? ‘모나리자’가 그렇게 유명해진 까닭은 사실 역사적인 것이다. 즉 미술사에서 특별한 것으로 평가된다는 뜻이며, 특히 1911년 루브르박물관에서 도둑맞았다가 1913년에 재발견된 사실이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대중적 차원에서 ‘영원의 미소’ 운운하는 것은 전설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 그림을 ‘모나리자’라고 부르고 처음으로 특별한 평가를 내린 바자리는, 1550년 레오나르도의 전기를 쓴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가 쓴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평전은 요사이 미술평론가들이 그림을 팔기 위해 그럴 듯한 설명을 붙이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책이 나온 르네상스 당시에는 ‘모나리자’도 일반인에게 팔릴 수 있는 그림이었다.
바자리는 ‘모나리자’를 보지도 않고 마치 본 것처럼 썼다. 그래서 두 눈에 물기가 배었느니, 솜털과 눈썹이 있다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거짓말이다. 이에 대해 어느 독일 학자는, 바자리가 나이든 모나리자를 찾아가 눈썹이 생긴 것을 보았으리라고 상상하는 글을 쓰기도 했으나 나로서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 학자는, 그녀가 레오나르도의 모델이 될 줄 알았더라면 그녀 아버지는 무리를 해서라도 모나리자에게 미술 교습을 받도록 했을 것이라는 말까지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책이 번역되어 우리 독자에게 읽히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그림 속의 모델이 누구냐, 누가 주문했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 그림을 완성한 뒤 레오나르도는 죽을 때까지 보관했다. 만일 누가 의뢰한 작품이라면 당연히 의뢰자에게 보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주로 의뢰 받은 작품을 그린 당시 화가들과 달리 대부분의 작품을 스스로 그렸다. 따라서 이 그림도 누구의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나아가 의뢰한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레오나르도 자신이 스스로 그렸고 심지어 모델 없이 그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는 ‘나’를 중시하는 르네상스인 레오나르도의 특징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레오나르도는 여성을 주제로 한 많은 그림을 그렸다. 화가들이 여성을 많이 그리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경우 왜 그가 여성을 많이 그렸는가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
예컨대 그 이유를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가 사생아였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계모를 비롯한 대가족 속에서 자라며 심리적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정신분석학의 시조가 한 말이긴 하나, 그런 성장기를 거쳤다면 도리어 여성을 경멸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실제로 레오나르도는 사생아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학대하는 계모’ 식의 설명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여성을 그림의 소재로 삼는다고 해서 꼭 그런 이유까지 만들어 둘러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여성을 경멸했는지 여부는 근거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남녀의 성교를 동물적이고 굴욕적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그가 한 그림을 완성한 뒤 옆에 써놓은 것인데, 그 그림이 실제 자세와는 너무도 달라 사람들은 그가 여성과의 성적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성교를 해본 적도 없으면서 무조건 경멸했다는 뜻이다. 역사상 가장 호기심 많은 인간이라는 그도 거기에는 무심했나 보다.
레오나르도는 성교를 경멸했으나 출산에 대한 관심은 컸다. 여성의 사체를 몇 번이나 해부하고 태아와 태반을 상세히 그렸다. 사실 그가 그린 여성상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바로 성모인데, 이는 무신론자인 그의 경우 성모에 대한 숭배를 뜻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모성, 생명의 연속에 대한 과학적 탐구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모나리자’에는 모델의 지위·신분·특징·성격 등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요소가 전혀 없다.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다. 당시는 물론 최근까지도 초상화(현대의 초상사진까지 포함해)란 스스로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여러가지로 꾸며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다. 특이한 머리, 화려한 장신구, 비싼 옷으로 치장한 후 자신의 소유지나 관련지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모나리자’에는 장신구가 없다. 머리모양도 인공이 가해진 면이 전혀 없이 그저 빗어내렸을 뿐이다. 옷도 검은빛이 도는 흑색이어서 상복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볼 때 그림의 모델은 매우 가난한 집의 여성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나리자’는 서민여성 또는 노동여성을 그린 최초의 그림이 된다. 또 배가 부풀어 있어 임신중으로 보이기도 한다. 산아제한이나 피임술이 없던 당시 여성들은 끊임없이 출산을 해야 했다.
임신중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눈과 눈 사이에 있는 지방덩어리다. 이에 대해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에도 똑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는 이유로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자신을 그린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얼굴 근육의 반 정도가 마비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모델이 임산부가 아닌 매독환자였다는 이야기로 비약된다.
그러나 하필이면 왜 임신중의 여성인가? 당시의 여성, 특히 서민 노동계층의 여성은 거의 항상 임신상태였기 때문에 이는 여성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짐작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이는 당시로서는 보편적인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임신을 특별히 축하할 이유가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임신녀를 그린 그림은 대단히 드물며, 임신녀가 모델을 선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모나리자가 입은 옷을 임신복이 아닌 상복으로 볼 경우, 밖으로는 죽음, 안으로는 잉태라는 생명의 순환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모나리자’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배경이다. 그곳이 알프스의 어느 곳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물론 레오나르도가 알프스의 풍경에서 힌트를 얻었을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알프스의 실경을 그린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배경을 그린 방법을 공중원근법이라 칭하며 ‘모나리자’를 그릴 당시 레오나르도가 아르노 강의 물줄기를 돌리는 사업에 몰두해 스케치한 풍경과 흡사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 공중원근법이 모나리자를 하늘에 떠있는 것으로 보이게 해 신비감을 더한다는 주장이나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가장 먼 원경은 오른쪽 위에 그려진 험준한 산맥과 거대한 호수다. 그 밑으로 바위들이 이어져 있고 그곳으로 물이 흘러 맨 밑에 있는 다리 밑까지 이어져 있다. 이렇게 오른쪽 부분만을 보면 그런 대로 있을 법한 풍경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오른편과 왼편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우선 왼쪽 풍경을 보자. 맨 위의 좀더 가까운 산맥과 아래 바위 사이로 뱀처럼 굽이쳐 흐르는 넓은 강이 그려져 있으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줄기는 가늘어져 결국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강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
이 넓은 강은 분명 오른쪽 호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나 모나리자의 목 부분 뒤로 펼쳐져 있을 호수와 강의 연결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한가지 가능한 설정은 호수에서 흘러내린 물이 왼쪽 강을 이루고 그 물이 다시 오른쪽으로 흘러 다리 밑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리 밑에는 강물이 흐르는데 다리보다 더 근경인 왼쪽 밑에는 물이 말라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레오나르도는 원근법을 표현했다. 원근법을 알고 있던 그가 왜 ‘모나리자’에서는 원근법을 포기하고 그것과 배치되는 상상의 풍경을 그렸을까? 무신론자인 레오나르도는 신의 창조나 신의 심판에 의한 세계의 멸망 따위를 주장하는 기독교나 봉건적 사고를 믿지 않았고 만물은 언제나 물처럼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물을 만물의 운동원리로 본 레오나르도는 인체에서도 피가 운동원리라고 보았다. 그는 혈액의 순환을 최초로 그리면서 인간의 심장은 바다(호수), 혈관은 강, 뼈는 산맥(바위), 호흡은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케네스 클라크는 레오나르도가 남긴 글을 분석한 끝에, 그가 물의 성질을 연속성으로 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이는 비가 많은 이탈리아의 자연 환경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을 게다. 물은 생존의 필수요건인 동시에 대홍수처럼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따라서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사망의 원인이기도 하다. 레오나르도는 바로 그런 식으로 물을 이해한 것이 아닐까. ‘모나리자’의 배경은 레오나르도의 이러한 우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인화는 우주와 지구뿐 아니라 정치, 건축, 심지어 도시계획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정치체계나 건축도 신체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같은’ 것이라 함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뜻임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건물은 동물과 같은 것으로 항상 돌볼 필요가 있고, 그렇지 못하면 병들어 죽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건축가는 인간의 모습과 해부학에 정통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유기적 사고’라고 한다. 그러한 생각은 예술분야는 물론 자연이나 과학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이는 세계를 중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근대과학과 전혀 달리, 무엇에나 가치판단을 부여하는 태도다. 예컨대 따뜻함은 그 자체가 활동적이고 생산적이므로 차가움보다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천국과 같은 무변(無變)은 지상의 변화보다, 휴식은 운동보다, 나무는 돌보다 좋은 것으로 믿었다.
르네상스 때는 세계의 모든 부분이 서로 연결돼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근대적 사고에서 말하는 우연적 계기가 아니라 상응하는 필연적 관계로 믿었다. 그러한 믿음의 기본은 대우주인 우주 전체와 소우주인 인간이 상응관계라는 것으로서, 이는 점성술에 근거한 의학으로 현실화됐다. 오른쪽 눈은 태양, 왼쪽 눈은 달이라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7개의 혹성, 7개의 금속, 7개의 요일과 같이 숫자를 통한 상응관계로 인정되었다.
우리가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르네상스 미술이나 저술을 읽을 때 유의할 점은 거기에 나타나는 모든 이미지나 상징이 우주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당시는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도 상응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근대적인 진보사관이 아닌 주기적인 반복이 역사라고 믿었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자체가 반복을 전제하는 것이고 ‘부활’이라는 단어 또한 유기체적 용어다.
이러한 유기적 관념은 17세기 자연철학자들, 즉 데카르트·갈릴레오·뉴턴 등의 기계적 관념으로부터 도전을 받는다. 새는 수학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본 레오나르도는 비행기 제작의 선구자이기도 하나, 이는 근대과학의 기본인 기계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유기적 사고의 결과였다.
‘레오나르도를 되살린다’는 책을 쓴 서울대 김문환 교수는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 등 걸작들은 ‘예술적 천재와 과학정신의 가장 조화로운 통일상태’를 보여주는데 ‘그 재탄생이 가능하려면 반기계적 태도가 약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 후반의 전신예술, 전자예술의 주창자들은 레오나르도가 20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들처럼 필름이나 비디오테이프를 기본표현매체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문환은 이를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이면서 전자예술 등을 소개한다.
그러나 나는 17세기 이후 본격화한 과학, 특히 기계적 과학과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르네상스의 유기적 과학정신은 구별할 필요가 있으며, 반기계적 태도인 레오나르도로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 멈포드가 주장하는 ‘새로운 유기적 예술’이 그것이다. 멈포드가 집요하게 기술의 인간적 통제를 주장한 반면, 김문환은 기술과 예술의 통합을 주장하며 멈포드를 원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모두 멈포드를 오해한 것일 뿐이다.
여하튼 그런 기계적 예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과학정신에 기반한, 레오나르도의 생명력에 가득찬 감정의 재현인가? 현대의 전자예술은 데카르트나 베이컨을 잇는 기계화의 재현일 뿐이며 오히려 레오나르도를 배반하고 있다. 그렇게 볼 때 김문환의 레오나르도 되살리기는 인정할 수가 없다. 레오나르도 되죽이기가 될 뿐이다.
다시 ‘모나리자’를 보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지식이 있어야 볼 수 있다’는 뜻이라면, 지식 없이는 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소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술품을 볼 때 우리는 그에 대한 지식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아름다운 예술품은 처음부터 그렇게 느끼며 지식의 차이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보는 만큼 보인다.’ 르 코르뷔지에의 말이다.
‘모나리자’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바로 눈이다. ‘모나리자’의 두 눈 중 우리 시선에 먼저 잡히는 것은 왼쪽이다. 그림 전체의 중앙에 위치한 데다, 배경 중에서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는 수평선이 그 눈과 연결돼 있으며, 왼쪽 눈이 있는 얼굴 왼편이 얼굴 중에서 가장 넓기 때문이다.
다음 오른쪽 눈을 보자. 자세히 보면 왼쪽과 달리 조금은 차가운, 또는 사려 깊은 눈길임을 알 수 있다. 입술 오른 쪽 끝 또한 결코 미소를 지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내 설명이 의심스럽다면 그림을 반으로 접어보든가 한 손으로 그림의 얼굴 부분만 반을 가리고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꼭 그런 식으로 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나리자의 신비’라는 말에 관심이 있다면, 그 ‘신비’란 위에서 설명한 각기 모순된 표정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좀 더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인다면, 왼쪽 눈은 유혹하는 것이지만 오른쪽 눈은 거절하는 것이라는 식의 대비다. 그것이 관객에 대해 ‘모나리자’와 시선을 주고받는 듯한 느낌을 주어 감상자를 감동시키는 비밀인지도 모르겠다.
흔히들 대화를 강조하지만 평행선을 긋는 일방적 주장의 대립이 대화는 아니다. 대화는 그 누구도 절대적인 진리를 말할 수 없다는 다원성의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존의 가치관이 해체된 현대사회는 자기형성에 불가결한 내면적 대화 상대와 내발적 합의 형성에 근거한 사회규범의 성립매체를 상실하고 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진실한 의사를 솔직히 표현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우려할 만한 사회적 동향을 저지하는 것이 힘에 부치는 무의식적 정신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 다원적 상호교류를 확대하는 것은 우리의 권위주의적 정신구조를 해체하고 좀더 자유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일에 필수 전제다.
우리는 기존의 권위가 해체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그러한 해체는 사실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 해체에 저항하는 ‘보수’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진보’와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그래야 보수도 건강하고 참된 보수일 수 있으며 우리 문화와 나라도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진보와 대중이 겨우 기성의 보수적 권위와 균형을 잡는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다. 문화 개방성과 균형감각이 중시되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르네상스와 ‘모나리자’의 겹눈이, 다원성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다원성이 중요시된 시대를 뜨겁게 살았다. 사생아 동성애자 무신론자 과학자 무학의 인문학자이면서 시대의 이단아였다. 말하자면 ‘진보’였다. 그래서 임신한 노동여성인 ‘모나리자’를 그려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최후의 만찬’에서는 삶의 조화를 표현했다. 그는 민주적 인간상의 요체인 개성과 다원성의 긍정, 자유와 평등, 문화 통합의 전인성, 유기적인 과학정신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보여준 르네상스인이다.